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장 수채통에 나무뿌리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물탱크 아래 잎이 푸릇푸릇한 벤자민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수채통을 따라 길게 뿌린 내린 것이었다. 바람이나 먼지에 섞여 포자나 씨앗이 날아왔을까? 어떻게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지가위로 줄기 아랫부분을 잘라내고 힘껏 잡아당기니 완강하게 버티던 뿌리와 검은흙이 길게 따라 나온다. 2미터쯤 되었다. 수채통이 그야말로 뻥 뚫렸다.
벤자민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관상수인 것은 맞지만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그대로 두면 수채통을 빈틈없이 막아버릴 것이다. 뽑아내야만 수채통은 제 기능을 할 것이다. 좋은 나무인가, 잘 자라고 있는가 보다 제자리에 서 있는가가 중요했다. 잘못 자리 잡은 것이면 무럭무럭 자랄수록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우리 부부에게는 광주와 연관된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으나 딸의 권유가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용한 한 사람의 야욕과 야심이 일으킨 혼란 등을 말할 수 있겠지만, 내 눈에는 제자리를 벗어난 사람과 제자리에 선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사람으로 인해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봄이 되어도 한없이 춥고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며 큰 고통에 빠트리는 것들이 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 30:21-23) 제자리가 아닌 곳에 선 것이다. 당사자로보면 놀라운 성취요, 만족이요, 행복이요, 명예일 수 있으나 세상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기쁨을 주는 대신에 큰 고통을 준다. 무슨 일을 할지 모르나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리더가 무엇인지 모르고, 화려함을 즐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잠 19:10) 탱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고 아무 버튼이나 작동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만다.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 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사 3: 5)" 슬프게도 그기 자리에 앉아있는 내내 이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엄마가 제자리를 떠나면 아이는 어디에 서야 할까? 남편이나 아내가 제자리를 떠나면 배우자는 어디에 서야 할까? 인간적인 매력이나 개인의 꿈이 아니라 제자리인가 아닌가 가 핵심이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있으면 게처럼 바르게 걸을 수 없다. 주변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제자리에만 서 있어도 세상의 혼란은 줄어든다. 주변 사람들은 살만해진다. 세상은 보기 좋아진다.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한 사람은 노래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풍경', 하덕규)
지금도 제자리를 벗어나려는 사람과 제자리에 서려는 사람의 이야기는 세계 어디서나 현재진행형이다. 마귀는 제자리를 벗어난 자요 벗어나게 하는 자요 하나님은 제자리에 서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마귀처럼 자기 자리를 이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두신 자리의 가치를 알고 그 자리에 서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은 이 땅에 이뤄진다. 샬롬의 왕국이 힘 있게 세워진다. 그 일은 제자리에 선 부부를 통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