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말
손 소 희
훠언한 하늘로부터 어슬렁어슬렁 눈이 내린다. 마치 강호 유람에 뜻을 둔 듯 눈발은 천천히 몸뚱이를 흔들며 송전무 댁 앞뒤 창문을 기웃거리다가 내려진 곳에 그대로 앉아버린다.
삼득에미는 댓돌 아래서 나직이 기침을 한번 한다. 이번이 두 번째 걸음이므로 먼젓번같이 그닥 서먹서먹 하지는 않지만 혹시 먼젓번에 없던 이 댁 영감이나 색시가 있을 법도 하고 그 밖에 하이칼라 한 마님 동무들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미치자, 좀체로 드놀지 않는 삼득에미의 염통이 수상스레 서너 번 푸득이며 멋쩍게 쭈뼛거려졌다. 그러나 그런대로 시치미를 따고 목에다 감았던 수건을 풀어 들고 쌓이지도 않은 눈을 툭툭 털며
“아유 웬 눈이 이렇게.”
뇌까리는 한편 짐짓 수선을 떨며 마루방에 올라서서 안방 미닫이를 열었더니 다행히도 마님만이 번들거리는 의걸이와, 배가 불룩한 자물통을 차고 있는 장롱과, 다과 그릇들을 넣은 커단 찬장에 에워싸여 뽀오얀 놋화로 곁에 퍽은 길어 보이는 장죽을 물고 태연히 담뱃내를 뿜으며 앉아 있었다. 반지르르 기름 윤이 나는 머리 양편엔 별반 깊지 않은 웨이브가 느릿느릿 줄을 그으며 내려가다가 조그맣게 몰려 금비녀에 질려 있었다. 감자줏빛 나는 비로드 치마에다 회색 양단 마고자를 받쳐입은 마님의 차림새는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에 알맞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옷빛과 검은 머리와 그리고 짤막한 팔과 밭은 목 아래, 옆으로 퍼진 똥똥한 체구에는 장죽이 그닥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님의 장죽이 놋화로를 당당 울리고 나면 뒤를 이어 마님의 목소리는 한층 더 짱짱해지고 마님 목소리가 소곤소곤 의논조로 변해지면 매파 삼득에미의 떠는 홍감*에도 열이 보태지곤 했다.
물론 마님의 이야긴즉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요, 먼젓번에 이미 싫도록 들은 같은 이야기였으나 흡사 처음 하는 이야기 못지않게 마님이 열고⁕를 내면 수선을 떠는 데는 자신이 있는 삼득에미도 자못 놀랍고 지겹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대로 꾹 참고 흔연히 듣는 구실을 치르며 간간이는 알맞게 장단도 맞춰야 하느니라고 스스로 당부하고 침으로 입술을 축이며
“이르다 뿐입니까, 마님. 아무러믄요, 마님. 그러믄요, 마님. 암 그렇습죠, 지당한 말씀입죠, 마님.”
하고 맞장구를 친다. 때로는 그저 듣는 구실을 치르며 앉아 있다가도 간간이 장단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마님의 구변이 유창해짐에 따라 삼득에미도 어느덧 감격에 목멘 음성으로
“네에 삼한 갑족요, 아아, 저 신라 때 네 아 그 김유신 장군님이, 아 그 최치원 사절님이, 아 그 임진왜란 때 수사(水使)도독이시오, 거북선을 만드신 이순신 장군님이 이십 대 전의 친정편 조모님 외가편이시구먼요 네, 그 신사임당께선 이십삼 대 전의 시가편 조모님의 고모님이시구, 아 예 또 정몽주 선생 어머님이 시 시조모 이십팔 대 전의 종조모시고, 아 참 과연 유서 깊은, 예에 지체도 놀라운 가문이다마다요. 예에 절개도 대쪽 같은 충신이,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참형을 당허시고 그 밖에 일족은 낙향을 하셨구먼요. 예에 또 어쩌믄 효성도 심청 같은 자식이, 예에 열녀문도 문중에 여섯씩이나 있으시구먼요, 아 그 참 놀랍구말구요. 암 그렇습죠. 아암, 삼한 갑족입죠. 네에 삼한 갑족이 아닌 그냥 양반들도 왕실하고는 혼인을 꺼렸습니다그려. 그렇습죠. 왕실은 계통 있는 양반이 아니라서요. 어쩌믄, 아아 지존은 그렇지도 않구먼요. 암요, 종가 줄거리만 같음 뭘 합니까. 예에 아 그 참 전 정말 오늘이사 처음으로 그런 걸 귓가심을 했습니다그려. 아이구, 마님 그저 더두 말구 마님 곁에 이틀만 있었으면 좀 말귀가 밝아질 것 같습니다. 전 온통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깜깜소식이랍니다요…….”
