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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제1독서 : 이사 11,1-10
제2독서 : 로마 15,4-9
복 음 : 마태 3,1-12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인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몇 년 전 글을 떠올립니다. 그때 저는 휴식을 취하고자 제주에 갔었습니다.
저는 지금 잠시 쉼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래라는 마을에서 나무들이 아주 많은 어느 집을 빌려 쉼, 휴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잠시 일을 놓고 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이지요.
제주의 어느 지인이 저에게 제대로 된 쉼을 가지라고 그 집을 빌려주었지요.
거의 아무 시설도 없는 작은 집인데, 저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한자어, 휴식(休息)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누군가의 뜻풀이를 보면서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휴식(休息)이 바로 피정과 같은 의미로구나. 하는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은 영어로 retreat라고 하지요. retreat의 원래의 의미는 후퇴이지요.
그러니 피정은 일상 삶에서 조금 후퇴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휴식이라는 한자어에는 영어 retreat, 피정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휴식(休息). 쉴 휴자에, 숨 쉴 식자입니다.
그런데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면 거기 깊은 의미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식(息)은 쉼쉴 식자인데, 바로 마음(心) 위에 자신(自)을 가만히 오려 놓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휴식(休息)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모양새를 그대로 읽으면 되네요.
휴식은 나무에 기대어, 혹은 나무 옆에 앉거나 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휴식의 식字가 쉼 쉴 식이라는 것에 어떤 느낌이 왔고,
거기 마음이 와 닿아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식(息)에서 스스로 자(自)는 원래 코를 나타내는 상형문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코로 쉼을 쉬니까 코에 생명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가만히 쉼을 쉬면 거기 휴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숨을 쉬면 숨을 쉬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사고방식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도 있는지요?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히브리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자 생명이 태동하고 사람이 되었다고 본 것이지요.
우리가 숨을 쉴 때, 스스로 존재하는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모두 자기의 이름을 찬미하라고 외칩니다.
자기만이 진짜라고 외치지만 외침은 다만 허무한 절규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대림 제 2주를 맞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대해 듣습니다.
그는 가짜가 아닌, 진짜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였습니다.
그 시대에 세례자 요한과 같은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하듯이
오늘날도 진정한 예언자, 가짜 구루가 아닌, 진짜 구루, 진정한 스승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너무나 허허로운 것은
경쟁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가짜가 아닌 진짜 구루, 영적 스승,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합니다.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저는 요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우선 저 자신부터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심이 필요하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 물론 가짜가 아닌 진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일까요? 당시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많은 제자가 그를 추종했고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기대를 걸었고 그를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요한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이 말씀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바치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자기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요한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만 약함을 지닌 인간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노라고. 그래서 제자들을 시켜 묻게 했지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메시아이십니까?”
이제 그는 알았고, 알았기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찬미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깨닫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녔던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나아가서 그의 고백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열려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깨어있는 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며 스승으로 삼고 추종했지만,
자기보다 더 앞서신 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낮출 수 있었던 그 겸손입니다.
그것은 실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쉽게 착각합니다.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자기가 정말 위대하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었을 때였지요.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분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요한에게 듣는 증언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 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 일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회개이다. 회개는 항상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인간들 가운데 정의를 다시 세우시고,
모든 피조물 사이에 평화를 다시 이루신다고 한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도 요한 세례자의 회개 외침이 나온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2.10).
결단을 내려야 하여야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보다 더 큰 권능을 가지신 어떤 분을 예고하는 것이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11-12절).
이는 심판 표현이다.
즉 요한은 구원의 소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때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알려준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곧 임하실 메시아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증인이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다.
1)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은 권위 있는 사람이다.
요한은 초대교회에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야 했던
신비스러운 인물을 요한으로 생각하였다.
“한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또 요한은 금욕 생활의 특성 때문에 엘리야와도 관련하여 생각하였다.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른 사람이었습니다.”(2열왕 1,8).
메시아 예고자로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말라 3,23).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이 요한 세례자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요한은 이러한 사명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바친 정열에 비추어 보아서,
또 자신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는 자기이지만,
주님을 알리는 겸손하고도 기쁨에 찬 그의 자세를 보아서
그는 우리를 저절로 주님께로 인도해 준다.
2) 그의 가르침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2절).
회개의 의무를 모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7-9절).
모든 것은 오직 변화되고 쇄신된 생활의 증거만이
우리가 모든 착각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3) 요한은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그런데 요한은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요한의 세례는 인간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이미 하느님 심판의 불을 댕겼으므로
그가 선포한 회개를 세례라는 표지와 죄의 고백(6절)을 통해 실현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에서 성령 은총의 선물로 성취될 것이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세례는 이 대림 시기에 계속 회개의 태도처럼 생활화해야 한다.
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전체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변화의 표지이다.
바오로 사도는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그 의미를 되찾고 사랑의 역사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셔야 한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러 사람의 몸으로 오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게 될 때 의미가 있게 될 것이다. (1요한 4,2-3 참조).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또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매 순간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언제든지 열어드릴 준비되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겠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분의 설교 및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예고 등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한때, 요한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11,7-14)가 전하는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도 훌륭한 사람’,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오해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이사야서(40,3)의 말씀을 인용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를 자리매김합니다.
오늘 복음에 요한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었던 초기 신앙공동체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요한의 입을 빌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선언하는 것도 같은 의도가 반영된 언급입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메시지가 담긴 언급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팔레스티나의 세례 운동가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다양한 세례 운동들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세례 운동은 물에 몸을 잠그거나 씻으면서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신심 운동입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그 시대 유다교 기득권층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율사들은 오로지 율법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 의례의 준수만이 오로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그 시대 세례운동가들은
유다교의 기득권층인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요한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말로 시작하여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또 그들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앞에 어떤 특권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起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출신지방, 출신가문, 출신학교, 취득한 자격증 등을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모두 기원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에 준해서 행세하는 우리들입니다.
요한은 그런 기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삶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실천을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삶을 바꾸는 회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다소 위협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하느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카 6,36)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 5,45)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호세 2ㅡ16 참조)입니다.
요한의 복장은 구약성서가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것입니다.(2열왕 1,8 참조)
요한은 음식도 많이 절제하였습니다.
“요한이 와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마태오복음서가(11,18)는 언급합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살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다교 사회에서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분의 삶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서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살지도 않았고, 특수 복장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 시대 유다교가 요구하던 단식에도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유다인들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마르 2,18 참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 지켜보고 계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벗어나서 성지순례,
혹은 철야기도를 할 때만, 우리와 함께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우리와 함게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비롭고 그들을 용서할 때,
우리 안에 그 자비와 용서의 源泉으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었고,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지금은 대림절이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苦行을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자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말합니다.
회개는 새로운 실천을 낳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시기에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외면하거나, 버렸던 이웃에게 새로운 마음과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는 분하거나 억울할 때, 자비롭지 못합니다.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시면,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 숨결 따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