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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온달 <3편 영웅의 몰락-죽어가는 호랑이 고흘>
이제 슬슬 전투신입니다. 하하 이 부분까지 오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일단 이번 편은 고흘이 팔팔하던 1차 고-돌 전쟁시설과 시작된 고흘의 위기를 썼습니다. 다음편은 고흘의 대패로 시작된 연자유, 강이식의 부여공방전과 고흘의 마지막 제자인 설무도의 5차 요해-요서 공방전이 시작이군요. 한 영웅의 몰락으로 시작된 고구려의 대격변이 드디어 시작된다고 할까요. 매번 큰 격려 감사드립니다. 그럼 달리겠습니다.
지난 줄거리
온달이 상관과 부하들과 부딪치면서 서서히 성장해가는 때에.
드디어 고흘은 이번 전쟁에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말을 하고 10만대군 막북으로 출정한다. 이에 연자유와 강이식은 보급과 사기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고 ..........
1개월뒤인 7월 하순 요해(遼海 서요하강 상류)와 막북(漠北 돌궐본토 지금의 외몽고 일대)접경 지역
자위(고구려 최하 관등) 온달은 부하들과 보급품을 나르고 있었다.
“아이참 사나이가 칼을 차고 나왔으면 나라를 위해 적당들을 토벌하는 것이 맞거늘 쌀이나 나르고 있느니?”
그러자 주의 부하들도 같이 불평을 하였다. 자신들은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온달의 말에 동조했다. 총사령관인 고흘은 막북정벌을 떠나면서 후방을 맡길 장군을 발안부대로 지목하자 부대장인 발안은 물론 모든 부대원들이 반발하였다. 특히 동부대인 발안은 고흘이 전공을 독식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고흘은 그를 빼고는 거란을 통제하면서 보급과 돌궐의 별동대를 저지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발안은 거란 유력부족들을 잘 구슬리는 정치력이 있었다. 거란이 고구려와 돌궐사이에 있는 약소부족이어도 그들을 너무 강압적으로 통치를 하면 반발 할 수도 있고 그런다고 방치하면 주제도 모르고 상국을 시험하려고 한다.
적당한 통치를 할 수 있는 자는 고흘 빼고는 발안밖에 없다. 고흘은 발안을 설득해서 결국 후방을 맡길 수가 있었다. 고흘장군의 10만 대군이 북쪽으로 떠난 후 처음 발안은 화가 매우 났지만 지금은 거란 팔부족 유력자들과 고구려-돌궐사이에 전쟁터가 되어 초토화에 직면한 거란족에 수습방향등으로 논하였다. 그런데 그는 요즘 부대관리도 거의 안하고 그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해서 온달은 조금 불안했다.
‘그 멍청한 놈은 언제 한번 사고를 칠 것 같은데.’
온달은 욕먹었다고 화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동부대인 발안만큼은 예외였다.
온달은 지휘부막사에 보급품숫자와 이송날짜를 보고 하기 위해 들어왔다.
그 곳에는 근무 중인 십장 3명을 제외한 당대 내에 을지무발 당주(중대장)이하 모든 장교들이 모여서 간단한 식사를 들며 전황을 논하고 있었다. 사실 논한다는 것뿐이지 그들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본부에서 보급품을 잘못 가져온 것이구먼. 잘 찾아냈어! 나중에 우리가 욕먹을 필요는 없지 잘 했어.”
당대 내 보급책임자인 자영에게는 온달의 보고에 흡족하게 답하고 같이 식사라고 하라고 온달에게 말을 했다. 을지무발은 자기가 다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할 일을 각자 나누어주었다. 나중에 당주가 된 온달은 이것을 흉내 냈는데 냉정하고 깔끔한 설연은 훈련, 부하들을 신나게 할 줄 알면서도 휘어잡을 줄 아는 마위는 사기, 마음이 약하지만 꼼꼼한 현기는 보급, 조용하면서도 빠른 일처리를 하는 이편성을 정보-정찰 등을 맡기었는데 고구려에 최고의 당주로 불리는 온달의 용병술은 을지무발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었다. 후일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모든 지휘술은 명지휘관인 을지무발 당주님이 했던 것을 그냥 흉내 냈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돌궐 놈들이 어떻게 대응을 할까?”
“적들이 쳐들어오는 데! 일단 집결하지 않을까요?”
“음....”
사실 돌궐입장에서는 처음 외세에게 공격을 당하는 셈이었다. 하늘아래 모든 영토가 대칸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돌궐이 분명히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장교들의 생각했다. 온달의 동기생인 설연이나 마위도 그런 견해를 말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 탄탄한 얼굴을 가진 온달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을지무발의 눈에는 하는 행동과 달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 온달이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는 것이 너무 티나 났다.
‘참나! 온달 저놈은 나서는 것은 참 좋아는 것 같아.’
결국
“온달 네가 돌궐군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웃으면서 을지무발은 고기가루 죽으로 식사를 하는 척하고 있는 온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매우 들든 태도로 온달은 즉시 견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계찰대라면 일단은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의외에 대답에 당주는 즉시 반문했다.
“돌궐군이 여름철에 모두 산계해서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아니!”
온달은 자신이 잘 못 말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정정해서 이유를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싸우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순간 막사 안에 모든 사람들은 온달의 말을 이해를 할 수는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싸우기 싫다니 무슨 뜻인가?”
부대 내에 2인자격인 오도는 온달의 견해에 어이없어하면서 질문했다.
“그들은 여름철같이 싸우기 싫고 어려울 때는 단순하게 도망갈 것입니다.”
을지무발도 이해가 안 되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니 온달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고개는 약간씩 기울어저 있엇다.
온달은 자신의 견해를 모두 이해 못하자 난감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차분히 정리해서 설명하였다.
“지금 여름철에 돌궐의 최약체로 힘이 떨어질 때입니다. 암말들은 새끼를 배고 있을 것이고 숫말들은 침 흘리면서 암말 꽁무니나 돌아다닐 때니까요! 그들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말들이 힘을 못 쓸 때입니다.”
모두들 온달의 말은 고흘장군도 출정 전에 하신 말이니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달의 다음 말에는 동의가 좀 어려웠다.
“그런 가정 하에서 강력한 고흘장군의 부대와 그들은 싸우고 싶지 않겠지요. 자기들도 무슨 수를 써도 고구려군을 이길 수가 없다고 판단 할 것입니다. 아무리 전쟁에 이 골이난 병사들이 싸우기가 싫은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군율이 뚜렷하고 조직이 잘 통제가 되는 군대는 병사들이 그런 말을 입 근처에도 내뱉지를 못할 것입니다. 물론 조국이나 상관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수도 있고 단순히 벌로만 생각한다면 군율에 의해 전투명령불복종은 즉결처형이니까요!
하지만 유목족들은 그정도에 깔끔한 조직이나 규율이 없습니다. 기본적인 것뿐이지요. 생존이 절박해지지 않는 이상 여름철같이 풀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평화로운 분위기면 양떼나 돌보면서 가족들하고 지내고 싶어 하지요! 다시 말하자면 상대하기 까다로운 고구려군이 다가오면 일단 피해보자는 식으로 단순하게 그냥 서쪽으로 가자 이럴 것입니다. 옛날에 유연과 위(북위)의 간의 싸움에도 그런 선례가 있습니다.”
