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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장 17-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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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해 첫주부터 이어지는 빌립보서 설교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바울 시대나 지금 시대나 교회 공동체 안과 밖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 / 덕을 이루는 사람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 / 거룩과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과 세속적인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 / 땅의 것에 욕심내고 자랑하는 사람과 위의 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 / 남을 칭찬하고 응원해주는 사람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일상이 된 사람, / 대접받으려고 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과 베풀고 나누며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 등, / 극명하게 나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고, 그로 인해 바울은 기쁨의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빌립보 교회 역시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꾸 도덕적이지 못한 세상풍조를 끌어 들이고, 윤리의식을 저하시키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내용은 교회와 성도들을 어지럽히는 나쁜 언행을 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훈계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눌때에 성령이 주시는 감동의 은혜를 받으시고, 우리 교회와, 각자의 삶에 잘 적용하셔서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기를 소망합니다.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아멘.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고 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언급 하며,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한 자,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또 “함께”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의 “함께”는 빌립보 교회 전 성도들을 지칭 합니다. 좋은 그룹이든지 안 좋은 그룹이든지, 나뉘어 있는 두 그룹 전부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함께 바울을 본받게 되기를 요청하고, 권면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좀 더 속 사정을 들여다 보면 잘하고 있는 그룹들 보다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세속적인 풍조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훨씬 더 쎈 강도의 권면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봉사와 헌신으로 열심을 내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비 도덕주의 자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은혜의 선물로 받은 구원의 자유를 남용하고 오용한 나머지 자신의 삶이 고결하고 특별하다는 착각 속에서 방종의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구별하여 불러 모음)와 성도(거룩함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아 내는 사람)의 의미를 망각한 채,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두면서 구별도 되지 않고, 거룩하게 살지도 못하는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믿음은 단지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일 뿐이며, 믿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권리를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이었지만 그 믿음을 지켜가고, 성장 시켜가고, 전파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무시하고 도무지 실행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놀이를 더 좋아하고 그러한 행위들을 무분별하게 교회에 끌어들이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래서는 교회가 교회 답게, 성도가 성도 답게 되는 것이 다 무너지겠구나 라는 판단을 하고, 강한 권면으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고 한 것입니다.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바울이 했기 때문에 통용되는 말이 되었지만, 교회 내의 다른 성도가 이 말을 했으면, “웃기고 있네, 나보다 못하면서 누가 누굴 본 받으래, 너를 본 받는이 차라리 우리집 ×를 따라가겠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무시 당하고, 조롱감이 되었을 겁니다.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는 말이 바울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내세우고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오직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하였듯이, 육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을 것을 추구하였듯이, 그리고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사모하며 살든지 죽든지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죽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고백 아래 살아갔듯이, 이러한 삶의 자세를 본 받으라는 겁니다.
즉, 바울은 감추고 싶은 자신의 흑역사의 수치를 가리워 주고, 패악질을 일삼았던 포악한 난봉꾼이었던 자신을 이토록 변화시켜 주시고, 택하여 사용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인도해 가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따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반복해서 들으셔서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흔히 배고픈 시절에는 먹을 거리가 풍성한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을 쓰고, 본 받을 만한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만 같아라”라는 말을 인용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바울만 같아라”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저는 바울의 신발끈이라도 매면서라도 그의 삶의 1%라도 닮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러 분들도 “나를 본 받는 자라가 되라”라 말을 일생의 시간 속에서 적어도 가족에게라도 한 번쯤음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17절 후반부에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모습도 안 보이고, 목소리도 안 들리고, 글씨로 된 편지만 읽을 뿐 이었습니다.
그러니, 눈에 안 보이는 자신 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성도둘 중에서 바울의 가르침 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모범적인 성도들의 행위를 직접 관찰하고, 제발 그들 중심으로, 그들의 모범적인 행동을 본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겁니다.
