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하군.”
주문장에 올라온 잘라콤을 보면서 인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라콤은 녹내장 환자의 안압을 내려주는 안약으로 2.5ml에 보험 가 37,635원이나 하는 고가 약이다. 말이 2.5ml이지 병아리가 한번만 울어도 두세 병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고가 약이라 한달에 대여섯 병정도 처방이 나오는 편이었다.
“제 부장”
“예에, 국장님.”
“잘라콤이 다 나갔나?”
“하하하나 남았습니다.”
“잘라콤 열개가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나가?”
“처방을 마마많이 모신 모양입니다.”
인규는 제동호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오른손으론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왼손으로 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약이 들어오면 입고장(入庫帳) 작성하고, 창고에 진열하는 사람이 제동호였다. 약국에 떨어진 약을 창고에서 꺼내와 채우고, 창고에서 재고가 떨어지기 전에 주문장에 적는 것도 그였다. 정오쯤 출근해서 주문장을 보고 주문을 넣는 것이 오너인 인규의 첫 업무였다.
“Y약품이죠?”
전화를 하는 인규의 목소리에 창고로 들어가던 제동호가 예? 하고 다시 돌아본다.
가는귀가 어두운 그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을 했다. 작은 소리로 부르면 듣지를 못했고, 중간 정도의 소리로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불러도 무조건 대답을 했다.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도 예? 예? 다시 얘기해 주십시오를 반복했다. 윤곽은 제법 뚜렷한 얼굴임에도, 검고 윤기 없는 피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 때문에 공사장의 인부를 연상시켰다.
“올해 전문대를 졸업 했다면서?”
“예에?.......아, 예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뭘 했나?”
“구군대 갔다 와서, 고공사장에도 나나갔다가, 이것저것 조금씩 해했습니다.”
“대학은 몇 살에 갔나?”
“수수물 아홉 살에 갔습니다.”
눈초리가 찢어져 성깔 꽤나 있겠다 싶었는데, 얘기를 해보니 유순하다 못해 어눌한 편이었다. 첫 출근 때, 1시간씩이나 지각한 것을 눈감아 준 것도 그의 어눌함 때문이었다. 잔꾀라고는 부리지 못할 것 같은 어눌함이 오히려 미더웠다. 약은 곧 현금이니까…….
대학노트 두 페이지 분량의 주문이 끝나면 점심시간이었다. 윤병국과 제동호가 첫조였고, 오재민이 그 다음, 마지막으로 인규의 순서로 교대를 했다.
“마마님 모시겠습니다.”
제동호가 윤병국더러 밥 먹으러 가자는 소리였다. 제동호가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제부장 때문에 밥 먹을 때만 되면 내가 상궁이 되네.” 윤병국이 가볍게 웃었다.
“제내관 마마님 잘 모시게.” 오재민이 윤병국의 농을 받았다.
제동호의 언어 체계는 독특했다. 뭔가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전부 모신다는 말로 통일 되었다. 누굴 부를 때도 결코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한살 아래인 오재민은 재치 닥, 윤병국은 마마님으로 불렀다. 오재민은 재치가 박사급이라 재치 닥터란 뜻이었고, 윤병국은 점잖은 품이 상감마마를 연상시킨다 하여 마마에 다시 존칭을 붙인 게 마마님이 되어버렸다. 제동호의 호칭을 듣고 있으면 조선시대 촬영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숫제 자신을 사대부가의 후예로 자처하기도 했다.
윤병국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윤병국은 인규보다 한살 아래였지만, 새치 때문에 서너 살 위로 보였다. 과묵하면서도 자상한 성격이라 제동호가 제일 따랐다. 고객들에게도 신뢰가 깊어 약국의 매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쉰둘이 되도록 부모와 형제들에게 월급의 절반을 내놓다 보니, 입성은 낡은 옷에 단벌이었다. 주공 아파트에 다섯 식구가 세 들어 산다 했던가. 약국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내와 노래방에 가서 풀고, 쉬는 날이면 가족들과 드라이버를 즐기는 등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야유회 때 커플티를 입고 온 윤병국 내외를 보면서 아내가 인규의 옆구리를 넌지시 찌르기도 했다.
“나도, 윤선생처럼 여동생 넷을 내가 벌어서 시집보냈어. 시골에 생활비 부치랴 아이들 공부시키랴 그 와중에 약국하고 집도 장만했고. 커플 티 입고 부부가 노래방 같이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분위기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아.”
아내가 옆구리를 찌르던 날, 인규는 아내의 입을 간단히 막아버렸다. 윤병국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인규는 내부에서 풍선이 부푸는 듯한, 깃털에 간질임을 당한 듯한 쾌감이 가려움 증처럼 스며들었다.
