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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이승만이 '분단 원흉'?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945년 9월 스탈린의 지령과
1946년 6월의 정읍선언
----1948년 7월. 초대 이승만 대통령(1대 재임 1948.07~1952.08)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네이버에서 ‘정읍선언’을 검색하면
이런 글이 가장 먼저 뜹니다.
<정읍선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6년 6월 3일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이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에
호소하도록 해야 한다’
고 말했던 선언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정읍선언'
검색어를 치면 뜨는 화면----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썼나 궁금해서
봤더니 제 기사더군요.
돌이켜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 역시 당시에는
‘한반도 분단의 최고 책임자는 이승만’
이라는 생각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 생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정읍발언
’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선언’이 아니라 ‘발언’으로 격
을 낮춰 불렀습니다.
1946년 6월에 남한만의 정부를 조직하자고
했다고?
얼마나 권력욕이 심했으면 나라를 반쪽
내서라도 가지겠다는 것이었다는 말인가!’
그보다 4개월 전에 38선 이북에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군대를
조직하고 화폐를 발행하고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실상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주변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946년 2월에 이미 북한에 정부가 들어선
것이었는데 말이죠.
이게 뭔가.
그렇다면 1946년 2월 이후에 북한에서 주장한
소위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성립한 북한 정권을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남한 지도자 몇 명을 들러리로 세운 채
수립하는 통일 인민공화국!
지금이니까 이것이 섬뜩하게 들릴 뿐,
1946년의 국민들은 별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공산주의는 절대 안된다’
고 주장하던, 자본가도 아니고 지주도
아니며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정객,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중도파에 비해
미 군정의 지지도 받지 못하던, 마치
독불장군처럼 보이던 단 한 인물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 사람은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의
1954년 미국 뉴욕 카퍼레이드 장면----
< 김덕영 감독 제공 >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이토록 흥행할 줄은,
일간지에서 처음으로 그 영화에 대한
기사를 썼던 저 역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영화적 기법도 눈에 띄지 않는
그 영화가 성공한 것은 오직
‘우직한 팩트의 힘’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1945년에서 1948년 사에에 이승만이
건국을 위해 과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새삼 떠오르는
옛 인터뷰가 있습니다.
2017년 8월 9일자 조선일보에서 저는
이정식(1931~2021)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이정식’ 하면 ‘스칼라피노’,
‘스칼라피노’ 하면 ‘이정식’이 생각날 정도로,
이정식 교수와 로버트 스칼라피노(1911~2011)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가 함께 쓴
1972년의 고전적 명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Communism in Korea)’
때문입니다.
미국 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禁書) 취급을 받았던
책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혔습니다.
좌파 독립운동사와 북한에 대한 객관적·체계적
정보에 목말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60여 년 동안 북한 문제를 연구해 온
한국 현대 정치사 연구의 권위자이던
이정식 교수는 미국에서 새 저서
‘북한: 획일적 국가 수립
(North Korea: Building of the Monolithic State)’
을 출간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사실 예전에는 자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추측해야 했던 부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옛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많은
문서에 힙입어 더욱 자신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명예교수----
< 조선일보 DB >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됐는가요?
“그 동안 한국 학자들은 1945년 9월의
‘런던 회의’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문제와 별 상관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그건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 외무장관들이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회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죠.”
-어떻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까?
“소련의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 전후
일본 통치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북아프리카 트리폴리타니아 할양을
구했어요.
하지만 미국과 영국이 일축해 버렸습니다.
런던 회의는 9월 15일쯤 결렬됐고,
이로써 약간 온기가 남아 있던 미·소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어요.”
<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
-스탈린이 어떻게 나왔을지 걱정됩니다.
“네. 닷새 뒤인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중요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북조선의 광범위한 반일(反日) 민주주의
정당 연합을 토대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설립하라’는 것이었어요.
이 지령에는 미군과 교섭하거나
협조하라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련 점령 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지시였던 것이죠.”
(얼핏 공산주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
이라는 것은 사실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
정권 수립의 전단계 역할을 한 정부였습니다.)
-그렇다면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1945년 9월 ‘북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소련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1948년 북한 정권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이
평양에서 수집한 사진 자료다----
(기자는 궁금한 점이 생기면 즉시 질문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이라도 말이죠.)
-아니 그럼 선생님, 1946년 6월의 이승만
‘정읍발언’은….
“아이고, 아직도 그 얘기 하고 있어요?
