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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카페 게시글
홍씨 자료방2 스크랩 2013년8월19날,,무신에등장하는,홍복원ㅇ일가에대한기록들
홍왕식 추천 0 조회 64 13.09.04 23: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래 최충헌 일가를 쓸려했으나 최충헌 일가쓰려고 국역고려사에 최충헌 전에만 들어가면 렉이걸려서 포기했습니다 (원처음에글올리신분의글)

아래글형식...

2013년네이버사극카폐무신에나오는내용중홍복원일가의기록을발췌한것으로...

네이버카폐남양홍씨(당성)중랑장파에카폐지기께서,이글을옮겨오면서.주석을달아서처음읽으시는분들에게

설명한형식임..

 

홍복원(洪福源)

 

본명은  홍복량(洪福良)으로, 본래 당성(唐城) 사람이었으나 그 선조가 인주(麟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로 이주했으며 부친 홍대순(洪大純)은 인주도령(麟州都領)을 지냈습니다.

 고종 20년 서경낭장(西京郞將)으로 있으면서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선유사(宣諭使)인 대장군(大將軍) 정의(鄭毅)와 박녹전(朴祿全)을 살해한 뒤,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최이(崔怡,최우)가 가병(家兵) 3천 명을 보내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와 함께 그들을 토벌하고 필현보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한 후 큰 거리에서 허리를 베어 죽였습니다.

 홍복원이 원나라로 달아나자 그 아비 홍대순과 처자 및 동생 홍백수(洪百壽)를 체포하고 나머지 서경 백성들은 모조리 바닷섬으로 이주시키니, 서경은 허허벌판처럼 텅 비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에선 영녕공(永寧公) 왕준(王?)을 볼모로 보내게 되었는데 그가 원나라의 질자로 있을 때 홍복원(洪福源)의 집에 머물게 되자 처음에는 매우 후하게 대해 친했다고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홍복원은 점차 영녕공과 사이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몰래 무당을 시켜 저주를 일삼았다고합니다.

이에 먼저 몽고에 항복해있던 고려의 군인 출신인 교위(校尉) 이주(李綢) 라는 사람이 영녕공을 통해 알게되었고 이 사실을 자신의 상관에게 알렸습니다.

 이주의 몽고인 상관에게 보고를 받은 황제는 다시 관리로 하여금 진위 여부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에 홍복원은 오히려 아이가 학질을 앓아 이것으로 병을 물리치려 했을 뿐 아무런 딴 뜻이 없노라고 해명했으며 이어 왕준에게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공은 오랫동안 나로부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참소하기 좋아하는 놈을 시켜 나를 모함하는 것이요?

이는 이른바 기른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무는 격이오.”
영녕공의 부인은 비록 원나라 황족이라 고려언어를 알아듣진 못했으나 홍복원의 말투가 좋지 못한것을 알고 통역관으로 하여금 홍복원이 한 말을 통역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알고 화가난 그녀는 다시 홍복원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너의 나라에 있을 때 무슨일을 하던 사람이냐?

”고 질책하자 홍복원은 변방에 살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인이 다시

 “우리 영녕공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그러자 홍복원은 영녕공은 왕족 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에 더 화가난 그녀는 다시 홍복원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녕공이 너의 주인이고 너야말로 사실은 개인데 도리어 영녕공을 개라 하면서 주인을 문다고 한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이냐?

 나는 황족이니 황제께서는 영녕공이 고려 왕족이라 하여 나를 그 분에게 시집보냈고, 그 때문에 내가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모시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내 남편이 만약 개라면 어찌 사람이 개와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내 반드시 황제께 아뢰리라.”
이에 놀란 홍복원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빌며 울부짖으며 매달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난 부인은 그대로 황제 쿠빌라이에게 달려갔고 영녕공도 이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홍복원은 황제 쿠빌라이에게 가던중 이미 영녕공의 부인에게 보고를 들은 황제의 명령으로 출동한 관리와 장사들에게 맞아죽고 말았습니다.

