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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상수훈’… ‘불이사상’ 가득 반기독교적 | ||||||||||||
승려가 성경 기초적 지식 없이 불교식 해석으로 왜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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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신앙> : 양봉식 기자 】 불교 승려가 만든 영화 ‘산상수훈’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일부에서는 종교화합에 기틀을 낳았다고 평하고 일부 기독교 인사들도 불교의 기독교 이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승려가 성경을 해석해서 만든 영화를 넘어서서 ‘기독교인들도 모르는 성경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식의 홍보 문구처럼 오히려 성경을 왜곡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산상수훈’이란 영화 시사회를 한다는 초청메일이 왔을 때, 홍보 문구에 ‘스님이 만든 영화’가 눈에 들어 왔다. ‘스님이 뭘 안다고’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려다가 자꾸 눈에 밟혀 시사회에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꼬리는 물며 일어나는 생각이 있었다.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스님이 거듭났을 텐데, 그런 문구는 없네.’ 예상한대로 이 영화는 철저한 불교적인 시각에서 만들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난다. 성경을 텍스트로 했다는 이유로 기독교적인 영화인가? 전혀 아니다. 이단도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난다. 안티 기독교 예술가들로 얼마든지 성경을 가지고 영화나 미술, 혹은 드라마를 만든다. ‘산상수훈’은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시사회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부터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제작자가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신학생들의 질문은 신학생답지 않고 유아적이고 초보적이다. 감독은 신학생의 입을 빌려 비기독교인들이 묻고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비기독교인들은 혹시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인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다. 그만큼 감독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천국가기 위해 예수를 믿니?”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이것이 최종 목표 아니야?” “한 번 믿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면 그것이 한판의 도박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가기 위해 안달이 났느냐?”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는 확신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현실적이고 감각적 확신이 없으면서 어떻게 천국 갈 수 있느냐는 식으로 몰아 간다. “넌 천국가기 위해 예수를 믿니?”라는 질문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도박판처럼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도박하는 사람처럼 모 아니면 도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철저한 부패와 타락으로 본인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인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 단순히 ‘천국 갈 수 있니?’라는 화두를 던지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잘못된 과녁을 겨누었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 은혜의 방편이 되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 가운데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한 번 믿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은 너무 경박하고 경솔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천국?”이라는 화두는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를 교묘하게 비틀어 가기 위한 ‘산상수훈’ 영화의 첫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 중에 하나가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불이”(不二)는 그 뜻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이사상’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번뇌는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생과 사, 나와 너, 안과 밖을 나누어 보는데서 시작된다는 사상이다.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머릿속에서 습관적으로 항상 둘을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영화 ‘산상수훈’은 이 사상의 프레임에 성경을 접목시켜 해석하고 있다. 8월 7일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산상수훈’의 영화 관람과 함께 기독교(최일도), 가톨릭(김용해), 불교(마가), 원불교(권도갑)의 4대 종교의 성직자들이 모여 4인4색 토크가 있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승려 유영의(법명 : 대해) 감독은 시나리오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두고 “성경공부를 찾아서 한 것은 아니다. 성경을 찾기는 어렵다. 시간도 없고, 종교가 생긴 뒤 가르침이 생기고 성경이 있는 것 아니냐. PD에게 성경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둘이 아니다’라는 부분을 찾아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즉 ‘신상수훈’은 불이사상이란 핵심 메시지 프레임에 맞는 관련 성경구절을 모아 귀납적 방법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선악과나무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구원 등과 관련된 해석을 불이사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를 두고 영화에서는 “너와 너, 그리고 이것저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악과나무는 문제가 없지만 그 열매를 먹는 행위가 구별하는 것이고 이것이 타락이라는 해석이다. 원래 구별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을 구별함으로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불이사상을 근거한 해석이다.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 이게 비유라고 했는데 그게 뭘 비유하는지 알아?