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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1 프롤로그 - 어두운 골목 (밤)
얇은 창살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창문을 두드린다.
몽규 : (목소리) 동주야! 동주야! 일어나라- 자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윤동주..손에는 책이 쥐어져있다.
의아한 표정으로 송몽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주..
몽규의 양 손에는 가볍지 않아 보이는 가방이 들려있다.
동주 : 안 잤어. 무슨 일이야?
몽규 : 난 지금 간다.
동주 : 어딜 가? 배편은 다음 주잖아?
몽규 : 그렇지. 다음 주지. (씨익 웃고) 그래도 빨리 가면 좋잖아? 고향인데.
너도 지금 가자. 배편은 내가 따로 구할 수 있어.
짐은 다 붙였지? 얼른 나와.
동주 : 왜? 무슨 일야? (불안한 눈빛) 난 안돼. (떨리는 목소리가 오르며) 안돼.
다음 주에.. 다음 주 배를 타야 돼..
동주를 바라보는 몽규...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지만 눈동자는 떨리고 있다.
동주는 몽규의 눈빛만으로 많은 것이 짐작간다.
몽규 : 난 같이 갔으면 싶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몽규의 눈빛이 점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위급함이 느껴지는 동주... 흔들리는 눈동자.
詩人
#2 취조실 혹은 독방 (간수의 방)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희미한 달빛에 드러나는 동주의 눈빛...
어둠 속에서 무겁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간수 : (목소리-일본어) 윤동주(일본식이름)?
간신히 고개를 들면 간수의 어두운 실루엣이 보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만으로 방 안의 윤곽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윤동주.
간수 : (일본어) 길림선 화룡현 명동촌 출생...맞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부진 얼굴이 드러나는 간수..
간수 : (일본어) 강처중을 아는가? 고희욱은? 김송은?
작가? 시를 쓴다고? 정식으로 출간된 시집도 없는데 시인이라고?
동주의 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간수..
자신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간수의 태도에 겁을 먹는 동주.
간수 : (일본어) 송몽규는..? 송몽규를 모른다고 하진 못하겠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겠지? 떠나기 전날 밤 찾아왔었잖아?
<인서트> #1의 몽규가 동주를 바라보는 눈빛..
몽규의 눈빛을 바라보며 갈등하는 동주의 눈빛..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의 소리가 들린다.
#3 다다미방 - 하숙집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창 밖을 바라보는 동주..
빈 방에서
메모지 한 곳에 펜을 들어 시를 적는다.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사랑스러운 추억‘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미닫이문을 열고 방으로 반쯤 몸을 들이미는 강처중...
처중 : 어제 몽규 왔었어?
동주 : 어.
처중 : 또 먼저 어디로 사라지는 거 아니지?
전화벨이 들리자 일어서는 동주..
급하게 아래로 내려간다.
#3 좁은 골목길.
급한 마음에 조금씩 걸음이 빨라지는 동주.. 점차 달리기 시작한다.
#4 서구식 다방
서양식 정장 차림의 일본 여성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자리 한 쪽에 놓인 보자기..
#5 좁은 골목길 - 대로변
점점 밝아지는 동주의 표정.. 땀방울이 맺힌다.
숨이 차오지만 즐거운 듯.. 달린다.
눈 앞에 다방에서 기다리는 일본 여성 - 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막 골목을 지나 대로 쪽으로 나오려는데..
두 명의 특고 형사들이 길을 막아선다.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지만.. 동주는 이내 형사들이란 것을 알아챈다.
형사1 : (일본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지?
형사2 : (일본어) 시험은 끝났지?
동주 : (일본어) 절.. 아시나요..?
형사1 : (일본어) 잘 알지 아주 잘 알지.
형사2 : (일본어) 같이 좀 가지. 시험도 끝났는데..
#6 서구식 다방
빈 잔을 어루만지는 일본 여인. - 후카다 쿠미.
#7 대로변 입구.
숨을 헐떡이며 갈등하는 동주..
천천히 다가오는 특고 형사들..
담배 한 대를 권해주며 동주의 어깨를 감싸 안는 형사1.
형사1 : (일본어) 급한 일도 아니잖아? 잠깐 가자고.
형사2 : (일본어) 시험도 끝났잖아. 학생한테 그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체념한 듯, 형사들을 따라 가는 동주..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여유롭게 동주를 이끌고 가는 형사들..
간혹 동주의 어깨를 토닥인다.
#8 서구식 다방..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본 여성..
형사1 : (일본어-목소리)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잠깐..
의자 옆에 놓여있는 보자기..
원고 뭉치가 싸여있다.
#9 독방
작은 창문에서 빛이 내려온다.
모포 하나만 덮고 누워있는 동주...
잠들어있는 그의 곁에서 간수가 속삭이고 있다.
간수 : (일본어) 잠깐이면 된다고.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주.. 멍하니 간수를 바라본다.
간수 : (일본어) 오늘부터 할 일이 있어. 잠깐이면 돼. 작가라며? 간단한 일이야.
(일어서며) 여긴 너무 춥지 않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좋아 하는 일을 하는 편이 더 좋잖아?
독방의 문이 열리고 앞장서 나가는 간수.
동주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따라나선다.
#10 사무실. / 간수의 방
푸근한 분위기의 분위기.
선반에는 다기 세트와 커피 세트가 놓여있다.
벽면을 채운 지도와 일장기...
책장에는 의외로 책들로 빼곡하다.
사무실 내부를 살피던 동주의 시선이 커다란 책상 위에서 멈춘다.
자신의 원고를 알아보는 동주..
커피를 내리는 간수.. 동주의 표정을 읽는다.
간수 : (일본어) 어디서 구해왔는지 궁금하지?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많아.
동주가 책상 위의 원고를 손으로 훑어본다.
간수 :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 일본어) 이제부터 매일 이 방에서 조선어로 쓴 너의 시들 을 번역할 거야. 왜냐고? (표정이 조금씩 표독스러워지며) 그야.. 네놈들의 사상적 배경을 알려고 하는 거지.. 3류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려고 제국의 정신적 자산 에 접근하고.
원고를 훑고 있던 동주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돌려세우는 간수.
간수 : (일본어) 제국의 군부에 침투해 아시아 해방 전선의 혼란함을 이용하려던 것이 네놈 들의 계획 아니었나!
간수의 기세에 몸이 굳은 동주.
간수 : (일본어) 우린 네놈들을 오래동안 지켜봐 왔다고.
송몽규는 어디 있지? 모른다고 하겠지. 알아낼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차분히 자신의 잔에도 커피를 채우는 간수.
간수 : (일본어) 송몽규가 낙양군사학교 출신이란 것도 알고 있나?
동주 : (일본어) .. 알고 있습니다.
간수 : (일본어) 김구 일파와 이웅 일파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나?
중국에서 김구 일파와 이웅 일파와 접선한 사실도 알고 있지?
동주 : (일본어) 자세한 건 모릅니다. 우린.. 문학과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 말고는 대화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간수 : (바라보며- 일본어) 왜 그러지..? 오래 지켜봐왔다니까.. (표정이 변하며)
시인 윤동주.. 네놈이 송몽규 일파의 정신적 사상적 기둥이란 걸 모를 거 같나!
간수의 매서운 눈동자를 떨리지만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동주.
#11 용정 - 들판 혹은 운동장..
뿌연 모래바람이 일며 축구공을 차는 동주..
학생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공을 잡은 동주가 유연한 동작으로 상대진영까지 공을 몰고 간다.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다다르는데..
교복 차림의 송몽규가 잽싸게 공을 낚아채 상대 진영 골대에 차 넣는다.
포효하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몽규..
양 쪽 학생들이 그런 몽규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12 용정 - 들판..
동주가 들판 약간 높은 구릉에 웃옷을 벗고 누워있고
몽규가 냇가에 교복차림으로 몸을 던졌다가 나온다.
몽규 : 동주야, 나 조만간에 중국으로 간다. 너만 알고 있어.
동주 : 뭐? 갑자기 왜?
몽규 : 갑자기는 무슨 또 갑자기야. 시절이 이 꼬락서니인지 언젠데..
동주의 옆에 드러눕는 몽규.
동주 : 아버님한테 말씀드린 거야?
몽규 : 내가 언제 부모 그늘에 있었던 놈이냐?
넌 좋은 시인이 될 거야. 살아남아라. 나 같은 놈은 어차피 시절이 바뀌면 사라지는 불나방 같은 족속들이니까.. 조국이 이 꼴인데 밥이 먹히고 글이 써진다는 게 견디 기가 힘들 일이야. 제대로 된 글쟁이로 살아갈 팔자도 아니고.
멀리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는 또 다른 친구 문익환..
동주와 몽규를 멀리서 알아보고 소리친다.
익환 : (큰 소리로) 야- 몽규야- 동주야- 지금 난리다.
몽규 : (일어서 아주 큰소리로) 와서 물장구나 쳐라, 익환아-
조국이 이 꼬라진데 더 난리 날 게 뭐 있냐-?
익환 : (숨을 헐떡이며) 몽규 니 소설이 당선됐다고 난리다-!
빨리 가 봐. 아버지가 너 찾고 다들 .. (멈춰 숨을 고르며) 자식아, 빨리 내려와!
의아한 표정으로 몽규를 올려다보는 동주..
몽규가 동주의 표정을 읽고 멋쩍은 듯 교복 웃옷을 벗어 물기를 짜낸다.
몽규 : 거 참. 장난으로 한 게 일이 커졌네. (동주에게) 가자.
잽싼 몸놀림으로 구릉 아래로 내달려 가는 몽규.
동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옷을 들고 따라나선다.
#13 용정 - 동주의 집
툇마루에 몰려든 친척들..
몽규부가 경성에서 온 전보를 들고 흥분하며 떠든다.
동주 가족들이 흐뭇해하면서도 흥분한 몽규부의 전보를 드려다 보려고 또 난리들이다.
몽규의 합격 통지문을 뺏어서 보는 동주부.
동주부 : (꼼꼼히 읽으며) 당선작 ‘술가락’, 당선인 ‘송몽규’
몽규부 : (바싹 붙어서) 이게 보통 일입니까! 조선팔도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힘들다는 동아 일보 당선을 우리 몽규가 떡허니 해냈다는 거 아닙니까!
통지문을 보려고 몽규모와 동주모가 동주부 등 뒤로 바짝 와서 기웃거린다.
하나둘 등 뒤로 붙는 동주 여동생 혜원, 동생 일주, 어린 아이들까지 신이 나서 달라붙는다.
익환, 동주, 몽규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몽규모 : 몽규야-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몽규모..
#14 용정 - 동주의 방 (밤)
모닥불이 타오르고 아이들이 모여서 장난질이다.
평상 위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몽규부와 동주부.
술자리에서 나누는 아버지들의 목소리가 동주의 방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책을 읽고 있는 동주, 몽규의 당선작을 번복해서 읽는 익환,
바닥에 드러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몽규.
동주부 : (목소리) 몽규는 글재주가 있는 거 보니 의과로 진학을 안 시켜도 되겠어.
몽규부 : (목소리) 자식들이야 원래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부모가 살라는 대로 살수만도 없고..
동주부 : (목소리) 동주 저놈은 의사가 제격이야. 밤나 책을 안고 있으면 뭐해..
시를 쓴다고 끄적여대는 거 같은데.. 몽규처럼 당선이라도 될 재주가 없으면
기껏해야 기자나 뭐 그딴 거 밖에 더 되겠어..?
책을 덮고 문틈 사이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동주..
몽규가 그런 동주를 피식 웃으며 바라본다.
익환 : (신문을 덮으며) 재주들도 좋다. 너네들처럼 문재가 없으니 난 뭐 하면서 살까?
동주 : 너도 시를 써봐.
익환 : 내가?
동주 :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
몽규 : (일어나 앉으며) 해 봐. 글이란 게 원래 아무나 하는 짓이야.
나 같은 놈도 당선이 되는 거 봐.
동주 : (근심어린 표정으로) 너 진짜로 중국으로 갈 거야?
부모님이 저렇게 기대를 하시는데?
익환 : 중국에? 중국에 왜?
긴 한숨을 내쉬며 여유로운 눈빛으로 익환과 동주를 번갈아 바라보는 몽규.
몽규 : 동주는 시를 써라. 계속해서. 익환이는 신학 공부를 더 해보고.
동주는 영혼이 맑고 가벼우니 세상을 이고 살기 힘들거고,
익환이는 영혼이 뜨거우니 세상을 이지 않으면 자신이 불타버릴 거란 말이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 피식 웃어버리는 익환과 동주.
익환 : 너는?
몽규 : 나는... 나는 천성이 불나방 같은 놈이라 세상에 내려앉아도 타죽을 것이고,
세상 위를 떠다녀도 재가 돼서 내려앉을 거니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닐거야..
동주 : 그래서..중국은 가겠다는 거야?
말없이 다시 드러눕는 몽규.
동주 : 언제, 왜 가야되는지 우리한테도 말해주기 힘든 일이야?
몽규 : (큰소리로) 야- 전세계 인민을 하나로-
버럭 뜸금 없이 소리를 지르는 몽규에 놀라는 동주와 익환이지만,
이내 몽규를 따라 껄껄거리며 웃는다.
모닥불이 꺼지고..
어둠이 가득한 마을..
동주가 동생들과 함께 누워있다.
잠들어 있는 동생들 옆에서 호롱불빛으로 책을 읽고 있는 동주..
밖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온다.
소란스러움에 개들이 짖는 소리가 잦아지고..
