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노회의 역사
목포노회 선교역사는 호남과 제주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이미 목포지방 기독교 100년사와 목포노회 희년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었기에 여기서는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중요한 부분만 정리하려고 한다
1. 호남선교와 미국남장로회 목포 선교사 시대 (1894-1978)
호남선교는 미국 남장로교 7인 선교사가 1892년 10월 18일 내한함으로 한국선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목포지방의 선교는 1894년 4월 18일 이눌서와 유대모선교사가 답사차 목포로 와서 목포장터에서 복음을 증거한 일로 시작되었다.
전남의 첫 교회는 목포교회로 1897년 3월 5일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 변창연이 설립함으로 이어진 배유지 선교사의 선교활동으로 1898년 9월 11일에 목포선교부를 개설 하였고 동년 11월에는 오원 선교사에 의해 목포 진료소가 개설 되었다.
1902년 정명학교(스트레퍼)와 1903년 영흥학교(배유지)가 세워졌으며 목포 선교부를 거쳐간 선교사가 84명이나 되며 전남 지역에 이들로 통해 선교가 시작 되었다. 선교사 가운데 4명이나 선교사역에 힘쓰다가 목포 땅에서 죽음을 만나게 되는 슬픔도 있었다.
목포노회에서 최후까지 선교활동을 한 이는 인도아 선교사로 전남 선교의 선구자인 배유지 선교사로 시작된 선교활동이 그의 외손자인 인도아 선교사로 선교활동이 마감하게 된다.
2. 목포노회 창립과 수난기 (1947-1952)
전라노회가 1911년 10월 15일에 조직하여 교세가 확장되자 1917년 9월 17일에 전라노회에서 전남노회가 목포에서 창립노회가 조직되었고 전북노회는 동년 10월 10일에 조직되었으니 목포는 전남노회의 산실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전남노회는 목포시찰, 제주시찰, 광주시찰, 순천시찰을 두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22년 10월 3일에 순천노회가, 1930년 11월14일에 제주노회가 분립하게 되었다.
그후 전남노회의 방대한 지역으로 목포노회를 분립할 수밖에 없었기에 1947년
5월 13일 목포부 양동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포노회가 역사적으로 창립하였다.
전남노회 제 36회 회의록을 보더라도 노회원수가 전남노회 지방보다 많았으니 전남노회 지역엔 목사13명 장로총대 11명인 반면 목포지역엔 목사 21명 장로 총대가 21명이나 되었다.
광주에서 경영하던 고등성경학원 역시 광주에서는 경영하기 곤란한 상황이었으니 목포지방으로 인계하여 노회직영으로 경영하기로 하매 1947년 2월 20일에 목포 고등성경학교로 개교된 이래 1990년까지 44년간 제 41회로 560명의 졸업자를 배출하여 평신도와 교역자 양성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48년 7월 15일에는 전남노회에서 재단분립까지 하여 재단 보호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1957년 3월 11일부로 재단법인 서부유지재단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6.25 사변의 돌발로 많은 교회와 교역자, 교인들이 당한 수난과 피해상황은 너무나 심각한 형편이었으며 많은 순교자 (목사 4 , 장로 5, 전도사 9, 평신도 173, 교회소실15, 가옥파괴, 재산몰수)와 재산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선교사 시대로부터 시작된 순교의 피는 일제하에서도 많은 수난과 피흘림이 있었으니 목포지방 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의 역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 교파 분열의 시대 (1953-1959)
해방을 맞이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을 주축으로 1951년 5월에 총회에서 고신파가 이탈해 나갔다.
기장과의 분열은 다른 지역보다 엄청난 손실과 심각한 피해를 입은 노회가 되었다.
합법적인 총회 결의를 불복하고 한신 졸업생에게 목사 안수와 강도사 인허를 하며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는 김재준씨를 옹호 지지하며 김세열 일파의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는 이남규, 조승제 목사측과 총회를 지지하는 김점래, 송암석목사 등이 그 부당성과 불법적인 반 총회적인 이탈측의 불의를 계속 볼 수 없어서 1953년 7월 21일에 목포노회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임원 불신임 안을 제출하고 1953년 8월 6일에 목포노회 계승노회(제7회)를 갖고 총회와 미국남장로교선교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총회 수습 비상대책위원회의 지시대로 동년 10월 7일에는 노회를 재 조직하게 되었다.