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 뜨고 목을 찔룩거리며 흐들갑을 떨었다. 호들갑을 떨면서도 그 어려운 이름들을 하나라도 기억 속에 남기려고 다소 애를 썩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그것들은 곧장 잊어버려지곤 했다. 욕심쟁이인 김사장에게 이 댁 소개를 할라치면 이 댁 역사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물론이요, 게다가 마님 친정 또 그 노마님 노노마님 친정의 스물 몇 대 사돈댁까지 샅샅이 내력을 캐어 들리는 것도 모름지기 색시를 위해선 금상첨화 격일 테니까 중매쟁이가 알아두어서 해로울 건 없다고, 새로 정신을 바짝 차린 멀끔한 눈을 까 번득이며
“마님, 참 일제 때 벼슬이 뭐랬습죠. 예에, 시아버님은 도에 경시나리구요. 친정아버님은 총독부에 과장나리였구먼요. 암요, 그 시절에 조선 사람이 그런 벼슬자리에 있었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지요. 훌륭하다 뿐입니까. 참 해방이 되니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합디다만 그때야 감투가 얻어걸리지 않아 못 썼지 갖다 씌워주면 누가 마다했겠습니까. 입은 비뜰어져두 말은 바른대루 하란다구 안 그렇습니까마님.”
삼득에미는 자기의 말솜씨에 스스로 감탄하며 마님의 눈썹 한 대의 움직임과 입안 혀 놀림 하나 빼놓지 않고 알뜰히 살펴가면서 모르는 새, 새는 허황한 군음과 또 그 뜬 음성에 알맞은 표정을 얼굴에 새기며 마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야말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받아다는, 도로 뱉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에 열고가 난 마님은 삼득에미의 떠는 흥감을 듣는 둥 마는 둥 이따금 귀를 갸웃이 기울이며 자기의 이야기에 취해 낯빛이 발그레해서 샘같이 솟는 자기의 말 속에 잠겨 있었다.
삼득에미는 마님과의 대꾸에 어지간히 진력이 났는지 옆에 놓인 접시에서 강정 부스러기를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우물거리다 보니 여간 목이 컬컬치가 않았다. 그렇게 목이 컬컬한 것이 마치 마님의 탓이기나 하듯 삼득에미는 문득 어떤 분노 같은 것을 꿀컥 삼켜버리고 속으로, 쯧쯧 수선이 격이군그래. 내사 참말이지 아무리 젊은 나이에 늙은 차림을 하고 꼴딱 네 해째 매파 노릇을 해먹었어도 그저 온몸에 풍경 단 소가 쩔렁쩔렁 방울을 울리듯 요란스레 지체자랑·영감자랑·팔자자랑·돈자랑·자식자랑·솜씨자랑을 하다 하다 나중에는 저 비계 낀 몸매와 작은 키가 후분*의 복록을 약속한다고까지 자랑으로 엮어대는 아낙네는 다시 본 일이 없다고 하까 흥감을 떨던 입과는 달리 뱃속이 뒤틀리는 것을 깨달으며 무심한 듯 강정 부스러기를 주워먹고 있었다. 그러자 마님은 또 어찌 된 셈인지 하던 이야기를 뚝 끊고 귀를 갸웃하고 나더니 삼득에미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오늘은 그만 돌아가게. 갔다가 다시 와주게.”
하며 넌지시 무슨 언짢은 눈짓 같은 것을 지어 보인다.
삼득에미는 후회막급이었다. 먼젓번에는 마님의 말씀에 장단을 맞추지 못한 것이 께름칙 했는데 이번엔 일껏 잘 맞춘 장단에다 무슨 좀이 쑤시는지 강정을 집어먹고 밖을 내다보며 속으로라도 마님을 나무랐는지 모를 일이라고 또한 속으로 가슴을 쳤다. 만약 혼사가 되면은 김사장댁이 알아 챙겨줄 것도 줄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첫째가는 대 무역회사 사장의 외톨 아들이 제 용돈에서 한몫 단단히 떼어준다고 고복다짐*을 했으니만치, 일이 성사가 되고 보면 열 칸 기와집 하나쯤 마련하기야 땅 짚고 헤엄치긴데, 또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아마도 잠깐 사이에 헤살*이 들었던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 주제에 무슨 방자한 짓이었냐고 한바탕 자신을 꾸짖고는 새삼스레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넓죽한 손을 마주 잡고 경건한 태도로
“오다 뿐입니까 마님, 저 그 사진 말씀입죠, 따님 사진을 주세야죠, 호호 그건 그저 되련님 아버님이 체면을 세우라는 분부대로 그러는 겁죠.”
하고 은근히 마님의 낯빛을 살핀다. 마님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김사장 아들 사진을 들여다보며
“자넨 그래 이 되련님을 직접 봤는가?”
한다. 삼득에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을 비비며 말한다.
“보다마다요 마님.”
했다.
“누구의 연줄이던고.”
마님이 다시 물으니 삼득에미는 새삼스레 후우 한숨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살던 시골인 의정부에 육이오 때 놈들이 들어오던 길로 생과부 여럿을 냈는데, 바로 그 무렵 자기와 한날한시에 과부가 된 동무가 있다고, 그 동무가 자기와 더불어 대전으로 해서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가 손 부부리* 얌전한 덕으로 마침 김사장 댁에 침모로 앉았다고, 그래 두루 내왕이 있은 게 연줄이노라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의 회색 광목 두루마기 깃섶을 여미며, 그 댁 도련님이 무슨 모임에선가 우연히 애기씨를 보고 나서 곧 뒤를 따라붙이고 뒷조사를 했나보더라고 먼젓번에도 한 꼭같은 말을 다시 되풀이한다.
