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4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출애굽기 3장 1절-10절
중국 송조의 선종 때의 고서인 벽암록에 “줄 탁 동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로 태어날 때, 이제는 모든 것이 충분히 자라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음을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줄”이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이 “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줄”과 “탁”이 한 가지 “동” 과 때 “기” “동기”에 즉 “줄”과 “탁”이 정확하게 같은 때, 같은 시각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이 안에서 두드려 알리는 것보다 빨라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늦어서도 안 됩니다. 안팎의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튼튼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줄 탁 동기”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 가거나 매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선각자나 혹은 선구자들의 행동이 이“때”를 앞지르면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반대로 이 “때”를 놓쳐 버리면 그것은 기필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줄 탁 동기”의 함축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세태를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치가 세상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비롯한 야곱의 모든 자손 칠십 인이 가나안 땅의 굶주림을 피해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430년이나 흘렀습니다. 당연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칫거리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수가 많고 강하게 되므로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잊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그들을 이렇게 애굽 사람들에게 당하게 내버려 둘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다 계획과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을 택하셔서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르는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430년 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움직이지 않으시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고 계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애굽 왕 바로가 ‘비돔’과 ‘라암셋’ 성을 건축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일 등으로 괴롭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짐승 취급하는 상황을 똑똑히 바라보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하늘나라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눈은 이 땅에 남겨둔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로 삼으셨던 우리에게서 한시도 땔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주님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모습이 보입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고 외치며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처형장의 감독이었던 사울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공문을 가지고 열심히 갈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사울을 향해 소리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러므로 우리를 언제나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그냥 바라보지 않으시고 자신도 몸소 함께 그 고통을 당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로 번성하게 되자 사내아이를 낳게 되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탄식으로 이어졌고,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그것을 출애굽기 2장 25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작은 신음까지 다 들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짖는 신음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당해야 하는 억울한 일들이 힘들다고 느껴지실 때, 그냥 참으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힘들다고 호소하십시오. 그렇게 하실 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신음 소리를 직접 들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얼마나 무고하게 고난당하는가를 확실하게 알게 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고를 아신” 하나님께서 알게 되신 다음에 어떻게 행하십니까?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친히 건져내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친히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시고, 또한 그들의 울부짖음을 직접 들으셔야만 자기 백성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지 아시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멀거니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모습을 원치 않으십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부리로 알을 쫓는 것 같이 우리가 해야 할 기본적인 행위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 위해서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갇혀 있으니 죽을 지경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 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라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 독생자를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우리가 찾지 못함은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우리에게 열리지 않는 것은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더구나 두드리지 않으면서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었다고 원망합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과연 능력이 있으신 분인가? 의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신 것입니까?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당신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이기에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꼭 부르짖고, 구하고, 찾고, 두르려야만 응답하시고, 얻고, 찾고, 열겠다고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시고, 자신의 귀로 직접 들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편을 자신이 확실하게 아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라.” 말씀하시려고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미처 기도하지 못한 것까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 내가 생각지 못한 크고 비밀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아멘으로 화답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부르짖으라.”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과 간구함을 듣고 우리에게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것의 버전도 변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선한 일 즉 주의 일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모습, 전도하는 모습, 고아와 과부를 돕는 모습, 담 안의 형제자매들을 돌아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받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겸손하다고, 정직하다고 칭찬받는 소리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껄껄 웃으시면서 친히 내려 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인도하시고, 天國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과 현실이라는 알 속에 갇혀 있으면서 우리들이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사탄의 무서운 공격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장 6절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