뒷부분에 온달의 설명에는 모든 장교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단순하게 돌궐군은 군대가 아니다 이런 말이지. 거의 기분 따라 움직이고.”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들은 을지무발은 온달의 견해를 정리하였다.
“정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온달은 당주님의 정리가 옳다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했다.
“그러면 계속 후퇴할 것이다. 자신의 영토가 유린당해도?”
오도가 동의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초원은 일부 점령해도 돌궐에는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들에게는 토지이라는 계념은 농경민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집단별로 이동해 가면서 토지에 풀과 숲에 자원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온달은 상관인 오도를 바로 응시하면서 대답하였다.
“하지만 돌궐칸은 추장들에게 초원의 땅을 분배하지 않은가?”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들의 초원은 우리와 달리 성이나 도시나 마을은 거의 없습니다. 잠시 동안 우리에게 맡기어두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넓은 초원을 다 불태울 수가 있을 것입니까?”
막사 안에서 그의 말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온달은 끈질기게 견해를 피력했다.
믿을 수가 없지만 오도가 만약에 온달의 말이 옳다는 가정 하에서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계속 후퇴하다가 10만 고흘장군님을 끌어들여서 포위하겠다는 작전이겠군!”
“아마 작전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생존의 위협받을 정도로 초원의 영토를 잃었을 때 아마 총력전으로 나올 것입니다.”
온달은 말을 하면서 속을 다른 생각을 하였는데…….
‘아마 이계찰대는 아마 그런 위기 상황을 일부러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고구려군은…….’
그때 당주님의 질문 때문에 그 생각을 끊었다.
“너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였냐?”
온달은 역시 거침없이 대답했다.
“옛날에 위대하신 광개토태왕의 거란정벌전과 그 분의 아들 장수태왕의 지두우정벌등에서 보인 유목족의 행동을 보고서는 생각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은 영락 5년(연호 서기 395년)에 요동과 부여지역에 안전과 후연침공을 위해서 요해 지방에서 사는 거란을 친정하시여서 고구려의 속국화를 시작하였다. 이후 유목족인 거란족대부분은 북위과 군소유목족들을 충격으로 몰고 간 장수태왕의 지두우 정벌을 보고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고 만다. 장수태왕은 북방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물길 같은 반 고구려세력들이 북위에 교섭을 막고자 초원의 패자인 유연과 동맹을 맺고 두 세력 사이에 있던 지두우를 분할했다. 동시에 그는 숙신에 지배권을 더욱 확고히 하고 마지막으로 고구려에게 대항하던 물길을 잇달아 공격하여 굴복시키는 전략을 수립했다. 고구려의 동맹국인 유연을 제외한 모든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장수태왕의 아들인 문자명왕시기 고구려의 강력한 힘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고구려는 한족들이 사는 황하 진출보다는 서북방과 동북방의 유목족지역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대릉하, 요하, 압록수, 살수, 패수(대동강), 한성일대(현재 황해도), 아리수(한강)같은 많은 농업지역을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황하일대로 힘들여서 갈 필요도 없었다. 차라리 눈을 돌려서 궁핍하고 물자가 부족한 북방유목족들을 생필품을 제공하면서 명마와 전투원인 기병을 공급받을 수가 있다. 그와 동시에 고구려는 북방을 안정시켜서 요동과 부여의 안전을 확보하고 초원을 따라 서역과 교역망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도 부국이라고 불리지만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시기에는 온 천하의 모든 부가 고구려로 집중되던 좋은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목족들과의 전쟁과 교역은 고구려역사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온달은 그들의 풍습을 읽은 것이었다.
유목족의 부에 대한 탐욕과 그렇게 된 이유 동시에 단순한 행동, 귀찮음.
그리고 생존의 위기를 느끼면 그들이 어떻게 되는 지.
사실 온달은 학문 쪽에서 멍청해도 역사 부분에 군사(軍史)를 꾀고 있었다. 어떻게든 군대에서 성공하게 위해서 역사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고구려의 사학자중에 손에 꼽히는 이문진 박사를 졸졸 따라 다녔었다. 글자도 제대로 때지를 못했지만 어떻게든 박사님의 서재를 눌러 앉아서 박사님에게 질문하면서 100권이 넘는 유기를 세 번이나 읽었다. 그 집념에 놀라서 이문진박사는 온달에게 관심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다른 장교들에게 비판 받았다.
“온달 거란하고 지두우같은 약소부족들과 돌궐은 성격이나 차지한 지역, 규모등 모든 것이 틀린 종족들이야!”
“그 강대하던 유연도 10년 안에 몰락시킨 잔악한 늑대들이다. 게다가 돌궐은 칸의 명령에 바로 60만은 징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너무 돌궐을 낮추어 보는 것 아니냐?”
온달은 일일이 대응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당주님과 동기생인 설연 마위 3명을 제외한 6명에게 집중공격을 받다보니 답변으로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1각동안 반론을 피던 온달은 스스로 입을 닫았다. 왠지 자신이 상관에게 대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꼭 필요한 것에는 완벽주의자이자 왕고집이었던 온달도 이 당시 군생활에 적응하면서 맞추어주어야 될 때는 자신의 의견을 잠시 접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온달은 진심으로 잠시 접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을지무발은 토의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안하면서 팔짱을 끼고 온달을 쳐다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온달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양성 안학궁
정무를 보고 있던 태왕은 가드다란 눈으로 갑자기 옥좌 아래에 서있는 어린 12살나이에도 풍채가 준수한 태자를 보았다. 무슨 고집인지 태자는 태자비가 될 미한이가 궁에 들어온 뒤에 매일 태왕이 옆에 서있었다.
‘그런다고 주씨의 피가 흐르는 너를 태자로..’
태왕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내쫒을까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러기에는 좀 찜찜했다. 자신이 어린 태자를 너무 몰아내 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태왕은 태자에게 정신 사나우니까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사실 태자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배후에는 태자비가 될 미한이 있었다. 어차피 감시당하는 상황에 차라리 아버지 곁에 앉아서 정치라도 배우라고 말을 올린 것이었다. 태자는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은 싫었지만 미한의 강권에 곁에 앉아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한은 혼례도 안 올렸는데도 태왕은 궁에 있을 것을 명했다는 것이었다. 태왕은 귀족들이 왕실일인 태자문제로 거론하는 것을 보기 싫었고 따라서 이번 혼약을 빨리 치루고 싶었다. 그러나 돌궐과의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이 흐트러지자 혼례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상관없다는 식으로 태왕은 전격적으로 미한을 여기에 살게 한 것이었다. 신료들은 예에 안 맞는다고 했지만 태왕 양성은 규범은 중요하지만 목매듯이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연히 태자와 태자비 미한 둘이 밤중에는 같이 있지는 못하게 했다. 태자 대원은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3살이 모자란 12살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라?”
