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관심사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백자. 민중가요의 마이더스의 손. 노래모임 우리나라의 음악감독. 민족해방계열의 가요들을 좋아하지 않는 입장에서 그를 만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1집을 듣고, 리뷰를 쓰고, 어느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니 듣고 싶어졌다. 곧바로 연락을 했고 인터뷰를 잡았다. 금요일. 사람은 많았고, 이야기는 점차 길어졌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그를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둔다. 인간 백자의 모습은 이러했다.
일시: 2011년 2월 18일(금) 19:00~21:00
장소: 홍대 낭풍
인터뷰: 백자 vs 이경준
-만나게 되어 반갑다.
나야말로 반갑다. 안 그래도 리뷰 써 준 것 때문에 고마워서라도 내가 먼저 연락하고 싶었다.
-음반에 대한 뒷이야기부터 해보자. 후원을 받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내가 속한 노래패 우리나라에서 2003년부터 단원들의 솔로를 내기 시작했는데, 정작 내 음반은 계획되어 있으면서도 나오지 못했다. 그 열악한 재정상태가 문제였다. 그러다 이런 저런 음악들을 모아 2009년 소품집을 발매했는데, 이게 큰 힘이 됐다. 초도 300장을 찍고, 그게 다 팔려서 또 찍었는데, 그것마저 동이 났다. 서서히 반응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이번 음반은 거기서 얻은 힘을 통해 낼 수 있었다. 무려 100여분이 후원을 해주셨다. 지인들도 있었지만, 카페 가입자 중에서도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주셨다. 고맙고 또 고맙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을텐데?
사실 그것도 맞다. 인간 백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정작 나는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늘려가고 싶으니 말이다(웃음).
-향뮤직에서만 단독 유통되는 것 같던데.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우리나라 5집을 예전에 신나라 레코드와 거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새로운 루트를 다시 개척해야 했다. 우리 같은 가수들은 언론홍보의 노하우 자체를 모르는 입장이다. 많은 곳에 팔아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향뮤직은 인디음악에 대한 고집이 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됐다.
-몇 장이나 찍었는가?
2000장 찍었다.
-잠시, 음반에 대한 언급을 하기 전에, 인간 백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고교시절부터 민중가요를 불렀다고 들었다.
학교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해직된 분도 계셨고. 아무래도 그분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꽤나 진보적인 공간이었는데, 책도 읽고 학습도 받는 공동체였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뭐 이런 책들을 학습했다. 옛말로 ‘고운(고등학교 운동)’의 전형이었지. 우리의 주사업은 민중가요 테이프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어떤 노래들이 그렇게 와 닿았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일어서는 4월’. 뒷머리가 쨍~ 울렸다.
var controlBtn5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5.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5");
var ds5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5"));
-보통 원인이 된 동료가 있게 마련인데.
맞다(웃음). 교회에 친한 친구가 있었다. 나는 원래 시창작을 좋아하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고3때 마스터인쇄로 50권을 찍어 친구들에게 나눠 준 적도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자체출판인 셈이지. 그런데, 어느날 그 녀석이 내 시에 노래를 붙인 거다. 그래서 불러봤는데 제법 좋더라고(웃음). 내가 운동권에 합류하게 된 데에는 그 녀석의 덕이 컸다.
-그러다, 상경대 노래패 ‘맥박’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운동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원래 대학 가면 꼭 해봐야지 했던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소설을 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타를 치는 것이었다.나는 기타도 대학교 와서 배웠다. 그러다 얼떨결에, 외대(백자는 한국외대 출신이다) 진군가상에 공모하게 되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노래였다. 마디도 19마디고, 악곡도 엉망이고. 그런데, 덜컥, 대상을 받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선배들이 그때부터 입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맥박’의 탄생이었겠군.
맞다.
-백자라는 이름의 연원도 그것과 연관이 있었을 법 한데.
백자라는 이름은 풍물패를 하다가 얻게 되었다. 뭐, 당시 풍물패들의 성향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말도 맞다. 그러다 2학기부터 노래패를 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천지인이 일렉기타를 쳤다가 먹은 욕은 전설로 남아 있다. 백자네 학교에선 그런 일이 없었나?
