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고등학교에 출근하는 첫 날 버스정류장으로 급히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너무나 좋았다.
아! 이제 자전거로 슬슬 5분만 달려가면 학교이다.
..............
직원들에게 부임인사를 하고 이어 학생 조회 시간에 부임인사를 하였다.
임실초등학교에서 나에게 배운 학생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선생님들 사이엔 낯익은 얼굴이 많아서 참 좋았다.
교육대학 선배인 심병기 선생님, 최우련의 친구 조윤희 선생님이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송호창 선생님, 교육대학 후배 최상영 선생님, 이선희 선생님 등등 낯익은 얼굴들이 반겨주었고 학생들 중에서 몇 명은 찾아와서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부임한 날 점심을 교장, 교감, 교무부장 선생님과 같이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 선생님! 교감선생님 말씀을 한번 잘 들어보세요!"
하시고는 교감선생님에게
"잘 말씀드려!..."
하고 말씀을 그쳤다.
잠깐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머뭇거리던 교감선생님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정선생님! 실은! 저!! 오해 하지 마시고 들어주셨으면 허는디요.... 핵교 형편이 아주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교장선생님의 결정이니까..... 가능하면...아니... 가능하면이 아니라 ... 꼭 들어주셔야 할 형편이라서....."
영문을 모르는 나는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리도 뜸을 들이시는지...
"말씀하셔요! 교감선생님! 저는 무엇이든지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 물론 그러실 줄 알죠만..... 다름이 아니라 학교 형편상 정선생님이 미술하고 음악도 좀 가르쳐주셨으면 하는디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음악선생님으로 조윤희가 있지 않은가!!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교감선생님! 조윤희 선생님이 음악전공을 하셨고 여기 계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래요 실은 그러니까.... 어려운 부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
"자! 가면서 얘기 합시다."교장선생님이 일어서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음악 전공선생님을 제키고 내가 무슨 낯으로 음악을 가르친단 말인가? 이건 얼마나 음악선생님을 무시하는 일인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
퇴근시간 무렵 조윤희 선생님이 내게 왔다.
"오늘 가시는 길에 저와 말씀 좀 하게요"
"그래요! 나도 지금 할 말이 많아서 기다렸는데요!"
"벌써 교감선생님한테 말씀 들었는가요?"
"듣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지요!"
조윤희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차분하게 말하였다.
"실은 교감선생님의 부탁은 제 부탁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왜냐하면....정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시지 않았으면 제가 미술을 가르쳤어야 하구요... 또 교장선생님께서 브라스 밴드를 만들고 싶다는데 그것도 제가 해야 해요....저는 브라스 밴드는 전혀 모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정선생님을 이 학교에 모셔 오려고 하기 전에 이미 저와 상의를 한 것이었어요..."
"지금은 브라스 밴드가 없잖아요? 그리고 브라스 밴드가 조직되었을 때 그때에 제가 브라스 밴드만 따로 떼어서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의 말에 그녀는 바로 준비된 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여학생 교련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학생 교련을 가르치기로 한 거죠..... 교련은 제가... 그동안 음악하고 같이 가르쳐왔었거든요.... 선생님이 음악을 해 주시면.... 제 수업시간이 줄어들어서.... 대학원 다니기가 좀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 우련이 친구인 저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그냥 승락하셔요.... 음악 수업하시면서 저를 의식하지 마셔요.... 선생님이 가르치시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거여요.... 또 하나 말씀드릴까요.... 사실은 이번에 미술선생님이 아니라 여자 교련선생님을 모셔와야 하는데 정선생님이 욕심이 나서 교장선생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거라구요...."
..............
할 말이 없었다.
학교의 사정과 조윤희 선생님의 사정이 딱하여 하는 수 없이 음악수업을 맡게 되었다.
이왕 맡은 바엔 아주 잘 가르쳐야 한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고등학생의 음악수업답게 좋은 노래로 음악적 감성을 마음에 키워주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학생들은 나의 수업시간을 기다렸다.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의 차이가 크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맞지 않았다.