폐비 주씨의 자결이후 왕후궁에 주인이 비어버리자 왕실의 여인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중리부 총책 고필장군의 말을 듣고 태왕 양성은 굉장히 불쾌해졌다. 항상 무표정으로 옆에 있던 어린 태자도 어이없는 표정을 질 정도였다. 그녀들은 외척에 시달린 태왕이 아주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고구려와 내부 왕실을 대표하려는 국모가 되려하였던 것이었다. 태왕은 누가 시켜주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다니 그녀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고필의 입에는 태왕의 할머니뻘에 여인들이 읊어졌다. 태왕은 기가 막혔다. 15만 장병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거란족이 사는 요해(遼海)일대에서 피를 뿌리고 있는데 모범을 보여야할 왕실의 여인들이 암투를 벌리다니…….
“당장 그년들을!!”
입에서 막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9척 거구에 태왕은 불쾌를 뛰어넘어 진노하였다. 그러자 왕실의 종친이고 한 고필은 태왕을 말리며 말을 올렸다.
“태왕폐하! 그 여인들은 왕실의 웃어른입니다.”
태왕에 모두 할머니 벌이고 심지어는 항렬(行列)이 4대 손위도 있으니 함부로 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고필은 말하였다. 침작하게 생각을 가다듬은 태왕도 결국 옥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오? 장군의 말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 아니요.”
또렷한 눈을 가졌지만 고필도 태왕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태자는 순간 딴 생각을 하였다.
‘모든 순리대로 이 일을 해결하려면 그 방법이 최선인데!’
태자의 표정에 무슨 변화가 일자 태왕은 순간
“너는 이런 황망한 상황에 무슨 딴 생각을 하는 것이냐?”
고필은 자신의 또렷한 눈을 크게 뜨며 태왕을 쳐다보았다. 폐비가 죽은 이후 태왕이 태자에게 처음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태자가 생각하는 것을 태왕도 동시에 생각한 것이다. 태왕은 그것을 눈치체고는 그냥 화가 난 것이었다. 이번 일을 조용히 해결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첫째는 태왕이 새 왕후를 맞이하여 비어있는 자리를 매우는 것이고
둘째는
“여봐라! 당장 명화공주를 데리고 오너라!”
태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천정을 쳐다보면서 말을 하였다.
“누가 한데!”
명화공주는 말을 듣고는 그런 말을 했다.
궁궐 밖에 나와서 말을 타면서 공주는 시내구경을 하다가 난데없이 중리부 군사들이 자신을 찾고서는 즉시 입궁하셔야 된다고 말했다. 역으로 명화공주는 먼저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대라고 추궁하였다. 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공주에게 이야기를 했다. 공주는 자신이 돌궐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궁에 안살림만이라도 맞아주라는 명을 아버지인 태왕께서 내리셨다는 말을 들었다. 궁에 일만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공주는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나를 이용할 생각이신 거야! 그러고선…….’
공주의 가장 가까운 시녀인 수현은 그래도 입궁해야 된다고 하면서 반은 강제로 공주를 궁으로 모셨다. 태왕폐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기 때문에 수현은 무례를 무릅쓰고 한 행동이었다. 공주도 그런 수현에는 화를 내지 하지 않았다.
명화공주는 들어오자마자 아버님에게 바로 않고 시녀들에게 그녀가 가진 고급스러운 수백 벌에 옷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가져오라고 하고 몸을 단장을 하였다. 수현은 그래도 아버님에게 잘 보이려한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시녀들이 몸단장을 하는 동안에 청동거울로 자신의 단아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몸단장이 끝났다는 수현의 말을 듣자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동궁을 나섰다.
마치 전선에 출정하는 사람들 같은 결심에 찬 표정을 지면서.
“아버님 오랜만이옵니다.”
명화공주는 높은 옥좌에 앉아 있는 아버님에게 정말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태왕은 친딸의 오랜만의 인사를 받는 마는 둥했다. 솔직히 그는 딸에게 문한인사를 안와도 신경 쓰질 않았다. 아래에서 공주와 같은 높이에 서있는 고필장군과 함께 있던 태자는 여전히 어머니와 닮은 공주의 얼굴을 보지 못한 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려워했던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시선을 자신의 여동생에게 돌렸는데 오늘 정말 화려하게 옷을 입고 나왔다.
공주가 좋아하는 붉은 색 계통에 옷이었지만 금색실로 무늬가 정말 과하다할 정도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긴 머리에다가 큰 가체까지 썼는데 인사를 올리며 고개를 숙일 때는 무거워서 태자가 고개를 들 수 있을까라고 생각 될 정도였다. 사실 태자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인 명화공주는 정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태왕은 간략하게 지금 상황을 말하고는 공주가 궁궐의 안살림을 과악 잡으라는 말을 하였다.
“네가 이 나라에 여자 중에 제일 윗사람이니 당연히 해야 한다. 매사가 공정하고 엄격하게 하라!”
태자는 아버지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와 딸의 대화라기보다는 극히 정치적이고 건조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명화가 나이가 12살인데 잘해낼까? 정말 아버님은 이런 식으로 말을 못하시는 분이신가?’
태자의 실망한 얼굴을 지었지만 아버지의 말에도 단아한 공주는 태연했다.
“아버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제가 하는 것이 하늘의 순리를 따른 것이옵니다.”
태왕은 역시 딸을 보지 않았지만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화공주가 의외로 고분하자 태자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모두가 경악할 비극적인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아버님 그런데 두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키가 작은 고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청이라니?’
태왕은 갑자기 공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 보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의외에 말에 고개가 그냥 간 것이었다. 그 곳에는 자신이 버린 왕후와 똑같이 생긴 단아한 모습에 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 청을 말했다.
“첫째는 궁내에 시녀들의 인사문제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시지 않는 것입니다.”
“뭐라?”
그녀의 아버지인 태왕 양성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과 함은 모든 인사의 기본 아닙니까? 아버님께서도 8년 동안 뜻에 맞는 사람만 고르고 계셨지 않으셨습니까?”
명화공주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버지가 왕실의 두 기둥인 고흘장군과 고필장군을 이용하여 측근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꼬집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른인 고필은 아직 12살에 어린 공주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자는 여동생의 생각을 읽고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들썩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두 번째는.”
“명화야!”
태자는 참지 않고 공주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태왕은 손을 들면서 태자를 막고 공주가 계속 말을 하라고 했다.
“일단 말해 보아라!”
태왕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는 눈빛으로 딸인 공주를 바라보았고 딸도 자신의 요구를 바로 대답했다.
“어머니이신 왕후폐하의 장례를 다시 왕후의 격식에 맞게 하여주십시오.”
공주의 말이 끝난 순간 북쪽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는지 중궁은 얼어버렸다. 명화공주는 아버지가 제일 증오하는 주씨가문에 여자인 어머니 주실의 복권을 요구한 것이었다.
태자와 고필의 얼굴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으으으....”
옥좌위에 태왕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고 진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중궁에서 공포에 가까운 추위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활활 증오로 타올랐다. 자신을 고고한 눈으로 쳐다보던 폐비 주실이 생각났다.
대국 고구려를 혼란에 빠뜨리고 왕실을 능멸한 주씨가문에 여자.
자신이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여자.
그럼에도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너무나도 당당했던 그런 여자.
“그 년의....딸이 짐...을 능멸하고 있도다.”