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다는 건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가리지 않아서 나쁜 사람을 나쁜 사람 취급 안하면 그게 바로 손을 넣어도 괜찮다는 거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를 안 먹는 거지.” 영화 ‘산상수훈’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불이사상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이 또한 천국에 대한 이해에서도 적용시키고 있다. 이 영화의 천국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에 어떤 분이 있었는데 자기를 죽이려 하는 독사굴에 일부러 들어갔데. 그래서 독사굴에 있는 사람독사들은 이분을 물어 죽이려고 독을 입에 항상 품고 있었데. 이 집단은 상하관계가 철두철미하고 명령관계가 엄격한데 왜 그 집단에서 딱 중간 정도 있었데. 알다시피 중간정도 있으면 윗사람에게는 복종해야 되고 아랫사람에게는 명령해야 되는데. 이분이 가고 나니까 그 철두철미한 상하관계는 어디로 가고 없어지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누르고 억지 씌우고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이분을 괴롭히고 모함하고 완전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거야, 그러니까 사람 독사들은 이분한테 독을 쏴보겠다고 사방에서 덤벼들었던 거지. 내가 한 번 싸봐야지 하고 몇 년 동안 벼르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이분은 시비, 선악 이런 고정된 것이 없었어. 그 집단의 기준이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엉망진창일지라도 그분에 비유하자면 로마에 가서 로마법을 따랐던 거야. 상대가 안 지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시비가 없었어. 지혜롭게 상황에 따라 대처했기 때문이지 그 누가 어떤 경우라도 심하게 악하게 대해도 전혀 시비가 없었어.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사람독사들은 누구한데 독을 쏘는 것을 잊어버린 거야. 그리고 오히려 독을 쏴서 상처 난 것을 어떻게 아물게 하는지를 묻고 심지어 독을 안 쏘는 것까지 묻게 된 거지. 그러니까 이분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았던 거야 거기가 천국이었어. 이제 천국이 보여?” 이런 해석은 천국에 대해 죽어서 가는 천국과 여기서 이루는 천국과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래서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하는데 요새 우유 못 먹는 집 있어? 성경 구절구절 말씀을 보면 천국이 현실보다 특별한 게 없는 것 같네.”라는 유아기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현실이 천국이라고 말하게 한다.
영화 ‘산상수훈’은 예수님에 대한 해석 역시 불이사상으로 연결 짓고 있다. 영화에서 선택한 성경구절은 로마서 5장 13절에서 18절이다. 이 구절에서 주목하는 것이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 이 영화에서 신학생들이 오고간 대화를 그대로 전제해 본다. “오실 자의 모형이란 아담이 예수님이라는 이야기야. 처음에는 순수했던 아담이었다가 죄를 지어 천국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버렸는데 선 아담이 대표로 십자가에 모든 죄를 못박아버리고 깨끗해진 후 아담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거지.” “선 아담이 후 아담이었고 후 아담이 예수님이셨어? 예수님께서는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께는 순종하며 선악과를 다 못 박아서 죽여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든 분. 맞지? 그렇게 깨끗하게 하셔서 부활한다는 말이잖아? 그럼 우리도 선악과를 다 못 박아 죽여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면 천국 간다는 얘기네.” “그렇지 선악과를 못 박아서 죽였다는 진짜 뜻은 뭐지?” “현실에서 천국 되면 말이야 그전처럼 선이다 악이다 결정짓지 않는 것을 말해. 선이다 악이다 결정짓지 않아서 고정관념이 없고 영원히 고정관념을 안 만들고 사는 거를 말하는 거지. 살아있는 생명인데 결과를 고정지어주면 바로 사망하게 돼. 사망은 선악과고 선악과가 왕 노릇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에덴동산에 생명의 나무와 선악의 나무가 있는데 이 생명이 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항상 함께 있어 그리고 선악의 나무에서는 선악과가 열리고 근데 말이야 선악과를 따먹어 버리면 생명의 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함께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생명이 없어진다. 이런 얘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는 선문답처럼 자연스럽게 불이사상을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영화 ‘산상수훈’의 불이사상의 극치는 금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이 금과 함께 금을 재료로 만든 다양한 물건들은 결국 모두 재료가 금이라는 논리를 들어 불이사상으로 설명하게 한다. 이런 논리의 설명은 영화 ‘산상수훈’ 전체를 이끌어가면서 예수님, 하나님, 삼위일체까지 적용한다. “내가 금으로 한 번 비유를 해 볼게. 금 자체가 생명의 나무라고 한다면 금으로 만든 이 목걸이, 반지, 시계, 이런 것들은 다 선악의 나무인거야. 이 금목걸이가 자신을 목걸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본체인 금이라고 한다면 바로 선악과를 안 따먹은 건데 이 금목걸이가 자신의 본체인 금목걸인 줄 모르고 껍데기인 목걸이만 알고 있으면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거야. 그래서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자신의 본체가 금목걸이기 때문에 목걸이로만 있지 않고 본체로 돌아가서 무한하게 활용할 수 있게 돼. 칼이나 방패, 이런 것들로 말이야. 그래서 칼이나 방패 이런 것들로 죽지 않고 계속 변화할 수 있으면 살아 있는 생명인데 칼이나 방패, 한가지로 고정 지어져 버리면 바로 생명이 없어진다는 거야. 어떠한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은 금이라는 걸 알아야 돼. 우리의 본체는 금이고 하나님이야, 그리고 우리의 하는 행위가 선악의 나무인거지. 그래서 선악의 나무는 이 목걸이와 같아.” “우리가 하는 행위로 고정지어 두지 않으면 우리의 본체인 하나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하는 행위로 고정지어 둬 버리면 본체로 못 돌아가니까 고정된 생각들이 왕 노릇한다는 거야. 그렇게 우리의 모든 행위를 고정지어두지 않으면 선악과를 안 따먹은 거고 그게 바로 선악과를 못박아 죽여 없애 버린 거지. 우리가 살면서 돈 만 벌려고 돈을 고정지어 버리면 돈이 왕 노릇하고 명예로 고정지어 버리면 명예가 왕 노릇하고 양에 관심이 많으면 양이 왕 노릇하고 하나님 말고 다른 게 왕 노릇하잖아?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온전해져. 그리고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말씀인 거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온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거야.”