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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금마타리
< 2019. 11. 20 > 북경은 외성 안에 내성, 내성 안에 황성, 황성 안에 자금성이 있다. 천안문은 황성의 남문이고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다. 1417년 건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644년 소실되었다가 1651년에 재건되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케 하고 백성을 다스리다(受命于天, 安邦治民)'라는 의미의 천안문(天安門)으로 개칭했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천안문의 뒷모습 단문(端門).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으로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다. 황제가 조회 시에 만조백관들이 단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다. 오문(午門)은 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이다.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이래 1647년(순치 4), 1801년(가경 6)에 중수했다.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4개의 다른 전각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오문의 뒷모습 오문에서 본 태화문(太和門). 태화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경문(貞慶門)과 소덕문(昭德門))이 있다. 태화문 앞에는 명당수 역할을 하는 내금수하(内金水河)가 흐르고 있다. 태화문은 태화전의 전문으로 1886년(광서 1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4년(광서 20)에 중건되었다. 태화문의 뒷모습 태화문의 답도 태화문 위에서 본 태화전(太和殿).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 여기에 있어서 황제의 즉위식, 국혼, 황후 책봉,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체인각(體仁閣)은 태화전 광장 동쪽에 있다. 1678년(강희 17)에 이곳에서 143인의 학사들을 모아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홍의각(弘義閣)은 태화전 광장 서쪽에 있다. 영락제 때 편찬된 <영락대전>이 소장되어 있었다. 태화문 동측의 소덕문(昭德門)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은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전(奉天殿)이었으며 1562년(가정 41) 중건하면서 황극전(皇極殿)으로 개칭했고 1645년(순치 2)에 태화전으로 개칭했다. 정면 11칸, 측면 5칸, 길이 64m, 너비 37m, 전각 높이 26.92m, 면적 2,368m², 기단 높이 8.13m, 기단까지 합친 높이 35.05m로 중국에 궁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태화전의 답도 (어계의 양쪽 계단으로는 가마꾼이, 답도 위로는 임금이 탄 가마가 지난다.) 향로 태화전은 한백옥으로 된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72개의 남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 12.7m, 직경 1.06m에 이른다. 태화전에는 18개의 유금동항(流金銅缸)이 진설되어 있다. 홍의각(弘義閣) 태화전 좌우의 담장은 원래 회랑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 때 화재를 막기 위해 지금과 같은 담장으로 바꿨다. 태화전의 뒷모습 태화전에서 본 중화전과 보화전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평소에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평면은 정방형이며 단첨사각찬첨(單檐四角攢尖)에 정면 3칸, 측면 3칸, 높이 29m, 면적 580㎡이다. 보화전(保和殿)은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고, 청나라 때는 매년 정월 15일에 황제가 제야와 소수민족 왕공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보화전은 정면 9칸, 측면 5칸, 높이 29.5m, 면적 1,240m²이다. 1420년에는 근신전(謹身殿), 1562년 건극전(建極殿), 1645년 보화전으로 개칭했다. 보화전의 뒷모습 보화전에서 본 건청문(乾淸門). 건청문은 내정의 정문이다. 건청문 동쪽에는 경운문(景運門)이 있고, 서쪽에는 융종문(隆宗門)이 있다. 건청문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1420년(영락 18)에 지어진 이래 1655년(순치 12)에 중수되었다. 건청문의 답도 건청문 앞 청동사자상 건청궁에서 본 건청문 뒷모습 건청궁(乾淸宮)은 명나라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는 황제의 침궁이었으나 옹정제 때 침소를 양심전으로 옮기면서 정식 조회를 여는 편전으로 바뀌었다. 건청궁 답도 건청궁은 1420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8년에 마지막으로 중건되었다. 청나라 때는 강희제와 건륭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건청궁 옥좌 위에 걸려 있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은 순치제의 어필이다. 교태전과 곤녕궁 교태전(交泰殿)은 명나라 때는 황제의 정실 부인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했고, 청나라 때는 황후가 주최하는 행사들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황후 보좌 위로 강희제가 ‘무위(無爲)’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교태전의 옆모습 곤녕궁(坤宁宫)은 황후가 거주했던 궁전이다. 옹정제 이후로는 곤녕궁의 공간을 둘로 나누어 서난각에서는 만주족 전통 신앙에 따라 날마다 육류를 바치는 제사를 지냈고, 동난각은 황제가 혼례 행사를 치른 후 첫날밤을 보내던 곳이다. 강희, 동치, 광서, 선통 4명의 황제가 태화전에서 혼례를 치르고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후원인 어화원으로 통하는 문 어화원(御花園)은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했다. 동서 135m, 남북 89m, 면적 12,015m²이며 고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어화원은 내정의 뒤편, 최북단에 위치했다. 과거에는 외조 태화문부터 내정의 후삼궁 주변까지 나무가 없었다. 이는 고대 건축 기법에 따라 궁전을 근엄하게 보이게 하고,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외부에서 땅을 파고 침입하지 못하도록 바닥에 벽돌 40장이 포개진 것과 같은 두께로 깔았다고 하니 사실상 나무를 심는다 해도 자랄 수 없는 구조였다. 어화원에서 본 신무문 뒷모습 신무문(神武門)은 자금성의 북문이다.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신무문으로 고쳤다. 신무문에서 본 경산공원의 만춘정 자금성에는 높이가 10여m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 밖에는 넓이가 52m의 성을 보호하는 하천인 호성하(護城河)가 둘러서 흐르고 있어 경계가 삼엄하다. 호성하와 신무문 각루(角樓)는 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의 전각이다. Yanni / Nightingale (1997년 자금성 공연) |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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