태왕 양성은 마음속에 진노가 입에 튀어 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당황한 고필은 서둘러 바로 공주님에게 말을 거두라고 하였지만 명화공주는 다음 말을 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부부가 같이 묻힐 무덤을 만드는데 당연히 기혼자인 태왕도 화려한 벽화를 그린 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태왕의 배후자인 명화공주의 어머니 폐비 주씨는 태왕의 무덤이 아닌 그냥 평토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명화공주는 그것까지 집고 넘어갔다.
“천손을 낳으신 어머니께서 영혼을 보호해줄 사신들도 그려지지 않은 곳에 계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버님의 무덤은 크고 수많은 수호신들이 그려져 있으니 어머님의 영혼이 보호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년이!”
분노를 못 참은 태왕은 옥좌에 있던 옥으로 만든 연적을 공주에 머리 집어 던졌다.
[팍]
공주는 연적을 얼굴에 눈가에 맞아도 아픈 소리 없이 아버지인 태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연적에 맞은 공주의 눈가는 찢어져 붉은 피가 흘렀다. 오라버니인 태자 대원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감고 말았다. 말리고는 싶었지만 아들 대원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아버지와 싸우기가 싫었다. 왕실의 웃어른인 고필은 나서서 태왕을 말리고 불효를 저지른 공주를 꾸짖었지만 부녀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주씨가문이 이 나라에 끼친 패악을 모르고 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태왕의 분노에 딸은 바로 반박했다.
“아버님! 주씨가문이 아무리 그렇다하여도 어머니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어머니가 과연 역모에 관련된 증거가 있사옵니까?”
피를 주르륵 흘리지만 딸은 언제 머리를 맞았냐는 식으로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반격을 하였다. 사실 왕후가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태왕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숙청이었지 주씨가문이 역모를 꾸미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명화공주의 갑작스럽게 도전적인 행동에 놀랐는데 어머니의 자결 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명화공주가 이렇게 성격이 바뀐 것은 태학에 만난 온달 때문이었다. 온달은 어린 공주에게 분명히 자신에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복수할 것이라고 했다. 내내 그런 마음을 온달은 숨겼지만 눈치 빠른 공주는 그가 증오하는 것은 바로 이 나라 고구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조국을 배신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고구려의 현재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을.
그것을 본 명화공주는 그때부터 어머니 복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온달처럼 시련에 울면서 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온달과 명화공주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허를 찔린 태왕은 바로 말을 하고 증오의 눈빛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으으 저저...저년을.”
명화공주의 얼굴은 연적을 맞아 피범벅이었지만 아버지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감정으로 역시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부녀간에 증오는 이제 건널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태왕폐하 지금 출정중인 막리지 고흘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밖에 내관들이 말을 아뢰올리자 태왕과 공주 간에 싸움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태왕은 무슨 시간이든 북방에 전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무조건 먼저 말하라는 명을 했다. 부녀간에 난투극을 보고 있던 태자와 고흘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태왕은 시녀들에게 당장 명화공주를 끌어내려고 엄명을 내렸다.
“짐이 더러운 주씨의 피가 흐르는 너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태왕의 가시 돋친 말에 공주는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말을 올리려고 했지만 모시고 나가려는 시녀 수현은 공주의 팔을 꽉 잡았다.
“공주님 제발.....”
결국 공주는 중궁에 나와 태왕이 듣지 못하는 장소에서 이마에 흘린 피를 손을 닦았다. 그리고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보면서 중얼 거렸다.
“더러운 피가 흐르는 저도 아버님한데 기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뭐라고 막리지가 가한정(카라코름인근 외몽고 중심부)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냐?”
태왕은 아까 전까지 딸인 명화공주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냉정하게 고흘장군의 보고를 듣지 못하다가 그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보고자인 중리부에 서열 3위인 중리대형인 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돌궐의 수도 근처까지 진격했으니 우리에 대승 아니옵니까?”
중리부 총책임자인 고필을 말을 올렸다. 하지만 태왕은 턱을 괘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는 있었느냐?”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를 쓰면서 태왕은 질문을 하였다.
“고흘장군이 무서워서 모두 도망가기 정신없다고 합니다.”
“아무리보아도 이상하다.”
태왕은 무엇인가 이 전쟁이 크게 헝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한정이면 어기서 평양에서 수천 리도 넘는다.
그런 정도 거리에 보급을 유지할 수가 있는가?
그 정도의 영토를 유지 할 수 있는가?
왜 6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돌궐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가?
하지만 태왕 양성은 고흘장군을 정말 믿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태자시절 신미년전쟁때 고흘이 만 명의 병력으로 15만 돌궐군을 물리칠 때의 용맹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라면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겠지만…….”
15년 전
고흘장군의 전승신화가 열리기 시작했던
단기 2884년 서기 551년 양원태왕 7년 신미(辛未)년
불타는 요동일대
고-돌 1차 전쟁은 돌궐군의 대규모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돌궐은 숙적 유연을 완전 토벌한 단계가 아니었지만 북방의 주도권을 두고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초원통일을 이루려는 돌궐입장에서는 유연을 꺾는다고 할지라도 고구려가 지배하는 거란과 실위, 말갈을 빼앗지는 않고는 미완성의 유목세계 통일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돌궐의 숙적인 유연에 동맹국이었다. 유연의 패잔병은 대부분 서위로 도망갔지만 일부는 동맹국인 고구려로 투항했다. 돌궐을 당연히 유연백성들을 소환은 요청했고 고구려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깨끗이 거절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하일대의 국가인 서위 우문태가 유연의 칸과 3천명의 대신을 돌궐에 죽음의 송환한 것과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고구려가 돌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거란과 실위는 고구려에서 돌궐로 이탈될 것이고 대국 고구려는 순식간에 해체될 수도 있고 고구려의 실력자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이로써 고구려와 돌궐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고흘이 중심이 된 고구려군 수뇌부는 내란과 나제연합군의 위협으로 선제공격을 생각할 수가 없었고 결국 철벽 방어선인 요동으로 끌어들여서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즉시 고구려는 요동일대의 성들을 개축하거나 수리하여 거란족과 말갈족을 단속하는 등 전쟁준비를 하였다. 이런 고구려의 민감한 대응에 신미년 돌궐의 창업자 토문대칸은 고구려에게 말도 안 되는 서신을 보냈다.
[평성(양원태왕)이 나라를 잘 못 다스려 고구려의 혼란이 7년이 되었다. 이는 평성과 고구려백성이 돌궐에게 불충함으로 위대하신 텡그리께서 재앙을 내림이니라. 당장 평성은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해가 뜨는 곳부터 지는 곳까지 돌궐의 영토임을 증명하라]
추신으로 유연의 난민 전원송환과 서역과의 교역에 고구려 상인 참여금지(즉 돌궐의 서역과의 독점교역을 인정하라는 것), 거란과 말갈, 실위족의 할양을 고구려에 요구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돌궐의 요구에 당시 고구려의 실권을 잡고 있는 주씨가문은 정적이지만 군부의 실력자 고흘과 손을 잡고 돌궐 사신을 죽여서 그대로 초원으로 보냈다. 물론 돌궐의 토문대칸이 노발대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신미년 정월 충복인 이계찰대에게 돌궐군 총 20만 대군을 맡기어 출병시켰다. 이로써 기나긴 18년간 고구려 돌궐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단 흰늑대 이계찰대는 직접 5만을 이끌고 요해에 거란족 토벌을 하고 돌궐에 공성전의 대가 타르미에게 15만은 맡기어서 요동으로 보냈다. 처음 요동에 출정한 돌궐 15대군은 첫 목표를 신성으로 잡고 요하를 건너 공략하기 시작했다. 신성은 요해 요동 요서 부여 4지역에 교차점으로 요동 최고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신성이 무너지면 요동방어선을 평야지대인 부여를 우회하여 남쪽으로 돌아서 부수도인 국내성에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신성은 고구려의 급소이다. 너희들은 이 곳 신성을 지키는 병사들이니 목숨을 가벼이 하지 말고 성을 지키라!”