“그럼 하필 자네를 내세울 건 없지 않는가, 다른 연줄로 통할 일이지.”
하는 마님의 말과 표정은 분명, 그렇게 그편이 재산 좋고 집안 좋고 신랑 될 사람 됨됨이가 나무랄 데 없다면, 하필 너 같은 중매쟁이를 내세울 건 무어냐, 따지는 눈치다.
의당한 의문이요, 튕길 만한 조건이기도 했다. 손뼉은 맞아야만 운다고, 그만하면 아들애비 딸에미 서로 겨루기엔 알맞은 상대라고 생각하며 총각 편은 또 그 아버님이 야단스레 돈을 코에 걸고 그저 온갖 것을 확대경 속으로 자질하며 뻗대는 어른인지라, ‘이놈아, 서둘긴 제에기 흥 고관대작의 딸만 해두 천지에 색시 사태가 날 지경 인데 그래 김 아무의 아들놈이 혼사일루 등이 달다니 허허’ 하며 호를 빼니 혼처는 십상으로 알맞추 걸려든 셈이었다.
김사장 댁이 또한 그 남편의 뜻을 받들어 우선 총각 색시가 서로 사진 교환을 해서 당사자는 물론이요, 부모들까지도 대략 의논이 맞으면 그때 함께 실물 선을 보기로 해야지 괜히 처음부터 아는 사람을 내세웠다가 일이 성사 못되면 피차 체면에 다소라도 흠집이 생길 게 아니냐, 그러므로 일은 은밀히 진행시키라고 마누라에게 엄히 당부했다더라고, 삼득에미는 대략 이 뜻을 추려 마님에게 말했다.
마님은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일리 있는 소리라고 샐쭉이 웃고 나서 구미가 동하는 모양인지 매우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자네 집은 그 김사장 댁에서 가까운가?”
삼득에미는 자네, 자네라니 지금이 어느 땐데, 마치 누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 종년 다루듯 한다고, 또 부어오르려는 볼을 스스로 눅치어, 딴엔 애교 있게 입을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아니지요, 저이야 셋방살이루 아현동 막바지랍니다. 그 댁이야 가회동인 걸요.”
“아현동 막바지, 아현동 막바지면은 서쪽으로 말인가?”
마님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네에 서쪽 산비탈입죠. 그렇지만서두 그 댁하군 그닥 멀잖읍죠.”
“왜? 그쪽이라면 가회동하군 멀걸, 아현동 서쪽으루 막바지라면 나두 대략은 짐작이 가네. 그 근처에 예전 우리 친정 산지기네가 살고 있었지. 육이오 전만 해두, 우리 딸애하구 같이 나두 몇 번 다녀왔네만 퍽은 멀드군. 한데 어쩌면 아직도 거기 살고 있을 거야. 그 산지기네 말일세.”
혼잣말같이 나중 말은 입속으로 뇌고 일어나 서서 의걸이 서랍을 뒤지며 또 묻는다.
“그래 그 김사장 댁의 저택은 어떻든가.”
말투로 보아 뜻이 있는 눈치라고 삼득에미는 새로 입술에 침칠을 하고 가장 효과적 인 눈짓을 해가며
“그야 뭐 기막히게 좋습죠. 다시 더 어떻다 할 여부가 없습죠.”
한즉 또 마님은 그야말로 아주 숙고하는 눈치더니
“그런 귀한 댁 되련님이 행실은 어떤지, 자넨들 그것까지야 알 수 있겠나, 옛말에 겉볼안*이라 하지만 그런 건 다 소용없는 소리야. 사람이란 외양만으론 모르는 법야.”
이렇게 말하며 도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마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총각 사진을 바라다보며
“외양만은 사내답구 잘생겼군.”
한다. 그리고 갑자기 숨을 할딱거리며 몸이 나면서부터 심장이 나빠 걸핏하면 숨이 차노라고, 딸 사진은 건넌방 함 안에 있나보다고, 그러므로 우선 약을 한 모금 마신 뒤에 찾아보겠다고, 그 사이 강정이나 들라고 권하고는 식모를 불러서 약을 데워 오라고 이른다.
삼득에미는 마님이 약 먹기까지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되겠다고,
“그래서 어떡합니까. 병이란 애초에 고쳐얍죠. 하기야 마님은 복이 많으시니 염려할 것도 없습죠만.”
했다.
이렇게 마님의 병환을 걱정하는가 하면 그녀의 복록을 칭찬하는 것이었으나 마님은 그러한 삼득에미의 말엔 대꾸하지 아니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담배만 포올폴 빨며 무슨 생각인가 하고 있는 눈치더니
“사람이란 여간해서는 모르는 거지, 암만 그래도 그 댁 되련님 행실이 어떤지, 그거야 자네가 알 턱이 없지 않나. 사람 알기란 쉬운 게 아녀, 오죽하면 우리 아버님이 다 감쪽같이 속이우셨겠나.”
“속이 우시다니요.”
처분을 기다린다는 얼굴로 여전히 마님을 쳐다본다.
“자네두 중신을 허투루 하면 못쓰네. 그저 돈냥이나 있어서 으르르하게 집 칸이나 꾸리구 살면 그만인 줄 아나, 사람이란 뿌리가 좋아야 하느이. 요즘 세상에 제아무리 으릉거리고 살아도 근본이 상것들이면 결국 별수 없는 거야. 아예 상것들하고는 상대를 말아야 해.”
