감동과 재미, 흥행 세 마리의 토끼를 잡다
<에린 브로코비치>를 빼놓고 환경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팥소 없는 찐빵을 먹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줄리아 로버츠라는 주연 배우의 명성, 그리고 이 작품이 2001년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각각 줄리아 로버츠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으며 남우주연상 후보, 감독상 후보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는 1992년에서 1996년까지 4년에 걸쳐 미국의 거대기업인 PG&E(Pacific Gas and Energy)를 상대로 무려 3억3300만 달러라는, 단일 환경 소송으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액의 보상을 받아낸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 진한 감동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주었다. 미국에서 2000년 3월 개봉돼 6개월만에 1억250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화는 상당한 관객을 동원했으며 그 동안 교육방송, KBS 등 공중파방송에서 일요시네마, 주말영화 등으로 여러 차례 방영한 적이 있어 매우 친숙하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이 소송 사건의 주인공이랄 수 있다. 그녀는 변호사가 아니다. 법률사무소에 고용된 조사관이었다. 일개 조사관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끈질긴 노력 끝에 회사의 진상 은폐 기도를 뚫고 재판에서 주민들이 승소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브로코비치는 이 소송으로 미국에서 일약 유명인으로 떠올랐으며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전 세계에 떨쳐 환경 소송의 대모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브로코비치는 환경보건 전문가도, 환경보건 전공자도 아니다. 그녀는 이 소송의 조사를 맡으면서 현장조사를 통해 1992년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사막 도시 힝클리에 사는 주민들이 원인 모를 병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인근 퍼시픽 가스·전기 회사의 천연가스 압축공장에서 나오는 물질 때문임을 직감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법정에서 이 회사가 부식을 막기 위해 수년간 냉각탑 물 안에 발암성을 지닌 6가 크롬을 첨가했으며 이 때문에 주민 건강 피해가 발생한 사실을 밝혀냈다. 진실을 은폐하려던 회사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패소할 것으로 예상되자 3억33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액수를 지불하기로 합의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미국에서 담배와 석면 피해 소송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재판이었지만 이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두 유해물질과 관련한 전체 보상 액수였다.
미국 거대 에너지회사에 맞선 에린 브로코비치의 완벽한 승리
영화는 힝클리 지역 주민들의 소송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만 실제 브로코비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94년 캘리포니아 주 케틀먼에 있는 또 다른 PG&E 시설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힝클리 소송에서처럼 밝혀냈다. 그녀는 변호사와 함께 샌와킨밸리에 있는 공장의 대형 냉각탑과 그 근처의 직원 숙소를 조사했다. 변호사는 오염의 징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미 힝클리 지역 조사에서 경험을 쌓은 브로코비치는 그곳의 침엽수 잎이 힝클리에서처럼 흰색 분말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수자원관리부를 찾아 1964년 내무부에서 PG&E로 보낸 공문에 케틀먼의 우물에 크롬이 과도하게 들어있다고 통지하는 내용이 들어있음을 알아냈다. 6가 크롬은 폐암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과도하게 노출되면 코의 양 구멍 사이에 있는 물렁뼈에 출혈을 일으키고 심하면 구멍을 낸다. 비중격천공 또는 콧물렁뼈뚫림증이라고 하는 이 질환은 크롬도금 공장 등에서 6가 크롬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직업병의 일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힝클리나 케틀먼에서처럼 6가 크롬에 오염된 공기와 물을 오랫동안 마실 경우 생길 수도 있다.
케틀먼의 주민과 이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던 노동자 등 9백 명도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6가 크롬에 오염된 물·땅·공기가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원인이며 공장 냉각탑에서 뿜어져 나온 안개(미스트)에 크롬 성분이 함유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주민들과 노동자들은 오염된 우물물을 식수와 목욕물로 사용됐다. 케틀먼 주민들은 그동안 코피가 자주 나는 등 몸이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를 건조한 기후 탓으로 여겼고 다른 불편한 증상들도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사의 내부 문서에서 우물의 크롬 함유량이 식수 허용 기준치 0.1ppm의 175배에 육박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