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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린도후서 1:17-20
제목: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1) -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사람
일시: 2017. 9. 3 (한우리, 2013. 1. 6 )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사람이 살다보면 계획대로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갑작스런 돌발적인 일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야 하기도 한다. 혹은 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해야 하는 것은 알아도 능력이 미치지 못해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기도 한다. 즉 안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은 가쉽거리 생겼다고 말을 많이 하고 평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비난의 화살을 날릴 것이다. 지금 바울이 그런 입장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했던 계획이 변경되어 늦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람들이 말이 많았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육체를 따라” 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예”라는 순종의 결과라고 자신을 변호한다. 오늘 말씀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중 첫 번째 예수 안에서 “아멘”하는 사람이다.
II. 예수 그리스도는 “예”가 되시는 분이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19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그러한 죄인이었다. 우리는 거절당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No라는 대답을 들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예스가 되어 주셨다. 20절을 보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No였던 우리를 Yes가 되게 하셨다. 주님은 “예”가 되기 위하여 희생을 치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No를 예스로 만드셨다. 죽음이라는 NO가 생명이라는 YES로 바뀐 것이다. 죄라고 하는 No가 의라고 하는 Yes로 바뀐 것이다. 율법이라고 하는 No가 은혜라는 Yes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 앞에 No가 된 첫아담이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Yes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No를 Yes로 만드신 분이다.
사도바울은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더불어 역시 “예”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가 예스가 되시는 분이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신들도 예스의 사람이 된 것이다. 바울이 계획을 변경했던 것이 인간적인 생각에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17절)
아내가 가끔 “난 희까닥 하는 사람이 가장 싫어”라고 할 때가 있다.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 몰라도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참 어감이 재미있었다. 무슨 말인지 아는가? “경솔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희까닥 거리는가? 육체를 따라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산다는 것이다. 날씨의 변동에 따라 함께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예스맨”이라는 말이 있다. 긍적적인 말이냐 부정적인 말이냐? 부정적이다. 그것은 이해관계에 얽혀 자신의 주관도 없이 무조건 예스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예스맨은 육체를 따라 예스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예수맨이 아니요 “아멘”의 사람들이다. 예스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아멘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예가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셨다. 사도바울과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스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핍박도 당했다. 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배가 파선하는 지경에도 이르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살해위협도 감수했다. 바울도 베드로처럼 결혼할 권리도 있고 쉬고 휴가를 즐길 권한도 있고 좋은 것을 먹을 권리도 있었지만, 그 권한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Yes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는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며 자유한 자였지만 스스로 종과 같이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Yes요 어떤이에게는 No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Yes가 되기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이다. 바울과 그와 함께 일했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예수님과 같이 예만 되었다.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18절).
III.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약자가 아니요 강자이다. “예스맨”이 아니고 “아멘”이다. 예스맨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예스해야 하는 비굴하고 연약한 자이지만 “아멘”의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믿습니까”라고 하면 뭐라고 응답하라고 하는가? “아멘”이라고 한다. 아멘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고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해보겠다는 믿음이다. 아멘하는 사람은 불리한 상황을 다 감수하지만 예스맨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희까닥”거린다. 어떤 환경에서도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환경에 따라 진리의 음성도 듣지 않고 지조 없이 따라간다면 참으로 신뢰할 수 없고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사람이요 연약한 사람이다. “예”가 되신 예수님은 연약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강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의 연약한 것을 감수하고 진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예”가 되시고 아멘이 되신다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에 파워이다.
바람개비와 같다. 어릴 때 바람개비를 만들어 돌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수수깡과 가위 색종이 그리고 핀만 있으면 된다.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서는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가서는 안되고 바람을 거슬러서 서야 한다. 만일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 달려야 한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시련의 상징어로 종종 쓰인다. 그러나 바람은 시련처럼 보이지만 바람개비를 돌리는 에너지가 된다. 썩어지는 퇴비와 같이 사실은 영양가가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을 사서 한다고 하지 않는가? 바람이 불어오면 에너지가 우리에게 다가 옮을 알라.
No라는 상황은 불리한 상황이라기보다 유리한 상황이다. 예스할 수 없는 상황은 우리에게 위기와 같지만 알고 보면 기회이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고 모든 것이 잘 차려지면 “예스” 하기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잘해도 전혀 표시가 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No의 상황에서는 뚜렷하게 돋보일 수 있는 기회이다. 나를 위한 배경이 된다. 까만옷에 먼지가 묻으면 하얀 것이 묻은 것이다. 그러나 하얀 옷에 먼지가 묻으면 까만 것이 묻은 것이다. 먼지는 똑같지만 먼지 색깔이 달라 보이는 것은 그 배경색이 되는 옷이 검은지 흰지에 달려 있다. 먼지가 달라 보이는 것은 바로 배경색 때문이다. 그래서 “예”라고 말할 때는 “예”하기 쉬울 때가 아니라 오히려 “예”하기 어려울 때임을 알라. 그때가 “아멘”의 때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절실히 도움을 청하면 Yes할 좋은 기회로 알아 감사해야 한다. 왜 피곤하게 이렇게 부탁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거 정말 “예”가 되신 예수님의 예스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네라는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밤 11시에 공항 핍업을 부탁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저는 이렇게 감사할 일이 있다니 싶다. 누군가 목사님 이사할 일이 있는데 차를 좀 빌려 쓸까요? 이것 너무나 기쁘다. 누군가 먹을 것이 없으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누군가 미움을 받고 무시를 당하는 자가 있는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누가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가? 위로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챤스이다. 누군가 배고프면 “밥 사줄 기회”이다. 누가 힘들어 하면 “위로 해 줄 수 있는 기회”이다. 누가 잘 모른다고 하면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이다. Yes 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바울은 경솔히 육체를 따라 희까닥거리는 자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가 언제나 예가 되신 것처럼 자신도 아멘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였다.
