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13,5).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
7. 교황들의 이러한 말씀들은 많은 과학자들,철학자들,신학자들과 시민 단체들,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의 사유를 풍요하게 해 준 모든 이의 성찰을 반영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밖의 다른 교회와 교회 공동체와 다른 종교들도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우리 모두를 어지럽히는 문제들에 관한 소중한 성찰을 하였습니다.한 가지 좋은 예로,제가 온전한 교회 친교의 희망을 나누고 있는 존경하는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의 말씀을 간단히 인용하고 싶습니다.
8.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특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를 해친 것을 회개할 필요를 언급하셨습니다.“우리 모두가 작은 생태적 피해를 일으키면”우리가“크든 작든 피조물의 변형과 파괴를 야기한다는”사실을 인식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총대주교님께서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이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며 우리가 피조물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인간이 하느님 피조물의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본디 모습integrity
에 손상을 입히고,자연 삼림과 습지를 파괴하며,지구의 물,흙,공기,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은 모두 죄가 됩니다.”“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이기 때문입니다.
9. 또한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환경 문제의 윤리적 영적 근원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이는 우리가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에서 해결책을 찾도록 요구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증상만을 다루게 됩니다.총대주교께서는 우리가 소비대신 희생을,탐욕 대신 관용을 ,낭비 대신 나눔의 정신을“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금욕주의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이는 사랑의 방법,점차로 내가 바라는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이는 공포와 욕망과 충동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또한“세상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하느님과 우리 이웃과 함께 나누는 방법인 친교의 성사로 받아들이도록”부르심을 받습니다.“우리는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하느님 창조의 흠 없는 외투의 가장 작은 부분,나아가 우리 지구의 가장 작은 먼지 알갱이에서도 서로 만나게 된다고 겸손하게 확신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10 저는 매력적이고 감탄을 자아내는 한 인물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회칙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로마 주교로 선출되면서 저는 그분의 이름을 저의 길잡이요 영감으로 삼았습니다.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취약한 이들을 돌복 통합 생태론을 기쁘고 참되게 실천한 가장 훌륭한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은 생태 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그는 하느님의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그는 사랑을 하였고,또한 기쁨,관대한 헌신,열린 마음을 지녔기에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그는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았던 신비주의자이며 순례자입니다.그는 자연 보호,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사회적 헌신,내적 평화가 어떠한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1. 프란치스코 성인은 통합 생태론이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범주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고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프란치스코 성인은 해와 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며 벅찬 노래를 불렀습니다.성인은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며“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초대하였습니다.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그의 반응은 지적 평가나 경제적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그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하나 되는 누이였습니다.그래서 성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낀 것입니다.그의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그는 만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 큰 경외심에 가득 차 아무리 작은 피조물이라도‘형제’나‘누이’로 부르고는 하였습니다.”그러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에 영향을 주기에 순진한 낭만주의로 폄훼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경탄과 경이에 열려 있지 못하고,세상과 관계에서 더 이상 형제애와 아름다움의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지배자,소비자,무자비한 착취자의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이와는 반대로 우리거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밀한 일치를 느낀다면 절제와 배려가 곧바로 샘솟게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과 검소는 피상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곧 실재를 단지 이용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12. 더 나아가 성경에 충실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놀라운 책으로 자연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합니다.“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지혜13,5).확실히“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1,20참조).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언제나 손대지 않은 사애로 놓아두어 거기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하였습니다.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한 것입니다.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상의 것으로,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입니다.
(찬미받으소서 개정판/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보라,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주시는 분이시다
(시편54,6).
원수들은 시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지만(5절),하느님은 시인을 도와주고 그의 생명을 받쳐주는 분이시다.시인의 도움이요 옹호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이 시편의 중심 메시지다.시인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해치고자 하는 원수들과 달리 하느님은 시인의 도움이요,그를 지지해 주는 분이시다. 시인은 이것을 확실히 천명하고 있다.
시편 54편의 전체적 의미: 시편 54편은 강력한 주님의 이름에 관한 메시지와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다.시인은 특히 하느님의 이름을 강조한다.이 시편에는 하느님의‘이름’이란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3.8.9).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지만 그분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은 자신의 악을 되돌려 받는 끔찍한 체험을 하게 된다.이 시편의 메시지는 위기의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렇지만 하느님께 관심이 없는 이들은 끝내 멸망한다.왜냐하면 그들이 하느님을 그들의 눈앞에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5절).그러나 시인은 하느님을 자신의 도움이라고 부른다(6절).하느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그는 구원을 얻고 하느님을 찬송하게 된다.이 시편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도록 가르쳐 준다.때때로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 하느님께 지지를 바란다.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실 때 하느님께 자신을 옹호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죽게 한 이들을 위해“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라고 하면서 반대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42-89편/바오로딸)
(tv 촬영)
*영화 이야기
-모뉴먼츠 맨:세기의 작전 The Monuments Men
-2014작 감독 조지 클루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찌의 히틀러에 의해 세기의 명작들이 잃어버릴 위기 속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보다 중요한 미션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예술품 전담부대인 ‘모뉴먼츠 맨’의 숨겨진 실화를 영화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의 개봉당시 제목은 ‘미켈란젤로 프로젝트’로 유명배우들 보는 재미와
전쟁을 통해 예술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영화로서, netflix에서 볼 수 있습니다.
봄 되면 산과 들과 골짜기는
꽃과 신록으로 호사를 하고
개구리울음소리로 귀까지 호사를 하고
가진 것 별로 없는 나도 봄 따라 호강을 한다
(봄이 되면/나태주)
봄은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늘 오는 봄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는 봄도 있다고 하니
계절의 변화 속도는 늘 가늠하기 쉽지 않네요.
봄이 새롭게만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늘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