신성성주 흠량의 명령에 오천 병사들과 성민들은 돌궐에 15만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치열한 농성전을 벌렸다. 신성의 치열한 방어전에 돌궐군은 황하에서 잡아온 한족출신병사를 동원해서 공성장비를 제작하고 대공세를 펼쳤다. 고구려군의 투석기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공성장비를 파괴하려고 했지만 곧 신성은 한족이 만든 공성장비를 통해 날아든 돌궐군의 화시공격에 불바다가 되었다.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신성 내에 모든 건물은 밖에서 날아든 불화살에 모두 타 버렸다.
“불을 꺼라 불을!!”
하지만 흠량의 고구려군은 성안의 물과 흙으로 소화시켰다. 하지만 그 공격으로 고구려군은 이천여 명이 질식하거나 불타죽었다. 후일 돌궐군이 철수한 후에 한 달이 지났어도 이 시체들을 못 치웠는데 때마침 신성을 방문한 고구려 군 수뇌부인 20명 장군 중에 고흘을 제외하고 모두 참극을 보는 것을 못 참고 바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서서히 신성은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정작 태자 양성의 명령으로 출정한 고흘은 만 명의 군사를 이끌 와서는 국내성에 주둔하여 신성공방전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방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신성밖에 주둔한 돌궐군 15만 대군을 겨우 고흘장군의 만여명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 고흘은 정보와 타협에 능한 부관인 연자유의 아버지인 연명안을 통해서 요동일대와 국내성일대에 성주들에게 양원태왕에게 충성을 하도록 설득을 하고 있었다. 태왕이 즉위한지 7년이 넘었지만 요동과 국내성일대는 주씨가문의 허수아비인 양원태왕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강했기 때문에 고흘은 그들이 돌궐과 내통할까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특히 백암성주 위류의 움직임을 걱정했는데 그는 이전에 양원태왕과 주씨가문에 숙청당한 선대 안원태왕의 셋째 왕비가문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었다.
“백암성주 위류가 제일 문제다. 요동일대에 직급은 낮지만 추종자가 적지 않다.”
고흘장군의 말에 날카로운 눈빛에 고구려 최고의 정보공작에 대가인 연명안은 바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정보원과 자객들을 풀어서 지금 요동일대 성주들은 모두 저의 손바닥 위에 있습니다.”
신성이 돌궐에 떨어지는 것보다 요동과 국내성에서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면 돌궐군에는 더 큰 이득이다. 그때 백암성주 위류가 상급자인 고흘장군을 자신의 백암성에서 적을 칠 계책을 논하자고 총사령관인 그를 불렀다. 연명안은 위류의 고얀 행동에 분노하여 암살을 요청했지만 고흘은 일단 요동의 배후 요충지인 오골성 인근에서 만나자고 그와 했다.
백암성주는 중앙에서 왕명으로 출격한 고흘이 조금 두려운 나머지 성에 오천 군사를 이끌고 왔지만 풍채 좋은 흰 수염을 가진 고흘은 고작 부관 연명안과 호위병력 5명만을 이끌고 왔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진 위류는 휘하병력으로 고흘을 위협하면서 자신이 나이가 더 많고 무공 또한 높으니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다.
고흘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하기는커녕 불같이 화를 내며.
“군사를 오천이나 몰고 왔으면 백암성을 비어있는 것이고 돌궐군이 비어있는 성을 공격하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네가 과연 이 나라의 요충지인 백암성이 지키는 성주라는 말이냐? 추모성왕과 수많은 선대 태왕폐하 그리고 신성에서 불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순간 부끄러움을 느낀 위류는 칼을 떨어뜨리고 고흘의 호통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자신의 생각 없는 행동에 모든 긍지를 잃은 그는 얼굴이 흙빛이었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느낀 위류가 굴복하자 고흘은 화를 멈추고 웃으며 위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대 때문에 우리가 돌궐족들을 요동에서 내쫓을 계략을 필 수가 있겠소이다.”
돌궐군은 한족기술자들을 동원했지만 흠량의 저항으로 신성공략에 계속 실패하자 인근 지역을 분탕질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백성들의 치열한 항쟁으로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때 백암성주의 위류의 서신이 도착했다.
[나라를 망친 주씨가문의 허수아비인 평성(양원태왕의 이름)을 따를 수가 없어서 오골성에 쳐들어가서 평양에서 파견된 고흘장군의 목을 베어 가지고 가니 돌궐 추장 이계찰대는 신 위류를 받아주십시오! 지금 오골성주가 배신자인 저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부디 백암성에 오셔서 저를 구해주시옵소서]
하지만 이계찰대는 그 곳에 없었다. 그는 고구려의 속국인 거란족들을 공략하고 있었다. 당시 거란족은 고-돌전쟁 후반기처럼 초토화에 직면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고구려의 명을 받아 돌궐에 대항했다. 이계찰대는 한달이면 거란족평정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을 했음에도 두 달이 지나도 성과가 없었다. 그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들이 치고 빠지기로 나와서 진압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 지휘관인 이계찰대는 요해에 발이 묶었고 결국 황하 침공에서 뛰어난 공성술을 보이고 자신보다 전술에 뛰어난 타르미에게 요동을 맡긴 것이었다.
타르미는 고구려가 왕위계승전쟁으로 반란이 잇따르고 있고 특히 백암성주 위류는 평성의 즉위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알고 있던 타르미는 성주가 없는 오골성까지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성 포위를 풀고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남서쪽인 백암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성은 화공에 연이은 한족출신 돌궐군 공성병의 집요한 공격중에 신성성주 흠량이 돌궐군의 독시에 맞고 쓰러지는 등 최대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때 포위가 갑자기 풀리자 신성의 군민들은 돌궐군의 거짓 후퇴인 줄 알고 더욱 경계했지만 대부분 돌궐군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서로 얼싸안고 울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여기서 신성성주 흠량은 독시에 오른팔을 잃었지만 돌궐군 15만에 맞아 67일간 신성을 수호하여 신미년전쟁에 고흘과 함께 1등 공신으로 오른다.
돌궐군 지휘관 타르미는 말을 타고 15만 기병을 이끌고 백암성에 도착하니 위류의 환영 대신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을 것이다]
“이런 개자식을 보았나!!!”
백암성주 위류의 거짓항복에 분노한 타르미는 백암성 공략을 명령했지만 그는 성을 보자마자 포기했다. 작은 성이지만 성문은 서문뿐이고 동벽은 절벽인데다가 강까지 흐르고 있는데다가 엄청나게 높은 성벽 그리고 완벽한 치로 인해 공략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신성공방전으로 탈진 상태인 돌궐군 15만은 헛걸음에 허탈하며 싸울 의지를 잃었다.
