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 기자
▲ 1933년 2월 21일 저녁,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우연히 처음 만난 제네바 호텔 드 루씨. 바로 앞 레만 호수를 건너는 몽블랑 다리가 보인다.(자료사진) 호텔 드 루씨(Hotel de Russie)의 레스토랑 눈 덮인 알프스 산맥 물그림자가 아름다운 레만(Leman) 호숫가에 늘어선 호텔들은 무척 붐빈다. 1933년 2월 아담한 국제도시 제네바에 지금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중이라 60여 개국 VIP와 대표단, 옵서버들과 보도진들, 관광객들까지 몰려들어 곳곳이 초만원이다. 21일 저녁, 호텔 드 루씨 (Hotel de Russie)에 두 달째 머물며 동분서주하는 이승만은 그날도 ‘일본 추방’을 위해 회의와 방송, 신문 인터뷰 등 뛰어다니느라 뒤늦게 호텔 식당에 혼자 들어갔다. 대만원... 지배인이 합석도 좋으냐고 물으며 이승만을 이끌었다.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신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지배인의 말에 두 여인이 응락한다. 4인용 식탁엔 두 백인 여인, 프랑스를 여행하고 스위스를 관광하러 막 도착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중소기업 집안 모녀였다. 이승만은 프랑스어로 “자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앉았다. 모녀는 깜짝 놀랐다. 첫 인상이 기품 있고 귀족 같은 동양 신사가 주문한 메뉴 때문이다. 조그만 소시지 하나, 시큼하게 절인 사우어크라우트 (sauerkraut)와 감자 두 개 뿐. 외모와 달리 너무나 초라한 접시를 보는 젊은 딸이 놀라움에 호기심이 겹쳤다. 중년처럼 젊어 보이는 신사는 “봉 아뻬띠”(Bon Appetit: 맛있게 드세요) 신사의 예의를 차리고 식사만 하는 것이었다. 숙녀들에게 말을 잘 거는 서양남자들과 달리 한마디 말도 없이 거뜬히 먹어치우는 모습, 눈이 마주치자 무안해진 그녀는 얼굴이 발개져 얼떨결에 입술이 열렸다. “동양이시면...어느 나라죠?” “코리아”라는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얼마전 독서클럽에서 읽은 글 중에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물어본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과 양반이 있다지요?” 이번엔 이승만이 놀랐다. 아무도 모르는 조국 코리아, 일본이 더럽고 썩은 미개국으로 악선전하여 매장된 금수강산,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그 코리아를 되찾으려 뛰고 있는데 난데없이 젊은 백인 여성이 금강산과 양반이란 말까지 묻고 있다. 얼마나 반가웠으랴. 환해진 얼굴로 대화가 시작되는데 지배인이 다가와 ‘스위스 기자가 기다린다’는 메모를 전했다. “실례합니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승만은 급하게 자리를 뜬다. 국제연맹총회 개막전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신문 인터뷰, 여론 선전술이다. 바쁘게 나가는 동양신사의 뒷모습을 왠지 서운한 듯 바라보는 33세 독신녀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도너 (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1900~1992). 뒷날 이름이 Franziska란 기록도 보이는데, 당시 이승만은 일기(5월 9일자)에 Francesca로 적었다. 꼼꼼한 그가 본인에게 확인한 표기일 것이다. 이혼남과 이혼녀의 만남, 프란체스카의 첫 결혼 상대는 자동차 레이서였는데 내연녀가 있음을 알고 금방 헤어졌다고 한다.
