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백숙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닭백숙이라면 그야말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자, 나와 한 솥밥을 먹고 사는 남편이다. 그는 웬만한 진수성찬 앞에서도 토종닭에 마늘 서넛 들어간 닭백숙을 선택할 남자다. 어디 그뿐인가. 계란 프라이가 곁들인 비빔밥을 아침부터 먹어야 사는 남자다.
남편의 영향으로 아이들도 계란을 좋아해서 우리 집은 일주일에 계란 한 판은 족히 먹는 모양이다. 그런데 작년 조류독감(AI)으로 인해 계란 가격이 두 배 이상으로 오른 후, 조정이 되질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계란 값이 올랐으나 계란을 대체할 만한 식품이 없어서, 만 원짜리 계란을 변함없이 사다 먹고 있다. 또한 닭백숙도 한 달에 두어 번은 먹는다.
이 정도면 계란이나 닭이 없는 우리 집 식탁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은 토종닭 한 마리에 막걸리 한 병이면,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다. 어떨 때는 사뭇 진지하게 퇴직 후엔 시골에 내려가서 앞마당에 닭이나 키우며 살자고, 은근히 내 속마음을 떠보기까지 한다.
남편의
유난한 ‘닭
사랑’을 뭐라
할 게 아니다.
사실상
세계적으로 우리 국민만큼 닭을 사랑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아이들에서
어른까지,
치킨
하나로 대동단결하는 특이한 국민이다.
닭을
사랑하는 국민이니 만큼 요리해서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우선 내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백숙’은
서민의 보양식이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프리이드’는 국민
간식일 것이며,
감자와
양파에 갖은 양념을 넣어 볶는 ‘닭볶음탕’은
애주가의 술안주이다.
게다가
당면과 함께 간장으로 반지르르 조린 달콤한 ‘안동찜닭’이나
빨간 고추장 양념에 양배추와 감자를 함께 넣어 볶는 ‘춘천닭갈비’
등
지방을 대표하는 닭 요리도 있다.
거기에다 부위별로,
취향에
따라 요리를 하는 방법 또한 가지가지다.
단백질이
많고 지방이 적다는 닭 가슴살은 다이어트 하는 젊은이들의 샐러드 요리,
주머니가
가벼운 샐러리맨이 자주 찾는 포장마차의 단골 안주인 모래집 볶음이나 닭 날개구이,
젊은
아가씨들도 체면 불구하고 치명적 매운 맛에 빠져들게 하는 닭발 볶음 등 참으로 다양한 부위를 애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닭 한 마리를 가지고 ‘삶을
것인가’,
‘튀길
것인가’,
‘볶을
것인가’,
‘조릴
것인가’
등등으로
고민을 한다.
그뿐이랴.
지방
마다,
세대마다
튀기는 방법이든 볶는 방법이든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다양한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닭을 좋아하는 지 증명하고도 남는다.
최근 살충제 파동이 또다시 식탁을 뒤흔들어서 고민에 빠졌다. 늘 먹는 계란, 서민의 영양을 책임져온 닭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은 사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기란 도대체 쉽지 않을 전망이란 예감 때문이다.
살충제의 영향이 대수롭지 않다는 식약처의 발표도 믿음이 안가고, 계란이 없는 식탁을 생각하니 걱정을 넘어 암담하기까지 하다. 또 일반 가정에서야 그렇다 치고, 닭이나 계란을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에서는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이번 사태로 닭의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았다.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나라 중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걸까.’ 하고 자신의 출생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렇잖은가. 닭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삼, 사십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잖은가. 또한 지금, 어느 나라에 태어난들 대한민국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캄보디아 여행 중에 농가에서 방사하여 기르는 닭을 본 적이 있었다.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돌아보고, 뚝뚝이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닭들이 푸르른 풀밭을 산책하듯,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 먹으며 거닐고 있었다. 이에 반해 캄보디아의 소녀들은 지나는 관광객을 향하여, ‘1달러!, 1달러!’를 외치며 배고픔을 호소한다. 닭들은 그저 주위에 널린 게 유기농 먹거리니, 누구에게 구걸할 필요도 없이 언제든지 맛있는 성찬을 즐기는데 말이다.