그 때 고흘장군이 평양과 국내성등지에서 10만 대군을 몰고 온다는 소문이 돌궐군 진중에 퍼졌다. 지친 15만 돌궐군은 고구려군의 대반격에 관련된 유언비어로 순식간에 공황 상태로 빠졌다.
“이 놈들 당장 칼을 내려놓지 않겠느냐? 나는 사령관 타르미이다.”
“고구려군의 계략에 빠진 멍청한 지휘관 죽어라!!!”
“으아아악!”
혼란에 빠진 돌궐군은 독전을 주장하는 자신의 사령관 타르미를 죽이고 서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실 고흘장군의 병력은 여전히 만 명뿐이었다. 다만 돌궐군은 정보공작에 뛰어난 연명안의 거짓정보에 속아 넘어갔을 뿐이었다. 백암성에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고흘이 손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는 단계였다. 드넓은 벌판에 돌궐군 15만이 공황 상태인 것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고흘은 불과 만 명으로 백암성에서 일격을 가해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는 돌궐군들을 강으로 막혀있는 요하로 몰았다. 일단 대세가 기울기 시작하니 눈치를 보던 요동일대 성주들이 병력을 이끌고 고흘에게 와서 태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돌궐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양원태왕의 충신인 고흘장군의 계략과 전술에 놀란 요동일대 실력자들은 다시는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잊지 않았다. 고흘장군의 병력은 순식간에 8만으로 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상승의 용장 고구려의 호랑이 고흘과 불패의 지장 돌궐의 흰 늑대 이계찰대와의 첫 번째 전투인 요하 총퇴각 전에 그 시작이었다.
요해에서 거란족을 제압 중이던 이계찰대는 백암성의 투항소식을 듣고 함정이라고 판단하고 5만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했지만 상황은 파멸적이었다.
“대칸께서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너희들의 자식들을 돌궐의 자랑스러운 용사로 쓰시겠느냐? 노예로 쓰시겠느냐?”
이계찰대는 추상같은 질책으로 대혼란 중이던 15만 요동출정 돌궐군을 진정시키고 타르미를 죽인 돌궐병사를 참살했다. 이로써 돌궐군의 공황상태는 해소되었다.
“전군을 요서로 후퇴시킨다. 당장 너희들은 요동에 있는 부대를 수습하라! 나는 도망갈 길을 만들겠다.”
결국 이계찰대는 이제는 후퇴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요하일대에 한족출신공병들을 총동원해서 무려 3개의 부교를 설치했다. 고흘은 요하에 돌궐군을 몰아서 포위상태에서 중갑기병의 일제 돌격으로 대섬멸할 생각이었지만 이계찰대의 만든 부교가 모든 것을 망처 놓았다. 15만 돌궐군들은 그 부교로 죽음의 요동에서 요하를 건너 요서로 필사의 탈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성스러운 땅을 유린한 돌궐군을 보내서는 아니 된다. 저 부교를 파괴해야 된다.”
요동을 유린한 돌궐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고흘은 전투력이 뛰어나고 전원이 사병이 아닌 전투장교로 이루어지고 돌궐어에 능숙한 결사대 천명에게 돌궐군으로 변장하여서 잠입한 뒤 부교파괴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 사이에 고흘은 공병들에게 투석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밤중에 고흘의 명을 받은 결사대가 기습공격을 하여 돌궐이 만든 2개의 부교를 불태우거나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고흘은 결사대원에 400여명에 달하는 실종자 명단으로 보고 놀랐는데 자신의 둘째 아들인 27살 고창이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그는 두 아들이 전투에는 참전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둘째 아들이 어디 배속된 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첫째아들인 상은 대형(대대장급)이라서 지휘부에 자주 마주쳤지만 둘째 창은 아직 소형(중대장급)이었다. 그렇지만 보통 군에서는 장군의 아들은 직급이 낮건 높건 아버지 곁에서 보좌하는 부관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총사령관 고흘은 둘째아들을 그냥 인사부처에 맡겼다. 고흘은 장군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권 같은 것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서 그런지 고창은 전투장교로 가기를 원했고 그쪽으로 배속되었다. 아버지를 속 빼 닮은 고창은 적군에게 포로로 붙잡혀서 퇴각작전을 지휘하던 돌궐 총사령관 이계찰대에게 끌려왔다.
“네가 호랑이 고흘의 둘째 자식이냐?”
돌궐의 극동대왕인 이계찰대는 검은 수염을 만지면서 고창에게 물어보았다.
“그렇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이시자 이 나라 대 고구려의 시조이신 추모성왕의 23대손(광개토태왕릉비기준)이자 천하를 평안하게 하신 광개토태왕의 5손이자 요동주둔 고구려군 최고 사령관 위두대형 고흘의 둘째아들인 소형(대위급) 고창이다. 냄새나는 늑대의 자식들아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라.”
고창은 죽음을 앞두어도 슬프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았다.
“천제를 논하다니 너는 하늘아래에서 모든 땅의 지배자가 오직 대칸임을 모르는 우매한 자구나. 나의 위대한 조국인 돌궐은 건국된 지 20년도 안되었지만 대국인 유연을 격파하고 위나라를 굴복시키고 고구려가 지배하는 요해와 요동을 유린하였다. 추모성왕이 건국한지 20년이 되는 때에는 성스러운 부여보다도 약한 약소국이 아니었는가? 해처럼 떠오는 돌궐의 찬란함이 고구려보다 크지 않은가?”
이계찰대는 채찍으로 억지로 무릎을 꿇은 고창에게 가르치면서 소리쳤다.
“참새를 어떻게 봉황과 비교하고 쥐새끼를 호랑이와 견주겠느냐? 우리 고구려는 건국된 지 600년이 다되어가는 데 너희는 20대 청년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하늘에 법도를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예의를 깨닫지 못하고 어르신에게 큰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손의 후예인 내 창이 용서할 것이니 당장 나의 아버지이신 고흘장군에게 항복하라!”
이계찰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당찬 모습을 유지하는 고창을 아들로 둔 고흘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 자는 돌궐에는 크나큰 혹이 될 것이다. 당장 목을 베어라! 다만 몸은 부자의 연을 생각해서 아버지 고흘에게 보내어라.”
그렇게 해서 그 날 새벽에 고흘장군은 자신에 장성한 둘째 아들의 목 없는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잠시 아들의 시신을 보고는 왼손을 잡고 웃으며 말을 했다.
“창아! 너는 정말로 아버지인 나를 기쁘게 한 효자이다. 천손의 명예를 당당히 지켜냈다.”
그 모습을 본 8만 고구려군은 큰 감동을 했다.