인규는 약국을 천천히 돌아본다. 내 약국이라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대학 진학이 좌절되었을 때, 밖으로 나돌기만 하던 그의 손을 잡아끈 것은 5촌 아제였다. 아제는 그를 도회지로 데리고 나오면서 기술만 배우면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약국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막상 창고 직으로 취직하고 보니 먹여주고, 약국에 딸린 다락방에서 잠을 자고, 쉬는 날 용돈 몇 푼 집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잠자리에 들면 코앞으로 쏟아지던 천장만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막혔다.
인규는 어깨 위에서 가벼운 손동작으로 먼지 터는 시늉을 했다. 아내가 백화점에 가서 처음으로 사온 유명 메이커 제품이었다.
“이번엔 좀 잘해. 어째 아가씨 앞에만 가면 뻣뻣해져서 매일 퇴짜를 맞나?”
식곤증에 나른하던 인규에게 윤병국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제 부장 또 선보나?”
“예예에……. 국장님. 내일 봅니다.” 제동호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번에 아가씨는 몇 살인데?”
“서서서른 두 살입니다. 국장님.”
“20대 후반 아니면 싫다고 하더니? 급하긴 급했군요.” 오재민도 끼어들었다.
“사대부가의 후손이라서 아가씨한테 프러포즈도 못한다, 아가씨만 보면 낭자낭자 하면서 제 도령 흉내를 내지, 자기는 20대 초반으로 보인다는 착각 때문에 나이 든 아가씨는 싫다, 나이 들어 보여도 싫다, 뚱뚱해도 싫다, 거기다 시부모 모시자 하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말이나 더듬지, 내가 아가씨라도 싫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국장님. 낭자가 그리울 때마다 창고로 도망가지 말고 대충 맞춰서 결혼 하지요, 제부장. 별 여자 없습니다.”
인규의 말을 가로채서 오재민이 다시 끼어들었다. 제동호는 그 근처로 손만 스쳐도 물건이 부풀어 올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다보니 제동호가 안 보이면 창고로 피신 갔다는 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오재민이 그걸 물고 늘어지자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창고 직에서 출발하여 판매대로 나온 오재민은 제동호 앞에서 어른 노릇을 하려들었다. 일찍 결혼하여 맏이가 9살이었고, 상속받은 건물도 한 채 있어 제법 기반이 잡힌 편이었다. 한번 본 약은 잊지 않았고, 시키기 전에 일을 처리해두는 편이라, 오너로서는 부리기 편한 사람이었다.
“제부장, 철물점에 가서 장석 좀 사와. 화장실 문이나 고치자고.”
“예에, 국장님.”
이제는 제발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킵시다, 아내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신접살림을 차린 집에서 너덜너덜한 벽지 사이로 벌레들이 기어 나오자 아내는 기겁을 했다. 그는 아내를 나무란 후 도배하러 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밤11시쯤 퇴근해서 벽지를 뜯어내고, 세 시간씩 페인트를 칠했다. 집 전체를 덧칠까지 하는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노모의 시골집부터 그의 집까지 큰 공사가 아니면 그가 직접 했다. 잠을 설쳐가면서 일을 한 뒤 몸살을 하는 그에게, 아내는 손끝이 너무 야물어도 병이라고 했던가. 집 평수 넓히고 차도 중형으로 바꾸자 아내는 궁상스럽다며 제발 이제는 사람을 불러서 시키자고 했다. 3~4년 전만 해도 십만 원이 넘는 양복은 입지 않던 그였다. 옷은 냄새나지 않고 튿어진 곳 없이 깨끗하면 되는 것이었다.
인규는 창고로 들어갔다. 약국 바로 뒷건물을 얻어서 방수 페인트를 바르고, 환풍기 달고 폐업한 약국서 진열장을 줏어다 창고를 꾸민 것도 그의 솜씨였다. 약국에서 창고로 바로 통하는 문을 만들 때도 직접 지휘를 했었다. 손이 야물고 눈썰미가 있어 웬만한 일은 한번만 보면 혼자서 할 수 있었다. 창고에 가지런히 정돈된 공구를 볼 때마다 뿌듯했다.
2
“무슨 약이 들어왔나?”
허리를 굽히고 약의 개수와 거래명세서에 적힌 개수를 대조하고 있던 제동호가 인규를 돌아본다.
“프프라세센타 에프가 들어왔습니다.”
“그 발음 들어가지고 어디 약 이름이나 제대로 알아듣겠어? 포장이 참하게 바뀌었군.”
프라센타-F라는 이름이 오동나무 곽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내부엔 다시 두개의 나무 곽이 들어있고, 뚜껑을 열면, 한 칸에 앰풀이 하나씩 담겨있어 고가의 주사약처럼 보였다. 열다섯 개 씩 담긴 상자가 두통으로 포장되어 한달 분이었다.
보름분의 상자는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지고 외형은 고급스럽게 바뀌었다.
프라센타-F는 태반을 원료로 하는 고가 약이었기에 윤병국 선에서 판매가 이루어졌다.
“앞에 (판)매대에도 약을 보여주고 진열을 하게.”
“예에, 국장님.”
