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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깊은 불교문화
(1) 법화사의 입지
법화사는 서귀포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제주의 불교문화를 선도하였다. 법화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법화사상에 기초를 둔 사찰이다. 현존하는 기록과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볼 때, 법화사는 13세기 이전에 창건되었다가 원나라가 제주의 지배권을 강화해 가던 1269년에서 1279년 사이에 중창되었다.
법화사는 한라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가장 가까운 대포리 해안에서 약 4km 정도 내륙으한국지리지 제주특별자치도 260로 들어와 있다. 법화사지의 표고는 160m에서 170m에 이른다. 절터는 뒤편 220m 높이의 구릉에서 능선이 동서로 뻗어 내려 온 ‘∩’ 형태 지형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략 가로 동서260m, 남북 500m의 완만한 지형이다. 절터의 앞에는 해발 165m의 구산봉과 앞 능선이 포진해 있으며 서쪽 1km 지점에는 건천인 앞내가 위치하고 있다. 지형은 남쪽과 동쪽이 낮고 북쪽과 서쪽이 높으며, 경내에 복원된 건물인 금당지에서 남쪽으로 2m의 높이차이가 있는 늪지가3,000여평의 넓이로 형성되었다(제주대학교박물관·서귀포시, 1997, 27).
법화사가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임을 감안한다면 법화사의 입지에 풍수적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짐작이 된다. 더구나 비보사찰로 지정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풍수지리적 사고가 법화사의 입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의 지형 자체가 전형적인 풍수 형국을 이루는 육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풍수적 터잡기의 논리에 따라 법화사의 입지가 이뤄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현재의 법화사지를 보더라도 풍수적 사신사나 형국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풍수적 요인보다는 다른 요인이 법화사의 입지에 영향을주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법화사의 창건 당시 입지에 가장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용천수의 유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척박한 화산암 토양으로 이루어진 제주의 경우 용수를 구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중산간 지대에 광범하게 형성된 목장지대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언제나 용수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식수로 이용할 수 있는 샘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법화사의 입지로샘이 있으면서 당시 중심 취락과의 접근성이 높은 곳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복원된 대웅전의 뒤편과 동편에는 두 개의 큰 용천수가 있다. 특히 뒤편의 용천수는 과거 하원동 주민의 식수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다.
대규모의 사찰은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이 필수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특히 법화사는 고려왕조의 비보사찰로 지정되었고, 원 황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을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되어야 했다. 법화사 주변 일대는 수량이 풍부하여 다른 지역과 달리 벼농사가 가능했던 곳이다. 제주도는 대부분의 토양이 화산회토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벼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의 성산읍 종달리 지역, 한경면 용수리, 서귀포시 하논 일대, 강정동 일대와 더불어 법화사 주변 지역이 벼농사가 가능했던 대표적인 곳이다.
<그림 3-15>
최근 복원된 법화사의 모습
제3장 서귀포시 해안지역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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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시대 법화사의 기능
고려시대 법화사는 산북의 수정사와 더불어 제주도의 대표적인 비보사찰이었다. 조선 초기 태종 때에도 법화사에 노비 280구가 있었으니 규모로 볼 때 당시 제주에서 가장 컸던 비보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보사찰 창건의 목적은 국내의 산천을 비보하여 나라의 기업(基業)을 연장시키는 데 있다. 고려왕조가 제주에 비보사찰을 창건한 것은 한라산의 강한 기운을 눌러 개경의 지덕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이다. 특히 고려정부는 1105년(숙종 10)에 탁라(乇羅)를 탐라(耽羅)로 고쳐 군을 두면서 제주를 정치·행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라산의 강한 기운을 누르는 비보사찰의 건립은 제주를 고려의 지배체제로 포섭하기 위한 상징 장치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제주의 빈번한 반란을 제압하고 완전히 본토의 통제하에 두려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했던 것이다.
법화사는 또한 원나라 황실의 원찰(願刹)로 중시되었다. 비보의 목적으로 창건되었던 법화사가이후 많은 사찰의 난립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서서히 쇠퇴하다가, 원의 탐라 지배에 즈음하여 원 황실의 지원으로 번창했다고 볼 수 있다. 법화사지에서 발굴된 명문기와에는 ‘至元六年己巳始重創十六年己卯畢’이란 글귀가 있다. 이는 법화사의 중창이 지원 6년인 1269년(원종 10)에 시작하여 지원 16년인 1279년(충렬왕 5)에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명시한 것이다.