천지인이 공교롭게도 외대출신이다(웃음). 1980년대에야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겠지. 우리학교에 외인부대라는 록 그룹이 있었는데, 선배들이 막 돌 던지고 그랬다 한다. 드럼도 못 치게 하는 판국에 일렉기타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 나 때는 그런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일렉기타를 치면 안 좋게 보던 시절이었다. 보수적이었으니까.
-광운대 월계가요제라는 곳에서 대상을 받는다.
군제대 이후, 그러니까 26살 때 나가게 된 곳이다. 참가곡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26달’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군복무기간이지(웃음). 수배가 풀린 다음, 남은 후배들과 함께 팀을 꾸려 나가게 된 가요제다. 운 좋게 1등을 했고, 상금 100만원을 받았다. 40만원 현찰에 60만원짜리 금성 오디오였다. 말하자면 현물로 절반 이상을 받은 셈이었지. 남은 돈도 술 마시는데 다 써버렸다.
-혜화동 푸른섬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 다음인가?
그렇다. 활동폭을 좀 넓혀 볼까하던 시점이었는데, 마침 소개를 받게 되었다. 경기도 파주에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했던 김현성씨가 하던 노래모임이 있었다. 당시 윤도현도 그곳에 속해 있었다. 주로 포크음악을 불렀다.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는데 1997년 가을부터 1999년 초까지 있었던 것 같다.
var controlBtn9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9.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9");
var ds9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9"));
-산악다큐영화 ‘벽’의 음악감독은 어떻게 수락하게 되었나?
지금이야 다음 카페를 운영하지만(백자는 직접 팬카페를 운영한다), 원래는 네이버 블로그를 했었다. 내 연주와 음원도 올리고 그랬지. 그 때 한 여성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 후배가 영화감독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와 자주 어울리게 되었는데, 날 잘 본 모양인지 영화음악을 같이하자 하더라. 나는 영화음악할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고사했는데, 결국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영화는 ‘트렌토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는데, 심사위원들도 음악을 잘 들었다고 하더라고.
var controlBtn11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11.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11");
var ds11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11"));
-살롱 바다비를 본진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사장님을 알게 되었나?
당연히 오디션을 봤지. 재작년에 소품집을 내고, 오디션을 봤다. 홍대로 가서 활동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건 그 한해 전, 2008년 가을이었다. 당시 연영석이 빵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원래 처음 오디션을 본 곳은 바다비가 아닌 빵이었다. 그런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말씀을 들으니 분위기가 안 맞는다고 했다. 사실, 내가 오디션 보러 간 날이, 콜트콜텍 노동자 지원 비상대책회의가 열리던 날이었다.
-빵에서 말인가?
그렇다. 정체를 숨기고 싶었는데 발각됐다(웃음). 그렇게 떨어지고, 바다비를 갔는데 사장님이 노래를 좋게 봐 주셔서 공연을 하게 됐다. 사장님과는 그 다음부터 친해지게 된 것 같다.
-어떤 노래들을 불렀는가?
‘벽’, ‘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불렀다.
var controlBtn13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13.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13");
var ds13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13"));
-바다비의 어떤 점이 좋았는가?
그 양반이 시인이다 보니, 같이 술도 마시고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대학 동아리방 같은 분위기 말이다. 그곳에서 더 큅과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 친구(라선호)가 젬베도 막 쳐주고 그랬다. 그런 분위기가 뭔지 알거다.
-이제 음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예전에 하던 음악보다는 관심사적인 측면인지, 어법 전환 탓인지는 모르지만 좀 소프트해지지 않았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설명해 달라.
