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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26일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정되었다 |
1938-1945 (Finnish Army) : 제12보병연대 : 핀랜드군 대위 1945 (Waffen SS) : 친위대 자유 북구인 대대 : 무장친위대 소위 1954-1965 (U.S. Army) : 제5특전단, MACV-SOG A-743 파견대 : 미육군 소령(추서) 수상경력... 만네르하임 크로스, 동성훈장,명예전상장, 수훈십자장, 대통령부대표창 May 28, 1919(1919-05-28) – October 18, 1965 (aged 46) 도저히 한 사람의 경력이라고는 쉽게 믿기질 않는 엄청난 경력의 주인공은... 바로 미국 명"래리 썬"으로 알려진 핀랜드인 "라우리 알란 퇴르니" 미육군 소령이다 ( May 28, 1919 – October 18, 1965 (aged 46) ) 겨울전쟁과 독소전쟁에서 핀랜드군으로 활약했고, 종전직전 잠시 독일군에 몸담았으며, 종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육군 특전단에서 대위로 복무하므로서 삼국의 깃발아래서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 래리 썬은 "전설적인 핀랜드 전사"로 알려져 있다. 자~ 이제부터 그의 전설적인 경력과 함께, 삼국을 떠돌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기구한 사연을 소개한다. 냉전이 가져온 또 하나의 비극 그 자체다. 라우리 퇴르니, "래리 썬"은 1919년 5월 28일 핀랜드와 소련의 접경근처 핀랜드 령 "비푸리"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8년이 되자 퇴르니는 육군에 입대했으며 겨울전쟁이 한창인, 1940년에 "하미나"의 예비역 부사관 학교에 입교했다. (참고로, 그의 고향 비푸리는 네바강 하구의 도시다. 독소전쟁의 결과로 현재 러시아 연방공화국 내 카렐리아 자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스웨덴에서는 비보리히, 핀랜드에서는 비푸리로 불리던 도시가 결국은 러시아에 복속되고만 것이다) 1939년 가을, 퇴르니는 핀랜드 군 의무복무기간을 마쳤지만, 그의 조국 핀랜드는 여전히 소련과 전쟁 중 이었다. 이에 따라 그의 군 복무기한은 전시동원령의 일환으로 연장되었다. 원래 그의 보직은 군수지원 업무였지만, 라도가 호수 전투 중에 최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레미티"에서의 포위된 러시아 사단에 대한 섬멸전에 참가했었던 그는 혁혁한 공적으로 지휘관의 주목을 받았고, 그의 배려로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련과의 전쟁이 끝났을때 그는 소위로 임관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핀랜드는 독일과의 연대를 강화했고, 그 일환으로 다수의 핀랜드 군인(대략 650명) 들이 독일에 교육생으로 파견되었다. 퇴르니도 독일 무장친위대에 교육생으로 단기 파견되었다. 곧이어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개시되자, 퇴르니는 전선으로 복귀했다. 이른바 "퇴르니 부대"로 알려진 그의 휘하 수색정찰부대는 적후방 깊숙이 잠입해 소련군 후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놀라운 전과로 인해 양측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한번은 소련군 후방으로 침투한 퇴르니 부대는 러시아군 호송차량을 습격해 러시아군 30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한편 그의 부대원 중에는 훗날 핀랜드 대통령에 오른 "마우노 코이비스토"도 있었는데 그는 독소전 당시 핀랜드와 소련간의 최후의 전투인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이어진 "일로맨치" 전투 당시 퇴르니 대위 휘하의 정찰 중대에서 근무했다. ) 퇴르니의 부대가 계속해서 소련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자, 소련군은 퇴르니의 목에 300만 핀랜드 "마르크" 화를 현상금으로 걸었다. 퇴르니는 그동안의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4년 7월 9일 "만네르하임 크로스"를 수상하였다. 만네르하임 크로스는 미국의 의회명예훈장에 해당하는 최고훈장으로 독소전 동안 핀랜드장교 로서는 그가 유일하게 수상하였다고 한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핀랜드와 소련이 강화조약을 맺자, 퇴르니는 승복하지 않고, 독일로 갔다. 그는 무장친위대의 자유 북구인 대대에 친위대소위로 착임하였고, 독일군의 "베오울프"작전(저항군조직 및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교육을 받고 핀랜드에서 저항운동을 할 작정이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결국 영국군에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군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국가경찰이었다. 