고등학생들도 신체적으로 크기만 했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순진한 학생의 모습은 중학생들과 같았다.
"얘들아! 노래는 詩에 가락을 붙이는 것이란다. 따라서 그 시가 슬프면 가락이 슬프게 되고 시가 명랑하면 가락도 그렇게 작곡되는 법이란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나라 노래이든지 그 노래가 작곡된 원어로 부르는 것이 곡상을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것이기에 우리는 교과서의 노래를 외국노래는 외국말로 배울 것이다....."
나는 교과서의 한국 가곡이나 외국 민요 등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주옥과 같은 우리의 가곡과 이탈리아 민요.....
내가 부르고 싶었던 아름다운 노래들....
나는 노래를 가르치면서 나 스스로 노래에 도취되어 신들린 사람처럼 신나게 노래를 가르쳤다. 학생들이 모두 나의 기분에 같이 빠져들면서 열심히 배웠다.
'목련화' '님이 오시는가' '비목' '그리운 금강산' '고향의 노래'
'수선화'.... 가슴속에 파고드는 한국 가곡들...
'라스파뇨라' '토르나 쏘랜토' '라르고' '까로미오벤' '오 솔레미오'... 아름다운 이탈리아 칸쵸네
'올드블렉 죠' '징글벨' '리틀 드러머 보이' ... 주옥과 같은 케럴송
'양산도' 오돌또기' '밀양아리랑' ... 흥겨운 우리 민요..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는 물론 빼놓지않고 다 가르쳤으며 외국노래는 모두 원어로 부르도록 가르쳤다. 학생들이 뜻도 모르는 외국 언어로 노래를 부르는 게 처음엔 무척 어려워하고 싫어했지만 굽히지 않는 나의 설득과 엄포에 별수 없이 가사를 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번 중간고사 음악 실기 시험은.... 이태리 민요 외어부르기이다.
요령은... 오 솔레미오.... 까로미오벤.... 라스파뇨라... 토르나 쏘렌토... 이상 4곡 중에서 선생님이 전주곡을 치면 그것이 무슨 노래인가 듣고서 원어로 부르기다..... 노래 가사를 철저히 외우지 않으면 재시험을 볼 테니깐 알아서 해...!!"
학생들은 질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너무 어려워요!!!"
"...나도 안돼!!! 이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야!!!"
"그리도 너무 많아요!!!. 어떻게 다 왼데요????"
"하면 된다.!!! 이것 모르냐? 엉??? 이번에 외어 놓으면 평생 안 잊을 꺼여!!!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할 때가 올 것이다..."
학생들은 열심히 가사를 외었다. 종이에 한글로 적어가지고 다니며 외우는 학생도 있었다.
시험을 보기 전까지 음악시간엔 시험범위의 노래를 집중적으로 연습시켰다.
목적은 이 학생들이 앞으로 어른이 된 후에 있었다.
연회석상이나 어느 경우에 멋있게 칸소네 한곡을 뽑을 때 주위에서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노래 한 곡에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
시험 시간이 되었다.
시험 당일 날에는 학생들이 바짝 긴장하여 있었다.
"지금부터 음악과 실기 가창시험을 실시한다...."
"........."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바짝 긴장을 하였다.
"얘들아! 그동안 열심히 연습하였지??"
학생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듯이 외치며
"몰라요!!!! 어려워요!!!"
라고 부르짖었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 그중에서 자기가 가장 자신있는 곡 하나를 선택해서 불러라.... 됐니???"
"예!!!!"
학생들이 좋아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라스파뇨라를 선택하여 불렀다.
외우기 쉽고 부르기가 쉬었던 것 같다.
<라스파뇨라 에피소드>
다음 번호 나오세요!
"방수영 !"
"예!"
"넌 뭐 부를래?"
"라스파뇨라요"....
"그래! 알았어 자 반주 들어간다!"