어둠 속에서 집집마다 불이 다시 켜진다.
멀리서 들려오는 몽규모의 울부짖음..
몽주모 : 우리 몽규가.. 몽규가.. 이를 어째.. 중국으로 갔대요.. 어쩌면 좋아요.. 이걸..
여기저기서 수선스런 어른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방문을 열어서 마을 쪽을 바라보는 동주.. 이내 방문을 닫고 시를 쓴다.
마치 몽규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한 동주..
새로운 길 (동주 목소리)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넓은 언덕을 달라가는 송몽규..봇짐을 짊어지고..
마을 아래를 내려다 본다.
마치 윤동주를 바라보는 것처럼.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방문 너머로 멀리 시선을 던지는 동주.. #10의 눈동자와 겹친다.
#15 간수의 사무실..
헌병 하나가 타이핑을 하고 있고..
동주가 일본어로 자신의 시를 적어가고 있다.
타이핑된 원고를 읽는 간수.
간수 : (시를 다 읽고 -일본어) 조선인민을 계몽시키는 것이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하지?
송몽규와 함께 꿈꾸는 세상.. 혁명.. 너네가 꿈꾸는 새로운 길인가..?
동주 : (일본어) 멋대로 생각하려고 시키는 일이면 그만둘게요.
간수 : (다그치듯-일본어) 정지용, 이광수의 글을 읽으면서 볼세비키 혁명을 꿈꾸던 거 아니 었어? 송몽규가 중국에서 누굴 만났는지 몰라?
동주 : (일본어) 모릅니다.
간수 : (일본어) 김구 일파를 만나서 군사훈련을 받았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자가 왜?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니겠지.
또 다른 헌병이 두사람의 대화를 속기하고 있다.
#16 만주 중국 음식점.
중국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입구에서 어슬렁거린다.
송몽규가 긴장한 얼굴로 들어와 남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다.
간수 : (목소리-일본어) 당파와 분쟁이 조선인들의 천성이니..
송몽규가 김구 일파에 실망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방으로 안내된 송몽규..
방 안에는 중년의 중국인과 강한 인상의 조선인 남자 이웅이 앉아있다.
몽규를 훑어보는 이웅.
간수 : (목소리-일본어) 김구한테 실망하고 만난 게 이웅이었는데..
그자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고 만난 건지 모르고 만난 건지 모르겠어.
알고 만났겠지. 우린 그렇게 생각해. 니 말대로, 멋대로.
긴장한 얼굴로 이웅의 잔을 받는 몽규...술잔이 오간다.
#17 간수의 사무실
커피를 내려 마시는 간수.
간수 : (일본어) 이웅이 어떤 자인지 아나?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하는 것 같지만 장사 꾼에 불과한 사내라고. 김구 일파와 장개석이 꾸미는 일들을 비싼 값에 팔고 있었 지. 우리가 송몽규를 요시찰인물로 지켜보게 된 것도 그즈음이야.
동주에게도 커피 한잔을 건네주는 간수.
#18 만주 중국음식점 앞.
중국인 사내들과 인사를 나누며 나오는 이웅.
송몽규가 먼저 나와 허리를 숙여 이웅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몽규의 인사를 받은 이웅이 여전히 중국인 사내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눈다.
골목으로 사라진 몽규.. 곧이어 인력거가 도착한다.
간수 : (목소리-일본어) 혁명을 꿈꾸면 뭐하냐고..
혁명을 이뤄낼 인민의 역량이 안되는 걸..
건물 옥상에서 이웅을 내려다보는 송몽규.
이웅의 인력거가 출발하자 따라간다.
이웅의 인력거가 대로로 빠지기 전에 옥상에서 장애물 더미를 아래로 던지는 몽규.
인력거꾼이 놀라서 멈춰 선다.
장애물을 치우려고 앞으로 나오는 인력거꾼.
몽규가 권총으로 인력거의 지붕을 겨냥한다.
탕- 탕 - 탕-
#19 간수의 사무실
벌떡 일어서며 커피 잔을 쏟는 동주.
동주 : 말도 안돼!
타이핑을 동시에 멈추는 헌병대원들.
간수가 천천히 테이블을 닦는다.
간수 : (일본어)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지? 이웅이 이중 스파이였던 거?
송몽규가 이웅을 암살한 거?
동주 : (일본어) 몽규는 사람을 죽이지도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간수 : (피식-일본어) 중국에서 돌아와서? 왜? 네놈이 그렇게 얘기하라고 시켜서?
#20 용정- 동주의 방 (밤)
어린 동생들과 잠들어 있는 동주.
작은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몽규 : (목소리) 동주야- 자냐? 나다. 몽규.
잠에서 깨서 문을 여는 동주..
몽규가 땀을 흘리며 문턱에 앉아 있다.
동주 : 뭐야? 왜 연락도 없이..?
몽규 : (말을 가로막으며) 지금 여기서 떠들면 위험해.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주변을 살피며 방을 나오는 동주..
창고 쪽으로 몽규를 안내한다.
#21 용정 - 동주네 창고 (밤)
평소에도 자주 들어왔던 곳인지 아늑한 구석에 앉는 몽규.
동주가 기둥 뒤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내온다.
몽규 : 지금 장개석은 홍군(공산군)을 상대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왈본(일본)이 만주를 다 차지해 먹어도 대놓고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잖아?
동주 :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종이에 말아서 몽규에게 하나 건네며)
예상했던 일이야. 공산당을 다 죽이려고 드는 게 문제라고.
내버려뒀으면 될 일인데 일본군만 좋은 일을 했잖아?
몽규 : 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을 할 여유도 없어. 장개석은 글렀어.
동시에 말아 핀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동주와 몽규..
또 동시에 연기가 새어 나갈까봐 손부채질을 하는 동주와 몽규..
동주 : 군관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조선인을 배출해도 한계가 있어.
조선 인민 전체가 깨어있지 못하면 다 소용 없는 일이라고.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동주.
#22 간수의 사무실
두 명의 헌병대가 각각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있다.
간수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간수 : (일본어) 조선인의 특징이 그 냄비 근성 아니야? 쉽게 달아올랐다 금새 사그라들지.
송몽규 같은 자들이 지멋대로 설쳐대도 너 같은 놈들의 사상적 배경이 있어줘야 끊 임없이 움직이지. 냄비에 불을 계속 붙여줘야 식지 않는 것처럼.
동주 : (다시 일어서며) 말도 안되는 소리! (서성이며) 난..난..
(일본어) 난.. 단지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간수 : (몰아붙이듯-일본어) 비겁한 자군.
송몽규와 네놈이 어떤 식으로 조선인들을 선동했는지 모를 거 같아? 시인이라고!?
자리에 일어서서 서성이는 바짝 따라 붙어서 다그치는 간수..
타이핑 소리가 격렬해진다.
#23 용정- 동주네 창고 (밤)
창가 쪽에서 흥분하며 서성이는 동주..
동주 : 그 많은 군사와 자금을 가지고도 장개석군은 공산군에 휘말리고, 일본군에 무릎 꿇 고 있어. 군사와 자금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전 인민이 하나가 될 사상적 바탕이 있어야 해.
몽규 : 이제 조선 학생들도 전쟁에 끌려갈 텐데. 어떡할 거냐?
동주 : 일본 제국은 패망한다. 반드시. 우리는 그때를 준비해야 돼.
필요하면 지금은 어떤 굴욕도 참아내야 돼.
근대화된 제도, 장비, 기술..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굴욕을 참아야 된다고.
동주의 말에 경도되는 몽규의 표정..
간수 (목소리-일본어) 충동적인 송몽규에게 계속 불을 지폈던 거지. 시인 윤동주가.
담뱃불을 끄는 동주.. 결의에 차있다.
몽규 : (한숨) 그래. 니 말이 맞다. 일본군 한 두 명 죽이는 게 뭐 중요하겠어.
당장 군관 학교를 나와 봤자 장개석 군 총알받이 하기 십상이고.
동주 : 일본은 반드시 패망해. 스스로 멈출 힘이 없으니 넘어지게 돼있어.
일어나서 몸을 터는 몽규.
몽규 : 알았다. 니 말대로 총부리 잡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이제 다시 펜을 들어야지.
동주 : 이제 간도를 떠날 때가 됐어. 경성으로 가든지, 동경으로 유학을 가자.
몽규 : (다가서며) 그래야지.
종이 상자에서 담배 입을 꺼내서 다시 말아 피는 몽규..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타이핑 소리가 잦아들다가 탱- 하고..
#24 간수의 사무실.
칸을 넘기는 기어를 젖히는 헌병의 손길.
여전히 창가에 서성이며 간수와 마주서있는 동주.
간수 : (일본어) 북간도는 독립군 세력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 거기서 나고 자란 네놈들이 불온한 사상에 젖어 있다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지.
동주 : (조금씩 반항스러운 눈빛으로-일본어) 난 몽규가 중국에 왜 갔었는지 알지 못하고, 군관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죄 없는 학생들을 잡아서 억지로 사상범을 만드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몽규가 암살자라는 얘기를 억지로 꾸 미라는 얘깁니까? 몽규의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런 글을 쓰는 친구가 거물들을 암살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간수 : (여유롭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 일본어) 다 봤어. (동주의 원고를 꺼내들며) 너의 시 를 읽어봐도 충분히 네놈들의 사상을 위심할만해. (시 한편을 잠깐 읽고) 아름다워. (투르게네프의 언덕을 읽고) 시니컬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너의 태도가 충분히 읽혀진다고.
동주 : 억지야. 억지.
동주가 몸을 떨며 한국어로 혼잣말처럼 내뱉자 간수가 천천히 테이블 위 재떨이에 담배를 끄면서 쳐다본다.
또 다른 원고의 시를 읽는 간수..
중간부터 갑자기 한국어로 시를 읽는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는 동주.
간수 : ‘풍화작용’이라니 이건 너무 시적인 단어가 아닌데.. ?
간수의 능숙한 한국어에 당황하는 동주.
간수 : (원고를 내려놓으며) 억지라고..? 송몽규가 암살을 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그럼 안중근은..? 모른다고 할 건가? 문익환도 모른다고 할 건가?
안중근이 문익환의 집에 머물렀을 때 그때부터 준비했던 일 아닌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동주..
간수 : (일본어로) 나는 너희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어.
너희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송몽규가 있는 곳은 모른다고 하겠지?
아무 말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 윤동주..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추자 타이핑을 하던 헌병대원들도 멈춰 선다.
#25 용정 - 은밀한 벌판.
그루터기 위에 놓인 빈 병과 깡통 등이 격발 음과 함께 날아간다.
권총에 총알을 다시 장전하는 안중근.
동주, 몽규, 익환이 긴장한 얼굴로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 달려가 다시 표적물을 세운다.
차분하게 목표물을 맞히는 안중근..
동주, 몽규, 익환이 다시 표적물을 놓고 오자 안중근이 몽규에게 권총을 내민다.
망설이는 몽규..
안중근과 친구들이 뒤로 물러서자 차분하게 격발한다.
하나씩 쓰러지는 표적물들.
탕- 탕- 탕-
해질 무렵-
안중근이 동주, 몽규, 익환을 이끌고 들판을 걸어간다.
안중근 : 너희들 각자가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알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지 않겠어?
(멈춰서 돌아보며) 절대로 이 간도 땅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뭐든지 나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해.
들판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안중근과 동주, 몽규, 익환이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26 후쿠오카 감옥 - 동주의 독방
작은 창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동주가 작은 창을 통해서 간신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 가볍게 주먹으로 벽을 치는 동주..
누군가 방을 세차게 두드린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동주.
#27 감옥 복도
헌병대원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가는 동주.
복도 반대쪽에서 초췌한 모습의 사내들이 끌려간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내들을 돌아보는 동주..
#30 의무실
늙은 의사가 천천히 동주를 진찰한다.
안구를 열어보고 입 안을 살피고, 혈압을 재는 늙은 의사와 간호사.
아무말없이 차트에 무언가를 적는 늙은 의사.
병원 (동주 목소리)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 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자니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 는 안된다.
안 쪽 선반 위에 주사기를 쭉 펼쳐놓는 간호사.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병들이 일렬로 서있다.
동주부 : (목소리) 그 비싼 공부를 하면서 뭐 하러 문과를 간다는 거야.
그 정도 비싼 돈 들이면 의사나 될 것이지.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와 동주의 팔뚝에 바늘을 넣는다.
왠지 몽롱해지는 동주.
동주모 : (목소리) 그만해요. 동주 아버지. 다 끝난 얘기를 왜 자꾸 해댄대요.
점점 눈에 초점이 없어지는 동주..
#31 용정 - 철길이 보이는 벌판길.
연희전문대 교복 차림으로 걸어가는 동주와 몽규..
그 뒤로 동주와 몽규의 일가 친척들이 피난민처럼 줄지어 따라간다.
어린 동주의 동생들이 신이 나서 철길 위를 달린다.
쑥스러워 학생모를 벗는 동주.
동주부 : (큰소리로) 동주야! 모자 똑바로 써라!
동주 : (돌아보며) 아버지, 모자 안 써도 연희전문대 들어간 거 동네 사람들 다 알아요.
동주의 말에 폭소가 터지는 친척들..
아버지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30 철길- 기차 안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으로 동주와 몽규 일행을 쫓는 친척들.
자리에 앉아 시를 적는 동주.
새로운 길 (동주 목소리)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철길이 빠르게 지나쳐간다.
#31 옥인동 하숙집
짐을 옮기는 동주와 몽규.
