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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들입니다(잠 1:1).
영어로 “proverb”는 “격언”이라는 뜻인데 “잠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원래 “잠언들”이라는 복수형인데 단수 취급하여 “잠언”으로 번역됩니다. “잠언(箴言)”의 “잠(箴)”은 “대바늘 잠”이며 “경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잠언(箴言)”은 “경계하는 말씀”이며 “가르쳐 훈계하는 말”입니다.
“잠언”은 항상 명심하고 지켜야 할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인생이 낡은 때에 잘못을 고쳐 바로잡는 말씀의 대바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바늘 잠(箴)”에 “훈계하다”는 뜻이 형성되었습니다.1)
허신의 『설문해자』에 “잠(箴)”이 옷을 꿰맴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꿰매다”는 의미를 가지는 한자에는 “철(綴)”과 “봉(縫)”이 있는데, “철(綴)은 대바늘로, 봉(縫)은 쇠바늘로 된 침(針)으로 꿰매는 것입니다.
『상서(尙書)』에서 쓸모없는 옷은 대바늘로써 꿰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잠규”라는 말로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경계를 뜻하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대바늘 잠(箴)과 쇠바늘 침(針)을 통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철의”라는 말이 바르게 경계한다는 뜻으로 확대되어서 사용되었는데 “옷을 꿰맴”이라는 뜻은 “대바늘 잠(箴)”이라는 문학 장르를 형성합니다. 침(針)으로 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듯 “대바늘 잠(箴)”은 침에 비유됩니다.
침술로 병을 치료하듯 경계를 통하여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바늘 잠(箴)”에는 “경계(警戒)”라는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대바늘 잠(箴)”은 “바르게 경계하는 말”에 비유하여 간하게 되었습니다.
동양인의 잠(箴)과 성경의 잠언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혜롭고 선한 언어를 사용하여야만 한다는 교훈입니다. 자신의 말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원어로는 “잠언(proverb)”(마샬)은 “비유로 말하다”(마샬)에서 나왔고, “비유”(parable), “속담”, “격언”(adage), “금언”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격언이 잠언인 것입니다.
“잠언”이 70인경에는 “비유”라고 번역되었으며 “잠언”은 “간단명료하지만 큰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2)
잠언 1장 2-4절에는 잠언의 목적 4개가 나옵니다.
1. 잠언의 첫째 목적은 지혜와 훈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잠언 1장 2절에 “지혜와 훈계(instruction)를 알고”라고 하였습니다.
2-4절에는 4개의 동사가 “~하기 위해”라는 전치사에 붙어 쓰였는데, 2절에 “알다”와 “깨닫다”, 3절에 “받다”, 4절에 “주다”가 그 목적입니다.
잠언의 첫 목적은 알기 위해서인데 지혜와 훈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은 늦을 때가 많습니다. 인생은 ‘일생’입니다. ‘일생’이라는 말은 한번 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험하고 나서 아는 것은 기회가 지나갔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되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험하기 전에 인생을 살아보기 전에 미리 알고 대처해야만 하겠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많은 점에 옳은데 인생을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합니다. 경험자들의 조언을 잘 귀 기울여 들을 때에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경험하고서 결정한다면 늦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듣지 아니합니다. 겸손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내가 끌리지 아니한다고 지혜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아니한다면, 나중에 내가 끌리고 그 가치를 알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들이 잔소리하는 이유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놀고 싶다고 놀면, 나중에 공부의 필요를 깨달을 때는 늦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키지 아니하여도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공부를 예로 들었지만, 공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항들에도 적용됩니다. 인생을 앞서 경험한 지혜자의 말을 잘 듣고 인생을 미리 알아야 하며, ‘할머니는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죽은 후에 있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죽고 나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너무 늦으니까 죽기 전에 알아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많은 예언자를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뒤의 세계를 미리 알고 사는 날 동안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니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사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우면 자신의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신 33:29).3)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어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한 까닭에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니(시 19:7), 사람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웠고, 요셉도 지혜로웠습니다(왕상 4:31, 시 105:22). 야훼의 증거는 확실하기 때문에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시 19:7). 야훼의 계명들이 사람을 그의 적들보다 더 지혜롭게 합니다(시 119:98).
법령들과 정의들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지혜고 이해력입니다(신 4:6). 지혜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지키고 행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fear)이 지혜의 처음인데(시 111:10a, 잠 9:10), 하나님을 공경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지혜의 처음이 없는 자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훈계”라는 영어 “discipline” [disəplin]은 “징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는 “제자”를 뜻하는 영어 “disciple”이 있습니다. 영어 “discipline”에 “규율”이라는 뜻이 있는데 준칙이 되는 본보기로, 삶을 살아가는 때에 하나님께서 제한하신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은 그것이 불행을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반대죠! “좋은 거야, 왜 이 좋은 것을 못하게 해?”라고 말하며, “먹어봐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을 못 먹게 해?”라고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서 부모 몰래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고 즐거운 것을 못하게 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장 좋고 즐거워 보이는 것들이 결국 나를 묶는 사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선을 정하고 그것을 넘지 못하게 금하시는 것입니다.