나는 이 학생을 골려주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을 하였다.
그래서 시치미를 딱 떼고선 '돌아오라 소렌토'의 첫 구절을 피아노로 졌다.
따라라라 라라랄라~~~~따라라라 라라 랄라~~
~시~작~!
스파뇨라를 준비하고 있던 이 학생은 소렌토노래의 곡에 스파뇨라 가사를 붙여서 입으로 뇌까리며 연신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당황하는 것이었다.
나의 시작소리와 함께
'디스파냐 소노라 벨라~~
......
소렌토 곡에 스파뇨라를 붙여서 부르니 너무나 이상한 곡이 되어서 스스로 당황하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선생님 선생님--- 다시요 다시 한 번 불러볼 께요--"
학생들은 모두 폭소가 쏟아져 나오고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서 다시 피아노를 쳤다.
~~역시 돌아오라 소렌토의 곡이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전주곡을 듣다가 나의 시작 소리와 함께
"~디스파냐 소노라 벨~~라~~ 아뇨 !!! 선생님 제가 잘 불렀었는디요 이상혀요 다시 한 번 하면 안될까요?"
그 학생의 이 말과 당황하는 표정에 드디어 나의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와 버렸다.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책상을 두드리며 웃어댔다.
더욱 당황한 이 학생이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 더욱 학생들과 나를 폭소의 바다로 빠지게 하였다.
나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래 이번에-는 자알 혀바~!
'짠짠짠 짜자자 따라라라~~~~ 짠짠짠 따라라 라라~~~~'라스파뇨라의 전주곡을 쳐 주었다.
'디스파냐 소노라 베~~ㄹ 라~~ 레지나 소~ㄴ 델 아 모~~~ㄹ'
여기까지 부르던 수영이는 노래를 뚝 그치면서
"쌤님" 아까 샘님이 저 틀리라고 어멍겄 쳤지요?????"
하며 웃었다.
학생들과 나는 또 한번 웃음 보따리를 터트렸다.
<그리워 노래 에피소드>
가창시간이었다.
채동선의 <망향>이라는 노래였는데 이 교과서에는 가사를 바꾸어 <그리워>라는 노래로 나와 있었다.
노래의 악보를 크게 그려 칠판에 붙이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 노래는 원래 ‘망향’이라는 노래로서 채동선 선생님이 일제시절 잃어버린 조국의 국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로 표현한 아름다운 곡이었다. 여기선 ‘그리워’라는 노래로 배우려 하니까 조용히 곡의 흐름을 눈을 감고서 조용히 들어보도록 하자”
나의 낮은 목소리와 근엄한 표정에 교실은 엄숙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고 나의 손가락은 천천히 곡의 시작에서 끝까지 연주를 해 주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내가 백뮤직으로 이 곡을 칠 때 누가 시를 읽듯이 분위기 있게 가사를 낭독해 볼래?
목소리 예쁜 곽은진 일어서서 천천히 낭독해 봐!!!
피아노에서 작은 소리로 전주곡이 울려나오고 그 곡은 정적을 타고 온 교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시작!
(그리워 그리워 찾 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 니 뵈네--
들 국-화 애 처-롭고 들 꽃-만
바 람에 날-리--네------중략----
그리---움----그 것--만
지-니-고 가 -- 자 - 꾸나---)
대략 이러한 가사의 노래였다.
조용하게 읽던 은진이가 가사에서 붙임표와 이음표로 된 부분에 '-'의 기호를 붙여서 노래의 단이 변하는 곳에 이르자 올바른 띄어쓰기로 읽기가 어려웠나보다
그 노래의 후반부에 '그리움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실수가 나왔다.
숨소리도 조용한 분위기에 가냘픈 나의 피아노 소리와 낭낭한 목소리의 곽은진의 낭독이 천천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만.....그...그..것만 ...만...지니....고 ...<아니>
그것만 만 지고 가 자 꾸나.....
