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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이사 35,1-10
복 음 :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
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지 안에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가을이면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익어 떨어지면 검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썩으면서도 방향제로 써도 충분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이런 모과를 소재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모과’라는 시입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나이 듦이 어쩌면 썩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내게는 썩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낼까요?
향기로움일까요? 아니면 악취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풍겨야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향기는 믿음, 사랑, 희망을 통해 세상 끝까지 뻗어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향기를 가리는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서 예수님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병자를 내린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려고 방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향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악취로 가리고 있습니다.
좋은 향기는 어떤 악취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좋음이 진하면 진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병자를 당당하게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세상의 어떤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한 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달라스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예전에 2달 남짓 지냈기 때문에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홍보가 목적이기도 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온 것을 알고 제게 연락을 주신 분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만남 중에 한 형제님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항공대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 자전거를 타다 큰 사고를 당했고,
군대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조종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넘어와서 항공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 ‘스쿨버스’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딸이 아빠를 응원하면서 비행기를 운전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안전하게 등교시키는 스쿨버스 운전사가 되는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꿈’이 있었습니다. 군인이 되거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사촌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 선생님은 만물박사처럼 보였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성당의 친구 중에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영향이 컸습니다.
31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군복은 아니지만 성직자복과 제의를 입으면서 영적인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미국 대륙횡단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참으로 멋진 꿈입니다.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꿈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없애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자비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과 만남의 치유와 찬양
-믿음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세계 장애인의 날을 아시나요?
엊그제 12월 3일은 제30차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고 교황님도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두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상처받은 인간성의 부분이다.”
잘 들여다보면 인간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 뿐 장애인입니다.
“행복은 혼자 먹을 수 없는 빵이다”,
행복 역시 혼자가 아닌 빵처럼 더불어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의 행복입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나눌 때 비로소 행복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슬픈 인생이요 연민의 대상인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모두가 치유 받아야 할 장애인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 강론 서두 제목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바로 만나야 할 궁극의 분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 역시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치유 받고 더불어 많은 은총의 선물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르고,
수도원을, 미사를 치유가 일어나는 힐링 센타라 부릅니다.
치유보다는 힐링이라는 영어 단어가 많이 회자 됩니다.
왜 힐링의 천주교를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힐링을 찾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어제 나눴던 행복기도 중 한 대목이 다시 생각납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대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용기의 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게 말하여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위로와 격려의 주님이시며 이런 주님을 닮아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또한 기쁨의 샘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입니다.
이사야서 서두가 주님을 만날 때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상징하는바,
힘든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상징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고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처럼 아름답고 고무적인 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야말로 대 신비가인 영성가요 하느님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온전한 치유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치유과정이 은혜롭습니다.
새삼 주님과 만남의 치유에 믿음이 궁극의 답임을,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이 치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중풍병자 동료를 치유시키려는 도반 형제들의 지극 정성의 사랑과 믿음이 놀랍습니다.
궁즉통, 간절한 믿음에 눈이 열린 동료들은 군중 때문에 주님을 뵈올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이들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선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이 치유되는 중풍병자입니다.
몸과 마음은, 육신과 영혼은 하나입니다.
온갖 죄들은 육신을 통해 병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래서 영육의 건강에 고백성사가 우선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치유 받은 중풍 병자를 생각하면
미사 시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전 주례 사제의 다음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와 하나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부족해도 교회의 믿음은 부족함이 없이 강합니다.
교회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내릴 때 좋은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임을
제1독서의 이사야가 감동 깊고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를 구원하신다.
그 때에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대로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의 치유를 통해 실현되고
이 은총의 대림시기,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요, 무지의 병으로부터의 치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영혼이 치유된 중풍 병자는
이어 육신의 치유를 통해 전인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치유 받은 중풍 병자의 찬양의 반응도 주목됩니다.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부활하여 피스카의 기쁨을 살게 된 중풍병자요,
평생 잊지 못할 치유와 찬양의 추억이 되었을 것이며 선종의 죽음도 맞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찬양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 주님과의 만남이 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 주님과의 만남의 여정, 치유의 여정, 찬양의 여정임을 봅니다.
치유의 기적을 목격한 이들도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느님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요, 믿음과 찬양은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우리 믿음을 날로 북돋웁니다.
새삼 찬양과 감사의 공동 전례 은총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이 치유 받은 중풍 병자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그대로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은 이들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만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어 우리 모두 기쁨과 찬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알렐루야 환호송이 바로 대림시기 은총을 상징합니다.
“보라, 세상의 주인이신 임금님이 오시어,
사로잡힌 우리의 멍에를 몸소 벗겨 주시리라.” 아멘.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 입었습니다.
이토록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마태 5,26)
하오니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십자가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들것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그 상처를 더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본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과 희생으로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천사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 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를 내적으로 먼저 치유하신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한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신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가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박상대 마르코 신부
대림시기 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복음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하지만 딱히 어떤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만 선택된 부분이
章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독 된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중 제10주간부터 34주간 사이에
봉독 된 적이 없는 대목을 택한 경우가 많다.
굳이 대림 시기에 봉독 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병자와 소경치유, 죄사함 등의 기적과 억눌린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서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킴으로써
믿음이 하느님 나라의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여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 이상으로
메시아의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림 시기의 복음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항상 독서에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봉독되는 독서가 이사야 예언서에서 발췌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사야 예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집필된 세 권의 예언서가 한데 묶여있다.
제1이사야(1-39장)는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자요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충실할 때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의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어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임마누엘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2이사야(40-55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BC 587-538)를 배경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 해방과 자유를 제시한다.
특히 유명한 네 번의 “아훼의 종의 노래”를 통하여
야훼의 종이 바로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사할 고난과 죽음을 불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혀준다.
이 또한 신약의 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된 모습이다.
제3이사야(56-66장)는 이스라엘이 귀양살이를 끝내고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됨을 예언하면서 이로써 옛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선언한다.
이 또한 고난과 죽음을 불사한 신약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와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이사 35,1-10)를 주의 깊게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독서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말이 아니라 實在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른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환하게 트여, 그 길이 ‘거룩한 길’이라 불린다고 했다.
자, 이제 복음을 보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복음 안에 성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세상 안에 계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시는데,
중풍병자 하나 고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거룩한 길’을 세우는 데 있다.
거룩한 길이란 곧 ‘죄의용서’를 의미한다.
예수의 반대자들에게는 중풍병자가 단지 치유되어 ‘일어나 걸어가는 것’(24절)에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의 표징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믿음의 태도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비록 그 믿음이 주위의 도움을 받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병을 치유 받았음은 물론, 그 안에 죄사함을 통한
‘정결하고 거룩한 길’을 닦고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