합동측 이탈은 1959년 9월 24일 대전에서 모인 제 44회 총회에서 합동측이 이탈 분열되고 말았다. 남산신학교 대지 구입비 3천만환 사건과 WCC와 ICCC와 한 계통인 NAE측과의 적대관계로 분열되었는데 본 노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8개 항의 제안을 적극 지지하면서 75년의 전통을 지켜 온 통합 총회만이 법통 총회로 가장 신앙적이고 보수 전통 총회인 것을 확인하고 1960년 3월 17일 양동제일교회에서 모인 제 17회3차 임시노회에서 이귀동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임하고 통합총회 지지성명서를 채택하였다.
분열 시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와 긴밀한 유대와 협력관계를 갖고 끈질긴 노력과 강한 집념으로 존폐 위기와 막강한 세력 속에서도 목포노회의 모든 교회를 지켜오게 되었다.
4 안정과 부흥의 시대 (1960-1928)
노회창립 후 6.25사변의수난과 교단분열로 어려움이 많은 노회였지만 노회원들은 총력을 기울여 기존교회 지키기 운동과 교회 개척에 힘을 쏟았다.
남은 교회 모두가 미자립교회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경제적인 지원으로 교회를 유지해 나갈수 있었다. 열악해진 노회발전과 교회부흥에 중점을 두고 적극적인 전도사업에 주력하게 되었으니 평신도 연합회(1964.5.7)를 조직하여 평신도 신앙교육과 전도에 열심하게 하였으며 노회적으로 5개년(1969-1974) 자립계획을 위한 전도사업 및 후원회를 조직하여 전도수련회와 복음화 대회를 갖게 하였으며 협동위원회 선교자금 5만불로 선교 기념관을 세워 수입금은 전도비로 사용토록 하고 기독교교 회관을 건립(준공1976.11.23)한 일이다. 뿐만아니라 효과적인 행정과 전도와 교회성장을 위하여 군 행정단위로 시찰 구역을 6개 시찰로 재 조정하였으며 본 노회 안에 무교회 군청 소재지에 교회를 세워 교세 확장과 지교회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쓰기도 하였으니
1960년대 24교회를 개척하여 82교회가 되었고 1970년대는 39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80년대는 무려 52교회나 개척을 하여 173교회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는 1997년 10월 현재 29교회가 개척되어 202교회가 되었다.
5. 선교100년과 희년노회(1990-1997.9)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975년에 분실한 초기 노회록을 찾기 위해 제 3차로 노회사 편찬 위원회(1991.4)를 조직하고 2년 여의 꾸준한 노력(김성철) 끝에 오랜 숙원인 노회록을 18년 만에 찾아 1947년 5월 13일 창립노회로부터 제 40회 회의록 제 1집을 발간하여 감사예배를 드린 동기가 되어 목포지방 기독교 100년과 목포노회 창립 50주년 희년노회가 다가 옴을 발견하게 되자 목포지방 기독교 100년사 및 목포노회 창립 50년사를 발간하여 희년 기념대회를 열면서 선교 100년과 희년노회의 전통과 역사의 뿌리를 후대에 남겨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집필자(김수진목사)와 편집위원(윤여권, 정장복, 김성철목사)을 선출하여 자료수집과 집필에 착수하게 되었고 목포(전남)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94년 4월 18일을 기념하기 위해 동년 4월 20일 제 70회 노회 기간에 목포선교에 공을 세운 서의필선교사를 강사로 모시고 기념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목포 기독교 100년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미국 남장로교회 초기 목포선교부 연례보고서(1903-1910)를 번역 발간하였으며 노회록 제 2차(제41회-제 60회)도 발간하였다.
1986년 10월 노회에서는 노회보 창간호 발행과 목포지방 기독교100년 및 목포노회 창립 50주년 희년 행사 특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기념대회를 조직하여 준비 기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목포지방 기독교 100년사 및 목포노회 희년사와 미국 남장로교 목포 선교부 보고서(1895-1911) 2집을 함께 발간하여 1997년 5월 13일로 14일까지 각종 기념대회를 전 노회 교회와 총회장과 호남지역 노회들과 본 노회 출신들을 모시고 성대히 거행한 일이다.
그동안 목포노회는 장족의 발전과 부흥을 가져왔고 전국 노회 중 가장 광활한 자역으로 1시 9개군(목포시, 신안, 무안, 함평, 해남, 진도, 강진, 영암, 장흥, 완도군)과 202교회와 목사 131명 장로187명 전도사 95명 교인35,769명으로 더욱 발전과 부흥을 위해서는 분립을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알아 제 76회 4월 노회에서 분립을 가결하고 총회에 헌의 한 바 1997년 9월 25일 제 82회 총회에서 분립을 허락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