반면, 우리의 닭들을 생각해보라. 무한정 먹어대는 우리들을 보면, 닭들로서는 참 야속한 생각이 들 것이다. 먹을 줄만 알았지. 그 닭들이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는지 관심도 없으니 야만의 민족이라고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보다,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캄보디아의 닭들이 어찌 부럽지 않을까.
닭이나 계란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많은데, 지금의 사태를 그대로 표현하면, 계란을 쌓아놓은 듯한 아슬아슬한 위기, 즉 누란지위(累卵之危)가 아닐까 한다. 몇 년 전 살충제 계란에 대한 문제를 감지했음에도 덮어두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져야할 정부가 제역할을 하지 못한 탓에 지금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사회적 파장을 두려워해서였든, 누군가의 이익 보호를 위해서였든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위기를 만나면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지, 모른 체 덮고 가는 방식은 후에 더욱 큰 위기를 가져온다.
중국에선 계란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언젠가 공장에서 계란을 만들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기야 지금 닭을 키우는 축산환경을 보면, 이건 완전히 닭 공장이요, 계란공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언젠가 닭을 사육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최대한 한 마리라도 더 집어넣고 키우려다 보니, 닭들은 한 발을 들고 서 있다고 한다. 빽빽하게 자리한 닭의 공간은 그야말로 알 낳는 공장인 것이다. 또한 계란을 많이 낳게 하려고 밤새 불을 끄지 않는다고도 한다.
닭에게도 최소한으로 보장받을 동물권이 주어져야 한다. 동물에 대한 복지와 친환경적인 축산 방식에도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 언젠가 인간의 식탁에 오를 운명으로 태어났기에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닭의 생이 참 슬프기도 하다. 횃대에 앉아 잠을 자고, 흙으로 몸속 벌레를 털어내고, 자신의 모이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풀밭을 헤치며 다리 근육을 키워야하는 것이 닭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줄지어 선 공간에서 밤새 잠도 못자며 알을 낳고, 자기가 낳은 알을 품어 보지도 못하고 빼앗기는 닭들은 몸 보다 속이 더 아파서 울 것 같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닭의 해(丁酉年)다. 정유년 꼭두새벽부터 불길했던 조짐은 결국 대란(卵)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수많은 계란들이 부화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닭은 예로부터 새벽을 여는 동물로서,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이다. 목청껏 ‘꼬끼오’를 외치는 닭 울음으로 아침을 시작했던, 부지런한 우리 민족성의 바탕에는 닭 울음소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보면 집에서 키운다고 졸라서 참 난감한 적이 있었다. 병아리라면 키울 만도 하지만 몇 개월 사이에 훌쩍 자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자기도 날개를 가진 날짐승이라 푸드득거리며 법석을 피울 텐데, 아파트에서 닭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울며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매까지 들어가면서 병아리를 못 키우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가리켜 계륵(鷄肋)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현실이 딱 그렇다. 우리 사회에 쌓였던 적폐가 하필이면 서민의 식탁에서 터질 줄이야. 당장 저녁 밥상을 차리기 위해 장바구니에 계란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 남편도 고민할 것이다. 식탁에 오른 계란,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의 먹거리에 안전성이 확인 될 때까지 아마도 계란은 식탁의 계륵이 될 것이다.
첫댓글 어제 홈플러스 가서 환불 받았어요. 30개에서 몇 개 빠지는데 한 판 값 그대로 주더군요.
문제는 재래시장인데 거긴 출처가 불분명한 게 많아서 더 꺼려져요~
저희 집은 식탁에서 계란이 사라진지 오래 되어서 기억이 까마득 합니다.
계란 파동보다, 계륵과 누란지위 라는 의미가 더 다가옵니다. 달걀 사건은 금방 잊혀지겠지요.
시사성이 있는 내용을 가족의 식성과 결부시켜서 참 잘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