진열장에 빈자리를 만들자 오재민이 약을 받아서 진열을 했다. 영어 이름이 앞으로 오도록 해서 모서리까지 반듯하게 맞추니까 약이 한결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진열하니 보기 좋군. 오 선생 진열하는 걸 잘 봐두게 제 부장.”
“예에……. 국장님.”
오재민이 돌아서면서 제동호의 아랫도리를 쥐었다 놓았다. 욱하고 제동호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오재민은 인규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국장님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제제제가 타오겠습니다.”
아래가 부풀기 시작한 제동호는 커피를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요까시모 잔한피커?”
제동호가 조제실 쪽으로 가면서 중얼거렸다.
“국장님 뭘 그렇게 보십니까?”
“오 선생,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Blood Son, 高nine麻fry……. 매대 위의 메모지에 적힌 걸 들여다보던 인규는 제동호의 글씨는 분명한데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제 부장이 간식 목록을 적은 겁니다. 피자, 고구마 튀김입니다.”
인규는 오재민의 설명을 듣고도 한참을 더 쳐다보고서야 짐작이 갔다. 제동호의 모신다는 말을 겨우 이해하고 나자 사람들은 말을 거꾸로 하는 기벽에 다시 부딪쳤다.
그의 말하는 속도를 따라잡으면, 그만의 독특한 언어, 거꾸로 된 문장 하는 식으로 한 단계에 적응하고 나면 또 다른 버릇이 나오곤 했다.
“제 부장을 조선시대 세트 장에서 끌어내서 말도 바르게 잡아줘야 할 텐데…….”
인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창고와 매대 사이는 월급 차가 컸다. 창고 직이 5년째인데도 제동호는 매대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결혼을 못해서 노이로제에 걸려있으면서도, 결혼 후의 생계에 대해 별반 준비가 없는 걸 보면 인규는 답답했다.
창고 문을 여는 순간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가 인규를 떠다밀었다. 음악 소리만 해도 귀가 아픈데 따라 부르는 제동호의 목소리까지 한몫했다. 인규는 라디오를 꺼버렸다. 입이 벌어지도록 웃고 있던 제동호의 놀란 눈빛이 날아온다.
“구구국장님…….”
“무슨 노래가 그래? 창고 유리가 다 깨지겠구먼. 뭐 좋은 일 있어?”
“아아아닙니다. 좋은 일 없습니다. 헤헤비 메탈인데 이게 바로 예예예술입니다.”
“악 쓰는 거지 무슨 놈의 예술? 노래는 차분해야지.”
“그런 노래는 아아아무나 다 하하할수 있지만 이런 노래는 아무나 못합니다. 특히 주다스 프리스트의 노래는 시시신의 경지에…….”
“관두게. 따라 부르는 제 부장 목소리가 내겐 어찌 들리는지 아나? 배수구에 물이 마지막 빠져나갈 때 나는 끄르륵하는 소리 같아. 쥬다스 뭐? 그 발음할 때는 입에 와사풍이라도 온 사람 같네. 입을 왜 그렇게 일그러뜨려?”
제동호는 버릇처럼 손이 뒤통수로 올라갔다.
“야구 선수들 나이, 고향, 취미, 타율까지 줄줄 꿰차는 시간에 상식도 좀 익히고 아가씨하고 나눌만한 얘깃거리라도 익혀두게.”
제동호는 관심 분야만 벗어나면 과연 기초 상식이나 있을까 싶었다. 약국에서 농담을 할 때도 다들 웃고 있을 때 혼자 말뜻을 놓쳐 멀뚱멀뚱 있을 때가 많았다.
“요새는 선 안 보나?” 제동호는 싱긋 웃기만 했다.
“일단 결혼만 하면 생활이 되도록 내가 배려해 줄 테니까 아가씨만 구하게.”
“감사합니다. 구구국장님.”
선을 보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창고에서, 약 치우고 청소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위인이 그였다. 인규가 그에게 부장이라고 칭호를 붙여주고 약의 출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라고 일러준 후에야 그의 소개 말도 바뀌었다.
제동호하면 인성, 외모보다는, 쥬다스 프리스트, 헤비메탈, 야구, 왜곡된 언어, 바꿔 붙인 이름 등의 조각 언어가 퍼즐처럼 떠올랐다.
3
“병희는 자?”
집에만 들어오면 막내딸 안부부터 묻는 게 인규의 습관이었다.
“시계가 몇 신데요.”
“들어왔을 때, 녀석이 자고 있으면 괜히 허전해서.”
대학 졸업반인 큰딸이나 군에 있는 아들은 어려서부터 뚱했지만, 열 살배기 병희는 애교가 넘쳤다. 약국에서 짜증나는 일이 있다가도 병희만 보면 금방 풀어져 버렸다. 예쁜 사람이 예쁜 짓을 한다더니, 그 애가 태어나면서 집안 형편도 풀리기 시작했다.
“운동 나가실 건가요?”
