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용회장님의 카톡에서]
================================
진리에 대한 사랑이 보상을 받다 (박영신)
(2O21년 10월 작성)
참고:1988연감177-179면
교회 다니던 시절:
1956년 추운 겨울이었다. 현관 밖에서 “계십니까?”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가방을 든 40대로 보이는 한 여인(천신숙 자매특파)이
서있었다.
나는 그녀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고 증오심을 느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밖에 서서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미소 띤 얼굴로 말하는 그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내 뒤에 서계시던 어머니가 “잠깐 들어오셔서
몸이나 녹이세요”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동정심을 보이던 내가 왜 그에게는 그처럼 증오심을 느꼈는가? 그는 누구이기에 그처럼 냉대를 받으면서도 추운 날씨에도
방문을 하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고 나는 장로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교회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교회에서는 증인들을
이단시하여 멀리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전남 순천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교 선교부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매일 정기적으로
교내 채플 시간이 있었고 교목 혹은 초빙 교직자가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쳤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3학년때의 일이다. 당시 신학박사였던 교장(김형모 박사)은 졸업반을 위하여 매주 한 번씩 성서 교리를 강의하여주었다. 수업중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교장선생님, 대관절 여호와의증인이란 무엇입니까? 어제 저의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왔는데 천당이 없다고 전도하더군요.” 교장은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이젠 이곳에도 그 이단들이 들어왔군. 이들은 아주 위험한 이단이므로
집에 들이면 안된다. 내세를 부인하는 사람들이야. 나사로의 이야기 가운데 천당이 있고 요한 14:1-3에 보면 하늘에 처소를 예비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그 천당을 부인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래. 그렇게 간단한 진리도 모르는 이단도 있구나.”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여호와의
증인은 아주 무식한 종파라고 속단해 버렸다. 그당시로서는 여호와의증인은 내세도 부인하고 천국도 부인하는 줄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조회 시간에 교장은 전교생들 앞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주의를환기시켰다.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예언되었는데 그중에 여호와의증인 있습니다. 이 이단은 다른 이단과는 달리 아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가지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이들이 오면 집에 들이지도 말고 말도 하면 안됩니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때에는 순천에 여호와의 증인이 단지 3명(이중근 형제, 부인 천신숙 자매, 아들 이용진 형제)뿐이었다. 이들은 한가족으로서 특파 와서 일하였다.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있는 이 도시에 극소수에 불과한 이 증인들을 왜 이처럼 조심하라고 심각하게 강조하는지, 그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었다. 후에 생각해 보면 교장은 이미 미국 유학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를 잘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증인과의 첫 토론:
하루는 옆 집에 다녀오신 어머니(이윤례 자매)가 파수대 한부를 손에 들고 들어오셨다. 내가, “어머니, 이거 어데서 나온겁니까?”하고 묻자
“옆 집 김선생 부인이 어떤 여자와 성경을 연구하는데 그 전도하는 여자가 나에게 준거야. 내가 교인이라는 걸 알고는 우리 집에도 찾아오겠다고
하더구나”
이 말에 나와 누님(박라심 자매)은 펄쩍 뛰었다. “안돼요, 어머니! 이거 큰일 나요!” “큰일이라니? 뭐가 큰 일이니?” “교장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이들은 무서운 이단들이래요. 절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말도 하면 안된데요.” “그래? 뭐, 나보기에는 나쁜 사람같이
보이지 않던데.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참 좋게 보이더구나.”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인데 서두에서 말한 그 여인이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남을 친절하게 대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싫어해도 그녀를 방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친절로 인해 내 자신, 내 가족 전체가 인생 행로를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이왕 그 증인이 방에 들어온 이상, 나는 그 “이단”에게
따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시 나와 누님은 교회 주일학교 반사로 일했고 내 나름대로 성경을 좀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대관절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일반 교회와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 참
좋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리 증인들은 영혼 멸을 믿고 교회처럼 영혼불멸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들이 내세를 부인한다고 들었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나사로의 이야기와 요한14:1-3을 보여주면 꼼짝 못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 방향으로 유도할 셈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이 죽으니까 내세를부인하는군요.”라고 했더니 “아니지요. 내세를 부인하는건 아닙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즐길 때가 옵니다. 성서 그대로 믿고있을뿐이에요“라고 말하였다. “그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역시 성서 그대로믿고있는걸요.” “그럼 예를 들어 봅시다. 에스겔 18:4을찾아보시겠어요?” 나는 소위 “신약성경”은 많이 찾아보았지만
