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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서열 경쟁을 공적해결 못하는 사회
차선으로 '내가 더 잘났다'는 병적 증상 만연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존중 불안과 이기주의
다수의 한국인들을 이기주의자가 되도록 강요한 가장 큰 원인은 고립적 생존 불안이다.(이 주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왜 이기주의자가 되었나 ①’ 참고) 그렇다면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생존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은 공동체주의자 혹은 우리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생존 불안과는 거리가 먼, 돈이 많은 부자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다.
생존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은 왜 이기주의자가 될까? 존중 불안 때문이다. 존중 불안이란 존중받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 불안이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차별하고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사람들은 존중 불안을 정말 견디기 힘들어한다. 즉 극단적으로 굶주리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생존 불안보다는 존중 불안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로 장시간 노동이나 저임금보다 고객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꼽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존중 불안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열 상승에 목을 매게 되고 그 결과 이기주의자로 전락한다.
존중 불안의 위력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는 덕선이 아빠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는 친구한테 빚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반지하방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덕선이 아빠는 어려운 이웃이 껌을 팔러 오면 그 껌을 하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통을 다 사버리는 바람에 아내에게 구박받는 사람이다. 어렵게 살면서도 ‘반지하가 어때서?’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던 그는 아들의 학교에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아들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자기 아들을 ‘어이, 반지하!’라고 부르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장면을 본 덕선이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내가 반지하를 탈출하지 못하면 아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겠구나. 계속 친구들한테 무시당하면서 살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건 후, 그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껌을 팔러 왔다. 덕선이 아빠는 예전과는 달리 껌을 하나만 사고는 괴로운 음성으로 그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는 못 팔아드려요.” 이 가슴 아픈 장면은 그가 존중 불안을 이겨내지 못해 이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90년대를 경과하면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덕선이 아빠처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고통, 무시당하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해 이기주의자의 길로 들어섰다.
15일 서울 시내 한 반지하 주택 방범창에 스티로폼으로 만든 빗물받이가 끼워져 있다. 2022.8.15.. 연합뉴스
개인 간 불평등과 개인 간 경쟁
80년대까지의 불평등에서 기본은 계급 간 불평등이다. 즉 극소수의 부자와 절대다수의 국민들 사이의 불평등이 문제였다. 반면에 한국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된 90년대 이후부터의 불평등에서 기본은 개인 간 불평등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한테 개인 간 경쟁을 강제하는 온갖 제도와 장치들을 도입했다. 승자에게는 부를 몰아주고 나머지 다수는 생존 불안에 시달리게 만드는 승자독식의 분배 방식, 노동자들을 분열하고 반목하게 만드는 비정규직 제도, 성과급과 직무평가제, 상대평가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결과 계급 간 불평등이 있는 조건에서 개인 간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불평등이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계급 간 불평등보다 개인 간 불평등을 훨씬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어느 한 재벌이 국민들한테 가난한 놈들이라고 무시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런 행동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고 화나게 만들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생기거나 밤에 잠을 못 자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재벌은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거리가 너무 먼 사람이어서 그와 일상생활을 같이하지도,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지도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심리학 연구들에 의하면 심리적 영향을 주고받는 범위는 3단계(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다. 이것은 3단계 안에 재벌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가 노예주한테, 평민이 귀족한테 무시당했던 과거의 존중 불안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낮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개인 간 불평등은 거의 견뎌내지 못한다. 한 동창생 혹은 어떤 이웃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개인 간 불평등과 인간관계 악화
계급 간 불평등의 문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즉 계급 간 불평등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같은 방식으로 표출되고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힘을 합쳐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계급 간 불평등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개인 간 불평등은 사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급 간 불평등과 크게 다르다. 개인 간 불평등은 직장동료, 이웃, 친구, 심지어는 가족 같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며 공격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계급 간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해결할 수 있지만 개인 간의 갈등이나 다툼은 개인 간 불평등을 완화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한다. 개인 간 불평등과 불화는 존중 불안을 극대화시켜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파괴하고 인간관계를 급속히 악화시킨다.