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죄를 사해주셔서 믿기만 하면 이걸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아서 천국 간다고 했는데 뭐가 복잡한 거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돼.” “아담이 지은 죄가 모두 똑 같이 왕 노릇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그 왕 노릇하는 모든 죄를 다 못 박아 죽여 없앴어.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의 원인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없애는 열쇠도 다 같아. 재료가 똑같이 때문에 다 함께 풀 수가 있는 거지.”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라. 하고 산상수훈에 나온 그대로 하라는 뜻이구나? 그러니까 길이요 생명이지.” “사람들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는데 사실은 그 뜻을 진짜 모르니까 행하지 않는 거라고 봐. 소크라테스도 알면 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잖아?” “믿기만 한다고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실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거지. 알아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도 명확히 모른다고 봐. 따라서 믿기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믿기만 하는 말이라고 봐. 예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실천하게 돼 있어,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그 진실한 뜻을 모른다는 거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우리 죄를 대신 사해 준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거야. 사실 이게 자기를 다 죽이고 부인해서 온전히 사라져야 하는 큰 도박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셔서 큰 방법을 터득하셨고 그 방법을 우리한테 가르쳐 주신거지.” “예수님께서 천국을 무한으로 복제할 수 있는 공장을 얻으신 거지.” 성경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셔서 하늘의 보좌에 앉으셨으며 다시 오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예수는 구원을 받게 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한 인물로 묘사한다. 예수가 구원의 방법을 터득했고 그 방법대로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영화 ‘산상수훈’은 창세기 1장 26과 27절에 “우리 형상을 따라 그들을 만들고”라는 구절을 두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바로 내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잖아.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이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그러니까 바로 인간이 하나님이지.” ‘형상’의 히브리어 단어는 ‘체렘’이다. 이 뜻은 그림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흡사한, 유사한 존재란 뜻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시편은 8편 5절에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지 하나님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불이사상’과 연결하기 위해 선택된 성경은 빌립보서 2장 13절, 고린도전서 3장 16절, 17절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은 연합이지 진짜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원래 하나라면 떨어져 나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된 인격적 결합으로 이야기 하지 본질적으로 하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불이사상은 불교나 뉴에이 사상에서 나타나는 범신론적 일신론이다. 빌립보서 2장 13절의 구절을 두고 “우리 내면에서 행하는 주체가 모두 하나님이시라는 거네, 이렇게 움직이는 게(몸 동작)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는 것 아니야?”라는 이해도 매우 유아기적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너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 역시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내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하는 이 말이지,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서 한다는 말이지.”라고 해석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몸은 하나님의 몸, 즉 성전이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한다는 말이지.”라고 해서 불이사상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영화 ‘산상수훈’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 졌지만 결국 인간이 썼다는 점에서 인간의 책이라는 논리를 편다. 성경의 영감성보다 인간의 책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대와 문화가 다른 여러 사람이 동일한 주제의 흐름 속에 쓰인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삼위일체 역시 금잔을 비유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금인데 금잔을 만들었으며 그 잔을 만드는데 필요한 힘이 성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능력 이전에 인격을 가지신 성령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단순히 무엇을 만들거나 역사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근심하시고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는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 성령님이시다. 영화 ‘산상수훈’은 제목과 내용에서 성경을 차용했지만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불교 영화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자기식 해석을 두고 기독교에서 보지 못한 비밀을 제대로 보았다고 극찬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특별히 불이사상은 물론 뉴에이지 사상과 일신론 등 기독교와 상반된 해석은 오히려 기독교를 오해하게 하는 영화이다. 성경과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굉장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또한 우려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불교인 등 타 종교인들이 성경과 기독교를 영화 ‘산상수훈’이 그려 가는대로 인지하여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