“구약성경”은 별로 보는 일이 많지 않아서 그 구절을 빨리 찾지도 못하였다. 찾아서 내가 읽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이게 웬일인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오는 동안에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읽어본 적도 없는 성구가 갑자기 나타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 보지나 않았나 하여 앞 뒤 문맥을 다시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그 글자 그대로였다.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럴수가?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고 이젠 약간 기가 꺾인 상태에서 토론은 계속되었다. 토론이 진행됨에 따라 이 “이단”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 성서에 대해 매우 박식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쥐꼬리만한 지식을 가지고 그에게 함부로 덤벼들려 했던 내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여유있는 태도로 침착하게 시종일관 성서로 증거해 주고 난 후에, [하나님은 참되시다할지어다]책을 주면서 매주
성서를 연구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우리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교회에서의 탈퇴:
그 다음주부터는 그 증인 부부(이중근 형제, 천신숙 자매)가 방문하여 성서 연구를 사회하여 주었다. 그 여자의 남편되는 특파(이중근형제)는
과거에 교회 목사로 일하다가 증인으로 개종한 분이었다. 당시에 내가 성서를 연구하는 목적은 단지 성서를 배우기 위함이었지 여호와의 증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교회에 나가든지간에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기때문이었다. 그런데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려서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솔직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목사(문재구씨)는 순천 노회회장으로서 교단에서 지도층 원로 목사였고 그의 사위 세명 모두 목사들이었다. “목사님, 실은 제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경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괜찮지요?: “그건 위험한 일이야. 그들은 아주 위험한 이단이거든.”하고 점잖게 만류했다. “하지만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단의 정체를 알아야만 우리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박군이야 그들과 만난다고 해도 난 염려는 하지
않아. 하지만 조심은 해야 하네.” “예, 그점은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일이 있던 후의 일이다. 매월 정기적으로 한 번씩 수요일 저녁에는 청년 헌신 예배가 있었는데 청년회 간부가 윤번하여 설교를 하였다.
내가 총무직을 맡고 있어서 내가 설교를 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때에 연구서적인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책 제1장을 근거로 설교를 준비하였다. 예수께서는 사탄을 물리칠 때 세 번 모두 성서를 사용하여 물리친 것처럼 우리 역시 이단들을 물리칠 때에 성서를 무기로 사용하여야
하며 그러기위하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교를 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는 나에게 좋은 설교였다고 칭찬하여 주었다. 물론, 그 목사는 내가 설교 자료를어디에서 수집했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교회의 가르침이 성서와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혼불멸, 고초의 지옥, 삼위일체 등의 교리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성서가 우리에게 그저 좋은 교훈이 된다는 정도의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성서 말씀이 실제로 인간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또한 우리 생활에 어떻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실감함에 따라 내 피부에 맞닿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에 한때에는 마음 한 구석에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백히 명시되어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왜 그많은 종교 교직자나 성서 학자들이 모를까? 그들은 나보다도 경험이 많고 연구도 많이 했을텐데 이런 기초적인 교리를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 나만 어리석고 순진하게 무언가 속고 있지나 않은가?” 의심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했다.
“저 증인들은 대관절
생계를 어떻게 영위해 나가는걸까? 아마 보수를 받고 하는 것이나 아닌가? 비밀로 무슨 특별한 보수라도 있으니까 저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게
아닌가?“ 등의 별의별 생각이 다 들 때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증인들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성구라도 발견하면 “옳지, 이걸 보여주면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겠지.”하고
마치 비상한무기라도 준비해놓듯이 벼르고 있다가 연구 후에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참 좋은 질문이군요.
언젠가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지요.” 하면서 힘 안들이고 쉽게 설명하여 주었다. 듣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것을 가지고
대승리라도 기대하듯이 속으로 벼르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그는 내가 질문을 하면 교직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좋이하였다. “이제 점차 눈이 떠가는군요.”하면서 지식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기뻐하였다. 교회에서는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데 그러한 가르침과는 아주 대조가 되었다.
이제는 부인할수도, 공격할 수도 없는 확고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때에는 오전에는 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왕국회관에 나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양다리를 걸친 상태에 머무를 수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갈등도 생겼다. 지금까지는 내 인생 목표는 부모님께 효성을 바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하여 법조계에서 명예를
떨치는 것이었다. 서울대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수치스러워서 두문불출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다음해에 다시 응시하려고 재수하는중이었다. 고등학교
수석 졸업자로서 학교에 불명예를 돌려서 미안하기도 하여 다음해에는 꼭 함격하여 학교의 불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고
보니 그 모든 꿈을 버려야 했다. 곧 영장이 나올거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 감옥살이를 해야 하게 된다. 나에게 기대를 걸어온 아버지의 실망과
성화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당시에는 큰 시험이 되었다.