이렇게 말하고 쯧쯧 혀를 찬다. 삼득에미는, 참말 김사장네가 반드시 양반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터라 잠시는 죄를 저지른 사람 모양 풀이 죽어 있자니까 다시 마님이 말을 잇는다.
그 내용인즉 예전 마님 어머니가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시집을 왔는데 그것이 제법 외양이나 인품이 얌전하므로 마님 아버지가 뒤늦게나마 역시 인품 좋은 종머슴하고 짝 지어주고 게다가 속량을 해주었을 뿐 아니라 미덥다고 산지기로 보냈더니,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이것들이 엉뚱하게 산에 나무를 찍어다 팔고 어쩌구저쩌구 해서 저희들의 살 집을 마련하고 돈냥이나 착실히 만들었더라고. 그러나 그것도 또 좋지만 그 뒤 자기 친정이 기울어지니까 아주 싹 발길을 끊고 돌아앉아서 뉘 덕 본 일 없노라고 비방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신령 치벌(治罰)을 받음인지 사내녀석은 얼마 살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어린것 오뉘를 남기고 죽어버리더라구 했다.
좀더 높은 마님의 숨소리가 들리고 이어 놋화로가 당당 울었다.
“아이구 맙시사, 그저 옛말이 그르잖군요. 믿던 나무가 거꾸러진다구. 뿐입니까, 죄는 지은 데루 가구 덕은 닦은 데루 온답니다. 그러니까 마님 이제부터 저두 그 댁 내력을 알아봅죠만 마님께서도 잘 내사하십시요.”
하고 삼득에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삼득에미가 호들갑을 떨고 나자 식모가 약사발을 소반에다 받쳐올린다. 약사발만 받아들고 마님은 탕약을 몇 모금 꼴딱꼴딱 삼키더니 이마에 골을 짓고
“무엇들 하기에 약은 이따위로 달였을꼬. 참 이러니 병이 나을래야 나을 리가 있나, 어서 좀더 걸쭉히 달여 와요.”
약사발을 방바닥에 밀어놓으며 한숨을 짓는다.
잠자코 식모가 그것을 다시 소반에 받아들고 나간 뒤, 삼득에미는 뭐라고 또 위로해야겠다고 아까와 같은 말로
“마님은 복이 많으신 분인데 병환이 감히 마님의 복하고 겨룰 수 있겠습니까. 겨룰 수 없지요. 없구말구요.”
하고는 마님의 표정을 살펴가며
“요즘이야 약이 오죽 좋습니까. 돈만 있으면야 약이면 다 되니까요. 그게 다 마님 복록입죠. 글쎄 접때 저의 안채 집 딸색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구 대굴대굴 굴르는 걸 그 오빠가 병원엘 데리고 가더니 당장에 배를 갈르구 도둑 밸인가 한 걸 아주 뚝 잘라냈다잖어요. 병명이 급성 맹장염이라나요. 그래 한 주일이 지나니까 아주 멀쩡해서 퇴원합디다요.”
한다. 그러자, 마님은 뚱딴지같이
“자네네 안채에는 그런 과년한 색시가 있네그려.”
놀란 표정이다. 삼득에미는 또 말거리가 생겼다고 속으로 만족히 생각하며 마구 지껄여댄다.
“말씀 맙쇼. 과년한 색시뿐입니까. 늙은 총각두 있답니다요. 참 그런 걸 보면 김사장 댁 되련님이야 아주 숫배깁죠. 글쎄 그 안채 선생님 아니 그 색시 오라범 말이죠. 학교 선생님인데요, 나이 스물아홉이야요. 그런 노총각이 왜 장갈 안 드나 했더니 몇 핼 두구 죽네 사네, 놓아라, 못 놓겠소 하는 아주 정든 님이 있다잖아요. 저두 몇 번 그 색실 봤습니다만 대단치두 않어요. 퍽 멋쟁이긴 합니다요.”
“그래 왜 성례를 치루잖는고.”
“아마 색시 편에 사정이 있다나봐요. 뭐 아직 학생이라나요. 하지만 성례를 치르구 안 치르구 간에 무슨 아랑곳입니까. 총각이 총각 아니고 처녀가 처녀 아니면 일은 다된 판이지요.”
“에이구 더러운 연놈들 같으니.”
그러자 갑자기 삼득에미는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그렇게 웃어젖히고는 정말 우스워 못 배기겠다는 듯이 몸을 흔들 하고 한번 떨고 나더니 바른손을 허리춤에 넣어 손수건을 꺼내 눈구석을 닦으며, 왼편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다. 그 넓죽한 손을 그렇게 살래살래 내저으며
“글쎄 말입죠 마님, 그게 바루 어저께랍니다. 문간방이 빈다구 안채 아주머니한테 좀 살펴달라구 들어갔지요. 저야 무심쿠 문을 열었습니다요, 무심쿠요, 그랬더니 맙시오, 둘이 껴안고, 키스라나요, 한걸 하고 있잖아요. 글쎄 총각 선생하고 그 정든 님이란 처녀하고 말입죠, 전 얼른 문을 닫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구, 뛰어나왔더랍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수다를 떨며 어떻게 신바람이 나는지 자기도 모르는 새 마님 곁으로 바짝 다가앉아 있었다. 마님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빼뚜름히 꼭 다문 채 숨을 쌔근쌔근하며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고 있는 눈치더니
“그러니 과년한 딸을 둔 에미들이 골치를 앓게 마련이지.”
