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하는 예레미야‘ 1630년 홍주민
2004년 2월 십년간의 독일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이 그림을 구입한 적이 있다. 깊은 수심에 잠겨 암운에 드리운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예언자의 표정이 한국에 돌아온지 십년되어서 예리한 화살처럼 내 가슴에 박힌다.
삼백의 아이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수장당한지 이십여일...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선 반도의 미래가 암울하다. 센터에 자원봉사하러온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제는 어른들 말듣지 말라고...그냥 앉아 있지 말라고...미안하다고...
슬픔은 무엇일까? 탄식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무엇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젊은 시절 렘브란트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를 그렸다.
예레미아는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였다.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예레미아는 앞으로 닥칠 엄청난 재앙을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남유다는 새로운 제국 바벨론의 위협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재앙에 대한 경고는 너무 오래됐고, 눈앞의 즐거움은 가까웠다. 마침내 남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은 안전하리라’는 헛된 믿음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예레미아 애가>는 말할 것도 없고, <예레미아> 곳곳에서도 그의 장탄식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렘 8:18, 21).
렘브란트는 예레미아를 그리면서 오른손과 오른발을 모두 몸 뒤로 감추게 한다. 예전부터 ‘오른손·발’은 ‘힘’을 상징했다. 렘브란트의 예레미아는 그 ‘힘’을 잃은 조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왼팔은 근심과 고민에 잠긴 턱을 괸다. 남아 있는 기력은 비통을 어렵사리 견뎌내는 데에 모두 쓰인다.
빛을 받는 왼발은 갈 곳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턱을 괸 왼팔을 지지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희망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다윗의 영원한 왕조와 율법의 위대함을 말하는 말씀에 근거해 볼 때, 그 절망감이 더 클 수 있다.
(물론 예레미아 당시 이런 ‘성서’가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예레미아의 얼굴은 유심히 들여다보는 관람자의 표정을 자신과 닮게 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언자란 남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렘브란트의 예레미아는 그 예언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렘8:22~9:1 표준새번역)
*선지자 예레미야의 구슬픈 통곡이 가슴 아리게 파고든다.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까?
주님! 눈물을 주시옵소서. (이동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