자신을 살펴보면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내심 이기적이었음을 느끼기도 했다. 성서연구중에 불타는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회자인
특파에게, “그렇다면 하느님 안믿어도 괜찮겠군요. 구태어 고생하면서 믿는것보다 현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으면 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자, 사회자는 “그러면 지금까지 하느님을 사랑해서 믿었나요, 지옥불이 무서워서 믿었나요?”라고 반문하였다. 나는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반복해완던 내가 과연 하느님을 사랑으로 섬기는게 아니라 이기심으로 섬겼구나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과거에 대학 입시 전날 밤에도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한 것은 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합격을 위해 간 것이지 진심으로 숭배를 위해 간것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스스로 깨달았다.
성서연구를 통해 참 숭배란 무엇인지, 숭배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함께 연구를 해오던 어머니, 누님,
그리고 나 셋이서 진지하게 의논하였다. 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맺어온 친분 관계를 어떻게 차마 끊고 탈퇴한단 말인가? 이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로 보였다. 연구 사회자였던 특파 형제가 보여준 성구가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구하는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아니니라”(갈라디아 1:10 개역) 이 말씀은 우리에게 명백한 지침을 제시하여 주었다. 드디어 용단을 내렸다.
일요일이 되었다,. 누님과 나는 이전처럼 오전 아동 주일학교 예배를 마치고 반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누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오늘부터 우리 둘은 교회를 그만 두게 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위의 반사들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서
놀란 표정이었다. 드디어 주일학교 교장이 이유를 물었다. 그때 우리는 그동안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해왔으며 그 결과 증인의 가르침이 참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성서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을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먼저 교회 문 밖으로 나왔다. 누님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붙잡고 울면서 차마 헤어지지 못하였다.
다음날이었다. 집에서 가족들이 특파 부부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는 중인데 밖에서 누가 노크를 하였다. 나가보니 목사가 권사와 함께 서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매우 난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실은 나보다 더 당황한 쪽은 바로 목사였다. 목사는 우리가
증인들과 성서 연구하는 날인 줄 모르고 우리를 만나려 왔다가 그만 뜻밖에 우리 앞에서 증인들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방 안에 들어온 목사는 앉아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특파 형제가 그를 대화로 끌어들이려 해도 응하지를 않았다. 바로 그때에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평상시에 목사가 심방을 왔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또한 특파 형제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성서를 가르쳐 주는 일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셨다. 또한 종종 성서를 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배운 내용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할 때에 아버지도 들으시고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방안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방안 분위기가 좀 딱딱한 감을 느끼셨는지 이러한 질문을 하셨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러자 특파 형제는 “예, 참 좋은 질문입니다. 그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요한
14:19을 폈다. 그리고 나서는 , 목사에게, “이 성구를 저분 교장 선생님께 좀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 성서를 목사 앞에 펴 놓았다. 그랬더니 목사는 점잖게 성서를 접고 나더니 특파 형제 앞으로 다시 밀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큰실례를 하고있는겁니다.” 특파형제: “아니. 제가 무슨 실례를 하였단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교회의 일꾼들을 빼내갑니까? 이것이 믿는 사람의 도리입니까?” 이 말에 대해 형제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빼내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왔습니다. 직접 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말을 이어 받았다. “그건 목사님의오해입니다. 증인들이 오라고 해서 저희가 가겠습니까? 올바른 진리가 있기때문에 저희가 스스로 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도 장로교가 옳고 증인들의 가르침이 틀리기를 바라는 심정입니다. 단 한가지 만이라도 이 자리에서 장로교가 증인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저를 돕는 방법입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박군이 차라리 감리교나 성결교로 갔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 않을걸세. 그 수많은 교파중에 하필이면 여호와의 증인에게 가는 것이 이렇게 가슴아프네. 내 집에 책들이 많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빌려 줄테니까 먼저 읽어ㆍ 본 다음에 결정하기 바라네.” “네, 저는 이미 다 알아보았습니다. 예를들면 영혼불멸, 삼위일체 등의 가르침
중 한가지만이라도 성서적으로 옮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목사는 이에 대하여는 일체 언급도 없이 나더러 너무 함부로 결정을
내렸다면서 화제를 바꾸어 성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세속적인 문제로 아버지와 긴 대화를 해나갔다. 그런 대화가 좀처럼 끝날 것같아 보이지
않았다. 화제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특파 형제는 이처럼 방해가 생기고 더 이상 영적 대화가 되지도 않겠음을 느끼고 연구 사회하던 책들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왜 더 계시지 않고 가십니까?”라고 물으시자 이 시간에 다른 곳에 가서 할
일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목사는 “그러면 우리 함께 헤어지기 전에 기도하고 헤어집시다”라고 말하였다. 특파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도를 인도하면 할 수 있지만 댁에서 인도하면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왜 내가 인도하면 못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한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없듯이 어떻게.........“ 그러자 목사는 발끈 노기를 띠면서 “여러분 들으셨지요? 나보고
공산주의자라고 하다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버지는 특파 형제에게 정중히 책망하셨다. “이선생, 그동안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오늘 보니 자녀들 앞에서 잘못된 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두분 중에 연세많으신 이분(목사)이 기도하는 것이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자신이 기도해야만 응하겠다는 생각은 예의에 벗어납니다. 나가주세요!” 당시에 특파는 40대였고 목사는 60대였다. 그러니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던 아버지에게는 특파가 몹시 무례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성서의 견해를 몰랐기 때문이다. 특파 부부가 먼저 나간 후,
목사는 아버지와 잡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떠났다.