“나가야지. 뱃살이 더 나오기 전에 빼야지.”
“늦은 밤에 운동한다고 난리니까 아침에 못 일어나잖아요. 차라리 일찍 일어나서 헬스를 하지. 밤마다 청승맞잖아요.”
“당신은 꼭 돈 들여서 하는 것만 생각하는군. 집에서 가까운 공원이 있지, 거기에 운동에 필요한 시설 다 갖춰져 있는데 뭐 하러 헬스를 해. 이런저런 핑계나 대고 못하는 건 게을러서 그래.”
“헬스 비용이 얼마나 든다고 그래요. 돈 드는 건 그렇게 싫을까. 오디오하고 싱크대도 바꿀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바꿔줄 생각도 않고.”
“그것도 없이 사는 사람도 많아. 윤 선생만 해도 아직 23평 아파트에서 전세 살아. 눈에 보이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 내 손에 현금이 있어야지.”
“그 집은 분위기라도 있지요. 당신은 매일 열두시 넘어서 들어오지 한달에 쉬는 날도 두 번 뿐이지. 병희도 크면서 다른 친구들 사는 걸 보고 자꾸 투정을 부려요.”
“물이나 한잔 줘. 목마르니까.”
“목마를 때, 호프집에서 오붓하게 맥주나 한잔 하면 어디 덧이라도 난데요?”
상의를 받아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에 인규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소파에 앉아서 양말을 벗던 인규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앞쪽의 테이블에서 눈 한 쌍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림이지만 갑자기 마주친 눈알이 섬뜩했다. 자세히 보니 애벌레 몸에 그려진 눈이었지만 영락없이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이었다. 병희가 백과사전을 펴둔 모양이었다. 흥미가 동한 인규는 사전을 끌어당겼다.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소조(小鳥)들은 애벌레가 눈에 띄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 먹는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는 경우에는 일순 주저하게 되는데,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애벌레들은 소조를 잡아먹는 맹금류(猛禽類) 등 포식자(捕食者)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眼狀紋)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놓거나 포식자가 입을 벌릴 때 나타나는 구내색(口內色)을 연상시켜 깜짝 놀라게 하는‘경악색(驚愕色)’을 하고 있다.
올빼미나 매의 눈이 그려진 놈, 몸을 움츠리면 뱀의 머리 모양으로 둔갑하는 놈, 맹금의 무늬를 입고 있는 놈, 구내 색으로 새빨갛게 단장한 놈……. 이를 보고 있으면 벌레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중략. 보호색은 오랜 진화가 만들어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돌연변이 결과, 보호색을 띤 녀석들은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은 반면 보호색이 시원치 않은 놈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보호색이 시원치 않은 놈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그래도 안상문은 태어나면서 가지고나 오지, 사람은 남보다 작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하나하나 자기 힘으로 만들어갈 뿐이었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서.
인규는 아세톤을 듬뿍 묻힌 솜으로 애벌레의 안상문을 문질러 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시나브로 진화하거나, 스스로 돌연변이가 되어 획득한 보호색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강한 믿음, 그러나 더 이상 보호색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보호색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보호 능력도 없는 헛된 울타리를 만들어 스스로 갇혀 있을 뿐이었다면? ‘요까시모잔한피꺼’ 갑자기 그 말이 인규의 귓전에 아프게 울렸다.
벌써 7월 초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윗몸 일으키기를 끝낸 인규의 이마에서 뺨 쪽으로 땀이 가파르게 흘러내렸다. 복부와 등 쪽의 근육이 땅기고 욱신거렸다. 상체를 움직일 때마다 복부를 기점으로 해서 통증이 방사상으로 퍼져나갔다. 두 팔을 머리 밑으로 밀어 넣고 누운 자세로 숨을 골랐다. 별이 땀방울처럼 빼곡히 박혀 있었다. 병희가 백과사전을 들고 와서 보여주던 별자리 중 몇 개가 저기에 있겠거니 싶었다.
“다른 데는 매출이 줄어드는데, 국장님 약국은 느는 모양입니다.”
낮에 거래처 직원과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프라센타-F가 나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져서요.”
“그래?”
“모르셨군요. 모든 걸 꼼꼼하게 체크하시는 국장님이 모르셨다니 의욉니다.”
“위치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다른데 보다는 좀 낫지.”
“저희 제품 잘 부탁드립니다. 국장님.”
인규는 점심을 먹고 약국으로 오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프라센타-F는 한달 분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약이었다. 그 약이 나가는 날은 매출이 평소와 다르기 때문에 대체로 기억하고 있었다. 약이 처음 들어온 날짜부터 재 주문이 들어가는 간격을 세심히 살펴본 결과, 근래로 올수록 주문 날짜의 간격이 열흘에서 보름정도로 좁혀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었다. 문득 잘라콤의 일이 떠올랐다.
창고에 잔잔한 약까지 자신의 손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였다. 인규는 고가 약 몇 가지를 체크했지만, 장부상으로는 이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다른 약국과 달리 매출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주문은 보름정도야 당겨지거나 늦춰질 수도 있었다.