동주의 짐은 책이 대부분이다.
책장 가득 나란히 꽂히는 동주의 책들.
쌓여 있는 책 틈 사이로 간신히 발을 뻗어 들어오는 강처중.
처중 : 북간도에서 새로 왔다는 신입생들이구만.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는 동주와 몽규, 얼결에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처중 : (피식) 동년배니 그런 인사들은 서로 하지 말자고.
(손을 내밀며) 강처중이라 합니다.
강처중의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는 동주와 몽규.
#32 연희전문대학교 캠퍼스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는 동주..
서양 문학을 전공하는 동주답게 유럽 시들을 배운다.
칠판 가득한 릴케와 워즈워스의 시들..
몽규 : (목소리) 민족 문화를 고양할 잡지를 만들자.
처중 : (목소리) 잡지?
몽규 : (목소리) 문예지를 만들자고.
수업 중에 한 여학생에게 시선이 가는 동주.
유창한 영어를 하는 여학생에게 동경을 눈길을 보내는 동주..
#33 예배당
몽규, 처중, 동주가 예배중이다.
동주가 성가대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데
수업 시간에 봤던 여학생이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고 있다...
몽규 : (목소리) 내가 콩트를 쓰고, 처중이가 산문을 쓰고, 동주가 시를 쓰고.
조선팔도 대학생들 중에 잘난 놈들은 다 모아보자고.
처중 : (목소리) 대학생들이 아니어도 되지, 뭐.
좋은 글이고 민족정신을 고양시킬만한 글이면 누가 썼다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학생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주.
몽규 : (목소리) 좋은 생각이야. 일단 추천을 받아서 글 꽤나 쓴다는 사람들을 만나보자고.
동주가 경성에 있는 학생지들을 한 번 살펴봐봐.
예배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동주가 성가대 여학생을 쫓아갈 듯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몽규가 동주의 등을 탁 친다.
멍하니 몽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동주.
몽규 : (목소리) 동주야. 동주야-
정신 차리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몽규를 바라보는 동주.
#34 하숙집
교자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원고들..
동주가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있고..
몽규가 원고 하나를 동주의 얼굴 앞에 내밀고 있다.
몽규 : 동주야-
동주 : 응?
몽규 : 이거 보라고. 읽을 만하다. 역사과 여학생 글인데 제법이야.
동주가 원고를 받아서 읽는다.
역시 글이 제법인 듯 동주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몽규 : 제법이지? 옥천 출신 이여진이라고. 산문은 몇 번 써본 적도 없다는데..
정지용 선생 동향이라서 잘 아는 사이래.
동주 : 정지용 선생님?
몽규 : 자식, 놀랄 줄 알았다.
옆에 있던 처중도 이여진의 원고를 읽는다.
처중 : 야- 난 그냥 편집이나 해야겠다. 경성 땅에만 글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동주 : 정지용 선생님을 한 번만 만나보면 좋겠다, 진짜.
처중 : 난 이 여학생을 한 번만 만나보면 좋겠다.
이 정도 글재주면 인물이 조금 떨어지겠지?
동주 : 인물하고 글재주가 무슨 상관이야?
동주와 처중의 뒤쪽 문가에 누군가 조용히 자리를 잡아 앉는다.
피식 거리며 웃음을 참는 몽규..
처중 :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 이 정도 재주를 주시면서 인물까지 훌륭하게 하셨을 리가 없어. (몽규를 보며 주저리주저리) 그렇지? 분명히 인물보다 재주가 더 좋으니까 경성까지 유학을 보낸 거 아니겠어? 서구 학문을 익히면 가치관도 바뀌고, 미의 기 준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 신여성이라고 하면 또 일단 환상을 갖고 보는 시선들이 있잖아? 내가 의예과에서 천재적인 여성 몇을 봤는데..역시 신은 공평했어.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며 바닥을 구르며 웃는 몽규.
몽규의 반응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동주..천천히 고개를 뒤쪽으로 돌려본다.
뒤돌아보니 바로 뒤에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여진
- 바로 수업시간에 만났던 여학생이다.
몽규 : (바닥을 구르며) 인사들 해. 역사학과 이여진이야.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처중과 동주.
양 손을 동주와 처중에게 내미는 이여진.
동주와 처중이 놀라서 두 손으로 여진의 손을 잡는다.
여진 : 따로 소개 안 해도 되겠네? 잘 아는 거 같아서.
웃으며 동주와 몽규의 양손을 흔들어보는 여진.
그 여자 (동주 목소리)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35 독방
식은땀을 흘리며 모포 위에 누워 있는 동주.. 신음하며..
얼굴이 초췌해져있다.
늙은 의사가 동주의 동공을 확인하고.. 혈압을 재고..
간수가 그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챠트에 무언가를 쓰고 간호사에게 지시를 하는 의사..
간호사가 정체를 알기 어려운 물약을 동주에게 먹인다.
기침을 하며 간신히 간수를 알아보는 동주.
말없이 동주를 내려다보는 간수... 감정을 읽기가 어렵다.
간수 : (일본어 -낮게) 멍청한 녀석.
냉정하게 돌아서 나간다.
홀로 남은 동주가 땀을 닦는다.
작은 창 너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주..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36 하숙집 (밤)
하숙방 창 위로 별이 반짝인다.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고 원고들을 교정하는 처중, 동주, 여진, 몽규.
‘가슴 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시계를 올려다보는 여진..
몽규 : (여진에게) 늦었지?
여진 : 어, 가봐야겠어. (일어서려는데)
몽규 : (동주에게) 같이 가줘. 너무 늦었잖아?
잠시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동주와 여진.
동주 : 내가 왜?
몽규 : 바람 좀 쐬라고 하루 종일 안 나갔잖아?
여진 : 괜찮아. 기숙사까지 멀지도 않은데, 뭐.
몽규 : 안 머니까. (동주를 보며) 갔다 와.
무심히 교정 작업을 하는 몽규와 처중..
조용히 나가는 여진을 동주가 말없이 따라나선다.
#37 골목길 (밤)
나란히 밤길을 내려오는 동주와 여진.
여진 : 동주는 문학을 전공하지?
동주 : (서먹) 어, 그래. 문학. 영문학.
여진 :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야?
동주 : 뭐.. 다 좋아.
별빛을 올려다보는 동주.
반짝이는 별들 위로- 다시-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여진 : 이상 선생님 새 시집이 있는데, 본 적 있어?
동주 : 아니, 구하질 못했어.
여진 : 내가 빌려줄게.
동주 : 어, 고마워.
말없이 어색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
별빛이 반짝인다.
여진 : 정지용 선생님한테 인사드리러 갈 때가 있어. 같이 갈래?
동주 : (획 돌아보며) 어? 나도? 괜찮겠어? 난.. 시인도 아니고..
(수줍) 정지용 선생님은 문인들하고도 연락을 끊었다고들 하던데..
여진 : 학생들은 만나주셔.
동주 : 아..그래..?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여진 : 동주가 최근에 쓴 시를 봤어.
동주 : (깜짝 놀라 멈추며) 어, 어떻게?
여진 : 몽규가 보여줬어.
동주 :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감싸 안으며) 아- 그 자식- 진짜 창피하게-
난..진짜.. 남한테 보여줄 시들이 아닌데..(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여진 : 난 좋았어. 그렇게 부끄러워할 작품들 아니던데?
동주 : 아니..난 너무 부끄러워서 태워버리려고 한 건데..몽규 그자식이 멋대로 가져가서..
잡지에 넣겠다고- 아놔- 참.. 진짜 그럴 시들이 아닌데..
여진 : 왜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해? 다른 작품들처럼 좋던데?
난 정말 좋았어 그런데..
동주 : ?
여진 : 좋았는데.. 웬일인지 읽고 나서 좀 쓸쓸해졌어.
(미소를 띠고) 왜 그럴까?
동주 : (여진을 보다 부끄러워) 아니..아니..난 더 못 가겠어. 당장 몽규한테 가봐야겠어.
여진 : 다 왔는데? 기숙사 앞이잖아?
동주가 고개를 돌아보니 기숙사 정문 앞이다.
동주 : 아.. 그래.. 다왔네.. 나 갈게.
뒤돌아 급하게 뛰어가는 동주.
여진 : 동주야!
동주 : (돌아보고) ?
여진 : 정지용 선생님 뵙고 싶지?
동주 : (갑자기 환하게 웃는다.)
여진 : 같이 가자.
기숙사로 들어가는 여진..
동주가 환하게 웃다가 발길질로 애꿎은 땅을 찬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38 하숙방
방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동주,
다짜고짜 몽규에게
동주 : 자식아- 너, 그 원고 갖고만 있으라고 했잖아?
왜 여진이를 보여줘?
몽규 : (무슨 일인지 짐작하며 낄낄거리고) 야- 여진이랑 얘기 잘 나눴냐?
동주 : 뭐야? 너 일부러 보여줬어?
몽규 : 여진이가 뭐래? 좋다고 안 해?
동주 : 몰라. 넌 왜 ..내 말을..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거라니까..
몽규 : 여자들한테 통할 시라니까.. 여진이가 뭐래?
동주 : ..뭐..좋다고.. 근데 읽고 나면 쓸쓸해진다고..
몽규 : 통했네.
낄낄거리며 웃는 처중과 몽규..
동주가 부끄러워 자리에 앉는다.
몽규 : 자식아, 넌 내가 안 도와주면 평생 총각으로 살다 죽겠다.
더 큰 소리로 낄낄거리는 몽규와 처중..
담배를 물고 창가에 앉는 동주, 별빛을 올려다본다.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39 감옥 독방
여전히 달빛을 보는 동주..
헌병대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동주를 안내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40 간수의 사무실.
헌병대원이 나란히 타이프 앞에 앉아 있다.
간수가 조금은 차가운 분위기로 말없이 앉아있다.
언제나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시를 번역하는 동주.
대화록을 기록하는 헌병은 간수가 아무 말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다.
동주는 간수의 태도가 낯설지만 계속 자신의 글들을 번역한다.
말없이 동주를 바라보는 간수..
무표정한 얼굴이 더 신경 쓰이는 동주..
간수 : (낮은 소리로-일본어) 됐어. 그만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에 녹취했던 자료들을 불태우는 간수.
헌병대들이 놀라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역시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동주.
간수 : (연신 불에 태운 원고를 쓰레기통에 떨어트리며) 너 같은 녀석이 송몽규와 함께 사 상적 리더 역할을 했을 리가 없어. 너는 그저 송몽규의 리더십을 추종하는 문학청년 일 뿐이야.
번역을 해놓은 동주의 시를 집어 들어 거칠게 페이지를 넘기는 간수..고개를 젓는다.
간수 : (원고를 하나하나 던지며 - 일본어) 서구 문학에 빠져든 나약한 조선인 유학생.
나르시즘에 빠진 병원문학. 현실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
그런 자가 어떻게 송몽규 같이 영민한 위험분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겠냐고!
간수의 갑작스러운 비아냥에 당황스러운 동주..
동주의 원고를 읽는 간수..
간수 : (일본어) 송몽규의 인간적 매력에 빠진 평범한 문학청년이 조선인 유학생들의 전신 적 지주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한 거지. 착각은 나만 한 것도 아니지만.. 아직도 모르 겠나? 넌 철저하게 이용당했어. 송몽규에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주의 원고들..
#41 하숙방 / 밤-아침.
나란히 누워있는 몽규와 동주.. 잠이 오지 않는다.
몽규 : 여진이 마음에 들지? 집안 좋고, 똑똑하고, 이쁘고. 마다할 이유도 없지.
동주 : 넌..? 네가 마음에 있는 건 아니고?
몽규 : (한숨) 난 또 떠난다.
동주 : (고개를 들며) 뭐? 또?
몽규 : 부모님들이 걱정하실까봐 경성에 와있었던 거야. 태평하게 대학생활이나 즐길 때냐?
동주 : 문예지는?
몽규 : 너랑 여진이가 있잖아. 애초에 내가 계속 끌고 갈 맘도 없었어.
내가 너처럼 문학청년이냐?
동주 : (몸을 일으키며) 어디로 갈 건데? 임시 정부로 갈거야?
몽규 : (보다가) 넌 모르는 편이 나아. 여진이나 잘 챙겨.
집안도 좋고, 의식 있는 어른들이 주변에 많아. 정지용 선생도 그렇고.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동주 : (한숨-책상에서 담배를 꺼내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불을 붙이고) 넌 왜 항상 이런 식이냐? 니 친구 맞냐?
몽규 : (피식 웃으며) 원수한테 이런 얘기 하겠냐?
<시간 경과>
날이 밝아 있고.. 책상 위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다.
깨끗해져 있는 몽규의 책상 위.
#42 정지용의 집 - 방
동주가 여진의 안내로 정지용 시인의 집안으로 들어간다.
마당 앞에서 정지용에게 큰 절로 인사를 하는 동주..
툇마루에서 인사를 받는 정지용..
정지용 시인의 안내로 방안으로 들어가는 동주..
차를 내려놓는 여진..
아무 말없이 차를 마시는 정지용..
동주가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킨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
정지용 : 자네..
동주 : ??
정지용 : 시인이더구만.
동주 : 예?
정지용 : 시를 쓰는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시인이야.
동주 : (반색) 아..
정지용 : 읽어봤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동주와 여진..
정지용 : 근데.. 시는 그만 써.
동주 : ?
정지용 : 진정한 시인이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해. 지금이 시나 쓸 시대인가?
