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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을 부르심1:43~46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을 부르심1:47~51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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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을 따르게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가 율법에 기록된 그분이라고 전합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믿지 않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자,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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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을 부르심
1:43~46 _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을 전하려는 열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출신의 빌립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빌립은 즉시 같은 동네에 사는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이 가졌던 지역적 편견으로, 하찮게 여겨졌던 동네인 나사렛에서는 결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확신 가운데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을 전하며 “와서 보라.”라고 초대하면,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 더 깊은 묵상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
내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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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을 부르심
1:47~51 _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가까이 오자 예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간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에는 ‘거짓, 사기, 교활, 간교, 변절’ 등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자신을 아시느냐고 반문하자, 예수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십니다(48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유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있다’는 말로 쓰입니다. 즉 나다나엘은 경건 훈련에 힘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실하려고 애쓰는 나다나엘의 속마음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 생활을 지속하는 경건 훈련이 진실한 삶을 만듭니다.
● 더 깊은 묵상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간사함을 버리고 진실하기 위해 내가 지속해야 할 영적 훈련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를 초청해 주셔서 주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님’을 먼저 만난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초청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더 큰 일을 보이실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을 더 가까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을 만난 뒤 나다나엘에게 한 빌립의 증언과 나다나엘의 고백이다.
앞 단락에 이어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고백이 나온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를 부르시는데 빌립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말하신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난 뒤 형제 베드로에게 전했듯이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했는데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한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다나엘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와서 보라고 말한다.
선입견을 갖지 말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다.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겠다.
빌립을 따라 나아온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셨다.
나다나엘은 다른 복음서에 바돌로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다.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한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직감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무시했던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느끼는 것 이상,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야곱은 돌배게를 베고 자는 인생의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은 주인 바꾸기인데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우리도 인생의 주인, 가정과 일터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고 믿음의 눈이 열려 지금보다 더 큰 일을 보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요약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나사렛 예수가 율법에 기록된 그이라고 전합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자,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예수님을 소개한 빌립(1:43~46)
진리를 간절히 찾던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분을 따르는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참신앙을 갖게 된 빌립은 혼자 구원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처럼 진리를 구하던 나다나엘에게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다고 알립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알고 있기로 메시아는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시는데, 빌립이 소개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저항에 부딪히자, 직접 “와서 보라”라고 나다나엘에게 권합니다.
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요,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빌립이 예수님을 즉시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진리를 찾아 헤매며 구원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돌아보세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나다나엘의 회심(1:47~51)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나다나엘을 만나신 예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 주십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부터 메시아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메시아를 만나고도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만남은 의미가 없습니다. 메시아를 나의 구주,
나의 왕으로 모셔야 진정한 만남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메시아를 만난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리고 크고 비밀한 일들이 보일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계셨나요?
- 적용 질문: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 무엇을 고백하며 나아갈까요?
오늘의 기도
저의 간사한 마음과 더러운 생각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주님이 보여 주실 ‘더 큰 일’을 바라보는 믿음을 더하소서.
“다음 날(43절)”
요한과 안드레를 이끄시고,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를 만나신 주님의 행보는 멈춤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다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진리를 찾고 인생의 의미를 쫓아가다가 그 종착역에 서 계신 주님을 대면하기도 합니다.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그 위대한 부르심을 듣고 주저함 없이 그의 제자가 됩니다. 비록 자신의 일과 가정, 때론 정리되지 않는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님이 부르실 때 순종으로 나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결코 후회함이 없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나다나엘..와서 보라 (45-46절)”
안드레가 주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형을 주님께로 인도한 것처럼, 빌립은 서슴지 않고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는 또 한 명의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주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다소 회의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도마의 모습이 현실적 비관주의라고 하면, 그는 메시아의 현현에 대한 말씀의 성취가 소원하다고 여기는 이상적 비관주의자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신뢰할 만한 친구였으나, 갈릴리 가나 출신의 나다나엘(요 21:2)의 근처 동네에 살았던 “나사렛 동네의 요셉의 아들 예수(45절)”라는 자가 모세에 의해 율법에 기록되고 장차 오실 메시아로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되어 왔던 인물인 것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표정은 이전과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와서 보시오”라고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지금까지 그와 교제하며 신뢰를 쌓아왔던 나타나엘에게 기대와 울림을 주는 소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따라나서기로 결단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따르던 빌립, 여호와를 대망하며 선한 것을 구하던 나다나엘 모두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오늘 우리와 만나는 그 사람, 바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로 이끌라고 붙여준 사람입니다. 일상 가운데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가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월4일 전도
“무화과나무 아래…참 이스라엘 사람(47-48절)”
주님은 그때 자신을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함께 걷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미소로 기쁨을 선사해 주고 지나가버린 줄 알았는데, 무화과나무 아래 네가 그때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있었다는 음성처럼 들려옵니다. “우리를 아시는 분”,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지켜보고 함께 울고 웃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매일 만나고 싶어 하시고, 우리의 기도 소리를 향기롭게 흠향하시는 참 좋으신 우리의 왕이심을 날마다 기억하는 인생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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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큰 일(50절)”
나다나엘은 주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49절)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드립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한참 전에 그는 예수님을 높여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에게 했던 것처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도전시킵니다. “이것으로, 나를 본 것으로, 내가 누구인 것을 안 것으로 만족하지 마라. 이제 시작이다. 이제 네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해왔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음성 같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을 만한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평상시와 달리 매스컴에서는 그를 우상화시키고, 우러러보아야 할 존재로 여기라고 광고합니다. 마치 노벨상을 타는 순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사람과 관련된 책을 구입하는데 모든 이들이 힘과 재정을 투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원래 존재하였고,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저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주님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 넘치는 사랑을 공급해 주시고, 더 깊은 의미를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보다 ‘더 큰 일’ 항상 예비하시고,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 43~51 와 보라 전도 법
어제는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와 보라" 라고 말씀 하시더니
오늘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라고 말한다.
