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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설교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강연 제목: 하나님의 정치와 설교의 사명
(The Politics of God and the Task of Preaching)
김은주
Rev. Eunjoo Mary Kim, Ph.D.
Charles G. Finney Endowed Chair
Professor of Homiletics and Liturgics
Vanderbilt University Divinity School
Nashville, Tennessee, U.S.A.
서문 (Introduction)
안녕하십니까? Vanderbilt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설교와 예배를 가르치고 있는 김은주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Appenzeller Academic Conference에 초대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받은 초대의 글에 의하면, 이번 conference 의 주제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설교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라고 정한 이유는, 한국의 정치적 혼돈 속에서 “설교자인 목사들은, 일부 교인들로 부터 정치적 견해를 밝히라는 강요를 받을 뿐 아니라, . . .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설교를 할 수도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은 개인의 죄의 고백과 영혼 구원, 신앙인으로 어떻게 본이 되는 도덕적인 삶을 살찌에 대해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설교는 생소하고, 그런 내용의 설교를 해도 되나, 된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설교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 강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설교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하나님의 정치와 설교의 직무” (The Politics of God and the Task of Preaching)라는 제목 하에 네 가지에 중점을 두고 답하려고 합니다. 첫째,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설교와 정치의 관계, 둘째, 하나님 나라의 정치, 셋째, 설교자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정치에 대한 설교 방법론입니다.
1. 역사 속에서의 설교와 정치 (Preaching and Politics in History)
지난 6월 8일 성령강림절 주일에 저희 어머니가 다니시는 덴버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들렸습니다. 그 날이 바로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이었기에, 목사님께서 이 선거와 관련하여 “좌로도, 우로도 아닌 위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설교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대로,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돼며, 그것이 바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위를 바라보고 사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려깊은 한국 목사님들께서, 그 주일에, 이와 같은 의미있는 설교를 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주는 한가지 질문은, “우리가 좌도 우도 아닌 위만 바라보고 사는 게 기독교의 정치적 입장이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정치와는 별개인가?” 다시 말해, 좌당이 혹은 우당이 권력을 잡고 정치를 한다면,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사명은 이 세상의 정치가 어떻게 되어가던 상관없이 교인들을 위한 목회 사역과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한 구제 사업, 그리고 교회의 확장을 위한 선교 사업에만 힘쓰면 돼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보여줍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Albert Schweitzer 는 1906년에 출판된 저서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에서 말하길, 예수님은 종말이 곧 올 것을 믿으셨기에 현 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산상수훈을 비롯한 그 분의 가르침은 개인 윤리와 내면적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1]
뒤를 이어, 근대 기독교 신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독일 신학자Ernst Troeltsch역시, 1931년에 출판된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운동은 정치와는 무관한 순수한 종교적 운동이었음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예로 듭니다.[2] Troeltsch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이 세상과는 별개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3] 이 해석은 독일에 Nazi 정권이 수립되고 수 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비인간적인 정치적 행위에 대해 대다수의 독일교회가 침묵하는데 크게 공헌했읍니다.
기독교의 초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금방 도래할 줄 믿었던 하나님의 통치 대신에, 기독교는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게 되어 그때부터 정치와 결탁하게 됩니다. 로마 교회는 소수 권력층을 위한 로마 제국주의 정치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치 체제로 받아드리고, 로마 제국의 가부장적 위계 질서와 식민지 제국주의의 정치 구조를 모방해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는 동안, 이에 대항해 평신도 중심의 개혁 운동이 많이 있었읍니다. 예를 들면, the Franciscan 과 the Waldensian 들은 교회가 부와 권력에 주력할 게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종교 개혁을 거치며, 유럽에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과 예배에 기초한 개신교 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로운 정치 구조를 가진 사회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 한 예가 Puritan 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개혁 신앙으로 인해 영국 정부로 부터 핍박을 받자, 그들은 조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와 미국에 정착한 후, 자신들의 신학과 신앙을 반영한 도시, 즉, “세상을 비추는 산 위의 도시” (“city on a hill shining light to the world”) 를 세우기를 꿈꾸었습니다. 이 비유적 표현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인, 마태복음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 할 것이요” 에서 인용한 것인데, 성경에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쓰여졌는지에 상관없이, 미국 정치사에 건국 이념을 반영하는 문구로 사용돼 왔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정치와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왔고, 미국 정치가들은 정치 사회적 문제, 예들 들면, 노예 제도, 인종 차별, 성 차별, 동성 연애자 차별, 이민자 차별 등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때 마다, 교회와 연합하여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가장 최근의 예가, 현 트럼프 정권을 지지하는 정치가들과 극우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the Right-wing Christian Nationalists) 의 결합입니다.
