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 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경험과 기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에 관한 모든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소유’를 요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주인이나 스승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단죄, 험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잘못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만일 하느님의 일 때문에 이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꾸 갈등을 겪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성체 앞에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 안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첫댓글 <지팡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