▲ 제네바 국제연맹 건물 앞에 선 이승만, 오른쪽 사진은 10대시절 프란체스카.ⓒ뉴데일리DB 첫 눈에 끌리다...기품 있는 신사의 뜨거운 ‘독립 열정’ 22일 아침신문을 받아본 프란체스카는 새삼 뛸 듯이 놀란다. 그리고 감동한다. '라 트리뷴 도리앙' 신문 1면 전면을 가득채운 인터뷰 기사, 어제저녁 합석했던 ‘양반의 나라’ 신사가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야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막고 세계의 평화를 확보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는 기사를 프란체스카는 한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그 신문을 오려서 봉투에 담아 자기 이름은 안 쓴 채 안내에 맡겼다. 그랬더니 ‘친절에 감사한다’는 답장이 왔다. 다음날 아침 다른 신문에 또 같은 주장을 하는 기사가 실려 또 오려서 보냈다. 이번엔 답례로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짐짓 사양하다가 만나고 말았다.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힘든 여건에서 미국 국적도 정식여권도 없이 멸망한 조국을 다시 찾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58세의 남자, 독립을 말할 때는 넘치는 정열이 젊은이 같은 열기를 뿜어내 정신없이 듣고 있는 프란체스카는 그냥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신문을 오려보낼 때부터 끌렸던 마음이 이제 독립투사의 동지처럼 가까워지는 듯 느껴졌다. 프란체스카는 저도 모르게 “이 분을 돕고 싶다”는 감정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세 딸 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나를 상업학교에 보내고 영어를 배우도록 스코트랜드 유학까지 시켰다. 그 결과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땄고 속기와 타자(타이프라이터)가 특기였다.' 프란체스카는 모국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잘했는데, 영어까지 잘하게 되었으므로 ‘외로운 독립운동가’에게 그때까지 갖춘 재능을 바쳐 돕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독립투사의 비서일’은 5월까지 석달쯤 계속된다. 어머니가 눈치 채고 말았다. 관광도 마다하고 동양신사 일을 제일인양 걱정하며 봉사하는 딸, 게다가 가난한 남자라 시간과 돈을 아낀다며 날계란에 식초를 쳐서 끼니를 대신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당장에 짐을 싸라고 성화였다. 다시는 만나지 말라며 이승만과 작별하는 것도 거부하는 어머니, 프란체스카는 그분이 좋아하는 김치 대용 ‘사우어크라우트’ 한 병을 종업원에게 ‘전해 달라’ 맡기고 떠나야 했다.
▲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이승만 인터뷰 기사. '라 트리뷴 도리앙' 신문 1면 전면에 가득찬 동양신사 독립운동가의 열변에 감동한 프란체스카는 신문을 오려 이승만에게 전한다. ‘일급 비서’ 만난 이승만, 4개국 항일연대 협력체 구상 일본을 국제연맹서 퇴출시키는데 성공한 이승만은 할 일이 많다. 3개 국어에 능하고 타자 잘 치는 무료봉사 ‘일급 비서’를 만났으니 일할 맛이 난다. 첫째, 구한말 고종이 맺은 서양 각국과의 조약문들을 국제연맹에 공식 등록해야 한다. 이승만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은 국가들에게 조약의 인증사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둘째, 국제연맹 헌장 16항에 따라 일본에 ‘금수 조치’를 취하도록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다. 셋째, 고립된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서 미국-중국-러시아와 한국이 ‘4국 항일연대’ 협력체를 구상하여 중국의 국제연맹 상주대표 후스쩌(胡世澤)와 미국 총영사 길버트(Prentiss B. Gilbert)와 협의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황무지가 된 조선, 이승만은 지정학적 비극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일본 침략의 피해당사국 중국-러시아에다 미국을 더하여 한국이 동맹을 맺고 일본의 도발을 합동방어하려는 방안을 제안한 것, 국제법 박사다운 지정학적 전략이었다. 중국과 미국 대표가 긍정적 반응을 보이자 이승만은 소련 방문에 적극적이 된다. 시간이 지나니 여비에 쪼들렸다. 소련 방문 비용도 마련해야 한다. 이승만은 독일은행에서 대출 받으려 했으나 어찌나 까다로운지 프란체스카의 보증서신을 보내 겨우 120달러를 빌렸다. 그런데 그 직후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비서가 어머니와 함께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이승만은 중국의 상주대표 후스쩌(胡世澤)에 부탁하여 소련까지 거쳐가야 할 각국주재 중국영사들의 소개장을 받았다. 5월 21일 제네바를 떠나 기차 편으로 파리에 도착한다. 얼마 후, 후스쩌로부터 러시아 친구 소개장이 오고 호놀룰루에서 여비를 보내니 러시아에 가라는 전보가 왔다. 즉시 러시아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 '국역 이승만 일기표지'.