오늘 날, 한국도 이와 유사한 정치 종교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난 게 1980년대 였는데,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부흥회를 통한 개인구원의 복음화 운동에 집중 한 반면, 소수의 민중신학자와 민중교회가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예언자의 소리를 내는 게 교회의 정치적 참여였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복잡한 것 같습니다. 트럼프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극우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처럼, 한국의 극우 보수 기독교인들은 어느 한 당을 지지하며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기독교인의 정치적 참여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성경말씀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정치(The Politics of God’s Kingdom/Kin_dom)
정치란 무엇입니까? 서구 학자들은 정치 이론을 논할 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 개념, 즉,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 때, 모든 시민들에게 공정하고 덕이 되는 법과 체제를 실행하여 선을 이루는 것[4] 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고조선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과도 맥을 같이 하기에, 정치에 대한 논의는
동서양의 대화를 통해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한 주제입니다.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정치에 대해 정의하듯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정치라면,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 역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정치가 공동체의 중심에 있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그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함께 더불어 사랑과 평화의 삶을 살게 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 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자유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제가 아주 간단하게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가 이 세상의 정치와는 무관한 가르침으로 해석되어 왔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후기식민주의 관점 (a postcolonial perspective)에서 읽으면, 그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한 것임을 알게됩니다. 20세기 말부터 기독교 연구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학적 사관은 postcolonialism, 즉, 후기식민주의입니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식민주의 사관에서 탈퇴하여 (decolonization), 성경을 부와 권력을 가진 서구 유럽의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그들의 식민지 정권 하에서 억압받고 살아온 사람들의 시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고 신학적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후기식민주의 관점에서 읽으면, 산상 수훈의 역사적 배경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시대이며, 청중은 로마의 한 식민지 마을인 갈릴리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에 관한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서구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이 역사적 현실이 간과된 채, 세상의 정치와는 관계없는 순수한 종교 운동이나 보편적 도덕성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이 말씀의 본질은 로마 식민지인 유대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정치와 참여에 대해 가르치는, 비폭력 저항의 정치적 복음입니다.
그럼,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의 산상수훈 설교는, 공관서에서 유일하게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상세히 소개 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본문없이 설교 내용이 시작되는 것 처럼 보이나, 5:3-12의 팔복에 대한 말씀이 이 설교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한 본문 말씀이고, 나머지 부분 ( 5-13-7:26)이 이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설교 내용입니다. 설교 본문인 팔복의 말씀은, 이사야서 61에서 선포하는 희년의 멧세지와 유사한데,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이 기쁨의 멧세지를, 로마 제국에 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해 사용하십니다.
팔복의 말씀을 부연하면 이렇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 정책에 몸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가난해진 사람들 (5:3), 현 정권의 비 인간화 정책에 슬픔으로 가득 찬 사람들 (5:4), 악한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온유하게 (5:5)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5:7),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사는 사람들 (5:8), 현실의 불의를 보고 정의를 외치며 (5:6), 로마의 무력에 의한 평화 (Pax Romana)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화를 위해 목숨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헌신하는 사람들 (5:9-12), 이 모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들의 것임이라.”
팔복의 낭독을 마친 후, 예수님이 하신 맨 처음 말씀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청중의 정체성을 선언하심으로 이 기쁨의 말씀이 현재 그들에게 이루어짐을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 . 너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 . .”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 . .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팔복을 받기에 합당한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라고 선언 하심으로 청중을 하나님 나라 정치의 주체임을 상기시킵니다.
