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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이사 26,1-6
복 음 : 마태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의 문을 여는 193가지 이야기’라는 책에서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완벽주의는 불행하다.
그는 모든 걱정을 껴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2) 항상 남과 비교하려 한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간다.
3) 자기 자신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
4) 작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의 표정은 항상 불만과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5) 매사에 의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6) 이웃을 위해 절대로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는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더 많은 것을 간직하면서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풍요로움’ 대신에 ‘빈곤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혼자만 남게 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려움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 주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세상 안에서 많은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냐고 항의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행하면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사람이 되어서
어떤 시련과 고통도 거뜬하게 이겨내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앞선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반석 위의 인생집
-주님의 말씀(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가끔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수도원 피정 중인 형제가
“신부님은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 물었습니다.
저는 지체 없이 대답했고 지금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기도 맛으로, 말씀 맛으로, 즉 주님 맛으로 삽니다.”
사실도 그러하지만, 설상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과감하게 고백으로 던져 놓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 ‘믿는다’ 역시 고백으로 던져 놓고 나면 언젠가 그대로 사랑하게 되고, 믿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은총이 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수도자에게 이런 찬미의 맛, 기도 맛, 말씀 맛,
즉 주님 맛 아니곤 어디서 궁극의 맛을,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이건 수도자만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찾는 이에게 공통적일 것입니다.
나중 남는 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맛으로, 먹는 재미로, 먹는 기쁨으로 산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맛을 찾기로 하면
일 맛, 사람 만나는 맛, 술맛, 성性맛, 도박맛, 인터넷 맛 등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래서 중독입니다. 뭔가 중독되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광야 여정 살아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온갖 중독 환자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래서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요 괴물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 광야 여정도 성인, 폐인, 괴물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바로 주님 맛, 말씀 맛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배움은, 공부는 평생이요 죽어야 끝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심판의 그날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이때는 이미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그날의 심판 날은 죽음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을 대로, 자기식대로
살아 온 일방적 짝사랑의 삶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경청함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공부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래서 사랑의 침묵이요 사랑의 겸손입니다.
늘 내적 침묵 중에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재차 강조하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자명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반석 위인지, 모래 위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주님의 산상설교 중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반석 위의 인생집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과정입니다.
주님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해야 합니다.
방심으로 서서히 안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리모델링은 물론 늘 새롭게 시작하는 분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평상시는 모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반석 위의 인생집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서원 중 으뜸 서원인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주님 말씀을 실행하며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을 짓는 데 있습니다.
주님 반석 위에 세워진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요 수도자들입니다.
‘베네딕도의 평화(pax benedictina)’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정주의 수도자는 물론 정주의 신자들 모두에게 해당 됩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3-4)
어제 고백성사를 본 자매님에게 이 말씀을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렸을 때
말씀의 위로와 격려에 눈물 글썽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삼 주님의 뜻을, 말씀을 실천하는데, 즉 말씀 실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에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 그리고 훈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모래 위의 인생집, 사상누각에 대한 설명이 너무 실감이 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 어리석은 모래 위의 인생집들입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우리 사회는, 우리 가정 공동체는, 내 삶은 모래 위의 집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내적으로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기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분열로 망했으니
그대로 모래 위의 나라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사회나 가정 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태원 참사로 158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은 사건도
우리 사회가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참 허술하게 보여 집니다.
극단의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 나라도 흡사 모래 위의 집처럼 허술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선 내자신부터, 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냉철히 성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반석 위에 우리 인생집을 건축하는 보수(리모델링) 하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반석 위의 인생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시편118,25-27ㄱㄴ). 아멘.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갑작스러운 한파가 닥쳐왔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 해있는지라,
강력한 해풍까지 불어오니,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주말 피정을 앞두고 할 일은 태산인데, 바깥으로 나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가슴을 딱 펴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가자!’ 하고 나가보니, 추위 그거 별것 아니더군요.
열심히 일에 집중하니, 강풍이니 체감온도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 독하게 먹고 뛰어들면 극복 못 할 역경은 없습니다.
고통이나 시련, 추위나 더위, 열악한 환경이나 악천후, 그 어떤 도전들이 다가와도
우리 내면에 주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면 넘어서지 못할 도전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안에 든든한 반석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흐뭇한 든든한 반석 위에 우리 영혼의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엄청난 폭우나 태풍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미동도 하지 않는 반석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석 같은 신앙인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강의를 하러 가 보면 주 고객이 어머님들이십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 반, 진담 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이웃 사랑,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이웃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어야만 합니다.
매일 새벽 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신다면,
그 정성, 그 마음으로 영감님 진짓상을 차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강의 들으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현관문을 딱! 여는 순간,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의 그분, 티비 리모컨을 보물처럼 꼭 움켜쥔 채,
소파에 드러누워 졸고 계실 그분을 마주칠 텐데,
오늘은 어제와 다른 얼굴로 그를 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연민과 측은지심의 눈, 더 나아가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의 성격을 생각하면 강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편입니다. 논리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이기에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당황하곤 합니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정할 때도 ‘아무거나’라고 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걸 따라 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더러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포트워스에 갔을 때입니다.
신부님이 선물로 카키색 모자를 사주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은 모자의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걸로 사주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현지에서 유명한 클럽을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자를 원했던 신부님은
입장료를 내면서 갈 필요가 있냐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클럽에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어떤 성격의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더 현명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거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드럽고 약간은 우유부단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정든 고향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도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동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섬세하고 욱하는 성격이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욱하는 성격에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지만 소심한 성격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겁이 많아서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런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니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직관적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은 바오로 사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성격이 내 신앙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반석입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 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라고 말씀하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며,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고 극심한 풍랑이 닥치고 유혹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모략, 중상, 상실, 죽음, 가족을 잃는 일 등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는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유다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함을 선언하였고,
이에 미국은 대대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후세인 멕마흔협정(1915년)과 중동의 터키 영토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년)에 모두 위배 되는 것이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장군의 침략으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이 처참히 멸망한 뒤
유다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비참한 운명을 감수하며 언젠가는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을 기약하고
‘시오니즘’(Zionism, 팔레스타인에 유다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을 꿈꾸어 왔었다.
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1948년 UN은 영토도 없는 ‘이스라엘 건국’을 전 세계에 공포한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다인들의 ‘대 예루살렘 계획’은
일사불란하게 전쟁도 불사하며 진행된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했던가?
2천년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원주민 아랍인들이 고립되고 추방되면서
점령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유다인들의 아랍인들에 대한 태도는 실로 냉정하다.
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다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주택, 정착금, 직업) 아래
이스라엘을 향한 이민 길에 오른다.
2004년 현재 이수라엘에는 피부색이 다른 유다인계 에티오피아인들이 9만 명 이상이 정착하고 있다.
“이민의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眞髓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카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나 가르침을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가 잦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
즉 가르침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