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표지ⓒ뉴데일리DB 비엔나 숲 속의 데이트...‘사랑’을 알고 결혼 약속 프란체스카는 두 달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을 받았다. 이승만이 7월 7일 밤 비엔나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었다는 편지, 프란체스카는 뛸 듯이 기뻤지만 어머니가 두렵다.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비자도 받고 프란체스카도 만나러 온 것이다. 일주일의 사랑! “그분은 만날 사람이 많아 바빴고 나도 어머니 감시 때문에 집을 나오기 쉽지않았다”는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몰래 “우리는 비엔나의 명소들과 아름답고 시적인 숲을 거닐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이승만 일기에는 이 기간,
쇤브른 궁
고색창연한 쇤브른 궁 (Schonnbrunn Palace)이며 비엔나 전시가지를 내려다보는
호텔 쉴로스
호텔 쉴로스(Schloss) 등을 찾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특히 9일 밤 “프란체스카 도너 양이 나를 데리고 헤르메스 빌라(Hermes Villa)로 갔다가 밤에 돌아왔다”고 적었다. 그가 뒷날 일기에 ‘Vienna Affair’라고 적은 ‘비엔나의 정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윽고 프란체스카는 결혼을 결심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며 결국 가난한 한국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물론 언니들도 반대한다. “나이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했다가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보내게 되다니...”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도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 했다. 7월 15일 아침, 소련을 향해 비엔나를 떠나는 이승만이 기차에 올랐다. 미리 짐을 실어준 프란체스카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기차가 커브를 돌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고 이승만은 일기에 썼다.
에르메스 빌라(Hermes Villa) 에르메스는 석상에서 유래
▲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커플이 밤을 지낸 비엔나 숲속의 에르메스 궁. 오른쪽은 이승만이 약혼선물로 준 '어머니의 참빗'(이화장 전시중).
어머니의 참빗 비엔나 데이트 중에 어느 날, 이승만이 문득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 프란체스카에게 건네주는 그것은 어머니의 참빗이다. 빗살이 작고 촘촘한 참빗은 한국 여인의 필수품,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고 쪽을 찔 때 쓴다. 이승만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 빗으로 머리를 빗겨줄 때 아파서 울기도 했다는데, 당시 목욕을 모르고 살던 한국남녀의 머리카락 속에는 이와 서캐(이의 알)가 우글거려 참빗으로 훑어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과거시험이 없어진 갑오개혁 때, 아들 낳은 20세 이승만은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를 속이고 ‘서양 귀신’ 기독교학교 배재학당에 들어간다. 선교사들에게 한글 가르치기 알바로 거금의 강사료를 받자 어머니에게 달려가 사실을 고백한다. 어머니는 울었다. 다시 어머니 허락을 받아 상투를 자르는 단발까지 할 때 조상이 죽은 듯 흐느끼던 어머니는 다음해 1896년 여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58세 지금까지 ‘어머니의 참빗’을 품고 다녔던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에게 반지 대신 ‘약혼선물‘로 어머니의 유품 참빗을 준 것이었다. 다이어몬드보다 더 값진 마음을 바친 프로포즈! “하와이 우리 아이들 이와 서캐도 많이 잡아주었다오” 사탕수수 농장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이 교육은커녕 자녀들까지 노동에 부리는 현장을 찾아다닌 이승만, 어린 소년소녀들을 데려다가 씻어주고 재워주며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승만의 표정은 청년 같았다고 프란체스카는 말한다. 6.25전쟁 때 임시수도 부산의 대통령 관저에서도 전쟁고아들을 데려다가 머리를 빗겨주던 이승만, 하야 후 하와이 병상에서 어머니의 참빗을 꺼내 만지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이승만이 별세한 뒤 프란체스카는 남편처럼 고이 간직하였다가 며느리 조혜자(양자 이인수 부인)에게 물려주었다. 그 참빗은 지금도 이화장에 가면 유물전시품 속에서 볼 수 있다. 여기까지 내용은 (프란체스카 지음 '이승만대통령의 건강' 조혜자 옮김, 도서출판 촛불, 2007)과 '국역 이승만 일기'에서 발췌 요약 부연 설명함.