내일부터는 전 품목으로 확대해서 입고장과 노트북을 꼼꼼히 대조할 참이었다.
IMF 원년에 약국을 확장할 때, 아내는 무척이나 반대를 했다. 멀쩡하던 사람들도 쓰러지는 형국에 거액의 대출금을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했다. 말다툼 끝에 아내는 친정으로 가버렸다. 며칠을 꼬박 새운 후 시내로 내려가기로 했을 때, 덜컥 겁이 나면서 눈앞이 흐려졌던가. 가족들 앞에선 담담한 그의 속내는 화덕처럼 타들어갔던가. 노름꾼이 마지막으로 집을 잡히는 기분이 이럴까 싶었던가. 다달이 불입하던 적금은 그에게 늘 과부하를 일으켰지만, 정작 거기서 상환되는 금액은 절반을 조금 넘었다. 일년에 나가는 이자를 계산해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남이 보면 궁상스럽도록 절약을 해도 월말이면 돈이 말렸다. 돈이 마르는 게 아니라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밥 때가 되면 인근에서 제일 싼 곳을 찾아, 먹는 것까지 아껴도 약국 문을 열면 겁이 났다. 늪 저 아래에서 누군가가 그의 발을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입은 헐어서 아물 때가 없었고 집에 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기 바빴다. 이젠 거래처 잔고는 거의 제로에 가까우면서 창고엔 약이 그득 차 있다.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어도 이만하랴 싶게 든든하고 배가 불렀다. 그런데 창고에서 약이 사라진 것이라면…….
4
“국장님…….저어…….”
“뭔가 제 부장?”
“저어…….” 뒤통수를 긁는 속도가 빨라질 뿐 제동호는 말을 못 했다.
“국장님, 제 부장이 돈이 좀 필요한 모양입니다. 저도 형편이 빠듯해서.”
윤병국이 뒤에 와서 제동호의 말을 대신 건네주었다.
“왜? 전에는 가불한 적이 없었잖아. 무슨 일 있나?”
눈만 끔뻑이면서 손이 뒤통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뿐 제동호는 말을 못 했다.
“얼마나 필요한데?”
“이이이십만 원만......”
“얼마 전에 아가씨한테 퇴짜 맞아놓고 뭐 하러 돈이 필요해?”
“급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국장님.” 딱하던지 윤병국이 다시 거들었다.
가불을 받고 돌아서는 제동호를 인규가 불러 세웠다.
“오늘부터 약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무조건 입고장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게.”
제동호는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오 선생.”
“예에 국장님.”
“잘라콤과 잘라탄은 오 선생 자리에 가까이 있으니 약 나갈 때 신경 좀 써주게.”
잘라탄도 잘라콤과 동일한 효능의 고가 약이었다.
“국장님. 처방전 중에서 일반으로 끊긴 것은 컴퓨터에 입력이 안 되기 때문에 기록보다 많이 나갈 수도 있습니다.”
보험 적용이 안 돼서 환자가 전액을 부담하는 게 일반 처방전이었다.
“내가 여태 그 생각을 못 했군. 아무튼 고가약이니까 관리 좀 잘 해주게.”
“예에.”
“아참, 이번에 살던 집을 샀다면서?”
“예에, 집 주인이 돈이 급해서 시세보다 낮게 내놨습니다. 저희도 이사 가느니 사자싶어서 샀습니다.”
“젊은 나이에 장하네. 알뜰하니 보기도 좋아.”
“저야 대출을 받았으니 그렇지요. 여 형제들 다 결혼시키고 여기까지 온 국장님도 계시는데.”
인규는 드링크가 들어온 기록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입고장을 덮었다. 창고에서 손장난을 치려고 하면 드링크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장부에 기록된 숫자보다 약을 적게 받고, 나머지 약은 현금으로 환산해서 거래처 담장 자와 일정 비율로 나눠가지면 감쪽같았다. 입고장과 노트북을 대조해보고 재 주문이 들어간 간격을 체크 해봐도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했다 싶더니, 열흘 정도 장부에 매달려 있던 피로가 밀려왔다.
벌써 7월 중순이었다. 장마도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제 부장이 두 시간이나 늦다니?”
“윤 선생님 혼자 바빠 보여서 드링크 손님 받고 청소해주고 오는 길이라니까요.”
인규가 약국 열쇠를 집에 가져오는 바람에 아침 일찍 아내에게 열쇠를 보냈다.
왕복에 한 시간 정도면 족할 것을, 세 시간이나 걸린 아내를 나무라던 참이었다.
폭염에 아내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서둘러 온 티가 역력했다.
“눈치가 오늘만 늦은 게 아닌 모양입디다.”
“오늘만 늦은 게 아니라니?”
“윤 선생님이 무심결에 이 사람이 또 하다가 놀래서 입을 다물던걸요.”