내가 몇 해 전부터 문인들과의 교류를 끊고 칩거한 이유를 아나?
동주 : ..아..아니요..
정지용 : 시인이라면 삶을 어떤 태도로 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해.
솔직히 그걸 모르겠어. 난..
동주 : 아..
정지용 : 시절이 좋다면 시집을 출간하게 추천을 해주겠지만, 나 자신도 확신 없는 삶을 살 고 있는데 자네를 어떻게 추천하겠나. 시집을 내고 싶나?
동주 : ...예.
정지용 : 지금은 아니야. 일본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창씨개명이라니..
일본 이름으로 일본시를 쓰고 싶나? 지금은 아니야.
실망하는 동주의 표정..
정지용 : 그래도...
동주 : ?
정지용 : 때가 되면 내가 반드시 자네 시집에 서문이나 서시를 써주겠네. 약속하지.
환하게 웃으며 여진을 바라보는 동주..
#43 골목길.
골목길을 신나게 달리는 동주의 경쾌한 발걸음..
계단을 오르는 경쾌한 발걸음..
#44 하숙방
문을 활짝 열면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문익환,
동주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45 골목길
신나게 얼싸 안고 걸어 내려오는 동주와 익환.
걸음을 멈추고 수다를 떨다가 다시 뛰어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익환 : (목소리) 몽규는 또 말도 없이 떠난 거야?
동주 : (목소리) 또 말도 없이 나타나겠지.
교회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옥인동 산길로 접어든다.
#46 교회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동주와 익환.
성가대석에서 여진이 동주와 눈이 마주친다.
동주 : (목소리) 숭실 학교 생활은 어떠냐?
익환 : (목소리) 말도 마. 지금 뒤숭숭해. 창씨 개명에 신사 참배 문제까지.
이러다 폐교될 수도 있다는 얘기들도 있어.
동주 : (목소리)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어..?
예배가 마치고 쏟아지는 교인들..
동주와 익환이 그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익환 : 모르는 일이야. 경성에 온 것도 그 때문이야.
숭실 학교를 그만두면 어디로 갈지 고민이 돼서..
동주 : 연전(연희전문대)으로 와. 같이 다니자.
익환 : 여기라고 다를까? 쉽지 않을 거야.
교인들이 빠져나가고..
여진이 나온다.
동주 : (여진에게) 익환이라고. 숭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야.
여진 : (손을 내밀며) 알아. 얘기 들었어. 멋쟁이라고.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익환 : (수줍) 뭐.. 누가 그런 소리를.. (동주를 힐끔 보며 부끄럼)
얼른 모자를 벗고 경직된 자세로 여진의 손을 잡는 익환.
#47 경성 시내..(밤)
도심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며 걸어가는 동주,여진,익환.
근대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어지러운 이국적 네온사인들이 반짝이고..
익환 : (목소리) 신학공부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하고 싶은데 모르겠어.
동경으로 유학을 갈까 고민 중이야.
동주 : (목소리) 동경으로?
익환 : (목소리) 몇 학교 추천을 받긴 했어.
여진 : (목소리) 가려면 지금 빨리 결정하셔야 될 거에요.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들뜬 발걸음으로 모던한 분위기의 다방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
#48 다방 (밤)
구석에 자리를 잡은 동주, 익환, 여진.
익환 : 나도 그런 생각이야. 일단 가서 좋은 학교에서 인정을 받는 편이 나을 거 같아.
동주 : 넌 잘 할 거야.
익환 : 그럴까? (망설이다) 너네가 시를 써보라고 했잖아?
그냥 생각이 나서 나도 한 편 써본 게 있는데.. 볼래?
동주 : 줘 봐.
품에서 곱게 접혀진 종이를 꺼내서 건네는 익환..
옆자리에 앉은 여진도 함께 익환의 시를 본다.
긴장된 얼굴의 익환..
시를 찬찬히 읽는 동주..진지하다.
동주 : (시를 읽으며) 익환아..
익환 : ..어?!
동주 : (고개를 들며 담담히) 이건 시가 아니야.
익환 : (순간 굳었다) 어..그래.. 그냥 심심해서 써봤어.
(순간 발끈) 자식들이 지들이 써보라고 해서 썼지..
동주 : (피식 웃으며) 그냥 신학 공부 열심히 해.
익환 : 됐어. 뭐 시는 아무나 쓰는 거라면서.. (고개를 들다 멈칫)
어..? 저.. (놀라서 입을 벌린다.)
익환이 바라보는 쪽으로 다방 입구로 시선을 돌리는 동주와 여진..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지식인들의 모습..
익환 : 저기..저.. 이광수 선생님 아니야?
동주 : 어, 그러네.. (놀라서 시선)
익환 : (시선을 돌리다) 어.. 저쪽은 이상 시인 아니야?
동주 : 맞아. 맞아.
흥분한 두 청년들의 시선에 당대 명사들이 보인다.
반대 테이블 몇몇을 점령한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시인들..
익환 : (흥분) 너무 흥분하면 촌스러운 건가..?
동주 : (흥분) 아니..아니..좀 촌스러워도 괜찮아..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짓는 여진.
여진 : 이광수 선생님 아는데 소개시켜 줄까?
익환 : (화들짝) 아니, 아니.. 갑자기 막 그러면 또 너무..우리가 좀 그런 거 같고..
동주 : 이광수 선생님도 알아?
여진 : 어, 이상 시인도 아는데? 소개시켜줘?
익환 : 잠깐, 우린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두 남자의 모습을 즐기듯이 웃는 여진..
입구 쪽에서 정지용 시인이 들어온다.
문인들과 인사를 나누던 정지용이 동주 일행을 발견한다.
다가오는 정지용.. 술기운이 살짝 느껴진다.
익환이 정지용 시인도 알아본다.
익환 : 저기..저기.. 정지용 시인 아니야..?
동주가 돌아봐 채 알아보기도 전에 다가온 정지용..
동주와 여진이 일어서려는데 먼저 말을 건다.
정지용 : 반갑네.
익환 : (멍하니 보다가) 어.. 인사도 하시는데..?
하고 돌아보니 동주와 여진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
정지용이 익환의 옆자리에 앉는다.
동주 : 안녕하셨어요? (익환을 보며) 숭실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에요.
정지용 : 신학을 공부한다고..?
익환 : (벌떡 일어서며) 문익환입니다.
악수를 하고 뒤늦게 모자를 벗는 익환..
그 모습을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는 동주와 여진..
시간 경과..
하나둘 문인들이 나간다.
한층 화기애애한 분위기..
찻잔이 어느새 술잔으로 바뀌어 있다.
동주 : 익환이는 성격도 예민하고 건강도 좋지 못해 타지 생활을 잘 견딜지 모르겠어요.
정지용 : 오히려 조선 땅에 있는 것보다 나을 수 있어.
왈본땅도 잘 찾아보면 좋은 선생이 많아. 난 교토를 추천하고 싶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으니까.
동주 : 전 선생님의 ‘압천’을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진 : 진심이에요. 노트에 압천을 베껴놓고 걸작이로 썼을 정도니까요.
정지용 : 지금도 눈에 선해. 지금 가면 조금 다를지 모르지.
그 시절에는 뭐든 아름답게 바라볼 만큼 젊었으니까.
익환 : 그래도 너나할 거 없이 일본으로 유학 간다고 저까지 일본으로 간다는 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지용 : 침묵하고 있는 나도 부끄럽고, 술에 취한 나도 부끄럽고, 차를 마시는 나도 부끄럽 고, 좋은 시인을 도와주지 못하는 나도 부끄럽고, 일본으로 유학가라고 권하는 나 도 부끄럽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나?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네. 부끄러움을 외면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 정지용.
#49 경성 밤거리 (밤)
화려한 네온사인.
지나치는 외국인들과 고급 차들..
익환 : (목소리) 경성 땅은 갈수록 어느 나라 땅인지 모르게 변해가는 구나.
동주 : (목소리) 그래, 진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일본 땅이라도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편 이 나을 거야.
전차가 지나간다..
#50 옥인동 언덕 (밤)
바람이 분다.
도심의 불빛이 내려다보이고..
동주, 여진, 익환이 오르막길에 접어든다.
익환 : 좋아. 결심했다. ‘압천 십리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 (정지용의 ‘압천’)
(동주를 보며) 몽규가 돌아오거든 전해줘. 난 일본으로 간다고.
계단에 멈춰서는 익환.
익환 : (여진을 보며) 기숙사 다녀와야지. 밤도 늦었는데.
동주 : (여진을 보며) 어, 그래.
여진 : (익환에게) 다음에 봐요.
익환과 인사를 나누고 기숙사 방향으로 길을 트는 여진.
동주가 따라나선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는 익환.
#51 기숙사 앞 길 혹은 옥인동 언덕길 연결 (밤)
달빛 아래 걷는 여진과 동주.
여진 : 익환이는 좋은 아인 거 같애.
동주 : 어..
여진 : 동주도 유학을 갈 마음이 있어?
동주 : 아니, 난 지금이 너무 좋아. 연전에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
(긴장) 여진이도.. 있어서.. 좋고..
여진 : 괜찮을까? 연희전문대도 교장이 바뀔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동주 : 외국 선교사들까지 강제로 추방할까?
여진 : (걸음을 멈추고) 난.. 졸업하면 고향으로 가야 돼. 끔찍해.
그럴 바에는 유학을 갈거야. 교토로.
말없이 여진을 바라보는 동주..
여진도 말없이 동주를 바라본다.
바라보던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동주도 그런 여진의 눈동자에 마음이 짠해진다.
여진 : 몽규는.. 그전에 못 오겠지..?
갑작스러운 몽규의 이름에 당황하는 동주..
여진의 목소리에서 몽규에 대한 깊은 연정이 느껴진다.
눈물을 참듯이 고개를 돌려 기숙사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여진.
무서운 시간 (동주 목소리)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52 하숙방 (밤)
익환이 이미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있다.
조용히 옆으로 눕는 동주.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동주.
돌아서 누워 얼굴이 가려진 익환...
익환 : 몽규... 때문이냐..?
대답을 못하고 바로 누워 달빛을 바라보는 동주.
#53 교도소 연병장.
철조망이 처진 작은 마당에서 일렬로 늘어선 죄수들이 가장자리를 걷고 있다.
안팎으로 감시하는 간수들..
병약해진 얼굴의 동주가 무리에 섞여서 천천히 걷고 있다.
#54 교도소 의료실 - 기차 내부 - 독방 -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몽타쥬.
늙은 의사가 동주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또 다시 정체 모를 주사를 놓는 의사.
간수 : (목소리 - 일본어) 넌 송몽규에게 이용당한 거다. 아직도 모르겠나?
동주의 의식이 다시 몽롱해진다.
어디선가 기차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간수 : (목소리 - 일본어) 송몽규는 어디 있나? 아직도 모르겠나?
선로 위 그림자가 빠르게 동주의 얼굴 위로 스쳐간다.
빙글빙글 연병장을 도는 동주의 걸음이 교차된다.
빠르게 지나쳐가는 열차의 선로 이미지들..
끝없이 이어지는 환청들..
몽규부 : (목소리) 몽규는..? 몽규는 어디 있는지 모르냐?
동주부 : (목소리) 방학인데 왜 너 혼자 집으로 왔냐, 몽규는?
동주모 : (목소리) 몽규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같이 꼭 붙어 있으라 했잖아.
식은땀을 흘리며 독방에서 괴로워하는 동주..
하숙방에 나란히 누운 익환이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는 시선..
익환 : 몽규는..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지?
기숙사 앞에서 동주를 바라보던 여진의 시선..
여진 : 몽규는.. 어디 있는지 모르지..?
독방 안에서 괴로운 듯 꿈틀대는 동주의 표정..
#55 고향집 / 동주의 방 (밤)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동주..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동주를 멍하니 바라보는 남동생과 여동생.
여동생 : 괜찮아요?
동주 : (멍하니) 어..? 어..
남동생 : 밤새 소리 지르고 .. 대학 공부가 그렇게 힘들어요?
동주 : (피식 웃으며) 공부가 힘들 게 뭐 있냐?
남동생 : (다시 잠자리에 누우며) 난 힘들던데..
동주 : 공부가 힘들면 커서 뭐가 될 건데?
남동생 : 사람이 되지.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눕는 동주와 여동생..
동주는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아우의 인상화 (동주 목소리)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달이 밝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잠든 아우를 바라보는 동주..
손을 잡아본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주.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주..문 밖으로 귀를 기울인다.
어렴풋이 들리는 몽규부의 목소리.
몽규부 : (목소리) 몽규가 지금 유치장에 있대요..
동주부 : (목소리) 아니..왜?
몽규부 : (목소리) 이걸 또 어떡하면 좋아요?
동주의 눈빛이 반짝인다.
#56 마을 전경 (밤)
동네 전경에서 뜨문뜨문 집들에서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천천히 동주의 집으로 모이는 동네 어르신들의 풍경들..
#57 동주의 집 / 안방 (밤)
동네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있다.
심각한 분위기.
동주부와 몽규부 사이에 앉아 있는 동주.
어른1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거야..? 몽규, 그놈이 그래서 어디 잡혀 있다는 거야?
어른2 : 몽규가 어려서부터 빨갱이 물도 들고 나서길 좋아했잖아요.
결국 이런 사단이 날줄 알았다니까요..
동주부와 몽규부가 인상을 쓰자 머쓱해하는 어른2.
몽규부 : 특고 형사들이 북경에서부터 따라붙었다는데 쉽게 풀어날 길이 없을 거 같습니다.