고흘장군의 모습에 의기가 충천한 8만 고구려군은 다음날 요하에서 퇴각중인 15만 돌궐군에 총공세를 펼쳤다. 하나 뿐인 부교 인근에 있는 언덕에 투석기를 설치해서 투석하여 부교를 파괴한다고 잔존 돌궐기병을 1만기에 중갑기병으로 밀어버린다는 것이 고흘의 작전이었다. 하지만 흰늑대 이계찰대도 작전을 알아채고 인근에 투석이 가능한 언덕을 사수할 것을 명령하고 퇴각을 지휘했다. 피해가 막대한 돌궐부대들이 먼저 도하를 하고 비교적 손실이 적은 부대가 각 거점을 수호하였다. 고흘은 자신의 장자인 32살에 대형 고상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내 동생 창을 죽인 이계찰대의 간을 씹으리라!!”
동생의 시신을 보고 분노한 고상은 아버지에게 선봉을 맡겨 줄 것을 간청했고 고흘은 허락하였다. 드디어 1차 고돌 전쟁에 마지막인 요하 총퇴각전은 절정에 달았다. 선봉 만 명을 이끌고 진격을 한 고상은 투석이 가능한 언덕을 손쉽게 장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계찰대의 계략이었다. 그는 일단 요충지를 내주고 투석기를 설치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고구려군에게 돌궐군 3개의 부대로 역공격을 가했다.
“위대한 대칸을 위하여! 용맹하신 흰늑대 이계찰대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6만 돌궐군은 언덕위에 위치한 고흘의 장자 고상의 만여 명의 고구려군으로 일제 돌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전투지역에도 돌궐군은 총퇴각을 앞두기 전에 대공세를 펼쳤다. 고구려의 포위망은 급격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고흘은 이계찰대의 지휘 하에 패전 직전의 돌궐군이 완벽한 협동전술을 피고 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그는 각 전투지에 예비대를 파견하고 돌궐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위기에 처한 자신의 장자인 고상에게는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호랑이 고흘의 아들인 고상 또한 호랑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진을 순식간에 재편하고 반격하면서 언덕위에 있다는 이점을 적절히 사용해서 끝내 고지를 사수했다. 이에 고흘은 장자 고상이 1각(2시간)동안 돌궐군을 저지하면서 지치게 하자 반격의 틈새를 잡고 총공세를 가했다.
고구려군과 돌궐군은 대혈전은 극에 달했지만 계속 요동퇴각을 하면서 병력이 줄어가는 돌궐군이 8만 고구려군의 맹공에 요하로 밀려 났다. 결국 후미를 지키던 돌궐군들은 하나 뿐인 부교에서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서로를 밀치며 퇴각하였다. 그들 서로 살겠다고 부교위에 올라가자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돌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돌은 강에 떨어지면서 물줄기가 하늘 치솟았다. 고상이 혼전 속에서도 투석기를 설치하여 돌을 옮기어 부교에 투석을 하기 시작하였다. 강에 수십 차례 조준투석을 하다 끝내 큰 돌 두 개가 부교에 명중했다.
“으아악”
타격을 입은 부교는 세 쪽으로 부러져서 해체되었고 부교에서 퇴각하던 수천 명의 돌궐기병은 요하의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러나 요하 건너편으로 후퇴한 이계찰대는 포기 하지 않고 한족출신 수군을 이용해서 배로써 퇴각작전을 수행했다.
“지금이다. 출동하라!!”
하지만 곧 고흘의 명을 받고 때를 기다리던 고구려의 요하주둔 강상수군(강에 주둔한 수군)의 기습공격에 돌궐의 배 이십척은 순식간에 격침당하고나 나포되었다.
“와아아!!”
고흘의 고구려군은 강상수군의 대활약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을 본 요하에서 고립된 2만 돌궐군은 중갑기병의 돌격이 있기 전에 고구려군에 일제히 항복하였다. 하지만 토문대칸의 흰 늑대라고 불리는 이계찰대는 명성답게 요동 출정군 15만중에 기적적으로 10만이나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계찰대가 요해에서 데리고 온 직속부대 5만명중 손실이 200여명뿐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흘은 그의 수완에 놀라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돌궐군의 총손실은 5만 명에 달했는데 신성공방전에 이천 명, 백암성전투에서 천명이었지만 요하퇴각전에 만 명이나 손실을 입었고 나머지는 고구려군에 포로가 되었다. 고흘장군의 평양 출정군은 손실이 겨우 이천명이었고 요동 주둔군은 전부 합쳐서 사천이었다. 돌궐군은 5만 명을 고구려군은 6천을 손실을 입었으니 사실상 고구려군의 완승이다. 그때가 고흘장군의 군사적 감각이 절정에 달하던 영광에 시기였다.
하지만 고흘은 또다시 자식을 잃는 비극을 겯게 된다. 2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검열하던 고흘의 장자 고상이 독살당한 것이었다. 포로 중에 누군가가 독침을 가지고 있다가 그를 암살했다. 고상은 침을 맞고 즉사했으니 유언도 못하고 죽은 셈이었다. 고상과 고창 둘 다 아들을 남기 죽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그의 혈통은 막내인 13살 고주밖에 안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형님과 달리 건강이 안 좋아서 후사를 잇지 못했다.
그나마 고주는 10년 뒤 아버지인 고흘을 최고 관직인 대대로 선출하기 위해 중리위두대형 연명안 장군과 함께 사병들을 모집하며 선거 운동하던 도중에 패수(대동강)변에서 의문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대로회의는 고주가 패수에서 익사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의 시신에는 독살에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당시 대대로 선출의 경쟁자였던 주씨가문의 모살이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로써 고구려 광개토태왕때 왕가에서 갈라져서 5대동안 수많은 명장을 남기었던 고흘장군의 가계는 여기서 완전히 끊기게 된다.
<3년 임기에 대대로는 대로들의 선거로 이루어졌지만 사실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각 귀족들의 군사력으로 결판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귀족들이 평양에서 싸울 때 태왕은 궁궐 문을 닿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한다. 고구려 후기 약화된 왕권과 귀족들의 전횡을 알 수 있는 있다.>
고상장군에 독살의 보고를 들은 날카로운 눈빛에 부관 연명안은 즉시 암살자를 색출하였으나 고흘은 그의 처결을 원해 하지 않았다. 고흘은 고상 또한 자신의 운명을 따라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 암살자는 태자 양성의 명에 의해 불로 온몸을 지진 후에 목이 베어졌다. 천손을 죽인 것은 고구려에서는 최고의 죄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고흘은 평양에 팔천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개선하였다. 그 곳에서는 태왕폐하만세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일단 혼란에 빠진 양원태왕시기 안정은 고흘의 대승으로 시작되었다. 고흘은 개선을 하였는데 마중은 15살의 키 큰 태자 양성이 하였다. 아직도 그의 아버지인 태왕은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흘장군 아드님을 두 분이나 잃었으니 나도 예통함을 이길 수가 없구려!”
태자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흘장군은 미소를 지면서
“태자전하 이 자리는 대국 고구려의 전승을 기뻐하는 자리이지 슬퍼하는 자리는 아니옵니다. 창과 상은 분명 추모성왕과 수많은 태왕폐하에게서 큰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자는 나라를 위해 죽는 자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존경받는 효자를 둘이나 두었으니 어찌 이런 날 슬퍼하겠사옵니까? 지금 저는 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싶은 기분입니다.”
태자 양성은 노장의 충성심에 깊은 감동을 하였다.
