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교회는 오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지냅니다. 특별히 오늘을 십자가 현양 축일로 지내는 교회의 전통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예수님이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발견한 사건과 관련됩니다. 이 같은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성녀를 기억할 때, 예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함께 기억합니다.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찾으려 할 당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이 있습니다. 성녀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하나가 아닌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전하듯,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당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명의 죄인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그 세 십자가 가운데 어떤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이 발견한 세 십자가 중 어떤 것이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인지 알아내고자 각각의 십자가 조각들로 병으로 앓고 있는 이들에게 그 십자가를 만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첫 번째 십자가의 조각을 만진 병자가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두 번째 십자가의 조각을 만진 병자는 자신이 앓고 있던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성녀는 첫 번째 십자가가 예수님의 왼편에 있던 죄인, 곧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거부한 죄인이 매달렸던 십자가임을 알 수 있었고, 병자가 낳는 기적을 일으킨 십자가와 나머지 한 십자가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마지막 십자가의 조각을 죽은 이에게 갖다 대어 보았더니 죽은 이가 살아난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마지막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성녀 헬레나에 관해 전해져 오는 전승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공통되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구원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임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민수기의 말씀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불순종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통해 다시 한 번 용서해 주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시는 모습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종살이를 통해 받아왔던 탄압과 좌절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보내주신 모세를 통해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는 여정이 길어지게 되자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은 망각한 채,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인간적 고통에만 사로잡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크나큰 죄를 범하고 맙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ㄴㄷ)
이스라엘 백성의 이 같은 말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은 까마득히 잊은 채, 자신이 겪고 있는 인간적 고통과 괴로움에만 사로잡힌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이 전혀 사실에 근거한 말이 아닌 그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인상에 근거한 것이며 그 말이라는 것이 굉장히 과장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것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내적 정화를 갖추게 하기 위한 정화의 여정으로 그들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도록 만들었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통해 그들의 육적 허기짐을 채워주시고 하늘에서 그 양식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그리고 그들을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만나로 주어지는 육적 양식이 풍요롭고 배부를 정도의 양식은 아니었다할지라도 양식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자신들의 현실을 과장되게 말하며 하느님께 자신들의 인간적 불만을 표출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본마음을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ㄷ)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이 한 마디 말이 바로 그들의 감춤 없는 속마음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첨가된 모든 말은 사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한 부가적인 말일 뿐인 것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ㄷ)
이스라엘 백성은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의 길을 걸으며 육체적 한계와 인내의 한계를 맛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너무 더워서, 끝이 없는 그 길이 너무 지루하고 고단해서, 매일 계속되는 맛없는 만나라는 양식이 지겨워서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다 팽개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되었다는 기쁨도 잊은 채, 지금의 처해진 고단한 현실에만 사로잡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새로움을 잊은 채, 이 새로움을 가져다 준 모세를 일차적으로 비난하고 이에 더해 그를 보낸 하느님을 비난하며 다시 옛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고 해댑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이 같은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된 잘못을 일깨워주시고자 그들에게 불 뱀이라는 혹독한 벌을 내리시고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며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 간청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 21,7ㄴ)
어찌 보면 참으로 나약하고 간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맹비난을 퍼붓던 그들이 정작 하느님이 주시는 벌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이전의 용맹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다시 하느님께 간청하는 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적 모습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내가 필요로 할 때에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벌을 내리시고 이를 통해 우리 역시 다시금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 같은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제 1 독서의 민수기의 말씀에서 모세가 만들어 들어 올린 구리 뱀이며,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하는 다음의 말씀으로 여실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구약 시대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구리 뱀을 통해 그 구원의 은총을 주셨듯이, 새로운 계약인 신약의 완성자인 메시아 예수님의 십자가상 들어 올리심을 통해 모든 이들, 곧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예외 없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도록 초대해 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거룩한 십자가,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가 바로 여러분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의 극한적 표현이며, 바로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의 손에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통해 새 생명을 베풀어주셨듯이,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바로 여러분을 죽음이라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여러분 각자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머무르십시오. 십자가의 예수님이 여러분 각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의 잔치로, 하느님의 따뜻한 품으로 여러분 각자를 부르시는 그 사랑,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가 오늘 하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