“훈계”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서 먹은 교만이 죄입니다(창 3:5).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하와와 아담의 후손이기에 교만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복종시키고 훈계를 알고 겸손하게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불행을 방지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앞으로는 다시 소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잃은 것들은 어쩔 수 없어도 앞에 놓인 복은 잃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계를 알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훈계는 자동차의 핸들과도 같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줍니다. 훈계의 핸들을 붙들고 있어야만 인생길을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잠언의 둘째 목적은 이해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잠언 1장 2절 후반부에 “이해의 이야기를 이해하게.”라고 하였습니다.
“명철”이라고 번역된 말(비나)은 “이해”,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이해하다”, “깨닫다”는 동사(빈)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요셉은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기에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창 41:33).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신 1:13).
솔로몬은 이해하기 위해 듣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왕상 3:9).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 듣는 것이 귀합니다. 솔로몬은 재판을 듣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요구한 것입니다(왕상 3: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해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왕상 3:12). 아울러 그가 요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그에게 주셨습니다(왕상 3:13).
하나님의 교훈의 길을 이해할 수 있게 기도하여야 합니다(시 119:27). 하나님께서 이해하게 하셔야 그의 계명을 배울 수 있습니다(시 119:73). 우리는 하나님의 증언(testimony)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시 119:95).
시편 119편 130절에 “당신의 말씀들을 펼침이 빛을 주며, 단순한 자들(simple)에게 이해하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자들이 속지 아니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을 펼쳐야 합니다. 말씀을 펼칠 때, 빛을 주셔서 진리를 이해하게 하셔서 속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을 분별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 144절에 “당신의 증거들은 영원히 올바름이니 나를 이해하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살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법령들과 정의들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이해”입니다(신 4:5-6). 이해력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행함을 의미합니다. 머리로만 알고 지키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해력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이해력을 얻게 됩니다(대상 22:12, 대하 2:12). 이해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욥 28:12, 38:36, 39:17).
기도 이외에 이해력을 얻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이해력을 받은 사람들의 글을 읽음으로써 이해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잠언을 읽은 두 번째 목적입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한 사람 아래에서 전수 받아야만 합니다. “이해하다”는 “understand”는 “under” 아래 “stand” 서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아래에 서서 겸손히 들을 수 있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를 이해하려면 상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너 잘났으니 내 잘났으니’ 싸우는 동안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불화의 원인은 “내 잘났다”는 교만에 기인한 것입니다.
나에게 깨달음이 없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십시오! 그래야만 말씀이 이해됩니다. 내 생각 내세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깨달으려면 겸손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해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잠언을 기록하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일자무식의 사람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왕 솔로몬에게 배울 것은 얼마나 더 많이 있겠습니까? 성경 앞에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이해의 말씀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잠언의 셋째 목적은 훈계를 받는 것입니다.
잠언 1장 3절에 “올바름 정의 정직을 지혜롭게 하게 훈계를 받게”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움과 정의와 공평을 지혜롭게 하기에 훈계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받다”는 영어의 “receive”며, 마음에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훈계가 있구나 하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훈계를 내 것으로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잠 1:3).
우리가 취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취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여자는 선악을 알리는 나무로부터 금단의 열매를 취하였습니다(창 3:6).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취한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훈계를 받아야 하며, 훈계를 받는 것이 잠언의 셋째 목적입니다.
비록 내가 보기에는 나빠 보이는 훈계가 오히려 나에게는 유익합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어떠냐가 받아들이는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참으로 나에게 유익한 것이냐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훈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훈계는 지혜롭게 하므로 지혜롭게 되기 위해 훈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혜롭다”(샤칼)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와 관련되어서 나옵니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나는 나무였습니다(창 3:6). 여자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때에 지혜롭게 되기보다는 어리석게 됩니다. 내가 볼 때에 지혜롭게 하는 것과 실제로 지혜롭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모든 일에 있어 지혜롭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들을 지키고 행할 때 지혜롭게 합니다(신 29:9). 율법에서부터 좌우편으로 빗나가지 아니할 때 지혜롭게 합니다(수 1:7). 행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밤과 낮에 묵상할 때 지혜롭게 합니다(수 1:8).
사울이 다윗을 보낸 것에 그가 지혜롭게 하여 성공합니다(삼상 18:5). 다윗은 그가 행하는 길에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습니다(삼상 18:14). 그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사울이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삼상 18:15).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비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책무를 지킨다면 지혜롭게 행하여 성공하게 됩니다(왕상 2: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왕하 18:7).
우리가 지혜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훈계함을 받아야 합니다(시 2:10). 하나님의 증거들이 묵상이 될 때 우리가 지혜롭게 행합니다(시 119:99). 올바름과 정의와 정직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 훈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1)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39.
2)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40.
3) 김회권, 『신명기』, 한국장로교총회창립 100주년기념 표준주석, 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