현재까지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법화사는 몽고의 목호들의 근거지보다는 원나라황실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1982년에서 1997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운룡문(雲龍文) 막새, 운봉문(雲鳳文) 막새, 각종 기와류, 청자·분청사기·백자·중국도자기 등의 자기류, 개원통보 등이 출토되었다(국립제주박물관, 2001, 121~122). 이들 출토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운봉문과 운용문 막새이다. 용과 봉황 무늬가 있는 막새는 고려시대에는 왕실 건축물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유물은 몽골 콩두미 궁전에서 발굴된 막새와 유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강창화, 2000) 법화사는 원나라 황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찰로 판단된다. 원은 제주를 직할령으로 지배하면서 법화사를 원나라 황제 세조의 원찰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중창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원나라 세조가 신봉하는 관음신앙에 근거하여 남송과 일본 정벌의 무운(武運)과 황제의 축수(祝壽) 등을 염원하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원 황실의 원찰이었던 법화사는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목적 이외에도 직할령인 제주의 지배를 위한 정치·군사적 기능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군사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원은 남송과 일본 정벌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받고 더 나아가 제주의 물자를 계속적으로 거두는 데 법화사를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김일우, 2000). 현재 법화사는 여러 차례의 발굴이 끝나 대한국지리지 제주특별자치도 262
웅전과 구품연지 등이 복원되어 있어서 서귀포 지역 불교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존자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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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향토자원의 명칭과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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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한문/별명) | 존자암지 | |
명칭자 또는 단체명 | 제주특별자치도 | |
명칭의 유례 | 지역과의관계 | |
특정인물과의 관계 | ||
특정 소재와의 관계 | 사찰 존자암이 있었던 절 터 | |
심장(실벌), 설화, | <동국여지승람>에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곳 동굴에 마치 승이 도를 닦는 모습과 같은 돌이 있어 세상에 수행하는 동굴이라 전해졌다”고 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
2. 본 향토자원의 특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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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개요 | 서귀포시 하원동 해발 1280m 지점 볼래오름 기슭에 자리한 존자암지는 옛 문헌에 그 역사가 오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과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 |
기후, 토양 등 지정학적 특성 | ||
기술적특성 | 핵심기술 | |
기술을 통해 나온 결과물 및 효과 | ||
기술 보유자의 수 | ||
기술의 전수 이수 현황 | ||
역사적 특성 | 본 자원의 발생 (형성 배경 ) | 17세기 중반 이전으로 추정 됨 (어느 때, 누구에 의해 건립된 것인지에 대한 내막을 전해주는 문헌기록은 아쉽게도 없다.) |
본 자원의 발전과정 | 1993년~1994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과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으며 앞으로 존자암지 정비사업을 통하여 제주 불교문화 유산으로 보존하게 된다. 1995년 7월13일에 제주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 |
상업적 특성 | 자원의 활용 현황 | |
전국적인 인지도 현황 | 제주도내 전체주민 인지 | |
브랜드의 형성 여부 | ||
구성요소의특성 | 제주 불교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다. | |
문화적 특성 | 구성요소의 특성 | 제주 불교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다. |
핵심 표현물(캐릭터) | 제주도내 전체주민 인지 | |
문화향유자의특성 | ||
기타 핵심적 특성 | 〈대장경〉과 〈고려대장경〉 법주기에는 "석가모니 제자 열여섯 존자중 여섯번째 발타라존자가 탐몰라주에서 불도를 전파하였다" 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그 사실 여부는 앞날의 과제로 남는다. |
3. 본 향토자원의 상품화, 사업화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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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명(상호명) | ||
종업원수 | ||
연간 매출액(천원) | ||
주요 판매처 | ||
주요 홍보 및 마케팅 수단 | ||
사업관련 분야 | ||
본 향토 자원의 가치증대 가능성 및 방안 | 자원관리 분야 | |
생산기술 분야 | ||
유통판매 분야 | ||
상품화 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