혼잣말같이 뇌 이며 장죽에 새로 담배를 재워 물고
“그래 그 집 딸은 어디 댕기던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는다.
“무슨 대학엔가 다니 나봅디다. 딸헌테도 여드럼 투성인 놈팽이들이 곧잘 찾어오는 걸입쇼.”
두루 하찮은 것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입을 뻐죽거리며 말을 하고는 삼득에미 역시 입을 삐죽 다물어버린다.
마님은 그 삐죽이 다문 삼득에미의 입을 잠시 바라다보며 포올폴 연기를 뿜고 있더니
“그러기에 다 집 안 뿌리를 보는 게라오.”
여전히 쌔근거리며 총각 사진을 ˙들고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간다.
혼자 방 안에 남은 삼득에미는 자기도 어서 집칸이나 마련하면 안방은 이 마님 방 모양으로 꾸며야겠다고 벽을 바른 도배지와 천장지까지도 새삼 눈여겨본다. 도배지의 꽃무늬가 큼직큼직 한 게 참 혼란스럽다고, 그러나 방이 이보다 작더라도 자기도 꼭 저런 혼란스런 벽지를 구해다 벽을 바르리라 마음먹 었다. 그리고 요행히 신수가 좋으면 어쩌면 의걸이·장롱도 마련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분주히 또 열심으로 마님의 세간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마님이 들어왔다. 들어오는 마님의 손에는 엽서의 반절 폭이나 되는 사진이 한 장 들려있었다. 삼득에미는 황급히 그 사진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것은 모녀가 함께 박은 사진이다. 삼득에미는 홀린 듯이 旱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속으로 흠칫했다. 설마 그럴 수야 하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좀더 놀랐다. 얼핏 보기에 그 색시와 비슷하다. 이모저모 뜯어보아도 대체로 그 색시와 비슷하다. 보면 볼수록 자기네 안채 선생님하고 좋아지내는 그 색시하고 퍽은 많이 닮은 듯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 없을 것은 뻔히 정해진 이치다. 놀란 것부터가 어리석기 비길 데 없는 짓이라고, 손가락 한 마디의 반 폭밖에 안되는 사진의 얼굴을 보고 흠칫하다니, 이래서 모두들 주책바가지라고 하지 뭐냐고, 그리고 생각을 그따위로 돌리다니 날씨가 흐리멍덩하고 눈발이 어슬렁거리니 정신도 어리뻥해진 모양이라고 자신을 나무라며 그러나 어쩐지 무너져내리고야 말 듯한 열 칸짜리 기와집을 몸으로 받치듯 머리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리고 흐드득 웃었다.
“아이고 어여뻐라. 무산 선녀라드니 참말 미인이시구먼. 어쩌면 이런 따님을 두셨을까. 복두 많아라. 이러니깐 백만장자의 외아들 도련님이 오만 간장을 태우게 마련이죠. 마련이구말구. 오만 애가 다 타두, 이런 색시만 얻는다면야 오죽이나 좋을까. 지체가 훌륭겠다, 부모님이 특출허시겠다, 본인이 헌출했겠다, 가세가 으르등등하겠다, 하늘이 정해주신 천생배필이지. 아이구 또 마님은 왜 이렇게 젊으십니까. 시집 이래두 가겠네요. 참말이지 이 모녀분의 관골 좀 보지, 오묵하게 안으루 엎어진데다 논지(論之) 삼정(三正)하니, 하정이 최길이라. 이 복록을 다 어찌할랍니까, 끌끌.”
삼득에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사진과 마님을 엇갈아보며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어보고 궁합도 더 이를 데 없이 좋다고,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관상풀이와 사주타령을 하며 모녀 뒤섞어 좋은 말을 추려가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미 살주름이 제법 굵다랗게 자리잡은 눈가에 한결 더 뚜렷이 주름살을 살려 기쁜 웃음을 풍기며 마님은 적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저 밉잖은 얼굴이고, 또 고울 나이가 아뇨. 그러나 정말 복은 그렇게 타구났나 모르지.”
하며 짐짓 겸손을 표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걔가 우리들 첫자식 아뇨. 그러니 어디 아들딸을 가렸겠소. 그저 옥야 금야 했지. 게다가 걔 아래루 잇달아 아들 삼형제를 낳구 단산이구랴. 걔는 또 남동생이 불으면 붙는 대루 위엄과 귀염이 더하는구랴. 다 제 복인 걸 어쩌우. 영감께서두 유독 걔한데는 각별히 눈코가 없구랴. 뭐라구 걔가 떼만 쓰면 옳건 그르건 응 그래그래 식으루 응석이란 모조리 받아들이잖나, 옛말에 새끼 잡아먹은 범이 없다 하데만 우리 집 영감이야말루 걔한텐 뼈두 없다니깐…… 그래두 없어요. 다른 집 애들 같으면야 땅이 얕아 못 디디련만 걘 또 걔대루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우. 좀 가다가다 고집을 세우긴 하지 만서두.”