이 일이 있던 며칠 후에, 나와 누님은 목사 댁을 찾아 갔다. 당시 우리 생각에는 “그래도 그 목사는 진실한 분이니까 증인이 나쁘다는
오해만 풀어드리면 진리를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갔다. 증거할 목적으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딴 판이었다. 특파 형제가 말한 그대로였다. 특파 형제는 찾아가 봐야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 목사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성서만 올바로 이해하면 증인이 될 분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그러리라고 믿었다. 그는 우리가
보여준 그 책을 목차만 대강 훑어보고 나서는 필요없다고 되돌려 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우리를
영적으로 보호하려는 의욕이 전혀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음이 분명하였다. 자기 자신의 신앙이 성서에 기초한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바빌론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으며 1957년 10월에 어머니, 누님, 나 그리고 남동생이 침례를 받았다. 이제부터 다른
가족성원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게 되었다.
가족을 위한 노력:
내 위로 두 형님들이 있는데 이들은 직장 관계로 다른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둘째 형(박흥신)이 휴가때에 집에 왔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증거하였고 우리를 가르치던 특파 형제와 만나게 마련하였다. 진화론 문제를 비롯하여 진지한 토론이 있었고 드디어 연구가 시작되었다. 둘째 형이
너무나 신속히 발전하고 뜨거운 열정을 보임에 따라 가르치는 특파는 “빨리 달궈진 방이 빨리 식는 법인데” 하면서 은근히 염려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는 기우였다. 둘째 형은 1958년 서울 장충단 체육관에서 열린 국제대회 때에 침례를 받았고 얼마 안있어서 중립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증인에 대하여 반대를 보이시기 시작하였다. 진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식들의 출세길을 막는 종교로
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분노를 보이다가 때로는 설득을 시키려고 시도도 해보았지만 형은 굽히지 않고 결국 직장을 그만 두고 중립 문제로
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자식들도 필경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평온했던 가정에 불덩이가 날아든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교육계에 종사해 왔으며 고향에서 존경받아 왔었다. 아버지의 제자들중에는 지방 유지들이 많았다. 우리 7남매를 키우면서 세상
꿈을 키워왔었다.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서 인생 말년에는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는 희망을 향해 진전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7 남매 대부분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자식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처럼 자식 자랑을 즐기던 아버지에게 감옥에 들어간 자식이
있게 되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얼마 후에는 내가 또 중립 문제를 직면하게 될 차례였다. 아버지는 미리 나를 단속할
참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징집이 보류되었다. 사실 대학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지만 실망과 노여움에 찬 아버지의
노여움을 잠시 동안이라도 진정시킬 목적으로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대학 진학을 하기로 하였다.
동아일보에 지방 대학 4년간 학비 대여 장학생 특차 모집 광고가 있었다. 거기에 합격만 하면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4년간 학교에 다니면서
영적 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응시하였다. 동아일보 광고난에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내 이름도 거기에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다. 내가 고등하교 졸업시에 수석 졸업생에게 주는 도지사 상을 받을 때보다도 더 기뻐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196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3월부터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보류되었던 영장이 이제 나오게 되었다. 나는 결국 중립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당시에 형(박흥신), 나, 동생(박금령) 셋이서 번갈아서 교도소에 드나들게 되자 이것이 아버지에게는 가장 심한
고통이었다. “박교장 자식들은 종교에 미쳐서 다 버린 자식이 되어버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했고 친구나 친척들로부터 수치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자식들을 처음에 잘못 인도했다는 원망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였다. 어머니 때문에 모두가 진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친가측 친척들은 자기네 자녀마저 물들까 봐 우리 가족을 경계하였다.
우리들은 진정한 효도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위하여 타협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아버지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가장 참된 효행임을 알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객지에 있는 동안에
우리들은 아버지에게 수시로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해드렸다.