내 성격이 좀 극단적이다. 열받았을 때는 분노하다가도 혼자 있으면 침울하고 고독해진다. 노래를 만들어 오면서도 그랬던 것 같다. 빡센 노래가 한 축이었다면, 상념에 젖은 노래가 다른 축이었다. 항상 양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예전에는 다 같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다가, 혜화동 푸른섬에서는 감상적인 노래를 했고, 우리나라를 만나니 다시 불끈하는 노래로 갔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노래가 거의 없다. ‘울고 싶던 날’만 근래에 작곡한 노래다. 다분히 파편적인 음반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당시의 내 기분이 우울했던 탓이었을 수도 있다. 노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위무의 노래,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공감케 하는 노래다. 이번 음반은 철저하게 나를 위로하는 노래들로 꾸며진 작품이다.
var controlBtn16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16.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16");
var ds16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16"));
-어쩐지 이번 음반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단편을 모아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쓸쓸하기도 하고. 일단 제목부터 그러하지 않나.
말년 휴가 때 첫사랑과 좋지 않았다. 1997년에 헤어졌는데, ‘가로등을 보다’는 그 친구와의 이별 후 작곡한 곡이다. 아, 가로등을 원래 좋아한다. 특히 혼자 술 마시다가 보는 걸 좋아한다(웃음). 음반에 실린 노래들은 나를 10년 동안 안아주었던 곡들이다.
-‘가로등을 보다’는 무려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앨범을 만들었는데, 정작 마땅한 홍보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구상하게 된 것이 뮤직비디오였다. 그런데 뭐 돈이 있어야지. 김명준 감독(‘우리학교’라는 독립영화를 연출)의 도움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뮤직비디오였다. 모두들 노 개런티로 해주겠다고 했다. 연기도 조명도. 덕분에 약간의 비용만으로 멋진 뮤직비디오는 완성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십시일반이었지. 무척 기분 좋았다. 내가 이렇게 빈대인생이다(웃음).
-조희봉(‘추노’, ‘도망자’의 배우)씨가 주연을 맡았는데, 본인이 직접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나?
모두들 격하게 반대했다(웃음). 생긴 게 안 된다는 거지 뭐.
-노래와의 싱크로율은 정말 좋던데.
맞다. 정말 자기 노래처럼 소화해줬다. 희봉씨가 연습을 많이 해 온 듯 했다. 나중에 보고 깜짝 놀랐다.
-어쿠스틱 질감을 뽑으면서 특별히 고민한 바가 있는가.
다 돈이었지. 곡은 이미 다 나와 있던 상태였고, 녹음실을 구하는 게 문제였는데, 그게 다 돈이다. 개인적으로 어쿠스틱 사운드를 좋아해서 이런 거 저런 거 많이 알아보고 다녔는데, 다행스럽게도 안치환 씨 녹음실을 구할 수 있었다. 아주 헐값에. 그러니 이것도 후원받은 셈이다. 그 때문에 원하는 사운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남았는데, 바로 세션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몇몇들과 맞춰봐도 함께 연습을 한 사이가 아닌 탓인지, 음악이 노멀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혹 밴드 형태로 하고 싶은 생각은 있나?
실은, 지금 밴드를 구상 중에 있는데 일렉트릭 밴드는 아니고, 재즈 드럼과 콘트라베이스가 따라붙는 3인조 형태를 생각중이다. 아, 현은 꼭 추가하고자 한다. 이번에도 첼로를 넣었는데 느낌이 있더라고. 백자만의 어쿠스틱 사운드를 완성해내고 싶다. 이번 음반이 하나의 출발점이었으면 좋겠다.
-‘구름’, ‘나비’는 재수록된 곡이다. 분위기와 어울린다고 판단했는지.
그렇다. 앨범의 전체적 분위기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서 넣게 되었다.
var controlBtn20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20.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20");
var ds20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20"));
-혹시 ‘그대가 떠나가는 오늘밤에도’의 가사는 특정인의 죽음을 겨냥하고 쓴 곡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노래는 가사를 예전에 미리 써 둔 곡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런 감상에서 나온 노래였을 거다. 사랑했던 사람, 떠나간 사람, 떠나간 나의 모습,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var controlBtn22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22.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22");
var ds22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22"));
-개인적으로는 그 곡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팬들 사이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은 뭔가?
