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교과서에도 소개되었고 신출귀몰한 전술로 왜군을 무찌른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으며 때에 따라선 다른 사람에게 붉은 옷과 함께 백마를 타게 하여 적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경상도 의령에서 태어난 장군은 현풍곽씨로 원래는 경상좌도에 기반을 둔(현재 달성이나 창녕 )집안 이었으나 외가가 있는 강건너 의령에서 태어났고 당시 지역의 토호이면서 선비로 전쟁이 나자 가산을 털어 자신의 노비들과 지역민을 이끌고 왜적과 맞서 싸운다.
정규군이 아니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당시는 정부도 온전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시기 곽재우 장군은 고향 인근의 관청이나 세곡선의 곡식이나 물자를 털어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것이 자칫하면 도적이나 역적으로 판명되어 큰 죄가 될 수 있고 실제 처벌을 받은 인사들이 있었고 악용하는 자들도 있었고 더 문제는 이걸 빌미로 정적을 죽이고 모함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것은 훗날 일본에 대항한 구한말의 의병들에게도 적용되어 문제가 되었다.
임란이나 재란이 일어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한 야욕도 야욕이지만 조선내부의 문제와 국론 분열 그리고 국방력 약화였다.
지역토호이자 선비인 곽재우는 벼슬이나 명예보다는 조선의 땅을 왜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까지 소모하며 싸웠다.
그러나 정권과 관련된 자들의 모함과 전공다툼 이걸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조정과 권력자들 그리고 선조라는 왕에 의해 그리고 광해군 때 까지 벼슬(힘쓰는 벼슬이 아닌 책임과 의무만 있던 )도 했지만 귀양도 경험을 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지내다가 땅에 묻힌다.
기록도 다양하고 당파와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장군의 활약상이 부풀려지거나 폄하되어 있는 점도 있으나 장군은 분명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의인이다.
왜국과의 강화를 주장 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국가의 재산을 함부로 쓴다고 도적으로 모함을 받고 정부나 왕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아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장군이지만 그 의지를 꺾지 않았던 자세는 후세에 본받아야 한다.
곽재우 장군의 묘소는 낙동강이 가까운 달성군 구지면 한가한 길가에 있다.
과거 어른들이 밤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곽지 온다!'는 말을 했었다.
이 '곽지'가 곽재우 장군을 이야기 한다고 들었다.
곽재우장군이 행했던 비정규전과 함께 군수지원 그리고 축성과 진지확보, 민관군 협동 전술은 지금 전쟁에서도 참고할 바가 많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해야 하며 더 중요한 건 외부의 침입보다 내부의 분열이 무서우며 정권의 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인사정책과 국방정책도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