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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김은호 1892~1979 친일화가,이승만,박정희 정권 아래서 많은 초상화를 제작
문대식 추천 0 조회 207 18.01.29 19: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92년 6월 24일 인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창씨면 학산은 고향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본관은 상산이다. 어렸을 적 아명은 양은이고 호는 이당이다. 1906년 인천관립일어학교에 진학했으나 집안이 몰락한 뒤 1908년 기술학교인 인흥학교 측량과 단기과정을 졸업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겨 측량기사의 조수 외에도 도장포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로 가계를 꾸려갔다. 1912년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경성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했다. 이는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부찬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서화미술회의 교수였던 안중식.조석진/정대유/강진희/김응원등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1912년부터 1917년까지 과와 과 과정을 마쳤다. 심전 안중식으로부터 이당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친일유력자인 송병준/윤택영/윤덕영/민병덕 등의 초상화 제작으로 유명해져 순종의 어용화사로 발탁되었다.

 

서회미술회를 졸업한 후 1918년에 결성된 조선서화협회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1년 첫 서화협회전에 참여하면서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했다. 회화형식에서 일본식 채색화법기교에 치중하였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부호 이용문의 도움으로 변관식과 함께 다녀온 3년여의 일본유학을 통해 일본식화법을 습득했다.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청강생으로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에게 사사받았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법과 접목시킨 일본화풍을 일으킨 화가다. 귀국 후인 1928년 제7회조선민술전람회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이후 그의 섬세한 채색화에는 스스인 유키 소메이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김은호는 그 이전부터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장식적인 일본 채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조선민술전회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기호에 맞은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미인승무」로 4등상 1924년 제3회때 「부활 후」로 3등상 1928년 제7회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도쿄에 머물면서 1927년 제국미술전람회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했고, 1928년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등상을 받았다. 작품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했고 한 때 발길을 끊얻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했다. 1929년에는 이용문의 도움으로 허백련과 함께 중국여향을 다녀와 견문을 넓혔고 1932년에는 서울 미쯔코시백화점에서 허백련과 2인전을 열었다.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아 1920년대 후반부터 화실 낙청헌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다. 이들 중 백윤문/김기창/장우성/조중현/이유태등은 따로 후소회를 결성하여 1936년부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박광진/김복진과 함께 체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관했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문하 청전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에서 3대 후진양성의 통로였다. 여섯 번의 정기전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한유동/장운봉/김기창/장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했다.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 때에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2점이 특선했다.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김기창/장우성/이유태/조중현등은 입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1915년부터 1916년 사이에 순종과 이강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로, 1937년 11월 가장 먼저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를 그렸다.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선인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된 직후다. 이 그림의 주제는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것이다. 애국금차회는 1937년 8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결성된 단체로 국방헌금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부인등이 주축을 이룬 여성단체이다.



결성식 날에는 1000여 명의 여성이 참여했고, 총독 미나미의 부인 축사를 전했다. 애국금차회는 순종의 외척이자. 자작칭호를 받은 윤덕여의 처 김복수가 회장으로, 그리고 이윤용/민병석같은 귀족의 부인과 결성식 사회를 본 김활란등 지식인 여성들이 간사로 참여한 친일단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날 즉섟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귀지개 각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 후카자와 중장을 방문하고 헌납식을 가졌다. ‘이 광경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의뢰받은 ’김은호가 ‘2개월동안 노력한 역작’으로 11월 「금차봉납도」를 완성하였다. 김복수와 애국금차회 간붇르이 지 작품을 총독 미나미에게 증정했다. 1937년 11월 20일자 『매일신보』에는 ‘총독부 내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걸어두는 동시에 엽서로 인쇄하여 황군위문대에 넣어 보내게 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총독부에 걸린 「금차봉납도」의 작품사진과 그 왼편에 선 김은호의 사진이 함께 실려있다.

 

대작인 「금차봉납도」는 군국주의 경향성을 띤 첫 작품이자 대표적인 사례다. 왼편에 금비녀 따위를 증정하는 회장 김복수와 한복차림의 부인들을, 오른쪽에 그것을 받는 조선군사령부 후카자와 중장과 휘하 장교들을 정밀한 화볍으로 그린 채색인물화다. 「금차봉납도」 김복수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의 친분관계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특히 김은호의 초기 화단활동은 윤덕영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다.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중중에 출입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1년 2월 화가로서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 및 회화봉공’하고자 결성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이상범/이영일/이한복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일본화부’는 내선일체에 합당하게 동양화부를 개칭한 이름이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인 관변단체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화가들이 포함된 총력 협의체다. 1943년 1월 다른 예술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산하에 배치되어 국방기금마련을 위한 전람회 등 전시체제에 협조했다.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람회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 일본화부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조선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한 총후미술전은 조선인에게 ‘군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의 영광’을 고무시키기 위한 공모전형태의 전람회다.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1월 ‘전람회 7월 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연합 ’남종화전람회‘등 ’성전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해방후, 일제강점기 활동경력 때문에 해방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김기창/김인승/심형구/김경승/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했다. 그러나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에 힘입어 대한미술협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미술계에 영향력을 향사했다. 여전히 정심한 필치로 채색 인물화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정몽주/신사임당/논개/성춘향/안중근/서재필/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대통령 윌슨,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주한 미국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과 8.15해방 17주년 기념문화훈장 1965년 3.1문화상 예술부문본상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장 1976년 제11회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정됐다. 1979년 2월 7일 사망했다.











-우리 그림이 죽었다. 일본화와 남종화를 이어받느라 그 ‘독보적인 필치’로 우리 그림의 맥을 끊었다. 예술이란 무른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것에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한다면 민족을 죽이고 민족의 얼을 끊느라고 일생을 산 이런 자는 그저 기술자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바가 있다. 게다가 8.15 해방기념 문화훈장이라니... 양심도 양식도 없는 것이 모든 친일파의 기회주의 속성인바를 잘 알겠으나 어쩌면 이리도 하나같이 천박한가. 대한민국예술원에는 이런 쓰레기들만 가득차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동안 보아, 우르러던 이순신/정몽주/신사임당/논개/성춘향/안중근의 얼굴이 이런 자의 손끝에서 그려졌다는 말인가. 정녕 삶이란 무엇이고 예술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 그림이 죽었다, 이 작자 탓에 우리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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