‘그대가 떠나가는 오늘밤에도’, ‘가로등을 보다’를 많이들 좋아하신다. ‘어김없이’를 사랑해주시는 팬도 있다. 이 노래만 들으면 5월이 떠오른다고 한다. 봄이 되었지만 너는 없고… 뭐 이런 가산데, 내 처지로부터 탄생한 노래지만 이렇게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다. 곡도 곡이지만, 애초엔 드럼을 없앨까 했다. 그런데 프로듀서가 드럼은 내버려두고, 첼로를 입혀보자고 하더라. 결과적으론 그 친구 말을 듣길 잘 했다.
var controlBtn24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24.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24");
var ds24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24"));
-‘울고 싶던 어느 날’의 가사는 조금 불편했다. 지나치게 계몽적인 느낌이랄까. 혹 자신에게 내뱉는 말인가?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맞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가사다. 1절은 도닥이다가, 2절에선 자학으로, 3절에선 옥타브를 쭉 올린다. 완전 조울증에 빠진 노래지(웃음). 사실 프로듀서도 이 노래가 별로란 이야기를 했다. 그때 친구 하나가 조언해 주더라고. 연극하듯이 해보라고. 그래서 탄생한 노래가 이것이다. 그런데 여성분들이 의외로 좋아하더라. 이 노래를 듣고 술자리에서 울던 친구가 있었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니, 선배가 자기에게 해주는 말 같아서 찡했다 한다. 그 역시 그 친구 나름의 재해석이다. 경준 씨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 역시 하나의 재해석이니까.
var controlBtn26 = new Music.ControlListButton();
controlBtn26.setCheckboxClassName("chk", "tbTrkTit26");
var ds26 = new DragSelector(daum.$("tbTrkTit26"));
-요즘 많이 하는 고민은 뭔가?
재작년에 죽은 외대 총학생회장 출신 형이 있다. 그 형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과거 이 바닥 선배들이 정치권으로 진입해서 망가지는 걸 많이 봤다. 물론 그 사람들이 잘난 것도 있지만, 그 때 그 사람들 밑엔 선전물 매단 사람들, 스피커 들고 뛰어다닌 사람들이 있었다. 그 형이 이러더라. 그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 아니냐고. 그들이 왜 그 성과까지 가져가야 하냐고. 그 형의 말을 곱씹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있다.
-그 말을 들으니 브레히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 떠오른다. 앨범을 들으면서, 오히려 비권 혹은 반권(이런 말이 허용된다면)인 친구들이 더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단 서정적이지 않나.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그러더라고. 백자 말고 다른 이름으로 내보라고. 백자란 이름이 운동권 바닥에서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에, 대중들에겐 부담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근데, 나는 그런 게 싫더라고. 나를 속이는 것 같잖아. 그런 것도 다 내 모습인데. 사실 그런 친구도 있었다. 내 음반을 구입하고, 김광석 필이 나서 좋네요, 이런 친구였는데, 검색하다가 ‘주한미군철거가’, 이런 걸 발견한 거지. 깜짝 놀라 하더라고. 요즘 그런 데서 오는 딜레마가 있다.
-뭔가.
내가 가진 사상과 내가 하는 음악 사이에 난 균열이다.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게 나의 숙제다. 가령 훌륭한 사상가이지만 훌륭한 예술가는 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원래 훌륭한 예술가에게는 대개,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어, 주제 사라마구 같은 경우. 빨갱이짓하다가 나이 들어서야 인정받지 않았나. 파블로 네루다도 마찬가지 경우고.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니까, 그 사람의 작품이 그 사람의 사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알겠더라. 그냥, 항상 궁금하다. 난, 어떻게 하면 될까. 왜냐하면 난 내 노래에 가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라면 자신감은 상비약으로 가지고 다니지 않나?
물론 그렇기도 하다. 그래도 인간은 양가적인 것 같다. 자만과 자학이 늘 함께 있다.
-평소에 곡 작업은 어떻게 하는 편인가?
어떤 느낌이 올 때… 그러니까 주로 밤에 술 마시고 쓴다(웃음).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때 많이 쓰는 편이다. 누군가는 곡을 오전에 상쾌하게 써보라고 하던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카페 활동을 봐도, 주로 밤에 용감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다음날 아침에 보고는, 놀란다(웃음).