나쁜 그룹이 좋은 그룹을 뒤 흔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그룹이 발산하는 선한 영향력이 교회 안에 충만하게 퍼져 나가기를 기도하고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아멘.
바울은 교회내의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두 번 권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복해서 권면했지만 여전히 나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 번 권면 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항해서 원수로 대하는 행동을 한다고 하니, 나는 너무나 참담하고 기가막혀서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바울이 울었답니다. 바울은 보기 보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칠 즈음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3년 동안 당신들을 눈물로 훈계하였다고 했습니다.(행 20:31). 고린도 교회에는 눈물의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 2:4)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수고가 해산하는 고통이 있다(갈 4:10)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린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남자는 일평생 태어 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싸움에서 졌을 때, 세 번 운다고 하죠. 남자는 겉으로 우는 것 보다 속으로 우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남성은 시도 때도 없이 우셔야 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때문에 울음보가 순간 순간 터져야 합니다.
은혜 받아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순종하느라 울고, 일꾼으로 헌신 하느라 울고, 성도들의 아픔이 느껴져서 함께 울고, 찬양 하다 울고, 말씀 읽다 울고, 기도하다 당연히 울고.....울고, 또 우셔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울보가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남자분들, 바울첨럼 많이 우시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권면한 이유가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 때문 아닙니까? 바울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울었고, 예수님이 버림당하는 것이 화가나서 울었고, 십자가가 무시당하는 것이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이 울음 속에는 따가운 책망의 마음과, 다시 돌아오라는 회개의 권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물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원수로 대하며 행동하는 사람, 책망과 권면을 받고도 끝까지 무시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오직 영생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원수로 삼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오직 멸망 뿐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똑 같이 홍해 바다를 건넜고, 똑 같이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똑 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똑 같이 불기둥과 구룸 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전부가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과 맛서서 대적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선 줄로 생각했단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어지는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중 된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고, 말씀을 듣고도 준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서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는, 성령님과 떨어져 지내서는, 결단코 영생으로 갈 수 없으며, 멸망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며 멸망 당하는 사람의 특징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그들의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배가 그들에게는 신처럼 작동 되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신적인 맹신의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오직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절대적인 선택의 대상이요 일생의 낙이 된 사람은, 자신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그는 점점 멸망의 길로 나아가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그 일을 저지르는 자신은 오히려 그것이 자랑꺼리이고 높임과 칭찬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 한다는 겁니다. 무지하거나 무모하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알고도 그렇게 하는 나쁜 사람들 일겁니다.
예를 들면, 부패한 방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아놓고 후원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는 사업가, 거룩과 경건을 말하면서 은밀하게 파렴치한 음란과 음행을 저지르는 성직자, 세상 착하고 화목한 가정인 것처럼 보이다가 집에 가서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하는 괴물로 변하는 유명 연예인, 화면에 나와서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대단한 애국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야합하고 사리사욕을 챙기는 비열한 정치가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부 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자기 스스로는 절대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외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짜 뻔뻔하고 낮이 두꺼운 사람들이고 멸망으로 직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에 행여나 멸망으로 가는 사람이 없을까 근심하면서 눈물의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위험 경계수위를 넘은 사람들에게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강력하게 경고하고, 정신차리라는 말씀의 째찍으로 때리면서 혼쭐을 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혼을 내 준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었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20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아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강조해서 들려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앞서 멸망 당하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땅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 곧 하늘의 시민권을 행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도덕적이냐, 비도덕 적이냐, 누가 율법적이냐, 비율법 적이냐, 누가 순종적이냐, 비 순종적이냐,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는 땅에 있는 자들이 아웅다웅 자기들의 자존심과 이익 때문에 다투는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조차 눈물로 호소하면서 이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그러한 소모적인 논쟁을 벗어나서, “하늘에 시민권이 주어진 자”라는 정체서을 잊지 말고, 그것 만을 지켜 가는데 너희 일생의 삶을 완전하게 예수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가라고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내 정체성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 나는 당당한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 다면, 어떻게 감히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원수된 채로 살아가려는 생각을 할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히 하늘 시민권을 인증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믿음의 유산인 십자가를 모른체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에 도적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율법적인 행위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자신들이 하늘의 시민권자임가 되었음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노예 의식에 사로잡혀서, 과거에 속한 자들, 육체에 속한 자들, 땅에 속한 자들이라는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을 다 얻었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공급 받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정체성이 하늘의 시민권에 있음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소망하며 살아갈 때, 그 능력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무한 대로 작동될 것입니다.