다시 마님의 숨소리가 높아지며 목 안에서 쌔액쌔액 소리가 났다. 자기가 너무 흥감을 떨어 마님이 덩달아 말을 많이 한 탓일 거라고 삼득에미는 죄스런 낯으로 약이 왜 이처럼 오래 닳지 않느냐 묻는다.
그제서야 마님은 참 깜박 잊었다면서 얼른 탕약을 들이라고 부엌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삼득에미는 이제 마님 이 탕약을 마시고 난 뒤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으려니까 댓돌 아래서 빠지직빠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귀를 갸웃하고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대꼭지를 다지고 있는 마님의 숨소리도 한결 높게 쌔액쌔액 소리를 낸다.
삼득에미는 그 쌔액쌔액 하는 마님의 높은 숨소리를 들으며 어서 약사발이 들어왔으면 하고 미닫이문 쪽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미닫이가 열린다. 열린 미닫이로 디미는 것은 약사발이 아니요 나일론의 발길이다.
“춥잖냐, 아이구 얘 혜경아, 양말을 신은 게 그 모냥이냐, 꼭 벗은 발이지 뭐니.”
마님은 대견한 듯이 나일론의 곧고 매끈한 다리를 눈여겨보며 말한다.
“어머닌, 춥긴 뭐가 추워요. 여기 좀 보세요. 이렇게 땀이 나잖아요.”
색시는 굽실굽실 가락이 난 머리채를 바짝 마님 눈 가까이 디밀고 흐트러진 보숭머리의 가락을 추켜올려 촉촉이 젖은 하이얀 이마를 드러내 보인다.
“어이구 커단 게 어리광은 어지간하다. 그게 어디 땀인가 눈 녹은 물이지.”
하고 마님이 웃은즉 색시도 손을 마주쳐 가벼이 울리곤 새하얀 이빨을 가지런히 드러내 보이며 하하하 맑은 웃음소리로 한바탕 웃어젖힌다.
“그저 하는 짓이 꼭 저의 아버지라네.”
삼득에미를 쳐다보며 마님은 더없이 자랑스런 웃음을 짓는다.
삼득에미는 마음속에서 번져나는 착잡한 생각들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다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열 칸짜리 기와집을 몸으로 받치듯 꼿꼿이 허리를 편다.
색시는 삼득에미의 접어논 목도리 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어느덧 가느다랗게 노래 같은 것을 부르며 검은빛 외투를 벗어 핸드백과 함께 장롱 위에 얹는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화롯가에 앉는다.
그러자 미닫이가 열리며 계집애가 소반에 약사발을 받쳐 들여다놓고 조용히 물러나간다. 엷은 김발이 약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일고 있다. 어서 약이 식기 전에 들라고 삼득에미가 권했다. 마님은 생각난 듯이 숨을 쌔근거리며 약사발을 집어올린다. 때를 같이하여 이게 뭔데 하고 색시는 사진을 집어든다. 그러고는 비로소 삼득에미의 얼굴을 들여다본 모양으로 깜짝 놀라며
“아니 웬일이세요. 아주머니가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몹시 당황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성급히 묻는다. 삼득에미가 시뻘건 얼굴을 하고 벙벙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정순네가 갑자기 무슨 사고라도 났어요?”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서 어떠한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듯한 당황한 눈으로 삼득에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재처 묻는다.
딸의 당황한 서슬하고 삼득에미의 난처해하는 꼴이 아마도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직감한 마님은, 딸은 이미 김사장 댁의 도련님하고 뜻이 맞아 그와 더불어 말을 맞춰놓고, 일부러 매파 삼득에미로 하여금 다리를 놓게 하는 모양이라고 피뜩 짐작이 갔다. 그러자 그만 약이 목구멍을 넘어가주지 않았다.
따라서 높아지는 숨결을 간신히 죽이고 마님은 나직이 우리 혜경일 아느냐 묻는다. 삼득에미는 아노라 하기도 모르노라 하기도 진실로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자칫하다간 일은 제대로 파탄이 되어 열 칸짜리 기와집은 고사하고, 현재 참새 눈물 폭이나 집세를 내고 있는 문간방까지도 쫓겨나기가 십상이라고 정신을 바짝 모은 눈으로 색시의 눈을 마주 바라다보았을 뿐 대답을 삼가고 있었다.
이때 내려뜨려진 색시의 눈은 길이로 찢어지고 곧은 콧대가 옆으로 가웃해지며 입술이 바르르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르르 떨던 새빨간 입술이 팔락거리며
“왜 사진을 가져오랍니까. 무슨 허갈 낸대요? 그런데 대체 누가 보냅디까, 여길……”
갑갑해 못 견디겠노라는 듯이 머리채를 흔들며 대들 듯 묻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예요, 전 예가 애기씨 댁인 줄은 저, 전연 몰랐어요.”
굳어진 삼득에미의 혀가 꺾이며 간신히 이렇게 말했을 때
“뭐요, 뭐라구요. 그래 어떻게 찾았어요. 네 어떻게 오셨어요. 왜 자동차 사고가 났나요? 얼른 좀 말씀해요.”