스탈린이 이미 1945년 9월에 지령을
내렸다니까. 이승만이 귀국한 건 1945년
10월이었어요.
이승만이 아직도 미국에 있을 때 스탈린이
단독 정부 지령을 내린 거예요.”
그렇다면 ‘정읍발언’, 아니 ‘정읍선언’의
의미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요.
1946년 6월 3일 지방 순회 중 전북
정읍을 방문한 이승만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
(共委·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
지난해 6월 정읍선언 77주년을 기념해
우남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선
이런 분석이 나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부터 이승만은
한반도에 하나의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미·소·영·중 정상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10월 16일 귀국 후 38선 철폐 운동을 벌이는
한편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으로 구성된
남북 지도자 모임을 열어 12월까지 중앙정부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승만의 ‘정읍 선언’을 보도한
1946년 6월 5일자 조선일보 1면----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은
인구 비례로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이미 북한에 인민 정부를 세운
소련은 남한까지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미
실패했다고 판단했죠.
소련은 친소(親蘇) 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은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뒤
소련을 압박해 통일 정부를 세우는
방안이었습니다.
결국 정읍 선언은 단독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통일 정부가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읍 선언을 한반도 분열의 출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새로운 통일 선언’
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정읍선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기 위해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민족 통일 달성’
이라는 단계적인 통일 정부 수립론을
공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23년 6월 3일 이승만 정읍선언의 현장인 전북 정읍
정읍동초등학교에서 정읍선언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플래카드를 펼치고 있다----
< 유석재 기자 >
지난해 6월 3일 ‘정읍선언’의 현장인
정읍동초등학교 현장에선 77년 만에
처음으로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읍선언 기념사업회 측이
정읍동초등학교에 정읍선언 기념패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의하자 정읍동초 측이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는 것인가!’
유석채 기자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천하동인
좌파들아 머릿속 유연성을 키워 그럼 인생이 편해
아하 진짜 우리집에도 원조 좌파있는데.....
본질을 보지도 않고 본인생각 바꾸면 죽는줄.....
왜냐하면 내 인생의 20대 30대 시기가 없어지는줄
알아 이게 바로 팩트임 본인들이 뭘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을 바꿀때 되면 바꿔야지 이재명같은
쓰레기들이 이끄는당을 그냥 밀어준다고.....
지들 엄마 아버지 잘못한거 잘만 말 하더만.....
이재명이 니들 조상이냐???
사실과자유
현재 진행형이 맞아요.
역사는 최신 업데이트해서봐야 한다.
영화개봉 3주 지났는데, 김구측 반응이 유어만
편지원문 번역이 잘못 됐다고 시비 거는 수준이라고
kbs가 오늘 보도..ㅋ
국민들의 눈
미래세대,10대, 20대, 30대의 청소년, 청년들이
"건국전쟁" 영화를 봐야 한다.
왜??
향후 이나라를 이끌어 갈 미래의 주인공들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적대시한 역사 왜곡, 眞實을
알아야 올바른 국가관이 선다.
"역사 왜곡" 70년간 "석화"되어 국민들이 속고
굳어 있었다~!!
역사 왜곡에 眞實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관 확립을 위해서....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전국적인 "단체관람"이
역사의 큰 공부이다.
ggg7
좌파들은 사실을 뒤집어 조작선동 뒤집어 쒸우기
잘한다.들키면 아님말고.좌빠리들 얘기는
반대로 들으면 된다.
YellDream
예나 지금이나 언론에 책임이 있다.
1945.9월의 스탈린 지시로 이미 소련의 위성국
조성 책략은 다 들어났고, 1946.2 임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정부 행사를 한 것을
언론과 지식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토지개혁, 군대 조직...
이런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 정부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식인과 얼론이 반 대한민국 편에 서 있었으며
정읍선언의 진의와 Fact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비굴성을 규탄해야 한다.
민주시체장사로또유족
당시 김구가 북한에 붙어서 말썽을 피웠었지...
그래서 남한 국민들은 김구 욕 하는 이들 많았어...
그런 연유인지 김구가 살해당한건데...
그걸 모르는 건지 안두희 살해범이란 애도 나왔고...
YellDream
국회는 "한국 현대사 교육에 대한 임시 조치법"을
입법하여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현대사
교과서를 긴급히 검토, Fact에 어긋나는 것을
즉시 개정하고, 교과서 개정 이전이라도
건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 문제를 대학 입시에서 다루어 줌으로써 젊은
후학들의 역사의식을 바로잡는데 주저하지
말야야 한다.