나도 다시 한번 "와 보라"라고 말해야 겠다.
예수님이나 빌립은 "와 보라"하면 와서 축복을 받고 신앙을 고백하고 전도도 하게 되는데....
나는 "와 보라, 같이가자, 예수 믿어라" 해도 열매가 없는 걸까? 내 삶이 사과처럼
밖은 빨갛고 속은 하얀 이중 적이이서 그런가?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가 한 동네의 사람이다.
좋은 동네다. 은혜받은 동네구나. 지난해 갈릴리 지역을 갔을때 둘러본 동네라는 생각이 난다.
베드로의 생가 옆에커다란 회당이 있었던 곳....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할 찐데. 한 동네에 산 것 만으로도 축복이 였는데
나와 친구 되었고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이 학교 다녔던 녀석들에게
다시 기회가 올때마다 같이 교회 가자고 예수님 믿어라고 꾹꾹찔러 봐야겠다.
그들이 더 큰것도 볼수 있도록
우리는 다양한 경로로 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처럼 스승의 영향으로, 베드로처럼 가족의 영향으로, 나다나엘처럼 친구의 영향으로, 또는 다른 다양한 경로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로이든 부르심의 처음 원인도 마지막 결말도 처음과 나중 되시는 주의 부르신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오직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니라"(창1:3~30) 우리를 부르신 것도 같습니다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요1:43) 그러므로 부르심의 말씀은 주를 따랐을 때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게 될지에 대한 손익계산을 해 볼 여지도 없이 거부할 틈도 없이 그냥 그대로 된 것입니다 물론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의심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이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가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 때, 의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그의 알량한 신학지식이 그리스도께 가지 못하게 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마음은 친구의 강권에 있었고, 그대로 이끌렸습니다 "와서 보라"(요1:46) 그때 주께서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물을 때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시자, 모든 의심은 걷히고 그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0~51)
이 말씀은 나다나엘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너희에게"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주의 뜻을 이룰 하늘의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와서 보라 부르신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주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 더 큰 일을 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요 1:43~51절)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삶❞
❚ 한계와 편견을 깨고 모든 사람이 참 믿음에 이르도록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증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인간적 판단을 내버려야 합니다(43~46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실 때,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43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44절)이었습니다.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빌립에게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며, 제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부르시고 계심을 시사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45절,새번역)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거절하자 빌립은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와서 보라’(46절)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했으나, 나다나엘이 가진 나사렛에 대한 편견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꺼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서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울러 빌립을 부르셔서 지속적으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자신 역시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분에 따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 상관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엡 4:1~3)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이 바탕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와서 보라...’ 말할 수 있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합니다(47~48절).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에 해당 되는 단어의 뜻은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 사용되는 ‘미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미끼로 물고기를 속이는 것처럼 사기, 교활, 기만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그가 속임수를 부리거나 기만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으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는 나다나엘의 질문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종종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을 연구하거나 가르쳤습니다. 또 율법을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희망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에 대한 암시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목자가 자기 양의 음성을 구별하고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자기 양을 아실 뿐만 아니라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비록 외적으로 나타난 것들이나 현재의 위치나 업적을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심중에 자리 잡은 것을 보시고, 나의 행동을 보십니다.
내 심령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리고 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며, 깊이 묵상을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묵상하고, 내 삶 가운데 오시기를 갈망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제자요,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제자의 증거 역시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벧전 2:1,2)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신앙의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49~51절).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는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의 통치자이시며, 왕이시라는 고백이요, 왕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하는 공개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말씀하십니다. 더 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51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되신 당신을 통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전해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그가 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진정한 왕이시며, 나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백성된 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 문을 여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무셨고,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시키셨습니다.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세상적인 편견을 깨뜨릴 때, 하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신앙의 한계와 편견이 있는 자들 앞에서 바른 믿음의 삶을 통해 ‘와서 주님을 보라’고 당당한 말할 수 있는 증인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내 삶 가운데 오시길 갈망하는 마음으로 묵상하고 기도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목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1:43~51절)...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1~14)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7-19)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4-17)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2~14)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아시고, 만나주시고,
그 영광 가운데로 초대해 주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고, 선한 것이 남아 있지 않는 이 메마른 땅에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새 생명을 부으시고 놀라운 은혜로 새롭게 하셨음을
날마다 고백하는 제자의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여호와께로 인도하는 밑가지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시고, 더 큰일을 사모하며
일상을 감사로 감당하는 일꾼과 파수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치 광야의 돌베개와 같이 의지할 것이 없는 선교사님들을 향한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하늘의 창고를 열어 풍성하게 채우시고
그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온갖 질병과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돌보심이 있게 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손길로 그 아픈 마음과 상한 심령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분열과 다툼, 분노와 미움, 여호와를 대적하는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우시고, 이 땅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끝까지 귀하게 쓰임 받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