“왜 늦었는지 얘기는 하고?”
“옆에 오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무슨 정신으로 얘길 하겠어요. 고개만 끄덕하고 창고로 들어갑디다.”
“빨리 아침이나 차려줘.”
요즘 들어 점심을 거르고 약국 근처의 만화방에서 눈을 붙이고 오는 제동호를 보면서 웬일인가 했었다. 밤에도 배가 고프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그였고, 한 끼를 굶으면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던 그였다. 거기다 자주 가불을 했다. 인규는 점심시간이 끝나자 윤병국을 불렀다.
“윤 선생, 요새 제부장이 자주 늦었습니까?”
“자주는 아니고 몇……번…….”
둘은 출퇴근과 식사시간이 같다보니 늘 붙어 다녔다. 나이도 한참 아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의 험담을 하려니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숨겨줘야 할 일이 있고,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은 나한테 얘길 해주셔야합니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제동호는 종일 인규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면서 창고로 피해 다녔다. 어쩌면 가불을 할 때부터 출근이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인규는 잊었던 잘라콤과 프라센타 사건이 다시 떠올랐다.
사흘 후, 인규는 아침 8시쯤 약국에 도착했다.
정오가 가까워서야 출근하던 인규가 들어서자 윤병국의 얼굴에 낭패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에서 짚이는 바가 있어, 인규는 곧장 창고로 갔다. 제동호는 약 박스를 제 키만큼 붙여 놓고 큰대자로 자고 있었다.
“지각 안하면 아침 시간을 잠으로 때우다니. 신혼살림을 차린 것도 아닌데 왜 매일 빌빌거리나? 요새 가불하고 지각은 왜 그렇게 자주 하는가? 사생활과 직장 생활을 그렇게 구분을 못하나? 그런 정신 상태로 일하려면 당장 그만둬. 나는 자네 나이 때 안 그랬네. 자네가 모아놓은 게 있나 집이 한 채라도 있나. 부지런히 벌어도 다른 사람을 못 따라 잡을 판에, 이게 무슨 짓이야?”
제동호는 억지로 서 있긴 했지만 눈에는 실핏줄이, 파열된 유리창의 잔금처럼 뻗어있었다.
“일을 계속 하긴 할 건가?”
“죄죄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하하겠습니다.”
“내가 안 본다고 제부장이 이럴 줄 몰랐네.”
간혹 제동호를 불러서 직원들의 출근시간을 물어보곤 했었다. 대체로 출근시간을 지키는 편이어서 그 후로 단속을 안 했더니 등잔 밑이 어두워도 한참 어두웠다. 믿어줄수록 알아서 처신해야 할 것을. 한번 눈밖에 벗어난 사람은 다시 쳐다보지 않는 그였다.
아제 손에 이끌려 약국으로 들어간지 3년쯤 지난 때였던가. 인규는 창고 일을 서둘러 끝내고 약 설명서를 꺼냈다.
“무슨 말인지나 알고 설명서를 외우는 거야?” 국장의 목소리는 인규의 정수리를 순식간에 꾹 찔러버렸다. 일은 하지 않고 군짓만 한다는 질타로 들렸다.
“판매대로 나오고 싶은가?”
국장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던 인규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국장은 그를 고깃집으로 데리고 갔다. 오랜만에 먹는 고기지만 씹어도 씹어도 입안에서만 맴돌 뿐, 침만 목으로 넘어갔다. 국장은 내보내거나 호되게 나무랄 사람이 있으면 이리로 데려 왔다.
“넌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데가 있어. 설명서를 아무리 달달거리고 외워봐야 앵무새처럼 읊을 수야 있겠지만 기초가 밑받침이 되지 않으면 언젠가 한계가 드러나지. 약대에 가서 정식으로 공부를 해봐.”
입안에서 돌던 고깃덩어리를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던가. 목구멍이 꽉 막히는 바람에 가슴을 연거푸 치고 소란을 떨고 나서야 국장이 한 말 뜻이 그에게 새겨졌다. 길은 항상 있는 법이지만 그 길은 자신의 내부에서 먼저 만들어져야 하고 그걸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생기는 법이었다. 제동호를 바라보면 숨이 막혔다.
“국장님 피곤하신 것 같아서 커피 한잔 타왔습니다.”
“아. 오 선생. 마침 커피 생각이 간절했는데.”
인규에게 커피를 건네주고도 오재민은 인규의 책상 앞에 어물쩍 서 있었다.
“왜 할 얘기 있어?”
“얘 잠시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말해보게.”
“죄송합니다만 모레까지 근무하고 그만뒀으면 해서…….”
“뭐라고? 모레? 난데없이 왜?”
“집안에 약사 형님이 계시는데 이번에 약국을 확장하면서 손이 딸린다고 하셔서요.”
“어디서 개업을 하시는데?”
“강원돕니다.”
“형제간에 서로 도운다니 말릴 순 없지만 그만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
“저도 국장님 모시고 정이 많이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모레가 오재민의 월급날이었다.