동주부 : 왜 북경에서 붙잡지 않고 여기서 붙잡힌 건데?
몽규부 : 그게.. 몽규가 자수를 했나 봐요..
술렁이는 마을 어른들..
무슨 영문인지 동주의 눈빛도 반짝인다.
어른1 : 이상한 일일세.. 자수라니..왜..
동주부 : 몽규를 만나봐야 알 일 아니야? 자수건 아니건 빼내야지.
왜 붙잡혀 갔는지는 둘째 문제고.
어른2 : 이게 다 우리가 너무 김구 선생 쪽에 서서 그런 거 아니오.
적당히 눈칫껏 행동해야 되는데.. 빨갱이 등살에 명동 땅도 떠나고..
몽규부 : (버럭) 그만해라! 몽규를 빼내는 게 먼저 아니야?
동주부 : (동주에게) 몽규가 경성에서 너한테 따로 전한 말은 없냐?
천천히 고개를 젓는 동주..
어른들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여기저기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조용히 담배를 피던 한 노인이 살며시 말을 꺼낸다.
노인 : 예전에..
모두 고개를 들고 노인을 바라본다.
노인 : 일본 낭인들 중에 이런 일에 나서길 좋아하는 자가 있어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어. 김약연 선생이 명동학교를 재건할 때 힘을 써준 자인 데..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노인.
#58 고급 중국 음식점.
은밀한 방에서 만찬을 즐기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 중에 덩치가 좋은 일본인이 가운데 앉아 있다.
노인 : (목소리) 아, 맞아. 히다카 헤이시로. 그자야.
서류를 살피는 중국인..
맞은 편 일본인이 떨고 있다.
노인 : (목소리) 장개석이나 레닌한테까지 자금줄을 대준다는 소문이 있어.
이런 일에 나서는 걸 좋아해. 일본 낭인들 중에서도 특히.
서류에 서명하는 일본인 사업가.
서류를 확인하고 중국인에게 넘기는 일본 낭인 히다카..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는다.
히다카 : (사업가에게-일본어) 훌륭해. 내가 이번에 빚을 졌으니 다음엔 반드시 갚지.
사업가 : (조심스럽게 -일본어) 저.. 그래도 증빙이 될 만한 서류를 ..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히다카.
히다카 : (다가서며-일본어) 증거..?
말을 해놓고 벌벌 떠는 일본인 사업가.
천천히 다가서 일본인 사업가 앞에 손을 짚는 히다카..
사업가가 떨고 있는데..칼을 꺼내 보인다.
천천히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히다카..
끔찍해서 기겁하는 사업가와 중국인..
하얀 목도리로 손가락을 감싸 안는 히다카..
돌아서 걸어나가며..
히다카 : (일본어) 그거면 증거가 되겠나?
벌벌 떨며 남겨진 새끼손가락 마디를 내려다보는 사업가.
#59 용정 경찰서 앞
차 안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동주부, 몽규부, 동주.
곧이어 히다카가 거들먹거리며 경찰서에서 나온다.
앞자리에 올라타 앉는 히다카,
담배를 불고 돌아본다.
마른 침을 삼키며 히다카의 말을 기다리는 몽규부.
동주가 힐끔 히다카의 새끼 손가락을 본다.
히다카 : 송몽규.. (몽규부를 보며) 재미난 아이야. 김구 쪽 자금을 모으느라고 중국 군벌들 하고 단판을 짓고 있었나 봐. 겁도 없이. 마음에 들어.
히다카의 말에 놀라는 동주부와 몽규부.
히다카 : 중국인들을 우습게 봤어. 군벌들 자금 흐름을 쫓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수 를 했나봐. (킬킬거리며) 뭐 이런 엉뚱한 놈이 다 있어-
(웃음을 진정시키고) 하여간 들어가 봐. 30분 면회야.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는 몽규부를 붙잡는 히다카.
히다카 : 잠깐, 동주가 누구야?
동주를 보는 몽규부..
히다카 : (동주에게) 니가 동주야?
동주 : ..예..
히다카 : 들어가 봐. 너만 만나겠다고 해.
아버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에서 나가는 동주.
히다카 : 몽규 빼내는 건 문제 없는데 나와서 애 단속 잘하라고.
나까지 곤란해지니까.
몽규부 : 이거..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어떻게 보답이라도 해야 될 텐데.
히다카 : 보답? 날 만족시킬 만큼 보답들을 할 수 있소?
(담배꽁초를 밖으로 던지고)
용정 땅에서 조선인들을 도와준 히다카를 기억하라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그것만 기억들 해달라고.
호탕하게 웃는 히다카...
#60 경찰서 / 유치장.
유치장 접견실로 들어오는 동주..
몽규는 이미 와 있다.
천천히 다가서는 동주...
몽규의 얼굴 모습이 점점 선명해진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몽규의 모습..
동주는 몽규의 몰골에 놀라지만, 몽규는 그런 동주를 보고 미소 짓는다.
몽규 : 그렇게 보지 마라. 창피하다.
동주 : 너.. 괜찮은 거야?
몽규 : 방학이라 와 있을 줄 알았다.
동주 : 이제 그만해라. 불나방같이 사는 거. 불안해서 못 보겠다.
몽규 : 누구나 자기 길이 있다. 불안해하지 마.
동주 : (다가와 조용히) 얼굴은 왜 그렇게 된 거야?
간수들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다가오는 몽규.
몽규 : 죽다 살아났다. (엷은 한숨) 임정(임시정부)이 힘들어. 자금줄도 막혔고.
조금 위험한 일을 했어. 오죽하면 내가 자수를 했겠냐..?
여유 있는 미소의 몽규.. 동주가 어이가 없다.
몽규 : 여진이 잘 있냐?
동주 : (긴장) ..그럼..
몽규 : 잘 챙겨줘라. 좋은 여자야.
동주 : 얼른 나와서 니가 챙겨줘라. 너를 다시 만날 날만 기다려.
몽규 : (더 다가와) 난.. 안된다. 여진이 집안을 움직여야 돼.
(조용히) 옥천에서 군자금을 대줄 집안이 몇 있어.
여진이가 큰 힘이 돼 줄거야. 잘 지내고 있어.
멍하니 몽규를 바라보는 동주.. 혼란스러운 기분..
동주 : .. 넌... 여진이를 그렇게밖에 안 보는 거냐?
뒤로 천천히 기대어 앉는 몽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몽규 : 인생에는.. 각자의 길이 있는 거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가는 길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은 거잖아?
여진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아?
동주 : (한숨) 모르겠다. 난.. 사람 감정을 이용할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이 있는지..
몽규 : 여진이에 대한 네 감정이 거짓이냐?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이제 나가게 돼도 행동에 제약이 너무 많아졌어.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 돼. 연전(연희전문대)은 괜찮냐?
동주 :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숙인 채) 교장이 바뀐다는 소문이 있어.
몽규 : 좋은 시절 다 갔군. 조금만 기다려. 곧 나갈 테니까.
어딜 가든 같이 가자. 응?
말없는 동주.
몽규 : 이제 여진이 얘기는 안 꺼낼게.
시간이 다 된 듯 헌병들이 다가온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동주.
#61 용정 경찰서 앞.
동주와 몽규의 가족이 몽규를 기다리고 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몽규가 환하게 웃으며 나온다.
가족들과 얼싸 안는 몽규..
몽규부는 한숨만 내쉰다.
#62 용정 동주네 집 (밤)
또 한번 잔치가 벌어진다.
평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동주부와 몽규부.
아이들은 들떠서 뛰어다닌다.
군데군데 술자리에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니던 몽규가 동주에게 눈짓을 보낸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주.
#63 동주네 창고 (밤)
기둥 뒤에서 담배 상자를 꺼내는 몽규.
동주가 들어오자 담배를 내미는 몽규.
동주가 받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이는 몽규..
몽규 : 소식 들었어?
동주 : 응?
몽규 : 연전.
동주 : 응.
몽규 : (연기를 내뿜고) 교장이 윤치호 선생으로 바뀌었대.
윤치호는 예전의 윤치호 선생이 아니다. 조만간 다시 일본인 교장이 오겠지.
동주 : (바닥에 앉으며) 그러겠지.
몽규 : (맞은편에 앉으며) 연전으로 다시 갈거냐?
동주 : 넌? 요시찰 학생으로 계속 감시 받을 텐데.
몽규 : (연기를 뿜고) 불나방이 불이 무서워서 피하면 불나방이냐?
동주 : (연기를 뿜고) 그래서? 돌아갈 거야?
담배를 끄며 일어서는 몽규.
몽규 : 가야지. 졸업은 해야 되니까.
문틈 사이로 술자리 어른들을 바라보는 몽규..
동주 쪽으로 돌아본다.
몽규 : 동주야, 일본으로 가자.
말없이 바라보는 동주.
몽규 : 어차피 요시찰인이 돼버렸어. 그럴 거면 차라리 공부라도 제대로 하자고.
조선 땅에서 일본어로 일본이름을 갖고 공부를 할 바에는 그편이 낫지 않겠어?
경도 제대로 가자. 너도 가고 싶어 했잖아?
동주 : 시험은..?
몽규 : 너랑 나랑 몇 달만 공부하면 돼. 졸업할 때까지 몇 달만 연전에서 준비를 하자고.
부모님도 좋아 하실 거야.
문 틈사이로 보이는 어른들의 술자리..
안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몽규 : 공부해서 출세하겠다는데 싫어하실 리가 있겠어?
익환이도 가 있잖아?
동주 :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지? 위험한 일은 더 하지 마.
몽규 : 공부하겠다는 건데, 뭐.
술을 마시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몽규부..
작은 틈 사이로 보인다.
간수 : (목소리 - 일본어) 넌 송몽규에게 이용당한 거라고. 아직도 모르겠나..?
다시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는 동주.
연기를 뿜는 동주..
<인서트 / 익환과 만났던 까페에서의 정지용 시인>
정지용 : 경도는 동경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학풍이 있어.
공부를 하기는 좋은 곳이지..
마치 눈앞에 정지용 시인이 얘기한 ‘압천’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64 동주의 집 / 안방.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주.
동주부 : 문학이란 것이 공부를 해봐야. 선생 아니면 기자밖에 더 되는 거냐?
동주 : 그렇지 않습니다. 경도(교토) 제대 출신이면 일본인들도 무시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우를 받으니까요.
동주부 : 경도제대야 명문이니 그러긴 하겠지만, 조선인들이 쉽게 들어가겠냐?
몽규나 너야 공부를 잘 하긴 해도. 글세..
동주 : 이양하 선생님도 삼고를 나오시고 동경제대, 경도제대 모두 공부를 해셨는데
가장 학풍도 자유롭고 조선인들이 유학을 가기에는 가장 좋습니다.
동주부 : 그래. 가기만 한다면야.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연전 출신이 들어가기가 그렇게 쉽겠냐는 거지..
동주 :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주부.
#65 기차 안
나란히 좌석에 앉아 있는 몽규와 동주..
열차가 출발한다.
간수 : (목소리 - 일본어) 넌 송몽규에게 이용당한 거라고, 모르겠어?
선로가 빠르게 스쳐간다.
#66 서울 하숙방
엉망진창 누군가 헤집고 다닌 상태.
여기저기 책이 널부러져 있다.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는 동주와 몽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몽규..
처중이 뒤편에 서있다..
처중 : 이틀에 한 번 꼴로 특고 형사들이 와서 다 뒤져갔어.
나까지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동주가 어지럽혀진 자신의 책가지를 살펴본다.
몽규 : 뭐.. 어차피 한 번 짐정리 하려고 했어.
(처중을 보며) 이제부터 공부해야 되니까 아무 때나 막 오고 그러지마.
담뱃불을 끄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하는 몽규.
처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본다.
#67 하숙방 (밤)
단촐하게 정리된 방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는 동주와 몽규.
담벼락 너머로 누군가의 긴 그림자가 스쳐간다.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드는 동주.
담벼락 너머로 느껴지는 인기척.
#68 골목 (밤)
어두운 골목으로 나오는 동주.
누군가의 그림자가 담벼락 뒤로 슬며시 사라진다.
동주 :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야?
담 뒤편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여진.
여진 : 방해될까봐.
얘기 들었어. 경도 제대 시험 준비한다고.
동주 : 어.. (몇 걸음 다가서며) 몽규는 만났어?
여진 : 학교에서 아무하고도 얘기를 안 해. 멀리서 .. 보기만 했어.
동주 : 몽규는 요시찰 학생이라 얘기를 나누면 안 될거야.
여진 : 동주는?
동주 : 난 평생을 같이 했는데, 뭐.
여진 : 나도 일본으로 유학을 갈까?
말없이 한걸음 더 다가서는 동주.. 달빛을 올려다본다.
여진 : 가더라도 경도 제대 같은 학교는 못가겠지..?
동주 : 몽규를 만나고 싶으면 나오라고 할게.
동주를 바라보는 여진,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음을 옮긴다.
여진 : 불나방은 죽을 길인 걸 알고도 저렇게 불빛으로 뛰어들까?
아마 알거야. 알면서도 저렇게 뛰어 들거야, 그치?
가로등 불빛에 잔뜩 모여든 날벌레들.
동주 : 몽규는 안에 있어. 몽규는 여진이를 타 죽게 할 불빛도 아니야.
묘한 표정으로 동주를 바라보는 여진..
여진 : 동주는.. 내 남편을 닮았어..
무슨 얘기인지 몰라 멍하게 여진을 바라보는 동주.