▲ 200달러 짜리 중고차 윌리스를 몰고 미국 대륙을 횡단한 이승만. 모스크바의 하룻밤, 소련은 일본 압력에 비자 취소 7월 19일 오전 9시 30분 모스크바 도착. 20일 밤 11시 모스크바 출발. 이승만이 모스크바에 머문 시간은 고작 38시간이다. 호텔 방에 소련 외무성 직원이 찾아와서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께서 속히 러시아를 떠날 것을 통보하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나는 귀국의 외무성에 전해야 할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왔소. 비엔나의 귀국 대사는 나의 이 편지를 외무성에 직접 제출하라 하였고, 비자를 연장해주어 한 달간 머물 것이오.” “잘 알고 있습니다. 비자 발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수였습니다. 지금은 외무성이 선생을 떠나라고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예상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을 알고 허허 웃었다. “누가 뒤에 개입했는지 알 것 같소. 이 편지나 전해주시오.” 그 편지에는 이승만의 구상 ‘4국 항일연대’에 관한 설명과 제안이 들어있었다. 범인은 일본이었다. 이승만을 추적하던 일본당국이 이승만이 기차를 타자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다. 왜? 러시아와 동청철도(東淸鐵道) 매입을 협상하러 일본철도위원회 협상단이 지금 모스크바에 와있는데 중국이 반대하는 판에 이승만까지 나타나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만주국을 세운 일본에 동청철도를 매각하여 무력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이 철도는 청일전쟁때 일본이 가져간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개입, 중국에 돌려주고 그 대가로 만주를 가로지르는 철도 부설권을 얻어 러시아가 건설한 것, 다렌에서 하얼빈을 지나 러시아 국경인근에 이르는 노선이다. 밤차로 모스크바를 떠난 이승만은 폴란드로 향했다. 모스크바 거리에서는 택시를 볼 수 없었고 낡아 빠진 마차들 뿐, 굶주려 쓰러진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들었다. 가난한 공산주의 왕국, 농촌의 초가지붕들은 이승만이 갈파한 공산독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로마로 가는 기차에서 도너 양을 만났다고 한다. 우연인지 약속인지는 알 수 없다. 8월 2일부터 나흘간 로마 여행, 6일자 일기엔 “도너 양은 나와 같은 기차로 출발하여 플로렌스로 떠났고 나는 제노아로 갔다”고만 써놓았다. 둘이 함께 보냈다는 구절은 없다.
▲ 지난해 처음 발굴한 이승만-프란체스카 결혼사진. 오른쪽은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환영레이를 목에 건 신혼부부ⓒ뉴데일리DB 뉴욕서 결혼...하와이에선 “서양부인 데려오지 마시오” “비엔나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화니(Fanny)가 비자를 받아 9월 28일 유로파(S.S.Europa)호로 출발할 것” 이라고 한다.('국역 이승만 일기', 1934.9.26.) 이승만 일기엔 이날부터 프란체스카를 ‘화니’라 부르고 있다. 무국적자 이승만은 약혼자를 미국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부탁해 보았지만 결국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가 미영사관에서 ‘이민 비자’를 받아 뉴욕에 오는 것이다. 10월 4일 화니는 배에서 내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이승만이 교통체증 때문에 늦었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맞은 편 몽클레어(Montclair) 호텔에 들었다.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이렇게 번거롭고 여행하기 힘드실 텐데 미국 국적을 잠시라도 얻으면 안 될까요?" 이승만이 대답했다. "한국이 머지않아 독립될 것이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프란체스카는 여권 때문에 힘든 일을 10년 더 기꺼이 해냈다. 10월 6일 뉴욕 시청에서 결혼허가증을 발급 받았다. 그 다음날 메이시(Macy) 백화점에 가서 이승만은 반지 하나를 사고 화니는 결혼식용 베일을 샀다. 10월 8일 오전 6시 30분, 몽클레어 호텔 홀에서 결혼식. 주례는 미국 목사와 윤병구 목사, 들러리는 이승만의 미국인 지인들과 그 부인들이 섰다. 식당으로 옮겨 아침 식사겸 피로연, 호텔 밴드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다. 문제가 생겼다. 하와이로부터 축하전보를 받았는데 “나 혼자 오라고 함...” 이틀 뒤에 온 전보에도 “각하 혼자만 오시라”는 단서가 붙었다. 이승만 부부는 친지들을 찾아 신혼인사를 다니면서 고민했다. 프란체스카는 그 전보 생각만 나면 흐느끼는 것이었다.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인은 한국인끼리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심복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는 중고 자동차를 사서 직접 운전하여 미 대륙 횡단 길에 나선다. 59세 신랑과 34세 신부의 신혼여행, 국적도 나이도 잊은 독립운동 부부동지의 새 인생 출발은 스피드광 이승만의 과속운전 때문에 프란체스카는 몇 번이고 팔에 매달려야 했다. 장장 두 달 동안 찾아다닌 미주 전역의 ‘독립운동 친구’들은 한인은 물론 미국인도 많다. 프란체스카에게 그 여행은 남편 이승만과 독립운동과 한국에 대하여 새롭게 눈을 뜨는 귀한 시간이었다.
