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된 조선의 마지막 군대인 대한제국군은
근대군대의 모습을 갖추었는지 궁금하다.
해산 당시에 대한제국군의 병력 규모는 중앙군과 지방군대를 합쳐도 총
1개사단 병력보다도 적었다고 한다.
대략 9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육군이었고, 해군도 있었는지
미지수였다.. 일본으로 부터 발주한 군함 2척이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 운용하는 대상도 못되고, 항구에서 방치해놓은 상태였다..
기관총, 대포, 여러 근대무기를 수입해서 운용해서 쓰고 있어 어느
정도는 전투력을 유지했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에서 쓰여진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미지수.
탄약이나 소총등 기본 장비들은 대한제국에서 자체 생산도 안되고,
해외에서 100% 수입하는 상황이었고, 그것도 일본에서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1903년 당시가 아마도 대한제국군의 최전성기였을 것이다.
병력수는 대략 18000 정도 되었고, 그 절반 정도가 수도 서울과 그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상황이라서 당시 병력들이 국민 안보에 치중한 것보다는 왕실의
보호에 적극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1882년의 구식군대에 의해서 1884년 갑신정변때는 청나라 1500명의 병력에 의해서
1894년에는 2개중대의 일본군에 의해서 궁궐이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은 고종으로써는
국민들의 생명과 국방력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군대를 증강시켰다고
볼 수있다.
그 결과, 함경도와 평안도에 소수의 병력들이 주둔하여 남진하는 러시아와
청국정세가 어지러운 상황에 효과적인 방어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위화단의 운동이 일어났을때, 위화단의 패전 무리들이 만주로 도망와서
조선과 만주 국경지대에서 또는 간도지방에서 조선 양민들을 습격해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소수의 병력으로 국경을 수비하던 대한제국군의 병력으로는 게릴라식으로
국경을 넘어 약탈을 해오는 의화단의 잔적들을 방어하는데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대규모로 들어오는 의화단의 잔적들에게 소수의 구한국군은
더욱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병력을 국경에 증강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 포수들을 고용하여 이들을 하여금 민병대로 만들어 정규군 대신
국경을 방어하게 하는 소극적 대응을 했다.
병력 대부분은 모병제가 아닌 용병제로 뽑은 상황이라서 군사의 질도 주변의
일본과 서양열강의 병사들보다도 떨어졌다.
장교들도 인맥을 통해 뽑아서 자체적으로 세운 무관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을 시켰지만,
무관학교의 교육은 그리 질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장교의 질도 형편없었다.
정부의 지원하에 1890년대부터 유학생들이 일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배우고
돌아와서 대한제국군에 배치됐지만, 그 인원은 소수라서 대한제국군의 기량 향상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와의 간도 분쟁때 한국정부와 청나라 정부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실제로 간도 현장에서는 한국과 청국 사이에 군사적인 무력충돌이 10차례나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간도에 파견된 구한국 관리는 청나라의 위협으로 부터 한국인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구한국군의 간도 파견을 적극 주장했지만, 당시의 여러 여건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충돌은 정규군이 아닌 현지 주민들에서 뽑은 민병대와 청국 사람들 또는
청국군대들이었다.
물론 구한국 정규군이 청군이 조선인 민간인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로 들어가
청국군대를 공격한 일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상황이었다.
대한제국군의 지방 소속인 진위대는 여러 차례 의병 활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최익현 선생은 전라도에서 봉기를 하여 의병활동을 했지만,
의병들을 진압하러 온 진위대 소속의 병사들을한테 차마 총부리를 겨눌수가 없어
항복한 이야기는 유명했다.
대한제국군은 1904년 한일 신협약이 맺은 이래로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적으로 돌입한
이후부터 점차 감소하여 마침내는 1907년 당시에는 90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축소된 상황에서 불명예스럽게 강제로 해산당했다. 한 나라의 군대가
이렇게 빨리 쉽게 와해당하는 것은 정말로 이해가 안된다.
물론 중앙군인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거부를 하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여
의병항쟁에 불을 지폈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이래로 이렇게 가장 무기력한 군대는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해산되지 않았던 황실 수호 시위대 1개 대대도 일제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했지만, 1929년인가,언제인가는 모르지만, 결국 이들도 총독부에 의해서
재정상의 이유로 강제 해산당했다. 해산 당시에 이들은 1개중대인가 2개중대정도의 병력이었
고, 몰락한 왕가의 보호 역할을 하는 보디가드의 수준도 안되는 대중한테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였다. 물론 1907년의 군대해산이 진정한 조선군대의 끝이라 생각된다.
왜 이렇게 대한제국군이 금방 와해되었을까?
첫째는 일본의 간섭으로 인해서 급속한 병력감축을 들겠다.
일본은 대한제국군이 비록 허약한 군대이지만, 근대무기를 소장하고,
근대전술로 훈련하는 이들이 조선 즉 구한국을 먹는데 커다란 장애요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쉽게 와해 당했지만, 일부 군인들이 의병항쟁에
끼어들어 1905년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이 1907년에 이르러 최전성기로 이끌었다는
점을 둘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일제는 구한국군에 대해서
군대 실효성을 문제를 삼아 나중에 징병제로 돌입하기 위해서 잠시 재정비의 이유로
군대해산을 간행한 것로 본다.
둘째는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서다.
재정상의 이유로 대한제국군을 유지하는데 , 크게 벅찼다.
당시 재정의 절반까지 국방비로 나가는 상황이 되니 강력한 군대를 육성시킬 돈이
없었다. 또한 1900년대에 들어와 각지에서 국민개병제로 군인들을 뽑자는 주장이
여러차례 돌자, 고종황제는 의화단 사건과 동학농민운동의 예를 들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다가 결국에는 징병제의 실효성을 인정하여 징병제로 선택했지만,
또한 재정상의 이유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재정적인 이유로 군대 증강에 한계가 있었던 관계로
조선의 마지막 군대인 대한제국군은 일본에 의해서 쉽게 와해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첫댓글재정상의 문제는 단지 구실로만 알고있었는데..아니었군요..제가 어디서 줏어들었는지는 모르지만..^^;;대한제국 육군은 1902년 현재 시위대2개연대, 친위대2개연대였으며, 1900년에 지방의 진위대와 지방대가 진위대로 통합되었고, 1900년 현재 진위대 총병력은 6개 연대였다고 하는군요....
첫댓글 재정상의 문제는 단지 구실로만 알고있었는데..아니었군요..제가 어디서 줏어들었는지는 모르지만..^^;;대한제국 육군은 1902년 현재 시위대2개연대, 친위대2개연대였으며, 1900년에 지방의 진위대와 지방대가 진위대로 통합되었고, 1900년 현재 진위대 총병력은 6개 연대였다고 하는군요....
대한제국군이 힘없이(?) 해산당한것을 보면 분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대한제국군 내부의 군 장성들중에서 일본에 협력한놈들이 꽤 많더군요....ㅡㅡ;;박승환 참령과 같은 장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하는군요...
재정문제는..잠시 러시아가 대한제국군 재정을 감리감독할때가 오히려 훨씬 상황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중간에 돈 떼어먹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얘기죠.. 군함도,,상선에다 대포억지로 매단걸 일본에게 바가지로 구입한 두척이 전부였다고..;
차라리 대원군이 집권했다면 이꼴을 보이진 않았을텐데....
황실수비대도 1931년에 해산되었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