여진 : 고향에 남편이 있어. 세 번밖에 못 봤지만.
남편은 남편이지. 좋은 사람이고.
멍한 동주에게 다가서는 여진..
여진 : 미안해. 진작 얘기를 했어야 되는데..
아직 나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서.. 일단 고향을 도망쳐 오긴 했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못 잡았어.
남편은 내가 선택하는 쪽으로 해 주겠대.
자유 연애로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쪽에서 이혼을 해주겠다고.
좋은 사람이지. (동주를 바라보며) 동주를 닮았어.
돌아서는 여진.
여진 : (멈춰서며) 몽규한테 나 왔었단 얘기 하지 마.
다시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진.
동주가 한동안 제자리에 서있다.
#69 하숙방 (밤)
같은 자세로 공부를 하고 있는 몽규.
동주가 들어온다.
눈길도 주지 않고 하던 공부를 하는 몽규.
동주 : 누가 왔는지 알지?
몽규 : (책을 보며) 어.
동주 : 여진이가 결혼한 것도 알았어?
몽규 : 어.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 동주.
동주 : 그런데도 여진이랑 잘 해보라고 한 거야?
몽규 : (여전히 책을 보며) 어.
몽규의 책을 내리는 동주.
그제서야 동주를 보는 몽규.
동주 : 왜? 여진이 집안을 이용하려고?
동주를 바라보는 몽규.. 책을 덮는다.
몽규 : 사람이 한 가지 목적만으로 행동하는 건 아니잖아?
여진이 집안도 필요했고, 너도 여진이한테 마음 있는 거 같았고, 여진이도 너랑 어 울리는 거 같았고, 어차피 서로 애정이 있어서 한 결혼도 아니었어. 요새 신여성한 테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할 말이 없다는 듯 뒤로 기대어 앉는 동주.
동주 : 그런데 이제 필요가 없어졌어?
몽규 : 어.
동주 : 왜?
몽규 : 경도 제대 나와서 출세할 거니까.
강하게 바라보는 동주.
동주 : 진심이냐?
몽규 : 그래.
동주 : 알았다.
휙 돌아서 이불을 펼쳐 눕는 동주.
몽규 : 윤치호 선생도 창씨개명을 했단다. 연희전문대 교장이.
조선 땅에 있어봤자 무슨 소망이 있겠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동주.
#70 연희전문대 강당.
졸업식이 진행된다.
윤치호가 일본어로 축사를 하고..
우등상을 받는 몽규가 단상에 올라 상패와 상품을 받는다.
씁쓸히 바라보는 여진과 동주.
식이 끝나고 쏟아지는 학생들 사이로 나오는 몽규..
상품을 뜯어본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목의,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책이다.
몽규 : 에라이- 이따위 걸 상품이라고! 주지나 말지!
주변의 학생들이 웃는다.
책을 강당 안으로 던지고 냅다 달리는 몽규.
#71 옥인동 언덕길
열심히 달리는 몽규.
땀을 흘린다.
십자가 (동주 목소리)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교회첨탑.. 종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뒤따라 뛰어가는 동주..땀을 흘린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교회 입구 쪽에서 휘파람을 불며 기다리는 몽규.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따라오는 동주를 웃으며 반기는 몽규..
동주가 숨을 헐떡인다.
동주 : 졸업식날 상장을 던져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몽규 : 그게 상장이냐? 희롱이지!
첨탑에 기대는 두 사람.
동주 : 요시찰 인물이 그런 짓을 하다가 유학도 못 간다.
몽규 : (담배를 꺼내 물며) 어차피 연전 나와서 경도제대 붙을 확률 많지 않다.
동주 : (피식 웃으며) 교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몽규 : 절간에서 고기 먹는 놈이 교회당 앞에서 담배 못 필까..
동주 : 너..진짜 유학을 왜 갈려고 하는 거야?
몽규 : 출세하려고 한다니까.
동주 : 믿어도 돼?
담배를 비벼 끄는 몽규.
돌아서 동주를 바라본다.
몽규 : 동주야. 넌.. 날.. 예수님 다음으로 믿어라.
나도 그럴 거니까.
교회 첨탑에 태양이 걸려 있다.
#72 교도소 / 연병장
죄수복을 입은 사내들 사이로 연병장 주변을 걷는 동주..
철조망 사이로 태양이 걸려있다.
멀리서 동주의 모습을 바라보는 간수.
극도록 쇠약해져서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동주..
간수 : (목소리) 송몽규가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겠지.. 이용만 당했으니까..
멀리서 사라지는 사상범들의 행렬에서 얼핏 몽규의 뒷모습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정신을 차려보려고 고개를 젓는 동주.
#73 간수의 방
두 명의 헌병들이 타이핑을 친다.
커피를 내리는 간수..,
동주 앞에 한 잔 내놓는다.
간수 : 군관학교를 다니던 송몽규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군사자금을 모았다.
그 때문에 북경에 있는 임시정부 조직이 위험해 노출될 뻔했지.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송몽규는 자수를 했는데..
왜 했다고 생각하나?
동주 : 모릅니다.
간수 : 모를 거야. 맞아. 넌 이용당했으니까.
교토 제국 대학에 입학하자고 얘기를 꺼낸 것도 송몽규지?
동주 : 아닙니다. 정지용 선생님과 이양하 선생님이 추천을 하신 겁니다.
간수 : (일본어) 너를 잘 아니까. 송몽규는..
동주 : (일본어) 유학은 제 의지로 간 것입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간수..
동주의 커피 잔 위로 파도치는 검붉은 물결.
#74 인천항 / 밤
어둡고 붉은 파도가 밀려온다.
인천항 근처 여관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동주와 몽규.
동주 : 일본 명문고 출신들도 들어가기 힘든 학교인데.. 시험에 붙을까?
몽규 : 떨어져도 안 돌아올 거다. 다른 학교라도 시험을 봐야지.
파도를 내려다보는 동주.
#75 인천항 / 출입국 사무소.
출국 심사대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동주.
몽규가 안쪽에서 직원과 심각하게 얘기를 나눈다.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오는 몽규..
동주 : 왜 그래?
몽규 : (한숨) 도항증명서를 떼려면.. 이름을 바꿔야 된대.
동주 : 뭐?
몽규 : 창씨개명을 해야 된대. 시청에 가면 바로 할 수 있대.
신청하는 대로 바로 나오니까 오늘 안에 배를 탈 수 있대.
어떡할래?
동주 : 어떡하냐니? 창씨개명을 하자고?
몽규 : 여기 남아도 어차피 해야 될 거야.
동주 : 하자고?
몽규 : 오늘 배를 놓치면 시험도 못 봐.
작성하던 서류를 꾸기고 나가는 동주.
몽규가 따라나선다.
#76 거리
동주를 붙잡는 몽규.
몽규 : 동주야!
동주 : (뿌리치며) 뭐?
몽규 :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일본 놈들이 뭐라고 부르든 그게 뭐가 중요해?
동주 : (바라보다) 너 왜 그러냐?
유치장 한 번 갔다 오고 정말 출세라도 하고 싶어진 거냐?
몽규 : 불필요한 자존심 세워서 뭐가 득이 되냐?
민족 문화 고양을 위해서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너도 동의했잖아?
나한텐 지금 교토 제대가 필요해. 난 그것만 생각할 거야.
남고 싶으면 넌 남아.
동주를 비켜서 시청 쪽으로 걸어가는 몽규..
동주가 몽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77 인천항 바닷가.
출렁이는 파도 위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동주.
참회록 (동주 목소리)
파란 녹이 슨 구리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바람이 분다.
폐선이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고..
누군가 버려놓은 식기들이 모래 사이에 묻혀있다.
나는 나의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
일만이십이십사년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그릇에 담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동주.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해든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동주.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78 인천 시청 근처 거리
걷다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동주.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다시 걷기 시작하는 동주..
시청에서 나오는 몽규와 마주친다.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납니다.
쇼윈도로 보이는 동주의 뒷모습.
#79 간수의 방
커피 잔을 내려놓는 간수.
간수 : (일본어) 히라야마 도오쥬 (윤동주) 소무라 무게이 (송몽규)
마주보며 커피를 마시는 동주.
#80 교토 대학교 / 시험장 (교실)
시험 감독관이 출석을 부른다.
감독관 : 소무라 무게이-
몽규 : (손을 들며) 하이.
감독관 : 히라야마 도오쥬-
동주 : (손을 들며) 하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주와 몽규.
감독관이 출석을 부르다가 시험지를 나눠준다.
긴장된 얼굴로 시험지를 바라보는 동주와 몽규.
#81 교토 대학교 본관 앞
벽보로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다.
바짝 몰려드는 학생들.
몽규와 동주도 확인을 하려고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명단을 확인하던 몽규와 동주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돌아서 나오는 동주..
몽규가 따라 나온다.
동주 : (몽규 쪽으로 돌며) 축하한다. 대단하다. 차석이라니.
실망해서 돌아서는 동주를 따라 가는 몽규.
몽규 : (붙잡으며) 동주야.
동주 : ?
몽규 : 여기까지 와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동주 : 그럼 어떡해?
몽규 : 다른 학교도 시험 봐야지.
동주 : (뿌리치며) 부끄럽다.
몽규 : (다시 잡으며) 뭐가 부끄러워? 교토 제대 못 다니는 게 부끄러워?
너가 하고 싶은 공부하려고 자존심 다 버리고 여기까지 온 건데, 뭐가 부끄러워?
동주 : (생각) 다른 학교는 생각도 안 해 봤어.
몽규 : 입교 대학을 봐. 나도 떨어지면 입교 대학교로 시험을 볼 생각이었어.
기독교계 미션 스쿨이라서 다니기도 제국 대학들보다 훨씬 나을 거야.
흔들리는 동주.
몽규 : 동주야, 날 믿어라.
강하게 설득하는 몽규의 눈동자에 이미 마음을 정한 동주의 표정.
#82 용정 동주네 동네.
동주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편지를 들과 열심히 뛰어간다.
기다리던 동주와 몽규의 부모들이 편지를 받아들고 동주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83 용정 동주네 안방
편지를 읽는 몽규부.
식구들이 모두 긴장하며 편지를 읽는 몽규를 기다린다.
묘한 표정의 몽규부..
몽규부 : 송몽규는 교토 제대 역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을 했다는군.
환호를 지르는 식구들..
몽규부 : 윤동주도 ..
다시 긴장하는 식구들..
몽규부 : 합격을 했다는군..
다시 환호를 지르는 식구들..
몽규부 : 그런데..
다시 긴장하는 식구들..
몽규부 : 교토 제대가 아니라 입교대 문학부라는군.
동주부 : 교토 제대는 떨어진 거야?
몽규부 : 그런가 봐. 하긴 워낙 들어가기 힘든 학교니까.
(편지를 보며) 기독교계 미션스쿨이고 좋은 학교라는군.
동주부 : 뭐, 어디든 지 하고 싶은 공부하면 되는 거지, 뭐.
다른 식구들이 몽규부의 손에 있던 편지를 뺏어서 읽기 시작한다.
#84 압천
압천의 강길을 따라 걷는 동주.
동주 : (목소리) 이곳에 오고 거의 매일 압천을 찾습니다.
정지용 선생님의 작품 속 압천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하지만
좋은 시상이 떠오를 때면 어느새 압천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반대 방향을 따라 걷는 일본인 여성- 후카다 쿠미..
길을 따라 걸으며 여러 번 마주친다.
#85 6첩방 2층 하숙집.
주인의 안내로 하숙집에 오르는 동주와 몽규..
6첩 다다미방이다.
몽규 : (훑어보며) 6첩방이군.
짐을 정리하는 동주.
몽규는 창밖으로 보며 담배만 핀다.
몽규 : 난 며칠만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동주 : (일손을 멈추고) 왜?
몽규 : 요시찰 인물인 거 몰라?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동주 : 그래도.. 같이 지내야 생활비도 덜고..
몽규 : (담배를 끄며) 조만간 방을 같이 쓸 사람이 올 거야. 걱정하지 마.
밖으로 나가는 몽규..
동주가 의아한 얼굴로 몽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86 동주의 독방
헌병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동주가 익숙한 듯이 끌려 나간다.
#87 의무실 앞 복도.
사상범 몇몇이 줄지어있다.
멍하니 차례를 기다리는 동주.
음습한 분위기가 흐르고..
의무실 안으로 들어설 차례가 다 됐을 때,
고개를 숙이며 헌병대에 끌려나오는 한 사내-
몽규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이 몽규를 바라보는 동주.
몽규가 지나가다 고개를 천천히 든다.
동주를 쳐다보는 몽규..
또한 동주를 알아본다.
초췌한 얼굴로 헌병대에게 끌려가는 몽규..
반대방향으로 이끌려가면서 동주를 보며 힘없이 미소 짓는다.
말을 걸고 싶지만 입도 떨어지지 않는 동주..
헌병대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의무대로 끌려 들어가는 동주.
#88 의무실
늙은 의사가 동주를 진료하고..
젊은 간호사가 동주에게 주사를 놓는다.
다시 몽롱해지는 동주의 정신..
#89 6첩 다다미방.
식은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동주.
누군가 동주를 흔들며 깨운다.
눈을 뜨는 동주.
눈 앞에 처중이 앉아 있다.
처중 : 동주야, 괜찮아?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며 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주..
동주 : 어, 니가 어쩐 일이야? 왜 여기 있어?
처중 : 동지사 대학에 붙었어. 잠깐 동경에 갔다가 오는 길이야.