20절 말씀대로 “우리는 구원하는 자 에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일” 이것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삼으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가는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갑에 돈이 가득하면 어깨가 펴지고 당당해 지죠. 누굴 만나도 너그럽게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있게 되죠. 하늘의 시민권이 있다는 정체성을 항상 유지하고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지갑에 돈이 가득한 것보다 천 배 만 배는 당당한 자존감이 상승할 겁니다. 그 쾌감과 감동을 언제라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땅을 바라보고 걸으며 고개 숙인 자가 되지 마시고 하늘을 바라 보며 숨을 크네 내쉬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담대하게, 여유롭게, 품위 있게 걸어 가십시오. 이러한 당당한 발걸음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늘 시민권이 새겨져 있음을 매일 매일 확인 시켜 주시고, 그 길로 함께 가자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교회 안과 밖에서 들리는 세상의 소리, 땅의 소리, 멸망의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 들리고 마음을 흔든 다고 하여도 오직 주님의 음성 만을 따라가시는 강단 있는 선택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이 권면하는 마지막 21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아멘.
이 구절을 순서적으로 보면 세 단어가 눈에 뜁니다. 복종, 낮아짐, 변화(영광의 몸으로)입니다. 이 단어를 공식화 해서 대입해 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에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이유가 기본적으로 복종하지 못해서가 주 원인입니다. 거뜬하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가 있음에도 버티고, 도망가고, 거부하면서 요리 조리 복종의 자리를 피해 다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나의 자아와 일상을 다루어 주시기를 요청하시고, 나를 복종시키려는 역사가 있음이 감지 되면, 즉시 엎드리고, 무릎꿇고, 복종하십시오. 복종하면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시민권이 내 삶을 주도하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복종만 잘 하면, 그 다음 단계인 낮아짐(겸손과 섬김)의 과정으로 순식 간에 진행이 되고, 낮아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말씀 하시는 대로 나아가고, 말씀 하시는 대로 멈춰서기를 반복하면, 드디어 내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쥐고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하늘의 시민권자라는 인식이 내 삶을 이끌어 가는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를 다루시고 역사하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복종으로 응답 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 주려고 눈물 흘리며 호소하고, 질책하고, 권면하는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어둠에 있었고, 죄의 노예가 되어 멸망길로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빛에 거하고, 죄의 사슬을 벗고, 하늘의 시민권을 받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구원의 선물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다시 세상을 따르고, 욕심을 따르고, 다투고, 게으름을 피우며 자진해서 멸망의 길로 뒤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려고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습니까? 감옥에서까지 우리를 걱정해 주면서 눈물로 권면하는 대 선배 사도 바울의 피를 토하는 권면을 외면해서야 되겠습니까?
00교회 모든 성도는, 나의 정체성은, 이 세상,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보장된 시민권에 있음을 늘 기억하시며, 하나님 앞에서는 복종과 순종을, 공동체 안에서는 헌신과 충성을, 이웃과 세상에서는 겸손과 섬김을, 그리고 가족 앞에서는 사랑과 화목을 이루어가는 하늘 시민권자 다운 매밀 매일의 고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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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선물로 받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저희들이, 다시 세상의 풍조와 욕심을 따라 멸망의 길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늘의 시민권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영생의 나라를 향하여 믿음의 길로 전진해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