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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이사 4,2-6
복 음 : 마태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일 7km 정도를 걷습니다.
뛰면 운동량이 더 늘어날 것 같아서 뛰었다가 무릎이 아파서 고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담 없는 걷기를 즐깁니다.
제 나이에 뛰기란 틀렸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팔십 대의 몸과 오십 대의 몸 중 어떤 몸이 더 뛰기에 적합한 몸일까요?
당연히 오십 대의 몸이라고 누구나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은 팔십 대인데도 어떤 사람보다도 더 뛰어난 몸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마라토너 남정조 할아버지입니다.
그것도 젊었을 때 마라톤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나이 일흔에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라톤 입문 10년을 앞두고 풀코스 1,000회를 달성하셨습니다.
2012년에 처음 도전해서 대회에서 달린 거리만 42,195km로,
지구 한 바퀴를 넘어 달린 셈입니다.
이 기록은 대한민국에서 단 13명만 성취한 기록이라고 하더군요.
나이 들면 걷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이 할아버지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마라톤을 지금도 꾸준히 하십니다.
불가능함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인에게 종은 노예로서 상품이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 종을 위해 직접 와서 부탁했습니다.
상품이 아닌 사람으로 자기 종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에 사랑의 주님께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주님께서는 사랑에 사랑을 더해 더 큰 사랑을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직접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에게 자격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교도인 로마인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면
당시 풍습에 따라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믿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굳이 자기 집에 모시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어떠한가요?
그 믿음에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참 겸손한 이들이 영원히 머무는 곳-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본향을 앞당겨 사는 참 겸손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겸손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의 부흥에 대해,
즉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석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이사4,2-6 대목은 귀양살이 다음에 쓰여진 것이다.
어둡고 재앙으로 가득한 지난날이 흘러간 다음에는 솟아날 희망이 엿보인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남은 자들에게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백성이 생겨날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탈출기의 기적을 다시 보여주실 것이다.”(탈출13,21이하 참조).
이어지는 화답송 시편이 의미심장합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화답송 시편122장입니다.
특히 최민순 신부님 번역의 화답송 시편 1절은
제가 8년 전 2014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 여정 중
걸으면서 끊임없이 바쳤던 성구이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목적지는 바로 산티아고 대성전으로 그대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던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적처럼 생각되는 것이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에 샘솟는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고 달려가듯 걸었던 당시 상황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매일 새벽 수도원 산책 때마다 산티아고 순례는 계속됨을 깨닫습니다.
순례여정 중의 순례자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쁨의 샘, 활력의 샘,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은
바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하는 듯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이어지는 후속 시편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은 이미 서 있노라.
너 예루살렘은, 그 짜임새 멋지게 이룩된 도성,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저기 올라가도다.”
시편의 예언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장차 종파를 초월하여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참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찾는
모든 겸손한 이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의 전형적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를 상징합니다.
다음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백인대장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종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또 주님께 대한 지극한 겸손입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사랑과 겸손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이런 지극한 사랑과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킬 때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어 곧장 주님은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될 것이다.” 백인대장에게 응답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백인대장의 종은 나았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앞서 백인대장의 지극하고 순수한 사랑과 겸손의 믿음이 있었고,
이어 주님 말씀의 권능에 의한 치유입니다. 결코 주님만의 일방적 치유는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사랑과 겸손의 믿음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합력하여 이뤄지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 잔치 시간,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참된 믿음의 소유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인 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자격에 대한 겸손한 고백은 영혼을 치유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자격이나 합당함에 대한, 판단으로
영혼을 파괴하고 하느님을 슬프게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셨으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은 가전제품을 ‘리모컨’으로 작동합니다.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 전축의 작동을 리모컨으로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운전 중에는 음성으로 목적지를 말하면 알려주기도 합니다.
불르투스 기능이 있어서 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음악을 듣고,
자료를 다운 받고, 메일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금은 리모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가전제품의 작동을 대부분 손으로 했습니다.
아련한 추억이지만 군대에서 텔레비전 채널의 선택권은 先任兵이 가지고 있습니다.
선임병은 주로 말로 채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막 전입한 이등병들이 달려가서 채널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리모컨’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리모컨과 불르투스 기능은 우리의 삶을 한층 편안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상현실,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그때 여래가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연꽃을 받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꽃을 들었을 뿐이었다.
법회에 참석했던 팔만 사천의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의 당시 대중이 모두 멈추고 침묵하였다.
이에 장로 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는 불사(佛事)를 보고,
그 자리에서 확연해져 파안미소(破顔微笑)하였다.”
부처님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제자 가섭은 부처님의 의중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주방 자매님도 이심전심의 마음, 염화미소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도 알고 계십니다.