아버지(박성심 형제)는 오랫동안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생활해 온 것을 지켜 보다가 드디어 증인과 연구하게 되었고 우리 가족중 맨 마지막으로
1974년에 침례를 받으셨다.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진리 안에서 가치있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보시다가 1976년에 암으로 사망하셨다. 하지만 나는 큰 위안을 받고 있다. 만약에 아버지를 일시적으로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세상과
타협했다면 지금 남아 있는게 무엇이겠는가? 영원한 이별로 끝나고 말았을게다. 장례식 때 나는 아버지 관 앞에서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부활의 희망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그 귀한 희망을 주신 여호와가 얼마나 고마운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 교도소에 두 번, 내가 한 번, 동생이 두 번 도합 5번에 걸쳐 매번 1년형을 언도받고 드나들 때 친척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한 믿음을 보이며 당시 우리 6남매를 파이오니아를 하도록 후원해 주었다. 어머니 자손으로 7자녀와 손자,
증손 등 모두 60여명이 진리 안에서 활동한다. 뿐만 아니라 한때 진리를 듣지 않았던 어머니의 친정 언니와 그의 6명의 딸 모두 진리 안에
들어왔는데 어머니의 증거가 계기가 되어 지금은 그들의 자손들 도합 80명 이상이 증인들이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파이오니아를 하였고 자신의 인내의 열매를 맛보다가 2006년에 92세로 사망하였다.
여호와의 축복:
맏형(박국평)은 청소년 학창 시절에는 동생을 구타한 경찰관을 찾아가서 주먹으로 경찰관에게 폭행을 가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고 젊은 시절에는
술과 담배 그리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다. 처음에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님의 친구들은 나에게 “자네 형님이나 믿게 하게.
그러면 우리도 믿을 걸세”라고 조롱하여다. 그러나 가족들의 꾸준한 도움으로 특파와 연구하게 되었고 드디어 1970년에 부부 함께 침례를
받았다. 그는 우리 7남매 중 육적으로는 첫 번째이지만 영적으로는 마지막으로 “형제”가 되었다. 5남매의 가장으로서 교육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는데 국기경례, 애국가 문제로 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생활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 박국평 교사가 종교 문제로
교직에서 물러나자 기자들이 찾아오고 신문에 보도 되는 등 소문이 자자했다. 해직된 직후 바로 자신이 사는 순천시내에서 가족 부양을 위해
연탄수레를 끌기도 했다. 학교 모범 교사가 종교에 미쳐서 “천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고 세상 동료들 중에는 자신의
사상에 투철한 헝님에게 눈물로 동정심과 존경을 보인 이들도 있었다.
그후 생활이 안정되자 직장을 그만 두고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1985년부터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다가 90년대 말부터는 은퇴하여
파이오니아로 일한다. 자손 중에는 아들, 손자, 사위, 손자사위 등 장로들이 많으며 큰아들(박상균형제)은 순회대회 감독자,지역대회
위원,RBC위원으로 봉사하다가 60대인 지금은 그런 직책에서 물러나서 회중조정자로 봉사한다
둘째인 누님(박라심)은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가 1967년 3월부터 특파로 임명되어 1994/10월까지 독신으로
충실하게 일하다가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결국 1995/11월에 하데스로 가서 쉬고 있다. 28년간 특파로 일한 동안에 단 한 번도 시간이
미달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가르친 수많은 일꾼중에는 장로들도 많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누님이 다니던 대학에 증인은 단지 혼자뿐이었다. 동급생들에게 자주 증거를 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여호와의증인으로 알고 있었다. 하루는, 철학교수가 진행하는 자유토론 시간에 한 학생이 “여호와의 증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요?”라고 질문하였다.
아마 누님을 겨냥하여 그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교수는 “ 응, 그들은 미친뱅이들이야,” 라고 대답하자 학생들은 와 하고 웃으며 누님을
쳐다보았다. 누님은 손을 들고 질문을 하였다.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 사람들은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책을 팔고 다녀.”라고 말했다. 그러자 누님은 “저도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저도 책을 가지고
전도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파는 행위가 아니고 인쇄실비를 위해 헌금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증인의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었다.
당시 1950년대에는 소액의헌금을 받고 간행물을 전할때였다
교수는 매우 난처해하는 표정이었고 자기가 그렇게 보게 된 것은 얼마 전에 자기의 집에 두 여자가 찾아와서 책을 권하면서 돈을 요구하기에
그렇게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오늘날 종교가 상업화되어 가고 있다고 하면서 현대 종교의 부패상으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수업이 끝나자 질문을 했던 학생은 누님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하였다. 동급생들 중에 한 학생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자매가 되었다. 80년대에
내가 서울의 한 회중을 방문했을 때 그 자매는 자신을 소개하면서대학시절에 누님에게서 진리를 받았노라고 말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누님이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당시에 호별봉사에서 제자인 여학생의 아버지를
만나서 증거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교회 회계집사였는데 증인을 싫어했지만 자기 딸의 영어 선생이 전하는 책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받았다.
