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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반사라는 실험으로 유명해진 러시아의 과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개 실험은 역사에 남을만한 실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을 칠 때마다 반응했던 개실험만 알고 있는데
추후 몇 가지 실험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기자극에 대한 개의 반응에 대한 실험이었습니다.
즉 개를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그 몸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장치를
설치한 후 일정한 시간동안 잠깐식 전류를 흐르게 합니다.
그럼 개는 깜짝 놀라 도망가려 하겠죠
그러나 밀폐된 공간입니다.
아무리 짖고 발로 문을 두드려도 절대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주일 두 주일을 고문과 같은 실험을 하면
개는 전기자극을 받는 순간 오줌을 쌉니다..
그리고..보름이 지난 후 밀폐된 환경이 아닌 개방된 공간에서
그 개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전기줄을 붙인 후
다시 전기를 가할 적에 이제 개방된 공간이기에
당연히 그 전기줄을 끊고 도망갈 줄 알았습니다만..
그 개는 여전히 도망가지 못하고 낑낑대면서 오줌을 싸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실험을 통해 나온 개념이 저 유명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 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은 훗날 인간이 겪는
우울증에 대해 아주 적절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람도 이 대목에서는 개의 반응과 유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죠
계속 외부적 스트레스가 가해지는데 내부적으로는
무기력하게 그 현실에 계속적으로 노출되게 되면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하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입니다.
이번에 끔찍한 아이티 지진으로인해 15만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죽고
수 많은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이티에 방화와 폭력까지 판을 치며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지만..정말 문제는 앞으로 부터입니다.
계속 물과 음식과 잘만한 곳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들 중 대다수는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즉 학습된 무기력이 그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면
먹고 살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경계해야 할 정신적 공황 상태입니다.
이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은 어린 시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던 아이들에게서도 보여지는 증상입니다.
늘 부부싸움을 일삼거나 늘 엄마에게 폭행을 하는 아빠를 보고 자랐거나
툭하면 매를 들어서 구타와 폭행이 다반사였다거나..
이런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의 뇌를 조사해보면 뇌가 일반인과
다르게 구성되고 반응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너무 어린시절에 너무 힘든 일을 너무나 반복하여 고통받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그 누구도 나눠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아이를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스스로 조용히 혹은 악을 쓰며 견뎌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정신에는 아주 무기력한 자아가 스며있게 됩니다.
그런 학습된 무기력은 마치 사람을 최면에 걸리듯 멍하게
정신을 놓게 하거나 아예 정신을 마비시킵니다.
이런 증상이 자주 반복되면 뇌는 손상을 입게 되고
그 사람의 일상생활의 무드는 우울함으로 갈 수 밖에 없겠지요.
그 우울함과 무기력은 마치 갑자기 물 속에 쳐 박힌 것처럼
숨 쉴 수도 없고 안 쉴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그 고통이란..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겁니다.
불안의 친구는 공포죠.
그러다 갑자기 공포가 밀려오는데 그것을 공황장애라 부릅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 돌아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일상생활 그 자체가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자기의 증세가 잠시 좋아졌다하여
자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신앙인이라면 신앙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것처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권합니다..신앙은 정직하게 아픈 것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힘을 주지
아픈 것을 안 아프게 혹은 덜 아프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어린시절의 큰 상처가 그렇게 한두번의 경험으로 좋아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깊이 절망하고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단이라도 분명하면 치료의 가능성도 선명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진단을 잊으려고 하거나 적당한 대안으로
자신의 증상을 잊으려 해선 안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구체적인 치유적 자극이 필요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치료라는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늘 안타까운 것은 이런 돌봄과 치유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그래도 언젠가 내 차례는 옵니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지 힘이 들어도 견디는 것은
내 자신의 몫입니다.
절망을 믿지 말고 치유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삶에 대한 궁극적 선
혹은 신앙에 대한 영원한 긍정이 있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