은진이는 읽으면서도 가사를 잘 못 읽어서 이상한지 다시금 읽는데
그...것..만 ..만 지고 가 자꾸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둥거리며 몇 번을 반복하여 읽고 있었다.
"잠깐! 은진아!!! 너 지금 읽은 가사가 뭐냐!!"
"그것만 만지고 가다니......"
"그게 뭔데 그것만 만지고 가---!?"
..............
은진이는 입이 다물어지고 어디선가 뒤에서 '쿠쿡-'하며 웃는 아이가 있었다.
또 한이이가 'ㅋㅋ-'웃었다.
웃는 아이의 곁에 있던 아이가 웃는 학생에게
"야! 너 왜 웃냐?"
"ㅎㅎㅎㅋㅋ 그것만 만지고 간다쟌어??ㅎㅎㅎㅎ"
여기 저기서 쿡쿡 하고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 웃냐! 하고 묻는 학생과 대답하던 학생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더니 이내 교실 안에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음악수업은 정규수업시간에 이루어지지만 점심시간과 방과후에는 또 다른 나 혼자만의 봉사활동을 하여야 하였다.
봉사라기보다는 나의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일이었고 나 스스로 기쁨에 넘쳐서 하는 일이었기에 밴드부 지도를 열심히 하였다.
밴드부의 조직은 내가 부임하여 한 달이 된 4월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밴드부의 조직 경위를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월 말 경 하루는 임실경철서장이 교장실에서 나를 보자고 한다고 연락이 왔다.
경찰서장은 경찰악대출신이란다. 그는 우리 학교에 브라스 밴드를 만들기로 교장선생님과 이미 약속이 되었다며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 한다.
교장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상징적으로 일부의 예산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경찰서장이 군수와 농촌지도소 소장 그리고 마을에서 사업을 하는 유지들을 설득하여 협찬금 일천만원을 확보하였으니 브라스 밴드부를 조직하여 악기 구입과 학생지도를 맡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벅찬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제 지사중학교의 그 낡은 악기와 어린학생들의 연주가 아니라 명실공히 브라스 밴드다운 밴드부를 지도하게 되는 구나!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나는 전주농고 브라스 밴드 선생님인 김종태 선생님을 만나서 자문을 받았다.
그의 조언에 따라 악기 구입의 종류와 숫자를 정하고 입찰공고를 내었다.
중앙악기점 제일악기점 남문악기점... 등등 많은 악기점 사장들이 모여들어 입찰에 참가하였다.
중앙악기점으로 낙찰이 되었고 악기가 며칠만에 들어왔다.
밴드부 학생들의 유니폼을 서울의 어떤 업체에 맡겨 옷이 들어왔다.
밴드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매우 많아서 이들의 음악성과 체격조건 등을 감안하여 부원을 조직하였다.
악기를 처음 만져보는 학생들이기에 학생들의 적성에 맞는 악기 배정과 악보 읽는 방법, 그리고 악기의 기본 운지법과 소리내기를 훈련시켰다.
젊은 학생들이라서 무척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기본적으로 훈련이 끝나고서는 처음으로 의식곡 부터 쉽게 편곡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국기경례, 애국가, 묵념곡, 그리고 아리랑 행진곡, 간단한 민요곡 등을 가르쳤다.
큰북과 작은 북,의 리듬악보까지 편곡하여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잠을 설치면서 각각의 악보를 편곡하고 편곡된 악보를 각각의 악기별로 오선을 그려서 등사 원지에 철필로 악보를 그리고 이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주는 일까지 나 혼자서 하여야만 하였다.
악기점에서 팔고 있는 악보는 너무나 보기에 어려워서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물론 나 자신도 그 악보를 소화할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연습을 하고 방과후에 학교 뒷산 골짜기 까지 올라가서 연습을 하여야 학교수업에 지장이 없었다.
(밴드부 학생들의 이름이 기억에서 잘 떠오르지 않는 게 안타깝다.)
악장을 맡았던 이광신은 잘 생긴 미남학생이었고 음악성도 탁월하여 여러가지 악기를 잘 다뤘다.