 이일을 계기로 그의 아들은 더욱더 고려를 증오하고 모함하게되었습니다.

***번역과자료를잘못다루어앞뒤가안맞는서술임**카폐지기보충서술***

영영공,왕준과홍복원은처음은홍복원이元의동경총관이였고.

홍복원이고려접경의40여개城을갖고원나라에황복하였으므로,원나라에서는

홍복원ㅇ르극진히대접하였고,영영공은.원나레에고려의인질로왔으므로

홍복원이,왕준보다상급이였음..

그러다가왕준이고려왕족으로써,원나라황녀와혼인한지라왕준의끝발이

더셰짐...

이에,정적관계가되어.

왕준이홍복원이가지고있던고려유민의감독권을빼앗기위하여..

다툼과갈등이있었고.그러한와중에..왕준이부인인원나라황녀에게.홍복원을모함하여...........

원나라황제가보낸칙사에의하여.홍복원이주살되고..

이듬해홍다구의아비를신원하는소청에원나라황제가이르시기를..

그때홍복원을처단한것은,법을잘못적용한것이다..

따라서,사과하는의미로,,그대(홍다구)에게아비의관직

동경총관을,습(襲이어준다는의미)한것이다

그러니,그대는(홍다구)두말말고,호패를갖고,직을수행하라

하시었다******

 

이번에는 홍복원의 아버지인 홍대순(洪大純)입니다.

 

홍대순(洪大純)

 

고려 고종 때의 반역자로 일명 홍대선(洪大宣)이라고도 합니다.

 1219년(고종 6) 몽골의 원수 합진(哈眞) 등이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홍대순은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 있으면서 그들을 맞이하여 항복했습니다.

  그 후 아들 홍복원도 1233년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난을 일으키고 쫓기게 되자 민호(民戶)를 이끌고 몽골에 항복했습니다.

****홍대순(인)이이미,린주도령으로자신의백성을구하고져,

원나라에황복하여.고위직으로대접을받는상황인데,...

그로말미암아,홍복원이이미,동경총관으로최고위직인상황인데.

무슨고려에서반역을한답니까???***확실한오류임카폐지기서술***

 그로 인해 홍복원은 몽골의 동경(東京 : 요양 遼陽) 총관이 되어 조국인 고려에 갖은 압력을 가했으며 홍대순도 최우에 의해 대장군이 되는 등 대대로 몽골의 주구로서 조국에 반역하게 된 길을 열어 놓게됩니다.

***카폐지기서술,**멍청아,이미홍대순이원나리에항복하여고위직인데,

고려의최우에게무슨벼슬을받는가?

대장군이란??벼슬은,홍대순이원나라에항복하기전에.고려에서내린벼슬이다***

****앞뒤가안맞는주장...*** 

 

그다음 소개할 인물은 홍복원의 동생이자 홍대순의 둘째 아들인 홍백수(洪百壽) 입니다.

 

홍백수(洪百壽)

 

1233년(고종 20) 필현보(畢賢甫)·홍복원 등이 서경(西京)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선유사(宣諭使) 대장군 정의(鄭毅)와 박녹전(朴祿全)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배신하자, 최우(崔瑀)가 가병(家兵) 3,000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와 함께 쳐부수고 필현보를 요참(腰斬 :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복원은 몽고로 들어갔으므로 그 아버지 홍대순과 동생 홍백수가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몽고로 도망간 형 홍복원이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를 자주 괴롭히자, 그 회유책의 일부로서 최우에 의하여 낭장이 되었습다.

 

원종 때 복야(僕射), 1271년(원종 12)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고 놀라운것은 그의 후손이 훗날 조선을 세울때 공을 세운 홍길민(洪吉旼)과 그의 아들인 홍여방(洪汝方)입니다.

 

그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홍복원의 장남이자 고려를 괴롭힌 인물중 하나인 홍다구(洪茶丘) 입니다.