IV. 주님은 바울 같은 사람과 일하고 싶으실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예”하시는 것처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이 “예” 하신 것과 같이 “예”가 되고 바울의 고백같이 “아멘”이 된다면 우리와 함께 Zusammen Arbeit 하시고 싶으실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손발이 되는 우리가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예가 되었다. 사도바울 역시 아멘의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내게도 흐르기에 우리 역시 주님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예”의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다. 누구든 내게 오면 “예”라는 생각이 들게 하라. 푸른신호등의 이미지를 주라.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야 안돼” 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어떤 사람은 “해보나 마나야” 라는 절망적인 이미지를 준다. “이번엔 또 무슨 트집을 잡을까?”라는 부담스런 이미지를 준다. 언제나 문제없다고 하는 이미지를 주라. 문제가 있어도 “까짓것” 별거 아니야라는 이미지를 주라. 뭔가 해결책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이미지를 주라. 답을 얻게해줄 이미지를 주라.
나의 주치의였던 Dr. Kegel을 생각할 때마다 Ya, kein Problem이라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분의 사무실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Die besten Aerzte der Welt sind Dr. Diaet, Dr. Ruhe, Dr. Froehlich und Dr. Kegel." 그는 언제나 그러한 모습이었다. 살도 없는 분이다. 남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침착한 분이다. 그리고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이다. 그 씌여있는 글이 맞는 것 같다. 당과 혈압이 조금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아무래도 건축 때문에 신경을 써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 정도는 다 스트레스 받고 산다“고 하면서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도 여기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의 말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이제 Dr. Ludwig 가 주치의가 되었다. 얼마전에 병원에 가서 당을 체크했다. 그때 6.5나오던 것이 6.2로 떨어졌다. 여름 방문객이 많아서 높을 줄 알았는데 잘 나와서 다행이다. 은근히 혹시 약을 안먹거나... 생각했는데 내게 제안하는 것이 이 참에 약 한알을 아침 저녁으로 더 먹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한다. 저는 비테비테 하면서 그 처방은 내리지 말라고 했다. 운동도 음식도 열심히 하고 절제하겠노라고 하면서... 이미지가 뭔가 불안하다. 다음에 가면 뭐라고 할지 걱정이 된다.
예스라는 이미지를 줄 때 정말 속 편하게 예스하는 것일까?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일까? 정말 떨리지 않고 아무일도 아닐까? 정말 Yes 하기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울까?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가 되기 위해서 그는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사도바울 역시 자신의 인간적인 권리를 다 포기하였다. 복음에 예스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자와 같은 모습을 했다(고전9:20-23).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복음에 예스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와일드카드였다. Wild Card 는 언제든지 뽑아 쓸 수 있는 귀한 것이다. 카드 게임은 잘 모르지만 Uno 카드에서 색깔 숫자 글 등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쓸 수 있는 경우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와일드 카드는 언제나 예스이다. 와일드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게임하기가 아주 편한 것이다. Wild Card 가 되라. 이런 사람과는 일을 해도 신나도 재미가 있을 것이다. 같이 있으면 신나고 같이 있으면 일이 될 것 같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평안한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 그런 사람은 “예”하는 사람이다. 함께 일할 맛이 나는 사람이다.
사과가 10개가 있다. 사과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무엇인가? 사과 10개를 먹을 때 맛있는 것부터 먹는 것이다. 그러면 사과 10개를 먹는 동안 내내 맛있는 것만 먹는 것이다. 그러나 사과 10개를 맛없게 먹는 사람도 있다. 썩은 것부터 먹고 골은 것부터 먹는다. 어떤 사람과 함께 먹을 것인가? 맛있게 먹을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살맛이 나고 일할 맛이 난다. 맛있게 먹을 연구를 하라. No를 연구하는 친구와 함께 하기 힘들다. Yes를 연구하라. 신바람이 날 것이다.
V.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단언한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과 코드가 맞는 이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일하는 예스맨이 아닌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아멘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다. 경솔히 희까닥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멘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다.
9월 2017-18년의 교회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며 고민하는 시간이다. 주님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라. 아멘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오케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와일드카드와 같이 어느 때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함께 일할 맛이 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