색시는 꽤 높은 음성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화를 낸다. '
삼득에미는 겁먹은 낯으로 마님의 눈치를 살펴가며
“아 아네요, 전 그 그냥 왔어요.”
하고 손을 마구 흔들어 보인다.
색시의 얼굴에는 금방 웃음이 돌아왔다. 삼득에미는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고 난 사람같이 얼이 쑥 빠진 얼굴로 흘금흘금 마님의 낯빛을 살핀다. 마님은 숨을 할딱할딱하며
“넌 이 댁네를 어떻게 아냐 응.”
색시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톡 쏘아붙인다.
“왜 몰라요. 동무 집 문간방에 있는걸.”
“동무라니, 누구 말이냐.”
“저하구 한반인 박정순 말이예요.”
“박정순이라니 걔네 집이 어딘데.”
삼득에미가 곁눈으로 색시를 보자 색시는 입가에 웃음을 풍기며
“아주머니, 게가 어디지.”
묻는다. 삼득에미는 궁둥이를 비비적 거리며 목도리를 집어들고는
“저 저 아현동 아닙니까.”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삼득에미가 대답한다. 그러나 눈은 내리깐 채였다. 차마 눈을 뜨고 마님을 쳐다볼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드디어 붉게 상기된 마님의 얼굴은 흥분으로 일그러지며 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걔 오빠가 있니?”
“있쟎구.”
“그래 걔 오빠두 아냐.”
“그럼 알잖구.”
“어떻게?”
“남자동무예요.”
“계집애가 사내동무가 있다니!”
마님의 험악한 표정을 딸은 재미있다는 듯이 건너다보며
“하하하, 어머닌 지금이 몇 세긴 줄이나 아세요?”
하고는 얼굴을 아까 모양 바짝 마님 코밑 가까이 디밀고
“어머니, 그보다는 이 사진이 왜 여기 나와 있냐가 문제예요.”
한즉 또 마님 입술이 파르르 떨며
“그래 걔 오빠란 녀석은 이름이 뭐냐.”
딸은 살짝 손뼉을 쳐 우습다는 것을 표시하며
“박정길이라구 해요, 이름을 아심 뭘 해요.”
아까보다 좀더 상기된 마님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째글뜨려진 채 십 초가량 입을 삐뚜름히 다물고 있더니 이번엔 눈언저리가 팔락팔락한다.
삼득에미는 차마 궁둥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요놈의 입이 사뭇 될 일도 그르치고 마느니라고, 그렇더라도 궁둥이나 가벼워서 진즉 자리를 떴더면 작히나 좋았으랴고, 앙가슴을 뜯으며 그저도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마님의 숨소리는 차츰 높아갔다. 그 높은 숨을 어깨로 내리며
“걔들 애비가 박태순이 아냐.”
하고 바락 악을 쓴다. 그렇게 악을 쓰는 마님의 앉은 자세는 꼭 토라진 꼭두각시를 연상시켰다.
“왜 아네요, 바루 그 박태순이죠.”
“아니 그럼, 그, 그 상것들하고 네가……사괸단 말도 없이…… 애비 에미 승낙도 없이.”
마님의 뜻을 받는 대꼭지가 성급히 화로를 울린다.
“그럼 뭐 언제 또 사괴지 말라군 했어요. 그이들하고…….”
딸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그저도 웃음을 띤 채 황홀한 꿈을 추구하는 듯한 눈으로 눈발이 어릿거리는 창밖을 내다본다.
색시의 맘속에는 기쁨이 고여 그 기쁨이 저렇게 얼굴에 내 피는 모양이라고, 흡사 바람에 살랑대는 꽃잎처럼 연연한 모습이라고 삼득에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마님을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마님의 목구멍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며 전신을 바르르 떨더니
“아니 그럼 네가, 내 자식이……·그 산지기 아들녀석하고…… 아이구 맙시사 하늘을 쓰구 내가 이게 무슨 죄로, 아이고오……”
하더니 흑흑 느끼며 아이들같이 아앙 통곡을 친다.
딸은 꿈에서 깬 듯 눈을 말끔히 치뜨고 머리를 가웃하고는
“뭐가 어쨌다구 야단이예요. 전 아직 그이만치 훌륭한 사람 보지 못 했어요.”
쏘아붙이더니 다시 혼잣말같이
“그래두 바보 온달이 이얘긴 잘만 하시데요, 뭐 어디 대통령두 양반이래야만 되나.”
하고 종알거렸다.
마님은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목구멍에서 또 꾸르륵 소리가 났다. 이어 흑 하고 느끼는 소리가 나는 것을 계기로 두루뭉술한 마님 몸뚱이가 눈사람이 자빠지듯 사뿐 뒤로 쓰러진다. 쓰러진 마님의 치마 밑으로 하얀 버선발이 보이더니 마침내 치마 밖으로 다리가 쭉 뻐드러지고 뻐드러진 마님 다리가 다시 놋화로를 힘껏 차버린다.
그 서슬에 자리를 옮긴 놋화롯 전에서 약사발이 굴러 떨어지며 간장물 같은 약물이 주르르 쏟아지면서 쓰러진 마님의 회색 양단 마고자를 얼룩 짓기 시작한다.
삼득에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일어나서 지싯지섯* 다리를 놀리며 몸을 흔들흔들하다가 덥석 마님의 똥똥한 몸을 안아 일으킨다.