“미주의 우리 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았다. 그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는 남편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자금을 모아 보내는 동포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남편이 왜 값싼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 골라 타는지,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1석3조의 여행, 즉 백인 중산층 숙녀를 데리고 다니며 ‘한국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현장실습을 시키고 동지애를 키워주는 교육자였다.”
▲ 결혼반지, 진주가 박힌 위 반지는 이승만이 산 것, 아래 다이어몬드가 박힌 반지는 프란체스카가 산 것. 오른쪽 장도리와 드라이버는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것.(자료사진) 하와이 최대의 한인 결혼잔치... “김노디는 어디로 가나?” 태평양 물결을 가르며 하와이로 달려가는 말롤로 (S.S.Malolo) 호의 3등 선실, 호놀루루가 다가오자 초조해 보이는 아내 화니를 이승만이 다독인다. “이번엔 우리를 환영해줄 동지가 없겠지만 다음엔 달라질 것이니 힘을 내시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935년 1월 25일, 호놀룰루 항구에는 역사상 최다의 한인들이 운집하였다. 무려 3천여 명의 인파, 태극기와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함성에 프란체스카는 또 한번 울었다. 당시 하와이 한인 인구가 6천여 명 남짓, 그 절반이 몰려나왔다. 한인동지회 회원들이 독려한 결과, 게다가 자신들의 높은 지도자가 선택한 백인미녀를 보려는 사람들도 많을 터이다. 다음날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린 결혼잔치에도 9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승만 부부는 다시 한인기독학원을 맡아 부부동체의 새로운 운동에 돌입한다. 이승만이 교장, 프란체스카는 기숙사 사감이다. 신혼살림은 학원 기숙사에 차렸다. 결혼생활비도 이제 동포들의 성금에 의지해야 한다. 이승만이 없는 동안 학원을 도맡아 1인3역으로 일했던 김노디는 물러났다. 여기서 동포사회에는 새로운 흥미꺼리 ‘김노디의 행방’을 두고 설왕설래한다. 진작부터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가 결혼한다면 김노디가 틀림없을 것’이라 쑥덕거렸는데, 뜻밖에 백인 부인을 데려왔으니 김노디 거취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오벌린 대학 졸업무렵의 김노디(왼쪽)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노디.(이승만 앨범) 김노디는 누구인가 지난 2021년 9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김노디 애국지사에게 추서하는 독립유공자 훈장을 김노디의 딸 위니플레드 리 (Winifled Lee, 한국이름 이보경, 95세)에게 수여하고 치하하였다. 늦어도 너무 늦은 보훈이 아닐 수 없다. 김노디는 오벌린 대학졸업 후 1927년 사업가 이병원과 결혼하여 딸 이보경을 낳고 나서 이혼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이승만 반대파는 이 딸이 이승만과 김노디 소생이라 의심하고 소문을 냈다.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호놀루루에 돌아왔을 때 김노디의 딸은 8세였다. 김노디(본명 김혜숙)는 1905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했는데,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직접 모아 공부시키던 이승만이 기숙사에 데려다가 교육시킨 모범생이었다. 김혜숙은 이승만의 장학정책에 따라 오하이오주 우스터 고등학교로 유학가고 오벌린 대학까지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승만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김혜숙은 신세대 독립운동가로 변신, 이승만이 벌이는 모든 사업과 행사에 적극 참여한 청년지도자가 되었다. 3.1운동때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 연설로 언론의 주목도 받았고, 한인기독학원, 동지회, 애국부인구제회 등을 이끌며 미국식이름 Nodie로 개명, 한인친우회 확장에 나서 미국인 회원을 2만명 넘게 늘리고 자금을 모으는데 공을 세운다. 