가섭은 부처님과 함께 있으면서 부처님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의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방 자매님도 제가 즐겨 먹은 음식과 과일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리모컨과 불르투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지혜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침묵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의 관심과 믿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하느님께서 알려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로마의 백인대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종이 아팠을 때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시기로 했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종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어제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마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주었듯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청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 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필시 그는 이미 이 구원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한 말씀만 하소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
백인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 백인대장은 종을 예수께 데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종이 숨을 거두려 한다는 말 같다.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일을 하신다.
발 벗고 그 종을 치유해 주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그냥 종을 치유해 주셨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하고 대답한다.
여기서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백인대장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믿은 그의 지성을 드러낸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메시아께서 오시어 이루실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7).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종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선뜻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은 당시 상황 안에서는 친히 백인대장 집까지 가셔서
고쳐주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성자께서 세상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강생의 채비를 차리실 때 하신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에서 점점 멀어지고,
인류는 어둠의 세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며
희망과 절망, 인내와 포기 사이에서 지쳐가는 중이었지요.
인간의 몸을 취해 오신 성자의 육화는,
그런 인류를 바라보시던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자비와 연민이 솟구쳐,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선뜻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려는 순간에 하신 말씀일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주님의 거룩한 탄생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백인대장이 대답합니다. 놀라운 겸손과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 말씀의 효력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을 통해 발설된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생하시려는 성자께 바치는 지상 피조물의 응답을 듣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땅과 공기와 햇살과 모든 피조물의 겸손어린 합창입니다.
백인대장은 알고 있었을까요?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는 말씀과 본인이 이야기한 "한 말씀"이
같은 존재, 같은 의미라는 것을요. 주님의 의지와 말씀, 실행은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이 전달됩니다.
이방인의 믿음이 우리 주님의 영을 신명나게 들썩입니다.
이로써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든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도
하늘 나라의 잔칫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수혜자인 동시에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는 더럽혀진 예루살렘의 치유와 회복을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 내신 뒤에"(이사 4,4).
주님께서는 먼저 상처 입고 버려진 예루살렘을 품으십니다.
닦아 주고 어루만져 정결하게 하십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이사 4,5-6).
"덮어 준다"고 하십니다.
뜨거운 햇살과 더위, 폭우와 비를 막아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이와 더불어 그간 쌓인 예루살렘의 죄와 반역을
낱낱이 들춰내어 수치와 치욕을 안기시기보다,
당신 눈에서도 세상눈에서도 가려 주시겠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당신도 따져 묻지 않고 세상도 추궁하지 않도록 덮어 주시는 자비일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전무결한 이는 없습니다.
저마다 존재 어디엔가 죄로 병들고 약함에 허물어진 구석을 안고 살아가는 중이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선뜻 "내가 가서 고쳐주마" 하며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우리는 나았습니다.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입당송).
사실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지금 여기서 체험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죄와 수치와 약함을 씻어내 주시고
닦아 주시고 덮어 주시는 손길로 완성됩니다.
그러니 지금 초라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희망하며 주님을 기다립시다.
지금 우리의 고통스런 실존이 그분을 부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그분을 부릅시다.
초라하고 작은 우리의 겸손과 믿음이 그분을 또다시 불러 내릴 것이니까요.
待臨의 구체적인 방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 모두는 이제 막 시작한 대림시기에로 초대를 받았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
이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묵상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이 초대는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4주간의 준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나의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구유에로의 초대이다.
즉 나를 위한 하느님의 성탄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자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그분께서 주최하는 공심판에로의 초대이다.
이것도 말하면, 나와 온 세상이 인자의 재림과 심판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탄과 대림의 초대에 응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마태 24,44; 마르 13,37; 루카 21,36)이다.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은 이미 사람이 되어 오셨던 주님이시며,
세상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이시며,
또한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앞에서 깨어 기도한다면 대림의 초대에 잘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24시간 잠도 없이 깨어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도 하고, 미사참례도 하며,
내 할 일도 하고, 하기 싫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도 하며, 멍하니 있기도 하고,
걱정하며, 다투고, 화내고, 싸우며,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면서
하루의 마지막에 가서는 반성하면서, 아니면 지쳐서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든다.
이 모든 일 간운데 하느님을 현존시킨다는 것,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킨다는 것’은
방법상 그 출발점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중풍병을 앓고 있는 하인을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8절)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무도 주님의 현존을 내 안에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과 같은 말로 고백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내가 깨끗하여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럼으로써 감히 주님을 모실 수 있겠다는 믿음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깡그리 모아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적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와 있다는 표징이며,
우리가 또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땅에서 숨 쉬며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