-1990년대를 거치고 2000년대로 접어들며, 민중가요 노래패들은 일면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대학생들이 탈정치화된 마당에서 당신의 해법은 무엇인가?
소위 진보진영 예술가들에겐 큰 위기가 닥쳤다. 바닥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공연할 곳도, 음반을 판매할 곳도 흔하지 않다. 나 역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이 많다. 그러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운동이라는 게 정말 운동 자체가 필요해서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면 그건 가짜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다. 그 외로움 덕택에 꿈을 꿀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당장이야 탈정치화 되었을지 몰라도, 인간이라는 존재 내부엔 그 외로움이라는 놈이 늘 살아있다고 믿는다. 그런 마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솔직히 답이 없다. 이 계통 예술가들은 누구나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다. 내가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도 접근법에서의 하나의 시도를 가한 것이다. 알릴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는 다 전업이다. 먹고 사는 문제의 압박이 가장 크다. 우리끼리 만나면 이런다. 지금은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라고. 비록 깃발 들고 나오는 사람은 줄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운동의 기운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진보진영 자체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독단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니들이 말하는 건 옳은데, 난 아냐! 혹은 뭐하는 놈들이야? 이런 말들에 주목해야 한다. 1980년대는 확실히 취직 걱정이 덜한 시대였다. 선배들도 적당히 운동하다 다 은행에 들어가고 그랬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비슷했다고 본다. IMF가 분기점이었지. 지금이야 어짜피 다 예비 비정규직들 아닌가. 지금 대학생들에겐 먹고 사는 문제가 첨예한 문제다. 몇 주 전 일본에 계신 형님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곳은 등록금 대출이 싸다. 월당 수만원 내외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적다. 이런 상황에서 애들에게 남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니? 택도 없는 소리다. 먹힐 리가 없다.
-운동권의 클리셰를 사용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집을 믿는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가 생겼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좀 많이 이르긴 하지만, 2집은 어떻게 준비해나갈 것인가? 여전히 개인의 위로가 주가 되는가?
아마도. 위무의 차원이 중심이 될 것 같다. 뭐, 아직 모르지. 내 솔로 활동은 계속 그리할 듯 싶다. 스타일보다는 백자 사운드를 먼저 발견했으면 한다.
-백자 음악의 롤 모델이 있다면? 아마 어쿠스틱 사운드를 추구하는 뮤지션일 것 같다.
어쿠스틱 사운드는 다 좋아한다. 감성적으로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대미언 라이스(Damien Rice),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 잭 존슨(Jack Johnson), 그리고 김두수. 이런 양반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백자와 대미언 라이스라. 재미있다.
물론 그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진 않다. 아,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 그 친구 음악 참 좋아한다. 자기 고집이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보이스다. 나도 그런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뽕끼 같은 것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전에도 음악을 많이 들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게 아킬레스건이다. 나는 시골 촌놈이었다. 환경 자체가 받쳐주질 못했다. 고3이 되어서야 공부하면서 조금씩 듣기 시작한 정도다. 이문세(특히 이영훈), 유재하, 한영애, 이런 사람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대학 가서는 알다시피 민중가요만 주구장창 들었다. 뭐 꽃다지, 노찾사.
-소위 클래식들이군.
그렇다(웃음). 그리고 군대를 가서 가요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음악감독만 하는가?
아니다. 가수도 같이 한다. 무대가 그리 많진 않다. 우리는 팀으로 움직이기에 개런티가 필요하다. 가봐야 대학이나 노조무대인데, 요새 그쪽 상황이 말이 아니다. 우리도 돈 달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6집을 올해 아니면 내년에 발표하려고 계획중이긴 하다.
-다른 무대에는 서지 못하는가?
일부 진보진영 쪽에서 가끔 불러줄 때가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 노제 때도 공연을 했었다.