그랬더니 계속 재방문을 오므로 매우 난처하였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딸을 생각하여 거절할 수도 없고 하여 자기 교회 목사에게 가서
상의하였다. 목사는 친구인 그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아도 나도 여호와의 증인 이단들이 뭘 가르치는지 알고 싶었네. 그들이 전하는 자료를
수집하고 싶었어. 난 자네는 믿을 수 있으니 모르는 체하고 주는 책을 받아서 나에게 건너주게”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그 후 재방문을 올 때마다 들어주고 책도 받아 목사에게 건네 주었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에 증인이 참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결국 교회를 탈퇴하고 증인이 되었고 나중에 장로(이은하 형제)가 되었으며 그의 친척들에게도 증거하여 장로와 파이오니아들이 된 분들이 있었다. 목사는 결국 옛 친구와의 인연을 끊고 적대관계가 되어 버렸다.
둘째 형(박흥신)은 내가 베델에 들어가던 해인 1964년에 순회를 시작하였다. 형은 완고하신 아버지의 엄한 “훈계”에도 굽히지 않고 충절을
고수하는 데 첫 관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동생들이 뒤를 따르기가 쉬웠다. 70년대부터 지역감독자로 봉사해 오던중 건강 문제로 2002년
9월부터 특파로 봉사하다가 2013년 5월에 사망하였다.
그가 1958년에 침례를 받던 당시에 전남 시산이란 섬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숙직실에 모아놓고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들이 진리를 받아서 100호도 안되는 그 마을에 회중이 생겼고 그곳 출신 형제들중 현재 적어도
8명이 도시에서 장로로 일하며 이중에는 순감, 순대감을 등의 경력을 가진 이들도 있다.1960년대초(?)
에 벌교에서 특파로 일하면서 벌교회중의 기초를 놓았다
나는 1962년 대학졸업후 3월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고 1963년 2월에 중립문제로 1년 선고를 받고 3개월간 순천 경찰서 감방에서,
나머지는 광주 교도소에서 지냈다. 경찰서 경관들은 나를 보고는 “야, 이번엔 박교장 아들 3번째가 또 들어왔다”고 웃으먼서 말하였다. 검사는
나에게 “흥, 꼴 좋다! 네 아버지는 국가에서 상받아야겠구나”라고 조롱하였다. 검사는. “삼형제가 국가의 법을 어기니 네 아버지는 공무원
자격이 없어. 자식들을 잘못 가르친 사람은 국가의 녹을 받을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위협하였다. 사실 당시엔 군사정권 시대이어서 아버지가 우리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되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은퇴할 때까지 무사히 지나갔다.
1963년 12월25일에 일반사면으로 출소하여 계속 파이오니아를 하다가 1964년 2월에 베델에 초대받아 5년간 그곳에서 봉사하다가
1969년 4월에 결혼하여 그때부터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2007년 9월부터 특파로 봉사한다. 70년대 초에 전남 완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특파 형제 혼자 봉사하고 있었다. 아내인 정자매는 혼자 그리고 나와 특파 형제는 둘이 호별봉사를 하였다. 문방구 점을 들러서 증거를 하였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반응이 좋았다. 즉시 소책자로 연구를 시작하였고 특파에게 인계해주고 떠났다. 다음 4개월 후에 다시 방문해 보니
(당시는 4개월에 한번씩 순회방문하였다) 이미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속히 발전하였다. 그 후 남편도 장로가 되었고 아들은 베델 봉사자로
일한다고 들었다. 지금은 전남 구례회중에 연합하고 있다.
남동생(박금령)은 60년대에 특파 및 베델봉사를 하다가 중립문제로 특별전시간 봉사를 중지하였고 지금은 서울 봉천동에서 장로로 일한다.
아들(박상웅)은 서울에서 영어회중의 장로로 봉사한다.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즉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는데 아버지가 순천에서 고흥으로 전근하였기 때문에 1960년대초에 고흥 구역을 처음
개척하는 봉사자가 되었다. 형들인 우리는 객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 둘이 봉사하면서 숙소인 교장 관사를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회중이 형성되었고 그때 동생과 연구하던 애기 엄마가 자매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등에 업혀 다니던 아이가 지금은 슨회대회감독자(최기도형제)로, 둘째
아들은순회감독자(최기태 형제)로 봉사하고 있다.