다시 15년 뒤
단기 2899년 서기 566년 영강(永康) 2년 평원태왕 8년 병술(丙戌)년 7월
용맹했던 고흘장군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주씨가문의 횡포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던 막내 고주의 의문사
이어진 초대 중리위두대형 연명안의 중리부 반란사건
그리고 자신의 양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연명안의 정치적인 사망
끝없는 왕실의 피바람
태왕 양성의 자식과 세상에 대한 증오
폐태자의 위기에 몰린 태자 대원
장녀 미한의 야심과 태자비책봉
15년간 계속된 돌궐과의 전쟁
흰늑대 이계찰대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대결
고구려 군부의 기형적인 구조
훗날 양원태왕과 평원태왕기 군벌사를 정리한 이문진은 그때 고흘을 이렇게 평했다.
[고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는 모두가 인정해야 되지만 근본 원인은 고구려의 안팎에 심각한 문제들 때문이었다. 양원태왕시기부터 20년간 고구려의 모든 문제는 고흘 혼자 짊어져 왔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방해하고 시기하거나 기대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쁘게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슬프게도 늙은 호랑이 고흘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몰락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대로회의에 4부 귀족과 고흘의 그늘 아래에서 야심을 키워온 온달, 연자유, 강이식이 중심이 된 신흥무관파와의 정면충돌의 예고이었다. 30만 고구려군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고흘이 사라진 후 혼란의 씨앗인 온달과 연자유가 싹트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흘장군은 어떻게 후퇴는 잘하고 있는가?”
그 정도 거리까지 갔으니 태왕생각에도 여기서 고흘이 후퇴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태왕 양성은 말에 중리대형 우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면서 말을 했다.
“고흘장군은 계속 막북(漠北 돌궐본토 지금의 외몽고 일대)에 주둔이라 합니다.”
“말도 안 돼!!!”
태자는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잃고 소리쳤다. 바로 태왕은 풍채 있는 얼굴을 가진 태자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면서 태자는 순간 입을 닫았지만 정작 화잘 내는 아버지는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인 태자 고대원이 군사적인 직감력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다. 하여간 아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 태왕은 옥좌에서 일어나 그 근처를 잠시 서성이다가 천정을 보면서 심각한 말을 하였다.
“무슨 문제가 있다. 고흘장군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 지금 가안정까지 갔다면 적지에 완전히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계속 주둔 있다니 이는 필시 사지로 끌어들이는 이계찰대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 지친 우리군의 모든 것이 마비되어 갈 것이고 그 사이에 만만에 준비를 하고 이계찰대는 고흘장군을 포위하려는 계책으로 나올 것이다.”
태왕의 말을 듣고 상황을 제일 늦게 파악한 고필은 사색이 되었다.
“큰일이다. 북쪽으로 당장 파발을 보내라!”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황이었다.
글쓴이, 저작권자 김원식
이 소설에서 시나리오 각색, 도용, 표절을 절대 금합니다.
다음 주 금요일 오전 8시에 <4편 휘날리는 돌궐의 흰색깃발-총퇴각>을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크으. 고흘장군 아들 고상 고창의 활약이 재미를 이끌어 주네요. 그런데, 중간에 돌궐족이 부여를 '성스러운 부여'라고 칭한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것 같네요. 부여와 돌궐 사이에 뭔가 있어요? 그냥 설정인가요?
미리 말하면 설정입니다. 명확한 것은 없지만 부여는 몽고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가능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고리국이라고 부여의 선조국가에서 부여의 왕족인 동명성왕이 탈출한 곳도 아마 북쪽이어서 내몽골일대일 가능성도 높지요. 부여후기에는 모용선비같은 내몽골일대에 유목민과 전쟁이나 교류한 증거는 많고 건국초에도 그런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본 것 입니다. 부여와 유목세계간에 서로 좋은 느낌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여를 고구려의 침략에 무너진 아름다운 나라정도... 많은 관심 감사합니다. 꾸벅^^
이야기 어디서 들으신거죠? 내용이 탄탄하다면 돌궐족=부여인으로 잡아버리게 ㅋㅋ; 농담입니다 ;
'성스러운 부여 구문'에 대해서 제가 진지하게 고민했는 데 역시 무리가 좀 있는 것같군요.... 말갈이나 후에 등장하는 여진이라면(만주일대 유목민) 부여를 성스럽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인데. 아마 돌궐은 흉노족의 후예인데 유연에 예속된 부족중에 하나이니까 부여와는 관련은 없지요.(물론 부여의 선조국가인 고리국이 어디있었는냐가 문제이지만. 부여의 북쪽이니 북만주나 내몽골인데......) 물론 부여가 유목민족과 교류했을 매우 높습니다. 부여와 모용선비간에 접촉(전쟁이지만)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고구려가 부여에서 떨어져나왔듯이 고리국에서 부여와 유연이 떨어져나왔다고 볼 수는 있을까요?
일단 부여는 고조선 말엽에 태동했으니 당시 북방 유목세계의 지배자는 흉노입니다. (유목제국사에서는 돌궐의 기원을 흉노로 봄) 부여북방에 위치한 고리국은 인근에 흉노와 교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저도 옛날에 부여가 유목민문화가 아닐까 고민했는데 웃분들(죄송하지만 성함을 비밀입니다)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을때 볼수 없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문화가 좀 다르지요. 물론 부여에 유목민문화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구려가 졸본에 토착세력과 추모,유리의 부여이탈세력이 만든 국가라고 생각하면 고구려의 유목풍습은 부여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지요. 여기까지 저의 예상입니다(부여시대 유목세계변천은 흉노-오환-선비-유연)
이골이란-> 이골이난, 진념->집념, 내가-> 네가:: 오타.^^ 전쟁씬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 세계라는 단어보다는 시대상 천하라는 단어가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저는 님의 소설을 볼 때 마다 항상 드라마형식으로 상상을 하는데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현재에서 수십년전으로 넘어갈 때의 상황연출을 어떻게 할까라는 의문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결국 연자유 애비는 연명안으로 했네요.^^ 개인적으로 연광이 더 좋은데...ㅋ 무튼 그것은 작가님의 생각이고 고증에도 큰 지장은 없으니 저도 더 이상의 미련은 버리고 즐기겠습니다!! 건필하세요!!1
오타는 여전하군요. 저는 국어를 다시 공부해야 될지도... 하여간 지적 감사드립니다. 아 세계보다는 천하가 어울겠지요 님 말씀대로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시간 이동은 피하려고하는 데 이야기 진행상 피할 수 없는 때가 너무 많아서 (작가의 불찰이랄까? 사실 이런 시간 이동은 굉장히 이야기를 산만하게 합니다. 감초같이 쓸때도 있지만.) 아 연명안은 신경 못썼습니다. 막상 쓴 것을 바꾸기도 어렵고 나중에 최종탈고 할때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시 한번 싸악 수정해야 되니 그 때 고민 해 보겠습니다.(아직 완성은 아니지요) 매번 큰 관심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열심히 건필하겠습니다. 꾸벅^^
저는 개인적으로 김원식님께서 시간이동을 쓰는 시점이 굉장히 탁월하다 생각합니다.^^ 만일 드라마로 만든다면 그 부분은 세세한 연출감각을 가진 연출가가 아닌 이상 다루기 어렵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말입니다.ㅋ
과분한 칭찬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