몽규가 너랑 같이 지내면 된다던데?
동주 : 몽규가? 몽규는 어딨어?
처중 : 몰라. 나 시험 붙은 날 만나고. 주소만 받았어.
몽규랑 얘기했던 거 아니야?
동주 : 아니야.
처중 : 어떻게...? 나 다른 곳 알아봐?
동주 : 아니, 아니야. 같이 있으면 좋지, 뭐.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무는 동주.
처중이 그제서야 자신의 짐을 풀어놓는다.
#90 간수의 방
간수와 마주보고 있는 동주..
여전히 헌병대 두 명이 타이핑을 하고 있다.
담배를 물고 있는 간수에게 자신에도 담배를 달라는 손짓을 하는 동주.
간수가 피식 웃으며 새 담배를 꺼내 동주의 입에 물어준다.
불을 붙이는 간수.
동주 : (일본어) 왜 얘기 안 했습니까?
간수 : (불을 붙이고-일본어) 뭘?
동주 : (올려다보며) 몽규가 여기 있었던 거.
간수 : (자리에 앉으며-일본어) 평생 함께 했다면서 항상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군.
동주 : 몽규를 만나게 해주세요.
간수 : 만나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는 간수..
자신의 책상에서 무언가 서류를 뒤적인다.
간수 : 뭘 물어보고 싶은데? 왜 너를 이용했냐고?
교토에서 조선인 학생을 규합하는데 널 이용한 거?
(서류를 꺼내며) 여기 있어. 지금 그 자리에서 나에게 얘기한 걸 보면 돼.
서류 뭉치를 동주의 앞에 던지는 간수.
간수 : 서명을 봐. 송몽규의 글씨는 알아보겠지?
서류의 내용을 살피는 동주.
간수 : (일본어) 본토에서 실시될 조선인 동원령을 조직적으로 이용할 것,
유사시 이용할 내지인에 대한 포섭을 할 것,
군부에 깊이 들어갈 제국대학생들을 선발할 것,
모두 너의 생각이라고 말하더군.
몽규의 서명을 확인하는 동주..
간수 : 시인 윤동주가.. 그 모든 사상의 중심이라고.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맞는 얘기야?
혼란스러운 얼굴 표정의 동주.. 손이 떨린다.
#91 입교대학교 수업 시간.
서양 문학 수업을 듣는 동주..
수업을 진행하는 고송 효치 교수..
라스킨의 글을 설명하고 있다.
지적이고 인품이 뛰어난 교수의 수업에 감흥을 받는 동주..
동주를 뒤 쪽에서 힐끔 바라보는 일본인 여학생-후카다 쿠미.
동주 : (목소리) 다행히 입교 대학에는 고송 효치라고 훌륭한 선생님이 계십니다.
캠브리지 신학대와 하버드 신학부를 나오신 분인데
어려서부터 언어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수업을 마치는 교수..
학생들이 일어선다.
#92 용정 / 동주의 집
동주의 편지를 읽는 동주부.
동주 : (목소리) 서양고전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강의를 해주십니다.
편지를 뺏어서 읽는 식구들..
#93 대학 교정.
책을 읽으면서 걸어가는 동주.
동주 : (목소리) 인품도 너무나 훌륭하셔서 존경하지 않는 학생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동주를 부르는 효치 교수.. 무언가 얘기를 전한다.
감격스러운 표정의 동주.
#94 효치 교수의 집
동주와 교수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 효치 교수.
동주 : (목소리) 본인생활도 넉넉지 못하면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도 많이 도와주십니다.
예배가 끝나자 다과상을 들고 오는 여학생-후카다 쿠미.
효치 : (동주를 보며 - 일본어) 도쥬의 과제물을 인상 깊게 봤어. 특히 프란시스 잠에 관한 글들은 아주 유쾌했어.
동주 : (일본어) 감사합니다.
동주를 힐끔 바라보는 일본인 여학생 후카다 쿠미.
쿠미에게 무언가 손짓을 하는 효치 교수.
쿠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효치 : (쿠미가 나가자-일본어) 동북 제대 영문과 교수로 있던 친구의 딸인데..
부모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효치 교수.
쿠미가 자료들이 담긴 보따리를 들고 온다.
효치 : (일본어) 내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문학에 대해 정리한 자료들이야.
(동주에게) 자네에게 빌려줄게. 도움이 될 걸세.
동주 : (일본어) 아니, 이렇게 귀한 걸 저한테 맡기셔도 됩니까?
효치 : (일본어) 그럼, 귀해서 맡기는 건데. 자네.. 시를 써보는 건 어떤가?
과제물에도 문학적인 글들이 많이 있던데..
동주 : (부끄러워하며-일본어) 사실.. 시를 씁니다.
효치 : (일본어) 그런가? 시인이군.
동주 : (일본어) 아직 시집을 출간하지는 못해서 시인은 아닙니다.
효치 : (일본어) 조선어 시라서 출간을 못 한 거군.
쿠미 : (일본어) 혹시..
동주 : ??
쿠미 : (일본어) 그런 문제라면.. 예전에 아버지께서 제자들의 시집을 영국에서 내주신 적이 있어요. 일본에서 등단하지 않았던 작가들도 영문으로 시집을 낸 적이 있어요.
효치 : (동주를 보며 -일본어) 어떤가? 한 번 해볼 생각이 있나?
쿠미 : (일본어) 일본어 번역을 할 분을 알아볼게요.
동주가 들떠서 답을 못한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쿠미.
#95 용정 동주네 마을
동주의 동생들이 또 편지를 들고 뛰어간다.
동주 : (목소리)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이곳도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갈수록 분위기가 나빠지고 있습니다.
급하게 뛰쳐나가 편지를 받아보는 동주부.
#96 입교대 강의실
서양문학수업을 진행하는 호치 교수.
동주 : (목소리) 입교 대학은 기독교 미션 스쿨이라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은 상황입니다.
제국대학 학생들은 건드리지 못하는 군국주의자들이 오히려 희생양삼아 기독교계 학 생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수업 중에 벌컥 들어오는 군복 차림의 반도 신지 대좌.
사병들이 서 너명 따라 들어온다.
학생들이 놀란다.
호치 교수와 학생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신지 대좌.
대좌 : (일본어) 히라야마 도주..?
동주가 손을 든다.
앞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하는 대좌.
동주가 나오자마자 뺨을 후려갈기는 대좌.
학생들이 놀란다.
호치 : (말리며 - 일본어) 지금 수업 중인데 무슨 짓이오?
대좌 : (무섭게 노려보며-일본어) 더러운 서양물이 든 문학 따위를 가르치면서 수업이라고 할 수 있나? (동주를 보며) 교련 수업을 거부한 게 사실인가?
동주 : (일본어) 예.
대좌 : (일본어) 징집이 됐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봤나?
아무 말도 못하는 동주.
학생들도 잔뜩 겁을 먹는다.
학생들을 훑어보는 대좌.
대좌 : (일본어) 천조대신이 위대한가?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가?
개인주의가 위대한가, 전체주의가 위대한가?
아무 말도 못 하는 학생들.
쿠미가 안타깝게 동주를 바라보고 있다.
대좌 : (동주에게-일본어) 너는 일본사상에 물들지 않아서 교련을 거부한 거지?
동주 : (일본어) 그저.. 군사문화에 익숙하지 않은..탓에..
다짜고짜 다시 뺨을 후려갈기는 대좌.
동주가 쓰러진다.
대좌 : (일본어) 일본의 정신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거지.. 아닌가?
일본에 필요한 인물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사병 하나가 이발기를 건넨다.
이발기로 듬성듬성 동주의 머리를 자른다.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분위기..
동주도 무기력하게 머리를 잘린다.
동주 : (목소리) 그래도 걱정 마세요. 아직까지 대학 생활은 할 만 합니다.
훌륭한 선생님도 계시고요.
피눈물이 맺히는 동주.
쿠미도 눈물을 흘린다.
#97 호치 교수의 집 (저녁-밤)
엉성하게 만든 종이 모자를 쓰고 있는 동주.
쿠미가 모자를 벗기자 쥐 파먹은 듯이 엉망이 된 동주의 머리.
쿠미가 가위를 가져와 동주의 머리를 다시 손질해준다.
아직도 동주의 손과 발이 떨린다.
시간 경과..
날이 어두워졌다.
어두운 거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는 호치 교수와 동주.
쿠미가 안쪽에서 저녁상을 차린다.
라디오에서는 도조 내각의 담화가 발표되고 있다.
라디오 : (일본어) 정부는 조선 동포에 대해서 징병제를 실시하고 소화 19년부터 징집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듣는 호치 교수와 동주.
호치 : (일본어) 잠깐 고향에 가 있는 건 어떤가?
동주 : (일본어) 동원령은 다 내려 졌습니다.
근심어린 눈길로 동주를 보는 쿠미.
호치 : (일본어) 쿠미의 부모들은 동북 제국대학교 영문과 교수셨지.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사고를 당했는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전쟁미치광이들이 날뛰니..
밥상을 차려 나오는 쿠미.
담화문이 계속 읽혀지고 있고..
어두운 마음으로 흰쌀밥을 말없이 먹는 세 사람.
동주는 귀한 쌀밥을 먹으면서 표정이 점점 굳는다.
강한 결심을 한 표정..
#98 다다미방 (밤)
처중이 잠들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주.
처중이 잠이 깨서 동주를 본다.
처중 : 야, 너 머리가 왜 그래?
동주 : (조용히 책상에 기대어 앉으며) 조선인 학생 동원령 들었어?
처중 : 알어.
동주 : 잠이 오냐?
처중 : (반대로 누우며) 잠은 자야지.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여는 동주... 불을 붙인다.
간수 : (목소리 - 일본어) 자세히 봐봐. 송몽규가 뭐라고 했는지.
담배를 피며 창밖을 보던 동주가 돌아본다.
동주 : 처중아.
처중 : 왜?
동주 : 그냥 끌려 갈 거냐?
처중 : (이불을 덮고) 몰라.
동주 : 내 머리를 봐. 끌려가면 총알받이다.
처중 : (이불을 벗고) 어쩌자고, 그럼?
동주 :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을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처중.
처중 : 말이 되는 얘기를 해. 징집 반대 운동을 하겠다고?
동주 : (연기를 뿜으며) 아니. 반대야. 징집을 권장하는 거지.
처중 : 뭔 소리야?
동주 : 제국대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입대를 하는 거야.
그리고 군부에 들어가서 무장 봉기를 하는 거지.
일본군의 총칼로-
처중 : 그게 가능해?
동주 : 가능하냐고..? 여기서 더 나빠질 게 뭔데?
멍하니 바라보는 처중..
#99 간수의 방
몽규가 싸인한 자료들을 보는 동주.
간수 : 똑바로 봐. 시인 윤동주가 조선인 유학생을 규합해 입대를 권유하고 그들을 통한 무장 봉기를 계획했다는 내용이야. 송몽규의 싸인이 있어.
비열하지 않나? 친구를 팔아서 목숨을 구걸하다니..
선명한 몽규의 싸인.
#100 다다미방 (밤)
잠을 자고 있는 처중.
동주가 들어온다.
잠에서 깨는 처중.
처중 : 어, 동주야. 머리가 왜 그래?
불을 켜는 처중..
부끄러운 듯 창가 쪽으로 돌아서는 동주.
처중 : 왜 그래?
동주 : 교련수업에 빠져서 그래.
처중 : 그렇다고 머리를 이 꼴로 만들어?
창가에 누군가 돌을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여는 동주.
창 밑에 몽규가 와 있다.
#101 포장마차 혹은 다다미방 (밤)
일본식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에 정종을 마시는 세 사람.
처중 : 너 어디 있는지 왜 안 알려줘?
몽규 : 알아서 좋을 거 없잖아.
동주 : 학교에서 온 거야? 또 어디 엉뚱한 데 다녀온 거 아니야?
몽규 : 넌 머리가 왜 그러냐?
처중 : 교련 수업을 거부하다 짤렸대.
큰 소리로 웃는 몽규.
몽규 : 시인한테 총을 들라니 이놈들이 잘못했네..
(한잔 마시고) 점점 심해질 거야. 분위기가. 일단 고향으로 가있는 거 어때?
처중 : 학기 중인데?
몽규 : 일본군 총알받이로 가게? 학기 중에 지역별로 독려를 하다가 방학이 시작하면 강제 징집이 될 거야. 처녀들도 잡아가는 상황 아니야?
동주 : 기독교계 학교라고 더 집요하게 굴어.
몽규 : 전쟁에 밀리면 밀릴수록 더 심해질 거라고.
빨리 짐들부터 보내. 학교에서 정리할 것들 좀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가자고.
정종을 한 번에 다 마시고 술값을 내는 몽규.
동주 : 넌 또 어디로 사라지는 거 아니야?
몽규 : 어디 안 가. 같이 배 편 알아보자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몽규.
#102 간수의 방
여전히 마주보고 있는 동주와 간수.
간수 : 송몽규는 도쿄와 쿄토의 조선인 학생들 조직을 은밀하게 만들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 민족문화를 고양하겠다며 조선인 노랫말과 시와 문학 작품을 모아서 따로 숨겨두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
동주 : (일본어) 몽규는.. 문학을 사랑했습니다.
코웃음을 치는 간수..
#103 까페
쿠미가 기다리고 있다.
동주가 들어온다.
동주 : (조심스럽게-일본어) 일본어 번역이 끝났나요?