7남매중 여섯째인 여동생(박미자)은 특파로 봉사하다가 자녀 출생으로 정파로 일하게 되었고 2006년에 사망할 때까지 정파로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사위는 베델 의사로봉사하가 저녀부양문제로 베델에서 나와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안성에서 장로로봉사한다(설동오형제)
딸은 두딸의 어머니로서 지금 까지 파이오니로 봉사한다
아들부부는 전남대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데
아들은 장로. 며느리는파이오니아로봉사한다.(최강호형제)
그가 특파 되기 전,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교사들에게 증거하여 자매가 된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세명 있다. 한 사람은 특파가되었고(지금은 사망) 그의 사촌 동생은 남편 따라 순회하다가 지금 연로자 특파이다. (송경자자매와 박주환형제)
다른 사람은 80년대에 만나 보니 장로 부인이었다. 세번째 자매는 이전에 하번 만났는데 80대 노인 파이오니아였다, 남편은 대회회관 위원 등 많은 일을 하다가 별세하였고 딸은 현재 남편과 함께 특파로서 대리 순감으로 봉사한다.(전광철 형제 부부)
막내여동생(박금엽)은 특파로 봉사하다가 지금은 정파로 봉사한다. 남편,아들, 사위는 장로이며 큰아들(서영일.Mike Seo)은 외국에서 회중 조정자로 봉사하고
다른아들과 사위는 봉종 및 충실한 전도인으로 봉사하며 자여손 모두 진리 안에서 활동한다.
우리 친형제 가족은 1년에 한번씩 한곳에 모여 휴가를 즐긴다. 부모님의 생존시부터 지금까지 연례행사가 되어오는데 현재는 맏형님댁에서
살아있는 4남매 부부가 모인다.
함께 경험을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동심의 시절로 돌아가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얼마나 세월이 빠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7남매가 부모님과 함께 즐기던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3남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4남매만 남았다. 인생의 허무함을 점점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진리를 몰랐다면 재회의 희망도 없을거고 허무한 인생에서 목적 없이 그저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온 가족이 여호와를 중심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튼튼하고 안전한 연합을 유지해 왔다. 이러한 연합은 여호와께서 우리 가족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현세상의 그 어떠한 보배라도 그것을 가져다 줄수 있겠는가?
내가 바빌론에 속해 있을 때에는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특별히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세속적 출세를 이루는 것이 곧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처럼 종교가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나가는 발판이 되면 거기에는 하등의 희생이 있을 필요가 없다. “좁은 길, 자기 형주를 지는 일”이 실제로는 생활에 적용되지 않았다.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쟁점을 이해함으로써만 비로소 그리스도인 행로가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참 진리임을 느끼게 되고 믿음이 깊어지면 자연히 스스로 파이오니아를 하고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세상 종교는 세속 욕망과 경건한 숭배와의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
내가 다니던 교회재단의 고등학교에서도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서울대에 합격하라고 권하지 신학교에 가서 교직자가 되라고 권하지 않았다.
학생들중 우수생들은 신학교에 가려 하지도 않고 명문대에 가려고 했다. 내가 지방대학에서 특차 모집 시험에서 4년 장학생으로 합격하자
학교교무주임이 나에게 학교 명예를 위해 학교에서 비용을 지불할터이니 한번만 더 서울에 가서 서울대학에 응시하고 오라고 권하였다. 나는 이미
진리를 받은 상태이므로 거절하였다.
대학시절에 모교인 교장에게편지하였다. 그 편지에서 재학중에 학생들에게 "졸업 후에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하느님을 열심히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교훈을 기억한다고 말했으며 저는 드디어 참 숭배를 알게 되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다고 말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순천에 내려가서 교장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다. 분명히 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느냐고 충고를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증거할 기회가 될거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종교 문제에 관하여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상사에 관하여 화제로 일관하였다. 성서에 관하여 언급도 하지 않는데 내가 꺼낼 수 없어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신학박사라도 소위 “이단”에 빠진 사랑하는 제자를 도울 자신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종교 지도자들도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어 보인다. 죽음 앞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직면하는 사람이야 말로 승리자요 행복한 사람이다.
큰 바빌론에 속해 있을 때는 “빛의 천사”에게 기만당했기 때문에 선한 동기의 소유자라도 여호와의 주권 문제, 왕국의 실재성을 보지 못한다. (고후 11:14-15)
진리는 나와 우리 가족을 그 어두움 속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우리 가족 전체가 한 몸으로서 여호와의 편에 서서
여호와의 우주 주권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만족과 즐거움을 준다. 천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더없는 큰 특권이다. (잠언 27:11)
천적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에게 진리로 축복하여 주시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도와 주셨다.ㅅ 보람있는 일에 자신을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자비로우신 여호와께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ㅡㅡㅡㅡ
참고: 동생 박금령형제는 전남고흥회중의 처음개척자이고 둘째형 박흥신형제는 벌교회중과 시산회중의 처음 개척자이다
==================================
★* 덕담이 지닌 힘 *****
오늘은 어제 사용한 말의 결실이고
내일은 오늘 사용한 말의 열매입니다.