앞에서 본대로 학생 고국방문단을 인솔하여 본국에 와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노디는 이승만의 결혼 직후 상처한 동포 사업가 손승운(孫承雲)과 결혼한다. 이를 두고도 박용만파 등 반대파는 “실망해서 아무나 하고 결혼했다”는 둥 악담을 만들어 퍼트린다. 그뿐인가. 김노디의 본토유학시절 어머니를 만나러 하와이로 가던 중 미주를 순방하는 이승만을 우연히 만나 같은 기차를 탄 것을 누군가가 ‘만법(Mann Act)’ 위반으로 밀고하여 두 사람이 미국 이민국의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 ‘만법’은 매춘 등 목적으로 여성을 데려가는 등 성범죄 행위를 단속하는 법인데, 이민국 조사결과 ‘결백’으로 판명된다. 조사관은 어느 일본인이 무고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것도 반대파는 얼씨구나 나서서 이승만 모함에 활용하였다. 심지어, 이 사건이 백년도 지난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가 역사다큐 ‘백년전쟁’이란 명목으로 제작 방영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거짓 밀고자의 시각 그대로 가짜 영상까지 조작하여 만든 다큐는 다큐가 아니라 ‘이승만 죽이기’ 왜곡 선전물로 학계의 판정이 났다. 이런 구설과 조작극을 일거에 씻어줄 ‘놀라운 자료’가 2022년 발견되었다. 김노디가 사실은 ‘이승만의 수양딸’이었음을 밝혀주는 110년전의 손글씨 문서 한장!
▲ 작년에 처음 발견된 문서, 김노디 아버지 김윤종이 이승만 교장에게 딸을 양녀로 맡긴다고 명기 날인한 입적 계약서.ⓒ뉴데일리DB 놀라운 발견! 김노디는 아버지가 이승만에게 맡긴 ‘양녀’ 다음은 김노디 아버지가 한인학원 교장 이승만에게 써준 딸의 '양녀 입적 계약서'이다. 「나의 13세 된 여식 김또라(노디)를 이박사 승만 씨에게 수양녀로 주며 나와 나의 부인 김윤덕이 그 부모 된 권한과 책임을 영구히 넘겨 맡기며 이를 위하여 자에 성문으로 증명함」 1913년 6월 25일 호놀룰루 하와이 계약인 김윤종 (날인) 증인 한일성 이 입적계약서는 하와이로 이민 왔던 아버지 김윤종(1852~1936) 부부가 8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신앙 깊은 이승만 박사를 믿고 어린 딸이라도 제대로 교육시켜 달라면서 맡긴 것이라 전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노디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딸 위니플레드 리가 어머니 유품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다큐 영화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제작하던 하와이 이민연구 학자 이덕희가 조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 딸도 이 계약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결혼식 사진도 함께 찾아냈다. 이승만은 뉴욕 결혼식후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내지 않았고 유일한 가족인 양녀 김노디에게만 먼저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부녀는 입양사실에 침묵했을까. 신앙 깊은 양아버지와 양딸은 정치적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이 하도 많은지라 뜬소문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1948년 건국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김노디를 외자구매청장(1953~1955)에 임명하여 김노디의 미국 인맥과 성실함을 활용, 휴전후 미국자금을 유치 관리하고 달러 부정부패를 감시하게 하였다. 김노디는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대한부인회 간사, 인하대학교 이사 등으로 활약한 뒤 1958년 하와이로 귀환, 1972년 세상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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