-무대가 많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당연히 있지. 그래도 지금은 온통 음악 생각뿐이다. 기타강습도 얼마 전 다 끊었다. 콘서트도 계획 중이다. 물론 후원을 받아서. 예전에 노래패 만들 때 도와준 형이 너 아직도 그리 사냐, 고 물어보더라고. 주변엔 이런 부류들이 하나고. 미안하다, 고생이 많다, 이런 부류가 하나다. 그리고 유일하게 음악을 계속해줘서 고맙다는 부류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고맙다. 이번 콘서트도 그 형이 제작할 것 같다.
-언제쯤일까?
4월 아니면 5월이 되겠지. 지금 대관을 알아보고 있다.
-세포심는다는 말을 쓰지 않는가, 민중가요 후배세포 육성은 잘 되어 가는가?
우리 때는 재생산이라는 단어를 썼다. 전혀 못하고 있다. 일단 그런 친구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바다비에서 공연을 하던 중에, 심지어 2000년대 학번인데 나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있더라. 그들을 보면서 이런 친구들이 음악하고 싶어할 때 우리는 장(場)을 만들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나 하나 잘하는 것에 모든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친구들과는 이미 결의를 끝냈다. 죽을 때까지 하자. 나이 먹어서도 음악하는 외국 그룹들을 봐라. 멋있지 않냐? 하면서.
-신입을 안 뽑겠다는 말인가?
말이 좋아 재생산이지. 생활에 지쳐 그만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골수들만 모여 지금의 일곱 명이 남은 것이지. 10년째 이 멤버다. 모두 전업이다. 나는 오히려 이 바닥에 없던 새로운 친구들이 민중가요를 불렀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말한 재생산은 그런 의미로 쓰여야 할 것이다. 사회와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지. 바라건대, 그런 친구들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무 없다.
-방송출연도 가끔 하던데.
예전엔 거부했다. 지금 그런 꼰대 같은 접근법으론 아무 것도 안 된다. 다양한 시도와 노력. 그것만이 열쇠이다. 예전이야 민중가요를 같이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시 원론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정말 정치적인 게 뭐냐? 동시에 예술적인게 뭐냐?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지평융합시킬 것이다. 그게 내 목표이다.
-그런 것을 대중추수주의로 몰아가는 시선은 없나?
그런 비판이 있다면 아쉽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있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백자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신뢰가 강한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에 대한 궁금함이 강한 거지. 개인적으로 역사와 종교에 관심이 많다. 종교가 없음에도 예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 토론도 했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내려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건, 위대하다는 생각에서다. 사람들을 보라. 때로는 바보같이 살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 가끔은 저런 걸 왜 참고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여전히 믿음이 있다. 개개인으로서는 불안과 고독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 누구나 기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아까 말했지만 인간은 양면적인 동물이다. 그러니 자신의 악함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예전에는 안치환의 ‘자유’ 가사를 참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폐부가 있으면, 쓸쓸함이 있거들랑 과감히 드러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의미 있는 이야기다. 거의 끝날 시간이 됐다. 백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음악과 운동이겠지. 나도 이제 나이가 40이다. 절반 정도 산 것이겠지. 개인적으로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뭘. 평소 느긋한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냥 멋지게 살고 싶다. 삶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 말이다. 그게 내 운동에 대한 시각이다. 내 가치를 내 삶 속에서 잘 실현하면서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음악으로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음악관이다. 음악이랑 같이 사는 게 즐겁고 좋다. 스물여덟살쯤 고민한 것이다. 스스로 자문해봤다. 너 그만한 재능이 있냐? 퍼내고 퍼내고 계속 샘솟을 만한 재능이 있어? 음악을 많이 들은 것도 아닌데. 답은 이러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 붙어보자.
-그것도 운동가적 기질인가?그렇다(웃음).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난 운동가라고 자신은 못하겠다. 음악운동가 정도로 표현하자. 아, 옆엔 항상 기타가 있어야 한다(웃음). 술은 벗이지만 진정한 벗은 아니다. 기타가 벗이 되어주어야 한다. 자, 이제 술이나 한잔 하자. [글: 이경준 대중음악평론가]
첫댓글 아! 단숨에 읽었다. 재밌다....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그렇죠? ^^
저도 생각을 이래저래 하게 되더라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