쿠미 : (일본어) 거의. 지금은 조선어 글을 갖고만 있어도 위험해요.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요. 조만간 원고를 드릴 수 있어요.
안심을 하는 동주의 표정.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주문을 하는 쿠미.
종업원이 돌아간다.
쿠미 : (일본어) 좋은 시에요. 조선어를 알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동주 : (일본어) 고맙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시면 이런 위험한 일은 안 하셔도 될 텐데.
쿠미 : (일본어) 일본어 번역만 끝나면 더 빨리 진행할 수 있을 거에요.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아버님이 계셨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동주 : (일본어) 괜찮습니다.
쿠미 : (보다-일본어) 조선어가 아니어도 시집을 그렇게 내고 싶으세요?
종업원이 와서 차를 내놓는다.
동주 : (일본어) 그저.. 시인이고 싶어요.
쿠미 : (일본어) 원고는 여기로 가져올게요. 교수님 댁에 갖고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요.
요새는 특고 형사들까지 교수님 댁을 오가는 눈치에요.
동주 : (일본어) 괜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쿠미 : (일본어) 아니에요. 그런데.. 시집이 나오게 되면 책제목을 뭐라고 지을까요?
동주가 넵킨에 써준다.
조용히 건네받는 쿠미.
동주 : (일본어) 시집이 못 나와도 잊지 않을게요.
쿠미 : (일본어) 조선어로 이 시들을 읽을 날이 올 거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쿠미.
#104 다다미방 (밤)
짐을 싸는 동주와 처중.
처중 : (동주의 짐을 보며) 너 원고들이 안 보인다?
동주 : (짐을 내놓으며) 누구한테 맡겨뒀어.
처중 : 잘 했다. 괜히 조선어로 된 시를 갖고 있다가 봉변당할라.
휑-해진 6첩 다다미 방.
동주가 홀로 창가에서 담배를 핀다.
쉽게 씌어진 시. (동주 목소리)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텅빈 다다미 방안으로 비가 들이친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주머니에서 작은 우편봉지를 꺼내들고 그 위에 시를 쓰는 동주.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인서트>
-연희전문시절 같이 수업을 듣고 어울렸던 여진과 몽규, 처중..
-용정 들판을 뛰어놀던 익환과 동주, 몽규.
-호치 교수의 수업을 듣는 동주.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창가에 기대어 서서 시를 쓰는 동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105 간수의 방.
헌병들이 언제나처럼 타이핑을 치고..
빗소리가 들린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간수와 동주.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간수 : (일본어) 송몽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너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
억울하지 않나? 자네가 부끄러워할 일이 뭐가 있나?
있는 그대로 사실만 인정하면 자네는 여길 나갈 수 있어.
간수가 내미는 서류 뭉치들..
마지막 서명난에 히라야무마 도쥬라는 이름이 써있다.
펜과 인주를 내미는 간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동주가 두 손의 깍지를 낀다. 있는 힘껏.
#106 다다미방 (밤)
빗줄기가 강해진다.
몽규와 처중이 옷을 털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처중 : 간신히 짐을 붙였어.
몽규 : 미군 폭격이 시작될 거라고. 배편을 구하기가 힘들어.
담배를 끄고 자리에 앉는 동주.
동주 : 학교에는 얘기 안 하는 게 낫겠지
몽규 : 뭐라고 얘기하게? 전쟁터에 끌려가기 싫어서 도망간다고?
처중 : 일주일 뒤에 출발하는 암표를 구했어.
동주 : 일주일?
뭔가를 계산하는 동주..
자신의 시집이 번역되는 날짜를 생각하는 듯.
몽규 : 다들 몸 사리고들 있어. 일주일만 버티자고. 눈에 띄는 행동들 하지 말고.
동주 : 늦었잖아? 비도 오는데 여기서 자고 가.
몽규 : 안돼. 들려야할 데가 있어.
휙 나가버리는 몽규.
#107 간수의 방
바짝 다가가 앉는 간수..
간수 : (일본어) 애초에 송몽규는 재일 조선인유학생 그룹 사건의 배후로 널 이용한 거야.
아직도 모르겠나? 평생 송몽규의 그늘에서 넌 이용만 당한 거라고.
서명란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주.
재촉하듯이 바라보는 간수.. 오히려 간수의 눈빛이 간절하다.
동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몽규의 모습...
간수를 차분히 바라보는 몽규..
몽규 : (일본어) 동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간수 : (일본어) 왜 교토까지 동주를 끌어들였나?
몽규 : (일본어) 평생을 함께 했으니까요..
몽규의 커피잔을 채워주는 간수.
간수 : (일본어) 거짓말. 넌 처음부터 동주를 이용할 생각이었잖아?
차분하게 간수를 바라보는 몽규.. 마치 간수의 마음을 읽는 듯.
#108 다다미방 (밤) - #1과 연결.
잠을 자고 있는 처중.
동주는 책을 읽고 있다.
창밖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몽규 : (목소리) 동주야! 동주야! 일어나라- 자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윤동주..손에는 책이 쥐어져있다.
의아한 표정으로 송몽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주..
몽규의 양 손에는 가볍지 않아 보이는 가방이 들려있다.
동주 : 안 잤어. 무슨 일이야?
몽규 : 난 지금 간다.
동주 : 어딜 가? 배편은 다음 주잖아?
몽규 : 그렇지. 다음 주지. (씨익 웃고) 그래도 빨리 가면 좋잖아? 고향인데.
너도 지금 가자. 배편은 내가 따로 구할 수 있어.
짐은 다 붙였지? 얼른 나와.
동주 : 왜? 무슨 일야? (불안한 눈빛) 난 안돼. (떨리는 목소리가 오르며) 안돼.
다음 주에.. 다음 주 배를 타야 돼..
동주를 바라보는 몽규...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지만 눈동자는 떨리고 있다.
동주는 몽규의 눈빛만으로 많은 것이 짐작간다.
몽규 : 난 같이 갔으면 싶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동주 :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몽규 : (바라보다) 하여간.. 지금 여기 있는 건 위험해. 너도. 어쩌면 처중이도.
지금 가자.
동주 : 안돼. 나도 할 일이 있어.
몽규 : 그럼.. 다른 곳에 있다가 항구에서 만나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몽규.
위급함이 느껴지는 동주... 흔들리는 눈동자.
#109 다다미방 아래 주인댁 복도
아침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동주가 급하게 받는다.
쿠미 : (목소리) 지금 번역이 다 끝났어요. 원고를 드릴게요.
그때 그 까페에서 기다릴에요.
표정이 환해진 동주..급하게 뛰쳐나간다.
#110 골목길
급하게 달리는 동주..
형사들의 눈빛이 따라붙는다.
#111 서양식 까페
원고 보따리를 옆에 두고 차를 마시는 쿠미..
시간을 본다.
#112 간수의 방. / 몽규 동주 교차 씬
서류 여기저기의 자신의 서명을 하는 몽규.
몽규 : (간수에게-일본어) 왜 이렇게까지 하지?
간수 : (서류를 보다가-일본어) 시가 좋잖아?
커피를 마시는 간수.
맞은편에 동주가 앉아 있다.
간수 : (조금 간절한 눈빛-일본어) 서명해라. 어차피 송몽규는 못 빠져나간다.
동주 : (일본어) 싫습니다.
간수 : (버럭- 일본어) 왜?
고개를 숙이는 동주.
바짝 다가가 귓속말을 하는 간수.
간수 : 지금 너네가 맞고 있는 주사가 뭔지 알아? 바닷물 주사다. 그걸 맞으면 어떻게 죽어 가는 지 아냐고..? 고통스럽게 죽다가 시체까지 실험용으로 쓰인다고. 뭐하러 개죽음 을 당하려는 거야? 살 사람은 살아야 될 거 아니야?
답답한 듯 다시 몸을 일으키는 간수.
간수 : (버럭-일본어) 송몽규도 너를 팔아서 살려고 하지 않나!
<인서트>
교회종탑 아래서 동주와 몽규.
몽규 : 동주야, 넌 날 예수님 다음으로 믿어라. 나도 그럴 테니까
초췌한 얼굴로 간수를 보는 동주.
오히려 사정하듯이 얘기하는 간수.
간수 : 도대체 왜!? 왜!? 개죽음을 당하려고 하는 거야!?
간수가 동주의 멱살을 잡는다.
동주 : (떨리는 목소리로) ..부끄러워서요..
어이없다는 듯이 손을 푸는 간수..
간수 : (다가와) 송몽규는 어차피 죽는다. 너는 살아서 시를 써.
지금 같은 세상에서..그 정도는 부끄러운 게 아니야.
조용히 몽규의 죄목이 적힌 서류를 찢는 동주의 손.
다시 몽규가 동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몽규 : (일본어) 믿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간수 : (다가와 속삭이듯 - 일본어) 이런다고 윤동주가 믿어줄지 모르겠군.
전쟁터에서 시를 찾다니..나도 제명에 못 죽을지 몰라..
간수를 바라보는 뜨거운 동주의 눈빛...
간수도 동주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113 용정 동주네 집 (낮-밤)
동주가 보낸 짐이 평상위에 쌓여있다.
몽규부가 들어온다.
몽규부 : 얘들 연락은 아직도 없어요?
동주부 : 없어. 왜 짐만 보내고 연락들이 없는 거야?
멀리서 동주의 동생들이 편지를 들고 뛰어온다.
여동생 : 편지요- 일본에서 편지가 왔어요?
동주부 : (편지를 받아보고 겉봉을 확인하며) 복강(후쿠오카) 형무소..?
몽규부 : 형무소요?
몽규부가 편지를 낚아채 읽어본다..
점점 놀라는 눈빛..
몽규부 : (바들바들 떨며) 지금 애들이.. 형무소에 붙잡혀 있대요.
동주부 : (편지를 뺏으며) 왜? 얌전히 학교나 다니고 있을 애들이 왜?
밤이 됐다.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는 동주부와 몽규부.
식구들이 뒤편에서 아무 말 못하고 앉아 있다.
동주부 : (침묵을 깨며) 면회를 가자. 무슨 사정인지 가봐야 할 거 아니야.
몽규부 : 지금 미군들이 매일 폭격을 하는데 갈 수 있겠어요?
동주부 : (벌떡 일어서며) 가야지! 그까짓 폭격이 무서워서 자식을 버려!
뒤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
#114 형무소 / 복도
헌병대들에게 이끌려서 복도를 따라 들어가는 동주부와 몽규부.
주사를 맞던 의료실을 지나간다.
#115 간수의 방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 있는 동주부와 몽규부.
곧이어 간수가 혼자 들어온다.
간수 : (일본어) 윤동주의 부친은?
손을 드는 동주부.
간수 : (일본어) 송몽규의 부친은?
손을 드는 몽규부.
간수 : (일본어) 원래 이곳에서는 접견이 안돼지만 특별히 허가를 내줬오.
얘기들 나누시오.
간수가 나가자 몽규가 홀로 들어온다.
얼른 일어나 안는 몽규부.
몽규부 : 도대체 몰골이 이게 뭐냐? 어떻게 된 거야?
동주부 : 동주는? 동주는 어디 있느냐?
떨리는 몽규의 눈빛..
몽규 : 동주는... 죽었습니다.
아연실색하는 동주부..
몽규 : 지금 봬서 다행입니다. 저도 오래 살지는 못합니다.
팔뚝을 걷어 올려 주사바늘 자국을 보여주는 몽규.
몽규 : 바닷물 주사라는 건데.. 사상범들한테 실험용으로 계속 맞히고 있어요.
이 주사를 맞고 죽으면 시체를 대학실험실로 가져가는데..
부디 저희들 시체라도 고향으로 데려가 주세요.
어이없어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아버지들..
#116 형무소 시체보관실
하얀천에 가려진 동주의 시체..
동주부가 천을 걷으니 하얀 동주의 얼굴이 나온다.
오열하는 아버지들..
서시 (동주 목소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117 형무소 동주의 독방 (밤)
누워 있다가 괴로워하며 각혈을 하는 동주.
헌병들이 급하게 들어온다.
실려 나가는 동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
그 위로 별이 반짝인다.
#118 까페
동주를 기다리는 쿠미..
동주가 오지 않자 일어난다.
#119 다다미방
아무도 없는 방안을 살피는 쿠미.
처중이 들어온다.
처중 : (일본어) 무슨 일이시죠?
처중을 돌아서 보는 쿠미.
쿠미 : (일본어) 윤동주를 아시죠..?
(원고를 건네며) 중요한 원고에요. 그분께 꼭 전해주세요.
처중 : (원고를 받으며) 아..
쿠미 : (일본어) 시집이 나오게 되면 꼭 연락드린다고 해주세요.
나가는 쿠미..
처중이 원고를 살핀다.
처중 : (동주가 적은 제목의 메모를 보며 혼잣말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20 용정 고향 마을
동주부와 몽규부가 각자의 아들 시체를 지게에 지고 걸어간다.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 들어 뒤를 따른다.
어딘가로 이어지는 행렬.
#121 용정 시골 언덕
사람들이 땅을 판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언덕 위로 밤이 찾아오며 별이 빛난다.
#122 서양식 까페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쿠미와 동주.
쿠미 : (일본어) 그렇게까지 시집을 내고 싶으세요?
동주 : (일본어) 그저.. 시인으로 살고 싶어서요.
차를 마시는 동주... 창 밖을 본다.
#123 용정 언덕
윤동주의 무덤 묘비명이 세워진다.
‘시인’ 윤동주
끝
첫댓글 감사~ 감사~ 또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