개인 간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아 인간관계가 계속 악화되면 어떻게 될까? 2020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총기 관련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살인과 자살을 합해 4만 3595명에 달한다.(미국 질병관리센터CDC 2022년 5월 10일 보고서) 이 중에서 총기를 이용한 살인 사건만 무려 1만 9350건이다. 수년 간에 걸친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미군 숫자가 5만 8천 명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오늘날의 미국은 개인 간 내전 중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 간 불평등과 그것이 초래하는 개인 간 경쟁과 불화는 불가피하게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며, 서로를 공격하고 괴롭히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 서로를 파괴한다. 인간관계에서 오직 상처와 고통만을 경험한 일부 사람들은 인간증오, 인간혐오 심리를 갖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잠재적 총기난사범이다. 얼마 전 신림동 무차별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 간 불평등 문제를 장기간 방치한 결과 한국도 미국처럼 개인 간 내전이 벌어지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개인 간 서열 경쟁
UFC 같은 개인 간 격투기 게임에서 선수들은 끊임없이 일 대 일 싸움을 하고 그 결과 개인별 순위가 매겨진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은 치열한 개인 간 격투경기를 하며 그 결과 개인 간에 서열이 매겨진다. 개인 간 서열 사회에서 개인 간 경쟁은 무엇보다 서열 경쟁이다. 격투기 게임에서 선수들은 주먹으로 상대방을 이겨야 승자가 되고 서열이 상승한다. 반면에 개인 간 서열 사회에서 개인들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승자가 되고 서열이 상승한다. 이 때문에 개인 간의 서열 경쟁은 무엇보다 돈을 둘러싼 아귀다툼으로 표출된다.
개인 간 서열 경쟁은 또한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내가 더 잘났어’ 경쟁으로 표출된다. 과거의 신분제 사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국가가 법으로 개인 간의 서열을 정해주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의 서열은 기본적으로 돈이나 사회적 지위 등에 의해 정해지지만 그것은 예전에 비하면 명확하지 않으며 유동적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서열이 높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값비싼 외제차나 명품 같은 소유물, 학력이나 외모 따위에 집착한다. 개인 간 서열 경쟁이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다수의 사람들은 서열 경쟁에서의 승리, 서열 상승을 위해 살아가는 서열동물로 전락했다.
서열 경쟁과 악성 이기주의자
서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개인 간 격투는 모두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윗서열한테 무시당하는(열등감, 자존감 손상) 동시에 자기보다 아랫서열을 무시하는(우월감, 자존감 보상) 식의, 끝없는 악순환의 사슬에 묶여 정신이 황폐화되고 있다.
개인 간 서열 경쟁이 특별히 위험한 것은 그것에 병적인 심리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개인 간 서열 경쟁 사회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힘들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말초적 쾌감(쾌감과 행복의 차이와 관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 김태형, 갈매나무 참고)이라도 느끼려고 한다. 즉 ‘내가 더 잘났다’는 쾌감, 자신의 서열이 더 높다는 사실이 제공하는 우월적 쾌감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보다 서열이 높다고 자랑하는 것은 곧 상대방을 낮은 서열로 간주하여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존엄성을 짓밟고 침해하는 반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이다. 서열 경쟁에서의 승리가 선물해주는 우월적 쾌감은 타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적인 쾌감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우월적 쾌감을 좇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조합원들이 31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신학기 총파업 대회를 열고 임금 체계 개편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3.3.31. 연합뉴스
서열 경쟁 중독과 반개혁주의
서열 경쟁에 중독된 사람들은 평등한 세상을 거부한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면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알지 못하며 그것을 맛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병적인 쾌감만이 전부이기에 평등한 세상을 거부한다. 평등한 세상은 ‘내가 더 잘났어’라는 유일한 쾌감을 누릴 수 없는 불온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서열 경쟁에 중독된 사람들은 인간을 믿지 못하며 사랑하지 못한다. 한평생 이기적인 서열 싸움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을 믿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기에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더욱이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더 나은 미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서열 경쟁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것이 초래하는 끔찍한 고통에 사로잡힐수록 개인 간의 증오나 원한을 벗어나기 힘들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개인 간 난투극을 벌이는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증오하느라 바쁘다. 잔인한 게임을 강요한 부자들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낄낄대지만, 그들은 그 부자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못한다. 개인 관계가 악화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강요한 주범에게는 분노하지 못하고 애꿎은 개인들을 향해서만 분노를 표출한다.
한국인들이 서열 경쟁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개인 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개혁의 목표를 더 많은 돈이 아니라 ‘화목’에 두어야 한다. 당면해서는 개인 간 경쟁을 강요하는 제도와 장치들을 없애야 하고 개인 간 소득 격차부터 줄여나가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개인 간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개혁을 통해 공동체를 복원하고 강화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우리는 왜 이기주의자가 되었나 ②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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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