정동래
대한민국 좌익들은 김구는 선동의 도구일 뿐이지
팩트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주마등
이승만에대한 재평가가 나오니 황씨같은 좌파
유투브강사는 이승만이 국민을 너무많이 죽였다고
또다시 선동질울 하고 있다.
이런 역사업자들의 자기주장역사를 규제해야 한다.
사실과자유
기자가 인용한 김일성과 스탈린이 밥 먹는 사진이
조작이라는 지적이 있어요.최근 뉴데일리 인보길 기자
연재물에서. 모스크바에서 식사하면 호스트는
스탈린이라야.
젓가락 쥐고 음식 나눠주는 자가 호스트.
류수
현명하신 분이,, 저들의 역사왜곡을 사실로
이해하고 있었다니? /
정상적인 보통교육 받은 사람도 그 역사진실을
잘 알고 있는데요!
김철현
북한 입장에서보면 거짓말이 아니지.
james k
어제 건국전쟁 영화를 봤습니다.
이제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배워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진실을 외면하는 교육을 시켰는지
우리들의 선배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가 역사를 왜곡한다고 분노하면서
우리가 배운 역사가 진실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허구였다니...
그 잘난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공부했단 말인가?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나라의 근원도 모르면서 어떻게 국민 의례를 할 때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부끄럽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덕분이라는 것을 잊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
지금 민주당이나 이재명이가 하는 짓을 보면
이 O들이 과연 국가의 미래를 위한 길인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진고개
당시를 살았던 6.25세대들은 4.19와 5.16의 진실을
목격하였지만 종북들의 역사왜곡과 전교조나
민노총의 조직적 가짜뉴스 확대 재생산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지금이라도 이승만과 박정희는 물론 대한민국
근대 역사는 재 조명되고 재 평가되어야한다.
ziliz
정읍동초 동문과 기관장이 팔불출일세
메가네우라
2024.2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민족 최악의
반역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마오저둥을 위해
복무한 자들이다.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자가 활동했다는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의 고토
회복이 목표였지 조선 독립은 강령에 없었다.
메가네우라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라 모욕하는 자들의 혈관에
불한당 마적떼의 피가 흐른다.
그 꼭대기에 문재인 이재명이 똬리 틀고 있다.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도저히 못참는
자들일수록 이재명에 열광한다.
제 손으로 밥 벌어먹지 못하고 국민혈세 슈킹해
배를 채우는 데 이골이 난 것들!
애국투사
좌파들의 되먹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에대한 모독
우리 보수는 뭐 했습니까 분발 합시다
메가네우라
38선 이북에 이미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상
남한만이라도 자유선거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공산체제는 오직 힘으로만
극복할 수 있으니 자유를 국시로 하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지 분단되어 우리만
잘 살자는 뜻이 아니다.
물과같이
개일성이 솔방울 수류탄으로 일본과 싸워
광복했당께..
6.25전쟁은 세종대왕이 일으키고..
거지나라 자유대한민국을 진보 민주 개일성과
딱까리 개악마 개핵중이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하고 경제 강국을 건설했당께..
인민개돼지 쓰레기 인간들아 진보 민주 개일성
개택동 딱까리 개악마들이 인식시키는데로
인식질해!...
evoldas
김일성 공산당보다 힘이 없는데 뭔수로 통일을 합니까
先進韓國
해방 공간에서 보면, 이승만도, 김구도, 신익희도
호남을 순방했습니다.
당시 호남은 자유 민주주의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롯해서 송진우, 김준연 등
자유 우파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곡창지대라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해방 공간에서 정치인들이 호남을 순방했던
것입니다.
그 뒤 이승만 대통령을 호남은 지지했습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윤보선과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했을 ??도 박정희를 더 많이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를 죄파나 벌갱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대중은 중도 우파입니다.
그가 좌파라면 왜 일본과 미국 정치인들이
지지했겠습니까.
또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
김종필과 박태준이 손을 잡아서 밀어주었겠습니까.
또 김대중이 벌갱이였으면 왜 IMF에서 한국을
구제하느라 죽을 힘을 다했겠습니까.
그냥 한국을 망하게 해버렸어야죠.
또 김대중이 좌파 정책을 편 게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근거 없이 김대중을 벌갱이로 매도하는 건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