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1899∼1961)의 단편소설로 1936년에 발표되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겪은 경험과 모험을 토대로 많은 책을 썼지만, 문학을 위해서 또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스페인에 관한 사랑과 투우를 향한 열정은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1932)을 발표하게 했는데,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그 구경거리를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결과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즐겼던 아프리카 사냥 여행은 <아프리카의 푸른 산들(Green Hills of Africa)>(1935)과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1936)을 낳았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큰 짐승을 잡는 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소재다. 그는 낚시를 위해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집 한 채를 샀다. 또한, 쿠바 만류에서 큰 녹새치를 잡는 것에 이끌려 자기 소유의 낚싯배인 '파일러'도 그런 경우의 결과다. 1937년에 쓴 소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To Have and Have Not)>는 경제 불황기의 키웨스트와 그 근처가 배경이다.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지닌 헤밍웨이는 재치 있고 쾌활하고 성미가 급하지만, 호탕하고 이기적이며 개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쾌락적이고 헌신적이었으며, 삶을 사랑하면서도 그 자신이 고백했듯이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타고난 스포츠맨이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또한, 술을 많이 마시고도 아침 일찍 일어났으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복잡한 생활을 했으며, 유능하면서도 늘 손해를 입었는데, 결국 무자비하게 자기 자신을 버린 용기의 화신1 그 자체였다. 20세기의 미국 작가 중 헤밍웨이가 얻은 명성을 뛰어넘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큰 짐승의 사냥이나 투우, 전투에서 경험한 육체적 감각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한 작품의 힘찬 특성 뒤에는 사실 매우 섬세한 미적 감수성이 깔려 있다. 이 작품 『킬리만자로의 눈(雪)』에서도 그러한 미적 감수성이 아낌없이 나타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한 작가 해리 스트리트(Harry Street)는 아내와 사파리 여행을 하던 중, 그만 괴저병에 걸리고 만다. 온몸에 퍼진 병균은 그의 다리를 서서히 마비시키고, 비록 고통은 없었지만, 다리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난다. 그는 아름다운 킬리만자로의 산 아래에 위치한 캠프에서 조금씩 죽어 간다. 냄새를 맡았는지 하늘에는 흉측한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은 잠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 덕분에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현재의 아내도 만났다. 지난 수년 동안 쾌락과 안락에 안주한 채 더 이상 작가로서의 재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열정과 욕망은 서서히 고갈되었다. 사내는 그동안 계획했던 것들, 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아쉬워한다.
"글을 쓰지 않은 안락한 나날들. 그가 멸시했던 나날들은 그의 능력을 무디게 했으며, 글을 쓰려는 그의 의지를 약화해 마침내 전혀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해리가 비록 육체적인 고통 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정작 그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와 이제 다시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자신을 태우러 온 친구의 경비행기가 캠프 앞에 도착하고 주인공은 그 비행기에 오른 후 병원으로 향한다. 비행기는 만년설로 뒤덮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으로 향한다. 해리는 비로소 자기 죽음을 인정하며 자신이 사자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자각한다.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1952> 포스터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의 주인공 ‘해리’는 작가로서 인정받으며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이루고자 찾아간 아프리카에서 우연한 사고로 인해 다리가 썩어 들어가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킬리만자로의 눈』이 보여주는 죽음은 신이 없는 죽음이다. 주인공 해리에게 죽음은 살아 하고 싶었던 일을 못 하게 하는 상태, 일찍이 애착했던 세계와 원하지 않는 이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죽음에 수반되기 마련인 고통은 죽음을 더욱 두렵고 혐오스러운 그 무엇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를 죽음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은 극심한 고통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삶이란 고통과의 투쟁이며 죽음은 그 고통과의 투쟁을 마치게 하는 어떤 선물로 받아들여 별다른 저항 없이 죽어간다.
헤밍웨이가 30대 후반에 쓴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상실한 고독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사실 그는 유독 ‘죽음’과 ‘고통’,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죽음 앞에 놓인 방황하는 인물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그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 그 많았던 사랑, 많았던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도 그를 구해줄 수 없다. 지금까지 그토록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그였다. 다를 것 없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살아온 그였다. 그러나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한 악취를 내뿜는 죽음과 자신의 삶과 재능을 낭비해온 데 대한 허무, 더는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다는 회한과 고독뿐이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반복되었던 굴복의 삶을 다시 한번 더 받아들인다. 그리고 더 죽음에 개의치 않기로 한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새로운 구원의 세계가 펼쳐진다.
♣
『킬리만자로의 눈』에 드러난 남자의 죽음은 인상 깊다. 그를 죽음으로 안내하는 것은, 그를 병원으로 안내하기 위해 출발한 비행기의 형식을 빌려 나타났다. 구원자로서 다가오는 죽음의 형식이 독특하다. 인생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침대에 누워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극복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계획과 실천 사이를 한참이나 떨어뜨려 놓은 게으름을 몰아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전략) 흉기로 자살한 이들에게는 흔히 주저흔(躊躇痕)이란 게 남아있다고 한다. 죽음을 망설이느라 단번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해 사인(死因)과 무관하게 남게 되는 상처이다. 스스로 다가가는 죽음도 그럴진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찾아온 죽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고귀한 정신에게 그 주저흔은 수치가 된다. 소설의 이상적 주인공들도 대개는 주저흔을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의 눈』은 오히려 고통을 주된 원인으로 한 주인공의 주저흔을 감추지 않는다. 끊임없는 해리의 불평과 분노가 그렇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국 주인공 해리를 죽음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고통이다. 자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위로를 찾던 그는 마침내 삶조차도 고통과의 투쟁이며 죽음은 바로 그 괴로운 투쟁을 끝내게 해주는 어떤 상태로 받아들여 꼴사나운 저항 없이 죽어간다. 어쩌면 그것은 신이 없고 약속된 다음 세상도 없는 정신이, 그러나 건강하고 용감한 정신이 찾아낼 수 있는 죽음과의 친화 방식 중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권 199~ 200쪽에서 인용)
- 한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용기를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품위'라고 정의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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