이렇게 청중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깨운 후, 예수님은, 어떻게 로마 제국의 식민지 하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vision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찌에 대해 5장 17절에서 26절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먼저, 5장 17절에서,예수님은 본인의 사명이 법을 폐하는 게 아니라 성취하는 것이라도 말씀하신 후, 법률가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관습적으로 행해오던 사회, 정치, 종교법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해주십니다. 왜냐면 그 법들이 본래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을 자유케 하고 용서와 화해,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공헌하기 보다는, 기득권자의 유익을 위해 잘못 해석, 오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5:17-20). 법이 약한 자와 여자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들의 인권을 찾아주는데 사용되어야 하는 지 (5:27-32), 부정의와 폭력 앞에 어떻게 비폭력으로 대처하여 싸워 이길 찌 (5:33-48), 미움과 증오의 관계가 아니라 어떻게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찌 (5:21-26), 그래서 어떻게 팔복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5장에 연이어 6장과 7장에서,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어떻게 개인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구제 (6:1-4)와 기도 (6:5-15), 금식 (6:16-18) 하는 법, 재물에 대한 이해 (6:19-34), 비판에 대한 경고 (7: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중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니 (7:7-12) 하나님의 정치에 참여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힘쓰도록 격려하며 설교를 마치십니다 (7:13-27).
여기서, 우리 설교자들이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한 설교를
산상수훈 설교 한번으로 그치신게 아니라, 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후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계속하셨읍니다. 청중이 못 알아들을 때는 비유를 들어서, 그래도 이해 못하면, 재설명을 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 보게 하시며,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까지,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가르치시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3. 설교자의 정체성과 사명 (The Identity and Mission of the Preacher)
삼위일체의 신앙위에 서 있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한 복판에서 그 분의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윤리학자, Paul Lehmann은 하나님을 정치가로 표현합니다.[5]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가 인간답게, 행복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위해 쉬지않고 일하시는 정치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우리 설교자들은 이 하나님의 정치에 동역자로 부름받은 정치가들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사명은 청중이 우리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에서 우리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신지 (What God is doing in order to make and keep human life human)를 분별하고, 그 일에, 즉, 하나님의 정치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는 선거라는 게 없었지요. 그런데, 만일 오늘 우리 민주사회에서 하듯,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의 시장을 투표로 뽑는다면, 이스라엘의 총독을 식민지 백성들의 투표로 뽑는다면, 더 나아가, 로마 황제의 자리가 그들의 신임을 묻는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해 배우고 감동받은 청중은,어떤 자격을 갖춘, 어떤 vision을 가진 자에게 투표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한 설교를 들은 청중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위로부터 배운 하나님의 정치의 시각에서 좌와 우를 돌아보며 누가, 어느 당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더 가까운가 분별하고자 노력할 것이고, 투표가 끊난 후에도 정치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지, 하나님의 정치의 시각으로 계속 주시할 것입니다.
4. 설교 방법론 (The Homiletical Methodology)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 정치의 vision을 효과적으로 설교할 수 있을까요?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내용과 방법은 별개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내용을 어떤 목적으로 설교하든, 언제나 한가지 설교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방법에 따라 설교의 내용은 달리 전달됩니다 (“The method is the message!”). 그리고, 설교의 방법은 설교의 목적에 따라 달라져야합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교인들로 부터 정치적 견해를 밝히라는 강요” 를 받고,
설교의 시작에서 설교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후, 그 이유에 대해 성경귀절에 근거하여 세가지로 설명하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더 나아가서, 설교자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뽑으라고 권유한다면, 그 설교의 목적은 설교자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고, 설교자의 권위에 기초한 전통적인 가르침 위주의 설교 방법 (point-making)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되었지요.