내가 할
말의 95%가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말은 "뇌세포"를 변화시킵니다.
'말버릇'을
고치면 인생도 변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 "말의 파장"이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특히 아침에 하는 "첫마디의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밝고 즐거운 말로 하루를 열어보십시오.
말에는 "각인효과"(刻印效果)가 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대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나 깨나 '입버릇'처럼 "감사합니다"를 반복한 '말기암 환자'가 한순간에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자가 치유" 이야기도 있습니다.
밝은 "음색"(音色)을 만들어 보십시오.
"소리의 색깔"이 변하면 우리의 삶도 변합니다.
얼굴을 미소 짓는 표정으로 바꿔 보십시오.
정성을 담아서 말해 보십시오.
"정성스러운 말"은 "희망 성취"의 밑바탕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서로 맺은 좋은 '유대 관계'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발성 연습"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불평불만"만 쏟아내면 매사에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투덜대는 습관"은 자신의 삶의 "악성 바이러스"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경청하면 마음의 소리까지 들립니다.
상대방 말에 집중하십시오.
타인의 '시비'에 끼어들지 말고 자기 길로 묵묵히 걸어가십시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게 되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말에는 "견인력"(牽引力)이 있습니다.
"없는 말"을 퍼뜨리면 '재앙'이 따릅니다.
"부정적인 언어"는 '화'를 초래합니다.
"긍정적인 언어"로 '복'을 쌓아 나가십시오.
때로는 '침묵'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침묵'도 "최상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말합시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미안합니다."
이와 같은
"친절한 말"을 '상용어'로 사용하십시오.
대화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끼어들기, 가로채기, 자르기, 앞지르기는 피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은 용서를 빌고, 용서를 빌면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사랑과 평화"가 깃듭니다.
'좋은 책'은 소리 내서 읽고 또 읽으십시오.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조용한 소리가 오히려
위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는 "좋은 말", "덕담"은 모두의 인생을 바꿉니다.♥
☆ 성경의 말씀 ☆
"적절한 때에 한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 같다."(잠언 25:11)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야고보서 3:10)
입에서 나가는 말은 무기처럼 날카롭고도 파멸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꿀처럼 달콤하고 향유처럼 고통을 덜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가 하면,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실추된 명성, 상처 난 감정, 긴장된 관계 그리고 신체적으로 해를 입는 일까지,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말로 인해 초래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 잠언 10장 19절에서는 "말이 많으면 잘못이 있게 마련이지만,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슬기롭게 행동한다"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하게 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해를 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의 입을 지키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더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때에 맞은 말"을 해줄 기회를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을 아래 링크를 통해 얻어보시길 바랍니다.
https://www.jw.org/finder?wtlocale=KO&docid=2015924&srcid=share
================================
* 가지면 좋은 것 *
"좋은 생각"을 가지면 어긋날 일이 없고 "부드러운 혀"를 가지면
다툴 일이 없고 "온유한 귀"를 가지면 화날 일이 없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불편할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생을 유연하게 물처럼 부드럽게 사세요. "상대와 친해지고 싶다면 '공통점'을 찾고 상대와 멀어지고 싶다면 '차이점'을 찾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의 흐름은 달팽이도 개미도 산을 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물론 삶에 지칠 때도 있고 넘어야 할 '높은 산'과 건너야 할 '깊은 강'도 있기 마련이죠.
그렇다고 너무 우울해하거나 화내지 마세요.
'우울한 날'은 한순간입니다. '화나는 날'도 한순간입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삶의 기쁨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힘내요. 희망을 가지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상만사' 빠르게 먼저 간 사람이 이긴 것이 아니라 "정로"로 끝까지 간 사람이 아름다운 "최후의 승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앞을
"멀리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 성경의 말씀 ☆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4:13)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1서 5:4)
"인내"란 '장애물'이나 '박해'나 '시련'이나 '유혹'에 직면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시련'에 대한 올바른 견해 즉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원한 장래"가 "인내"에 달려 있음을 알고 위로부터의 도움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련'과 '환난'을 두려워하지도 그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지도 않으며 불평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비통해하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훈계하였습니다.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크게 기뻐합시다. 환난은 인내를 ···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로 5:3,4) '시련'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참을성' 있고 굳건하게 그것을 견뎌 내는 그리스도인이 "인내"라는 '필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시련'을 충실하게 "인내"함으로 그에 따라 틀 잡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참을성', '감정 이입', '동정심', '친절', '사랑'을 더 잘 나타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내가 그 일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느님이 그분의 승인받는 종들에게 요구하시는 그 "어떤 것에도 부족함이" 없게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그 방법을 자세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jw.org/finder?wtlocale=KO&docid=2021481&srcid=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