핀랜드는 이미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핀랜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퇴르니는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를 비롯해서 전쟁 중 혁혁한 공적을 세운 수많은 핀랜드 장교들이 헌신과 용기의 댓가를 감방에서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12월 퇴르니는 핀랜드 대통령 "파시키비"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 핀랜드에서 그를 흔쾌히 받아줄 곳은 없었다. 결국 퇴르니는 전쟁중 함께 했던 부하장교 "호글러 핏캐넨"과 함께 국경너머 스웨덴으로 도주했다. 국경을 넘은 그들은 수도 스톡홀름으로 이동했다. 그 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폰에센 남작부인"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난 것이다. 폰 에센 남작 부인은 퇴르니 처럼 전쟁후 스웨덴으로 망명하는 핀랜드군 장교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는 등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핏캐넨"의 운은 계속이어지지 못했다. 당국에 체포된 그는 핀랜드로 압송되고만다. 남은 퇴르니는 현지에서 "마리야 콥스"라는 스웨덴계 핀랜드 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후 직업이 필요했던, 퇴르니는 스웨덴 선원으로 가장하고 베네주엘라로 가는 "볼리비아"라는 화물선에 승선했다. 카라카스 항구에서 퇴르니는 겨울전쟁 당시 핀랜드군 지휘관 중 한 명인 "마티 아르니오" 대령을 만났다. 그는 전쟁후 볼리비아에 망명해 정착한 상태였다. 1950년 퇴르니는 다시 스웨덴 국적 화물선"스카렌"에 승선했다.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스카렌이 알라배마 주, 모빌 근처를 항해하자 퇴르니는 멕시코 만에 뛰어들었다. 그는 수영으로 해변에 도착한수, 핀랜드 인들이 다수 정착한 뉴욕시의 브룩클린으로 갔다. 거기서 퇴르니는 목수와 청소부로 일했으나, 이런 직업은 "타고난 전사"인 그에게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허드렛 일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시 비밀정보부의 수장으로 유명한 "와일드 빌" 도노반이 운영하는 법률회사에 의해 추진된 미의회 법안이 통과되면서 영주권과 함께 미육군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다 퇴르니는 1954년 "롯지 법(잠정 법률로 유능한 해외인력의 미군입대를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다)"으로 미육군에 입대하였고, 거기서 "래리 썬"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육군에 들어간 래리 썬은 곧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핀랜드계 미군장교 그룸의 후원을 받았다. 미육군에서는 종전후 직업을 잃은 핀랜드 장교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고 미육군에서 장교로 일할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있었던 것이다. 미육군에서 이들은 "마르티넨의 아이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중 상당수가 특수전부대로 배속되었고, 그들은 사병이었던 래리 썬도 특수전부대로 가도록 후원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래리 썬은 곧 특수전부대에서 가장 뛰어난 교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거기서 그는 교관으로서 스키와 써바이벌,산악등반, 게릴라 전술을 가르쳤고, 새로이 낙하산교육을 이수했다. 이런 그를 그냥 사병으로 둘 이유는 없었고 그의 계급은 초고속으로 올라갔다. 1957년 그는 예비역 중위로 임관했고, 곧 현역으로 전환되었으며 1960년에는 대위로 승진했다. 천성이 "필드 체질"인 그는 중위로 임관된 직후인 1958년에 이미 제10특전단 소속으로 서독에서 근무 중이었다. 서독 근무 중, 그는 미육군 특수전부대의 스키교육과정을 새로 쓸 정도로 상관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란의 "자고라" 산맥에 추락한 미공군 수송기의 시신회수 작업때는 험하기로 유명해서 유럽의 전문산악구조반도 포기한 그 곳을 부하들을 이끌고 가볍게 돌파해 수색회수작전을 마무리 하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1963년에는 서독근무 당시 상관인 "롤트" 중령의 천거로 중령과 베트남에 배속되었다. 그는 작전팀 A-734 소속으로 메콩델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두 차례 훈장을 수상했다. 상관인 "롤트" 중령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그가 승진을 위한 경력을 쌓기를 바랬지만, 그는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SOG로 전출을 희망했다. 