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16:1~19)
신앙 성숙을 위한 가장 어려운 Level이 두 가지가 있는 듯하다.
첫번째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두번째는 '내 소원과 의지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
두번째, 내 소원과 의지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묵상에세이에서 제시한 것처럼)
'내 소원이 없어진다는 것이 생각도 의지도 없는 로봇처럼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고,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며,
내 뜻이 점점 하나님 뜻과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선택권을 자발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받으신다.
만약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로봇처럼 '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하고 했다면
세상에서 자식이 고까운 마음을 그대로 담은 채,
또는 아무 관심 없이 그저 부모에게 거역하면 안 되니까
'예,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외형으로 순종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충족되지 않은 욕구로 분출되기에
곤란한 상황을 불러 온다.
그러므로 설득된 상태, 감동 받은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소원과 의지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마음의 동기와 신뢰 아래에서 나의 소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내 자발적 선택을 행사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물론 미세한 부분과 경우에서
나의 믿음과 욕망의 어중간한 상태 가운데 있어
이때 완전히 100% 혼쾌하지 못한 상태일 때
그런 애매한 상황일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발동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실존적인 것은
단순한 이론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Detail한 부분과
감수성, 개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실존적인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치유되거나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로 신음하다가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분명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생명의 삶에서
'루시 쇼'가 말한
'설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태도는
주님 손에서 통제권을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발버둥이다.'라고 설명한 부분을
수용할 때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미천한 인간이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이 있다.
그런 지점에서 인간적인 이해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조물주를 향한 마음의 문이 닫힌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만 판단한다면,
말은 그렇게 해도 뒤로 돌아 다시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지적, 상식적 수준에서 변증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의문을 적대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위한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너무나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태도'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당연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중에서
'설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태도'라고 언급했을 때
이것을 즉시 범죄적 태도로 인식해 버리고
타자에게 적용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많이 보아 알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신앙의 인물들이 명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이를 발췌, 인용하는 것에도 항상 주의해야 하고
무엇보다 해석하는 능력과 시도가 성도들에게 꼭 있어야 한다.
신앙은 무섭지만,
본질적을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일이다.
(물론 공동체와 지체의 위력에 대해서는
너무나 인정한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최종적 결정은 내가 하고,
그 정산과 심판, 대가 지불도
그 어느 다른 이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