트럼펫을 불던 김상겸과 송승호, 가끔 학교에 무단결석을 잘 하던 백은석은 큰북을 쳤고 그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착한 어른이셨다.
사이드드럼을 치던 오병관, 크라리넷을 불던 김양호는 모범학생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작은 강당에서 또는 악기창고에서 연습을 하였다.
삼일절 노래, 6.25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을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했다.
학생들에게 연습을 시작한지 한 달이 조금지난 6월 어느날이었다.
군청에서 새마을 전진대회를 한다고 우리 밴드부의 의식가 반주를 부탁하여왔다.
처음공연이어서 학생들과 같이 설래는 마음으로 며칠간 연습을 열심히 하여 멋있게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깃털이 꽂힌 멋진 모자를 쓰고 번쩍번쩍 빛나는 악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간단히 연습한 행진곡을 불면서 시가지를 걸었다.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악대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나는 옆에 따라가며 어깨가 으쓱해지고 정말 기분이 좋았다.
임실고의 밴드는 임실의 명물이 되어서 각 기관의 행사장마다 불려가고 한 번씩 공연을 하면 학생들에게 식사와 과자를 사 주라고 몇 만원씩 봉투를 주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연주있는 날을 무척 기다렸다.
그날은 수업을 빼먹고 의식에 참석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학교의 소풍이 있는 날 학생부 선생님은 출발 직전에 학생들이 소지품을 모두 검사하여 술과 담배를 빼앗았다.
소풍가는 날 맨 앞에서 밴드부가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그 뒤를 이어 학생들이 따라왔다.
소풍 목적지는 뒷절이나 정월리 정도였는데 시가지를 지날 때 밴드부의 연주가 온 마을을 울리고 지나가므로 길가 양편에는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나와 밴드부의 멋진 행진을 구경하였다.
나는 동내에서 상당히 유명하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라고도 불렀다.
세월이 꿈처럼 흐르는 가운데 밴드부의 기능신장을 위하여 '오재남' 코치선생님을 채용하고 나는 연주지도를 하지않고 밴드부학생의 관리만을 맡게 되었다.
학교의 일이 한결 수월해 진 느낌이었다.
<진안여고 교가를 작곡하다(진안여고는 현재의 진안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지사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현옥 선생님이 진안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서 나갔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에게서 내게 부탁이 왔다.
진안여고가 이제 개교를 하게 되는데 아직 교가의 작곡을 하지 않아서 자기가 그 작곡을 누구에게 의뢰하여 해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지사중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 학교의 교가도 작곡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지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시절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따르는 초임 교사였었고 나는 그녀를 무척 가까이 도와주며 가까이 지내었기에 흔쾌하게 받아들여서 작곡을 하였다.
이기반 시인의 작사였다.
나는 작곡한 곡을 악보에 쓰고 녹음기에 피아노를 치면서 학생들이 따라서 배울 수 있게 녹음을 하였다.
녹음 테이프만 틀어 놓으면 50분 수업이 되고 한 시간에 교가를 완벽하게 부를 수 있는 테이프를 만들어 같이 보냈다.
또 하나의 테이프에는 개교식에서 쓸 수 있도록 교가의 전주곡과 노래하는 테이프를 따로 만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정과 교사였으며 이제 막 개교를 하는 학교라서 음악교사가 없는 학교이기에 그녀가 음악을 병치하여 맡았던 거였다.
나는 그녀가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친절하게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그 교가는 진안 제일고등학교의 교가가 되어 불려지고 있다.
.....................
임실군을 떠날 시기가 왔다.
아들이 셋이나 생겼고 아들들은 씩씩하게 잘 자라 주었다.
큰녀석 상범이는 동내 유아원에 다녔고 둘째 인범이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형을 따라서 같이 다녔다.
둘째를 낳은 지 5년만에 또 아들이 생겼다. 막둥이녀석의 이름을 상원이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