5
인규가 들어서자 윤병국이 고개를 숙였다. 윤병국 혼자 서 있는 매대가 썰렁했다.
인규는 주문장을 펼쳤다. 주문장은 어제 주문한 이후로 아무 것도 적힌 게 없었다.
“제부장”
“국장님……. 저어…….” 윤병국이 인규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예에 윤 선생.”
“제 부장이 아직 안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안 나오다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핸드폰도 안 받고, 집에 전화를 하니까 어제 안 들어왔답니다.”
“오 선생도 빠지고 손 딸리는 줄 뻔히 알면서 안 나오다니요. 어제 술자리에서도 그 난리를 쳤으면서. 더 연락할 것 없습니다. 놔두세요.”
어제 오재민을 보내는 술자리가 열렸다. 제동호는 묵묵히 잔만 비우다가 취기가 오르자 오재민에게 술잔을 건넸다. 오재민이 마시고나면 제동호가 그 잔을 채워서 다시 마시기를 한참, 종내는 제동호가 먹은 걸 게워내고야 말았다. 시큼한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제동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오재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게워내는 압력 때문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번들거리는 물기에 동공이 확대되자 섬뜩함이 묻어났다. 제동호가 오재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뭐라고 하려는 찰나, 윤병국이 밖으로 끌어냈다. 그 길로 연락이 끊겨버린 모양이었다. 인규는 윤병국 들으라는 듯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창고 직원을 구해달라고 했다.
비가 내리면서 막바지 폭염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땅이 식으면서 올라오는 물 내가 풋과일 향처럼 풋풋했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종일 자다가, 목욕을 다녀온 인규는 나른하면서도 개운한 기분이었다. 여름날의 열기처럼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이, 이제 정상에 올라, 비를 맞으며 편안히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사흘 간격으로 매대와 창고에 새 사람이 들어왔다. 물이 흐르듯 사람도 가고 오는 것이었다. 물이 고이면 부패가 시작되듯, 가고 오는 흐름도 정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두면 언젠가 부패가 시작된다는 걸 제동호가 확실히 가르쳐준 셈이었다. 내 집만이 줄 수 있는 안정감을 누리는 참에, 초인종이 울었다.
“윤 선생이 어쩐 일이요?”
“비도 오고,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그렇잖아도 술 생각이 나던 참인데.”
뜻밖의 방문이었지만 윤병국에게 자신의 집을 보여준다는 게 싫지 않았다.
“국장님이 나오시죠. 근처에 조개구이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윤병국은 구이집 주인과 막역한 사이인지 늘 먹던 걸로 달라고 했다.
“뜻밖이오. 윤 선생이 이렇게 찾아오다니.”
“술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기분 나쁠 거야 뭐 있습니까. 또래끼리 술 마시는 게 제일 편한 법인데.”
과묵하던 윤 선생이었지만 말문을 편안하게 열었다. 대화도 재밌게 끌고 나가서 의외다 싶었다. 둘 다 얼굴이 불콰해졌을 때였다.
“국장님”
“예, 윤 선생.”
“며칠 전에 제 부장 만났습니다.”
“그래요?” 인규는 무관심하게 받아 넘겼다.
“예에. 술 한 잔 했습니다.”
“요즘 어떻게 산답니까?”
“오재민을 찾아다녔답니다.”
“오 선생을? 왜요? 오 선생이야 강원도 형 집에 갔잖소?”
“강원도는 무슨요. 지금도 오리무중이랍니다.”
윤병국은 자작으로 잔을 채워 연거푸 세잔을 마셨다. 호흡을 다듬는 기미가 느껴졌다.
“평소, 제 부장이 창고에서 나오던 오재민이 하고 자주 마주쳤답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창고를 지나가야 해도 너무 자주 마주친다 싶었던 거지요. 그러던 중, 오재민이가 첫조로 출근한 날, 제 부장이 창고에서 나오다가, 오재민이가 매상 금고에서 매대로 나가는 걸 봤습니다. 제 부장 눈치가 이상하다 싶으니까 오재민이가 여자를 하나 소개시켜준 모양입디다. 친구 동생이라면서.”
인규는 창고에서 혼자서 싱글거리던 제동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진 것 없지, 쑥맥이기까지 한 자기를 좋아라 하는 여자가 외모까지 참하니 제 부장으로선 더 바랄게 없었죠. 제 부장 퇴근 시간에 맞춰서 여자가 매일 약국 근처로 왔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겼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싶어 제 부장은 걱정에 몸이 달아올랐죠. 결국 오재민이에게 통사정을 해서 찾아냈는데, 아버지 병원비를 구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며, 그렇게 섧게 울더랍니다. 제 부장 성격에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을 테고……. 그 후 여자가 제 부장을 만나러 올 때마다 치료약이라면서 고가 약을 오재민이 내준 거죠. 나중에 꼭 채워넣겠다면서.” 인규는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곧추 세웠다.