그리고 얼른 자기의 무릎을 마님의 어깨 밑에 밀어넣고 부엌 쪽에다 소리를 지른다.
“물 가져와요, 얼른 더, 더운물 가져와요…… 아유 이를 어쩌나, 쯧쯧 마님, 마님, 정신을 차리세요, 마님. 그저 세상살이란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누구에 겐지도 모르게 푸념을 하였다.
그러나 마님은 아무런 응기가 없다. 응기 없는 마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삼득에미는 속으로, 그저 옛말이 그르잖지, 자랑 끝에 쉬가 쓴다구, 마님두……쯔쯔쯔, 혀를 차며 색시하곤 외면하듯 앉아 있다가 말없이 서 있기만 하는 색시가 궁금해서 슬쩍 색시를 바라보았더니 한사코 노려보는 색시의 빛나는 눈이 삼득에미의 눈을 쏘아보고 있다. 그럴 뿐 아니라 사뿐사뿐 다리를 옮겨 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삼득에미의 팔에서 마님을 빼앗아 아랫목에 반듯이 눕힌다. 그리고 마님 코에 손길을 펴서 대본다.
하얗고 걀쭉한 손이라고 삼득에미는 색시의 하얀 손길을 눈여겨보며 서 있었다.
색시는 마님의 코에서 손을 떼고 다시 눈으로 삼득에미를 샐쭉 흘겨주고, 문을 함부로 여닫으며 급히 건넌방으로 뛰어가더니 이내 양주병을 손에 들고 돌아온다. 자줏빛 술이라고 삼득에미가 보고 있자니까 술병 뚜껑에 따라진 자줏빛 술을 색시는 약간 벌린 마님의 입안에다 쏟아넣고 다시 뚜껑에 술을 따르며 색시는 또 삼득에미를 노려본다.
삼득에미는 색시의 시선을 못 본 체 외면하고 밖을 향해
“얼른 거기 걸레 좀 가져와요. 웬 귀들이 먹었나, 아이구우 집이 커서 이런가, 사람이 죽어두 모르겠네.”
투덜거리며 속으로 끌끌 혀를 차고 있다.
대체로 자기가 무슨 말을 마님께 고자질하러 온 줄 아나보다고, 그래서 저런 눈총을 준다고, 하지만 내가 말을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마님이 말을 하도록 한 거라고, 나야 내 볼일 보러 와서 할 말 했지 못할 말 한 건 없다고, 사실 나같이 속 깊고 체통 있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처음 자기(색시) 얼굴을 보았을 때 기겁을 해서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지만, 나야 잠잠히 새기지 않았느냐고. 그러므로 고마워해도 신통찮을 판인데 자기가 되레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다니, 애초에 내가 알은척했다면 몰라도 처음부터 자기가 알은체하고 애가닳아 못 견디는 시늉을 해서 마님 이 번드러졌지* 나 때문에 번드러졌냐고.
참 아가사창*이란 이런 거라고, 아무렴 그래 양반집 규수가 종놈의 자식 하고 좋아지내다니, 어불성설도 유만부동이지, 오죽하면 어미가 저렇게 번드러졌겠냐고. 또 마님도 마님이지 웬 저런 딸을 가지고 노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으로 엮어대더니 자랑 끝에 쉬가 슨 거지, 암, 쉬가 슨 거지……
“색시이, 전 이 댁이 색시 댁인 줄은 모르구, 좋은 규수가 있다고 부탁받고 혼담을 가지고 왔었더랍니다.”
싹 잘라서 말했다. 그러자 색시는 색시대로 몹시도 야무지고 담찬 목소리로
“시잇, 시끄러워요. 누가 그런 따위 잔소릴 듣재요, 자 인젠 얼른 가요, 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도 모자라서 눈을 흘기며 똥 묻은 강아지 내쫓듯 문을 열고 밖을 가리키었다.
더운물을 들고 들어왔던 식모가 마님이 또 까무러쳤다고 호들갑떠는 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삼득에미는 신발을 꿰고 뜰을 지나 대문 밖까지 나와서야, 접은 대로 들고 나온 회색 목도리를 탁 펴들고 성깔지게 두어 번 털어서 목에다 감고 그 한끝을 어깨 뒤에 넘겨뜨린다.
그리고 몸을 흔들며 길을 재촉한다. 그렇게 길을 재촉하고 있는 그녀의 스르르 감겨지는 눈 속에선 열 칸 기와집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바작바작 발에 밟힌다. 꾹꾹 땅을 다지듯 발에 밟히는 것들을 마구 밟으며 삼득에미는 팔을 홰홰 내짓고 있었다. 내리는 눈발같이 어슬렁어슬렁……
『신천지』 61 호(1954. 3); 『창포 필 무렵』 (현대문학사 1959)
손 소 희
손소희(孫素熙)는 1917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Ξ 本)대학에 진학했으나 신병으로 중퇴하고, 1961년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했다. 1946년 『백민』 애 단편 「맥에의 몌별(袂別)」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라기」 「전말」 「창포 필 무렵」 등 초기작에서는 주로 애정 문제와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 등을 다루었으며, 후기에는 여성 심리를 다루면서 세태를 반영하거나 남성의 존재를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1987년 타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