홍다구(洪茶丘)

본명은 홍준기(洪俊奇)이고 몽골식 이름은 찰구이(察球爾) 입니다.

아버지 홍복원이 고려의 영향으로 맞아죽자 그는 아버지를 죽인 고려를 미워하며 자주 침공할것을 요구했습니다.

 

1254년(고종 41) 몽골의 장수 차라다이[車羅大]가 고려에 침입할 때 모국에 해를 끼치고, 1261년(원종 2)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이 되었습니다.

 

1271년 재차 고려에 들어와 봉주(鳳州:鳳山)에 둔전총관부(屯田摠管府)를 설했으며 그해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이 일어나자 고려의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진도, 제주도에서 삼별초군을 토벌했습니다.

 

특히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고려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은 홍다구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계획하자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으로 감독조선관군민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이 임명되었는데 조선공사(造船工事)를 가혹하게 독촉했다고 합니다.

 그때문에 고려 백성들의 비난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이 해 충렬왕이 즉위하자 도원수 홀돈(忽敦)휘하에서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가 되어 쓰시마섬[對馬島] ·이키섬[壹岐島]을 공격하였고 1277년(충렬왕 3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가 되어 고려에 주둔했습니다.

 이듬해 위득유(韋得儒)가 김방경이 왕을 죽이려 한다고 무고하여 김방경이 투옥되자, 가혹하게 심문하였으나 끝내 김방경이 허위 자백을 하지 않자 풀었다고합니다.
그해 원나라 황제의 소환을 받고 돌아갔다가 1281년 제2차 일본정벌 때 우승(右丞) 실도(實都)와 4만 군사를 이끌고 합포(合浦)를 떠나 범문호(范文虎)의 10만 군사와 합세하여 이키섬 ·히라가섬[平賀島] 등지에서 싸우다가 태풍으로 많은 군사를 잃고 원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1287년, 원나라에서 발생한 나얀(乃顔)의 반란을 진압하여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이 되었고 1290년 숙환때문에 사직했으나 이듬해 황명으로 다시 복직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해에 사망했으니 그 나이 47세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홍복원의 5남 홍군상(洪君祥)입니다.

큰형인 홍다구와 사이에 나머지 형들에 대한 이름도 기록도 없기때문에 바로 그로 넘어가게되었습니다.

 

홍군상(洪君祥)

 

이사람은 그 당시 봐온 홍씨 일가와 다르게 재밌는점이 할아버지,아버지,삼촌,큰형 모두 고려에 반대적인 성향을 가진 매국노였던 반면 그는 오히려 고려를 위해 힘?다는 점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원에 귀화했고 어려서 큰형 홍다구(洪茶丘)를 따라 글을 배웠습니다.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직접글을배우셨음*****

 

1290년(충렬왕 16) 11월 충선왕이 원의 서울인 연경(燕京)에 왔을 때 동첨추밀원사(同僉樞密院事)인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합니다.

***충렬왕과충선왕부자지간의싸움을중재하고타이름**** 

1292년 8월 황제가 일본정벌에 관하여 의견을 묻고, 9월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일본인을 호송하는 일로 고려에 파견되어 충렬왕과 함께 일본정벌에 관하여 의논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해 12월 왕이 이번에는 연경에 가서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합니다.

1294년 정월 원의 세조(世祖)가 죽으니 승상(丞相) 완택(完澤)에게 아뢰어 일본정벌을 취소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홍복원이나 형 홍다구와 달리 여러 방면으로 고려에 이롭게 한 공으로, 1295년 5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益城侯)에 봉하여지고, 8월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세자사 임안공(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世子師臨安公)에 개봉되었습니다.

  원에서의 벼슬은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였으며,

 1298년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로 고려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선 그의 후손의 흔적이 없다고 하며

조선시대 홍씨는 삼촌 홍백수 계열이라고합니다.

 

******표시는카폐지기의주석.***

 

이상 글을 마치겠으며 내일은 경순왕 일가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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