“그 때가 지각하고, 가불하고, 만화방에 출입하던 때군요.”
인규는 소주잔을 움켜쥐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안 되겠다 싶어 오재민을 밖으로 불러냈지요. 그 자리에 여자가 같이 나왔더랍니다. 번갈아가며 술을 권하는 바람에 필름이 끊어졌는데, 이튿날 눈을 떠보니 여자하고 알몸으로 누워있더랍니다.”
윤병국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내부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꾹꾹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빗소리가 추임새처럼 윤병국의 음성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 선생이 가던 날, 그래서 그 난리를 쳤군요.” 인규의 음성이 딱딱 끊어졌다.
“한달 쯤 지나자, 여자가 짐을 싸서 찾아왔답니다. 아기가 생긴걸, 오빠에게 들켜서 쫓겨났다고……. 그때가 국장님이 한참 입고장과 장부를 대조할 때일 겁니다. 제 부장 입장에서 보면, 아기까지 생겼다니 어차피 내 사람이다 싶었을 테고, 방을 구해보라며 5년 동안 모았던 돈을 통장 째로 맡겼답니다. 오재민이가 약국을 그만두자, 닷새 후 여자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답니다.”
윤병국이 반쯤 남은 술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술이 넘어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컥울컥 오르내렸다.
“오재민이 국장님께는 입속의 혀처럼 굴었지만, 국장님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매대에 같이 있다보면, 새파랗게 젊은 놈이 사람을 괄시하면서 깔짝깔짝 얼마나 신경을 건드리던지 밖으로 끌고나가 패대기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손위, 손아래도 없고, 예전에 창고 직원을 둘을 쓸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주 바뀌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상속 받은 건물이 있다지만 모친이 관리하는데, 그 나이에 무슨 수로 집을 샀겠습니까. 아무리 집이 중요하고 돈이 중요하다지만, 그게 사람을 지켜주면 얼마나 지켜준다고, 다른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장만해야 합니까? 제부장더러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제부장에게는 돈이나 집보다 그런 착각이 더 자기를 지켜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살아가는 세상인데도 제부장은 약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말을 거꾸로 하거나 외모에 대한 착각이 강한 것도 제부장이 나름으로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일겁니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겨우 찾은 사람 것을 뺏어서 자기 속을 채워야 하는 겁니까? 죽일 놈.”
윤병국의 끓어오르는 시선을 받아내던 인규는 조용히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는지 인규의 얼굴에 부딪치는 빗물이 제법 따끔했다. 아무리 집이 중요하고 돈이 중요해도 그게 사람을 얼마나 지켜주느냐고 묻던 윤병국의 눈길이 안상문처럼 집요하게 인규의 뇌리에 따라 붙었다.
“보호색이 시원치 않은 놈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보호색이 시원치 않은 놈들은 지구상에서…… 모시지 못했다…….”
오재민을 보내주던 술 자리에서 오재민을 바라보던 제동호의 핏발 선 시선이 떠올랐다.
어느덧 집 앞이었다. 흐릿한 빗속에서 자신의 집을 찾아보았다. 거대한 아파트 건물 중 성냥갑처럼 자그마한 한 칸이 눈에 들어왔다가 곧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첫댓글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약업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제목이 어렵다 싶었는데, 연결이 좋습니다. 구성과 스토리 전개 등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저야 전문성이 없어 단순한 느낌만을 전합니다. 루사, 가량, 숲, 풀잎님, 소설강님, 괴얌. 그 외의 분들에게 평을 부탁드립니다. 님의 그 '열망'이 가늠되어집니다.
첫댓글 이 작품을 읽기 전에도 약업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제목이 어렵다 싶었는데, 연결이 좋습니다. 구성과 스토리 전개 등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저야 전문성이 없어 단순한 느낌만을 전합니다. 루사, 가량, 숲, 풀잎님, 소설강님, 괴얌. 그 외의 분들에게 평을 부탁드립니다. 님의 그 '열망'이 가늠되어집니다.
남(?) 일 같지 않아서 흥미있게 봤습니다.... --;; 좀 아쉽다면, 인규의 대한 묘사를 조금 줄이고 오재민의 이중성과 여자의 등장을 암시적으로 더 일찍 해서 복선으로 깔아두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꼬리글 길게 썼다가 지우고 갈랍니다. 잘 봤다는 말만 남기고..
결점 잡아주기가 제겐 거름이 됩니다. 지우지 마시지 ㅡ.ㅡ
안쓰고 쓴 척 하는 건 아닐까 몰라...ㅋㅋㅋ
무튼 누부들에게 도움 안된다니깐^^
굳이 말하자면 기승전결에서 이 소설은 기승결 부분만 있고 전은 어딘가로 없어져 버렸다는 느낌입니다. 갈등이 서로 부딪치며 증폭되어지는 부분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다보니 결말이 밋밋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설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평도 잘 보고 갑니다. ^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