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려와 증명하라'입니다.
본문을 보면 35절에 유대관리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비웃으며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하라”라고 합니다. 또 37절에도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라고 했습니다. 39절에서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증명해보라고 세 번이나 조롱했습니다.
경기장은 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그가 왜 연봉을 50억, 100억을 받는지를, 그가 왜 챔피언인지를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면접을 보는 것도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자기가 어떤 생각,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 회사가 왜 자신을 뽑아야 하는지를 짧은 시간에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의사는 사랑으로 환자를 돌보고 환자를 살리는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잘 외운다고 좋은 의사가 아니라 그 선서대로 실천할 때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슈바이처 박사와 견줄만한 허준과 장기려 박사를 배출한 나라인데, 지금의 모습은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드라마 허 준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의원을 높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간에 의원의 소임은 생명을 다루는 것이니 그 어느 것보다 고귀한 일이다. 허나 아무리 귀하다 한들 마지막 한 가지를 깨우치지 못하면 진정한 의원이라 할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진정으로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심의가 되는 것이야. 세상이 진심으로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심의일 뿐이야” 허 준의 스승 유의태가 한 말입니다.
허 준과 유의태의 아들이 내의원 시험을 치르러 한양에 가는 도중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만납니다. 이때 허 준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정성을 다해 돌봅니다. 이 일로 허 준은 늦게 도착하여 결국 시험을 치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모른 척하고 시험을 보러 간 유의태의 아들 도지는 내의원에 합격하고 기뻐 돌아와 아버지께 보고합니다만 과정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원은 영달의 길이 아니다.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을 배워 역관이라도 될 일이지, 돈 버는데 욕심이 난다면 장사를 할 일이지, 의원의 소임은 병자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이 첫 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셋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이야! 너는 허준에게 졌다.“ 의사들이 정부한테는 이길지 모르지만 환자에게는 졌습니다. 국민에게도 졌습니다.
운동선수들도 실력만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력과 함께 인성을 봅니다. 개인기량만 아니라 팀워크가 잘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 선수가 얼마나 팀에 녹아져서 팀을 위해 헌신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력을 증명하는 것과 인성을 증명하는 것은 다릅니다. 실력이야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면 되지만 인성은 경기장에서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 모든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난번 축구선수들이 탁구 하다가 발생한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전부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강인 선수의 실력은 정말 뛰어납니다. 20세 월드컵에 열여덟 살에 참가해서 준우승을 했고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스페인 명문 발렌시아에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공식으로 정해놓은 바이아웃금액 8천만 유로, 우리 돈 천 억 원을 포기하고 방출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발렌시아팀의 관계자가 밝힌 걸 보니까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팀과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증명하는데 있어 그 방법은 분명 다릅니다. 기술과 실력은 경기장에서 상대를 이김으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인성은 남을 배려하고 겸손하고 존중함을 통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증명합니까.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손에 든 초코렛 하나 먹자고 하니 “싫어, 싫어”라고 한다면 말뿐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힘과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희생과 오래 참음, 절제함, 허물을 덮어줌 등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어'라며 가진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너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감수하고 참고 견디며 기다리며 고난도 함께 할 수 있고 말없이 지갑을 여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어 구했다면 그의 수영실력을 증명하기보다 사랑을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유대관리들이, 군인들이, 또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 중 한 명도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네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라, 네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라"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여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고 왕임을 증명하라고 하며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증명하는 자리냐 하면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증명하되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많은 표적들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검정된 것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헤롯왕도 그의 능력 행함을 보고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한 것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며 엎드려 경배드리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놀랬는가 하면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죽은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라고 하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완전히 맛이 갔구나.' 라고 하지 진짜라고 여기겠습니까. 진짜 살아날지 모르니 혹시라도 군인들을 풀어 무덤을 지키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만일 사람들이 보는데서 삼천포 앞 바다를 걸어서 남해까지 갔다든지,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을 살렸다든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게 했다든지, 귀신을 쫒아내어 사람을 온전케 했다면, 그러고 나서 제가 죽으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는 그 말에 동요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죽으면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면 콧방귀나 끼고 정신병원이나 알아 볼 일이지 그 말 때문에 군인들을 시켜 보초를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겠는가,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것도 로마의 총독이 일반인도 아닌 관저를 지키는 경비병을 시켜 무덤을 지킬 정도였다면 적어도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예삿일은 아니었고 예수님이 평범한 유대인중의 한 사람이 아님은 방증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믿고 군대를 동원해서 무덤을 지킨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그것도 로마 황제의 인을 쳐서 절대 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은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사실임을 증명하고, 그것만으로도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즉 성경에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이적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은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럼 십자가는, 그 십자가의 죽음은 무엇을 증명하는 자리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분량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힘과 능력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희생과 헌신으로, 끝까지 참고 견딤으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으로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못 박아 놓은 십자가에서 마술이라도 부려 내려오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위해 돌아가시기까지 희생하고 참으시고 목숨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능력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조롱과 멸시를 참으시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우리를 향한 사랑의 분량을 증명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길 원하시는 의지도 증명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면서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조롱하는 저들을 향해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대신하여 제가 형벌 받사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저들을 용서해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크신 사랑을,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용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도 승리라고 합니까. 목숨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구원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증명된 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용서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쉬운 일이 아님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증명하셨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음으로 우리의 죄 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싼 것이 아니며 가장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 대가를 지불한 결과임을 증명했습니다. 우리가 단지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은 그 엄청난 대가를 예수님이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결코 공짜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다시 기억하고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증명하신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의지를 확인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