반면에, 설교자가 교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라는 요구를 정치적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고 이해한다면, 설교자는 서둘러 정치적 견해를 어떻게 밝힐 찌 고민하기 보다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성찰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하나님의 정치와 부응하는가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며 설교를 준비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인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해 설교하기 전에, 4장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 시험과 연단을 받으시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준비 과정를 통한 설교는, 그 목적이 설교자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자함이 아니라, 청중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이에 견주어 재 검토하도록 도와 주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교인들 각각의 정치적 견해를 존중하돼, 우리 각자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는 “장”으로 초대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초대 형식의 설교 (Invitational preaching)”에는 설교자의 권위적인 가르침 방식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대신, 네 가지 수사학적 방법을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 대한 솔직, 단백한 이야기를 교인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식의 설교 (storytelling preaching)는 설교 전체가 설교자의 이야기로 구성 될 수도 있고, 설교 전문에서 도입부나 예화로 이야기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고려해 야 할 점은, 설교자 본인의 이야기를 청중 모두에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로 전개하는 것 입니다. 이야기 식 문장형에 쓰이는 서술형 (the descriptive)을 진수성 (authenticity) 있게 사용하고 이야기 전개 방식 (the narrative plot)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두 번째로 초대형식의 설교에 효과적인 방법은 설교자가 청중과 동등한 동료 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설교자가 청중을 설교를 듣고 배워야 할 자녀나 학생으로 간주하고 성경 본문 말씀을 가르치고 그대로 살라고 일방적으로 교훈하는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그 말씀을 깨닫고 “함께” 실행 “합시다” 라는 식의 청유형의 문장 (the suggestive)을 사용하는 겁니다. 청유형도 명령형에 속하지만, 이는 상대방에게만 하는 명령이 아니라, 화자와 청중 모두에게 하는 거지요.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신약 성서의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를 제외한 바울 서신이나 목회 서신들의 문체가 서신을 쓴 저자가 청중에게 스승이나 부모의 입장에서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어투, 즉, “너희는 . . . 해야한다”는 식의 명령형을 쓴 반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청중과 동격의 위치에서 “우리가 같이 . . .합시다” 의 청유형의 문장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12장 1절과 2절에서 말하길,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라고 설교합니다. 문학 비평을 하는 신학자들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서신이 아니라, 설교로 쓰여진, 신약 성경에서 가장 세련된 수사학을 사용한 글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6]
초대 형식의 설교를 위한 세 번째 수사학적 방법은 예수님이 산상수훈 설교에서 하셨듯이 단정형 (the indicative)의 문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 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마태복음 5장 13절과 14절에서 예수님은 청중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단정형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처럼, 설교자가 청중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상기 시킨다면, 그들의 과업인 하나님 나라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설교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나라의 vision을 가지고 변화를 위해 투표에 참여할 뿐 아니라, 비판 의식과 경각심을 가지고 이 땅의 정치를 주시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초대형식의 설교는 청중과 함께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미완성이기에, 예수님은 산상수훈 설교에서 우리가 희망을 잃치 않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의 설교는 바로 이러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 6:10). 이 기원형 (the optative) 문체를 사용하는 설교는
청중을 함께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는 장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맺는 말 (Closing Remarks)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대한 복음의 선포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으로의 초대라고 이해한다면, 설교자의 권위와 위계질서 하에 행해지는 전통적 설교에 익숙한 설교자들에겐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목회자의 leadership style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형식의 설교는 목회자의 leadership의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leadership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을 가져옵니다. 저는 이점에서, 한국 설교의 위기 상황이 설교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개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reformed, always to be reformed”)
[1]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First Complete Edition, ed. by John Bowden, trans. by W. Montgomery, et a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323, 485.
[2] Ern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trans. by Olive Wyon (London: Novello and Company Limited, 1931, 51-54.
[3] Ibid., 39-40.
[4]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Loeb Classical Library (New York: G. P. Putnam’s Sons, 1926), Book I. i.
[5] Paul Lehmann, Ethics in a Christian Context (New York: Harper & Row), 83, 85.
[6] Herold W. Attridge, Hermenia: Hebrew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9), 14; Thomas Long, Interpretation: Hebrews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7), 2.
출처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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