결국 1965년 래리 썬은 SOG 불 사이먼 대령의 "프로젝트 샤이닝 브라스"에 군사고문 신분으로 배속되는데 성공했다. "샤이닝 브라스"는 남베트남으로 남파되는 북베트남 군과 게릴라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은신처인 "라오스"로 월경침투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래리 썬은 샤이닝 브라스의 첫 라오스 침투작전에 자원했다. 1965년 10월 18일 그와 정찰팀을 실은 "킹비"헬기가 라오스로 넘어갔다. 그의 헬기는 무사히 이동중이라는 무전을 본부로 보내왔지만, 이내 통신이 끊겼다. 사고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샤이닝 브라스 프로젝트팀은 곧 이어 그 지역에 대규모 수색구조 작전을 실시했으며, 얼마뒤 다낭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라오스 산악지대에서 그가 탑승한 헬기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정황상 그의 사망은 명백했고, 그는 사후 "육군소령"이 추서되었다. 1999년 미군유해발굴단이 현지조사를 통해 래리 썬의 유해로 보이는 유골을 발굴했고, 2003년 그의 신원을 확인했다. 2003년 6월 26일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정되었다 미군은 래리 썬의 업적을 기려서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의 제10특전단 본부건물 "래리 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로빈 무어"의 "그린베레"라는 작품에서는 래리 썬을 모델로 한 "스벤 코르니"라는 핀랜드계 미군특전단원이 소개되었다( 첫 장에 있다니, 궁금하신 분은 읽어 보시고) 참고로, 로빈 무어의 소설은 존웨인 주연의 "그린베레"라는 영화로 재탄생되었고, 래리 썬은 2004년 그의 모국인 핀랜드의 "위대한 핀랜드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 시대를 통털어 52번째로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래리 썬은 냉전의 와중에 갈 곳을 잃은 전사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당시 추축국편에 섰거나 전후 처리과정에서 동서진영의 분열로 인해서 다수의 인물들이 조국을 등져야 했고, 거기엔 상당수의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핀랜드인 래리 썬, 즉 라우리 퇴르니도 결국 사회주의 조국 핀랜드의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망명한 이후에도 퇴르니는 전사의 영혼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위험한 전장을 찾아 떠돌다 결국 라오스의 이름 모를 어느 골짜기에서 사라진 셈이다. 다만, 그는 동정적인 여론과 운이 따라준 덕에 지금은 조국에서 핀랜드의 영웅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서 그와 비교해 그늘 속에 뭍히고 만 다른 망명 핀랜드인 군인들이나, 꼭 핀랜드 인이 아니더라도 사정상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망명객들의 설움이 다시금 떠오른다. "전쟁에서 이기든 지던간에 군인은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기에 모든 영광은 민간인 정치가에게 돌아갈 뿐, 군인은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던 어느 군인의 말이 다시금 생각나는건 왜일까? p.s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 같네요. 결국 저런 전사라고 불리는 자들도 위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니, 그들도 피해자인 셈이죠.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다수의 무장친위대원들이 오갈곳 없이 떠돌다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해 알제리나 인도차이나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일부는 남미로 도주해 정착했구요. 핀랜드 인들도 그렇다는 군요. [출처] Lauri Törni (래리 썬) , 세 나라의 군대에서 복무한 사나이..|작성자 sundin13 |
첫댓글 말그대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었네요...
ㅎㄷㄷㄷ
ㄷㄷ
음, 사족도 안되는 한가지 이야기하자면, 박정희 대통령도 진기록 하나 가지고 있죠. 3개국 육군사관학교를 모두 졸업한 인물입니다. 만주국 사관학교, 일본 사관학교, 대한민국 사관학교를 모두 졸업했죠. 뭐,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니 그놈이 그놈이긴 하지만... 또한 일본군에서도 복무했고 한국군에서도 복무했던 인물로 2개국 군대에 복무한 흔치않은 경력의 소유자. 게다가 남로당에서 군대에 심은 끄나풀이었다가 전향해서 남로당 때려잡기 최일선에 있던 인물이기도 하죠. 그러고보니 이인물 생각보다 경력이 파란만장하군요.
그렇군요
음, 생각해보니 광복군에도 한자락 걸쳤군요.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에서 광복군에 입대했었습니다.
블로그로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__) http://blog.naver.com/nabershing
음...전후핀란드는 사회주의화 되었나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