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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에서 배로 30여 분, 헝보 강을 낀 톤 화누안의 한 강변 가옥에 이르니 한국영화 한 편이 맹렬히 촬영 중이다. 한가로이 소떼가 거닐고 주민들은 촬영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조용 자전거를 달려 오가는 소박한 마을. 여기에 마련된 쇠락한 집 세트에는 음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오늘은 웬 일로 비가 안 오나 몰라.” 맑게 갠 날씨에 스탭들이 반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을 할라치면 거의 매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탭들 대부분이 장화를 신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주 얇은 베트남 비옷도 현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물론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실내에 머물 수 없는 스탭들은 노랑, 파랑 등 여러 색깔의 비옷을 걸치고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지면서 공포영화 촬영현장치고는 무척 고즈넉해 보인다. 조안과 차예련이 종종 "썰렁하다"고 핀잔을 주지만 “공포영화 현장일수록 더 즐거워야한다”는 김태경 감독은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다. 그는 시종일관 큰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현장 분위기를 띄운다. 하지만 세트 안 므이의 집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습기 찬 거미줄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낡은 가재도구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굵은 나무줄기가 집안을 파고들어 초현실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곳이 므이의 집이다.
므이의 집, 100년 전의 공포 속으로
▶영화 속 1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므이의 초상화
김태경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므이>(제공 아이엠픽쳐스, 공동제작 빌리픽쳐스, 팝콘필름)는 1896년 베트남 달랏에서 발견된 실존 초상화의 전설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초상화의 끔찍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벌어지는 공포를 담는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므이’란 베트남어로 숫자 열(10) 혹은 ‘열 번째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베트남에서는 흔히 여자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이렇다. 새로운 소재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소설가 윤희(조안)는 베트남에 있는 친구 서연(차예련)으로부터 흥미로운 므이의 전설을 듣게 된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했던 서연의 이야기에 윤희는 호기심이 솟는다. 서연을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망설이게 하지만, 결국 윤희는 100여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초상화의 비밀을 찾아 베트남으로 향하게 된다. 예전과 사뭇 달라진 서연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지만, 두 사람은 어색한 가운데 함께 므이의 비밀을 하나둘씩 파헤쳐 간다. 동시에 정체불명의 끔찍한 사건들이 하나둘 발생하고 초상화의 비밀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해외 로케이션에 따른 난제는 <므이>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므이의 집을 짓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세트를 설치하기 위한 허가를 받는 데만 6개월 정도가 필요했고, 실제 제작에도 한 달가량이 걸렸다. 영화 속에서 이 집안에 들어선 서연은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카메라에 므이의 흔적들을 담던 윤희는 방 한구석에서 매혹적인 므이의 초상화와 마주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초상화 속 므이를 연기하는 배우다. 실제 영화에는 베트남의 여배우 트로이카라 불리는 유명 여배우들 중 ‘안트’와 ‘홍안’이라는 두 유명 배우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안트가 이날 하얀 아오자이 차림으로 촬영장에 들렀다. ‘베트남의 전지현’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난해 베트남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인기 영화 <댄싱걸>에 출연했으며, 한국영화 <체인지>를 패러디한 베트남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 말고도 박카스 현지 광고에 안재욱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 두 번에 나눠 베트남 배우 40명에 대한 오디션을 본 결과 낙점된 배우다. 배우들 말고도 현장에는 많은 수의 베트남 현지 스탭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트촬영 때는 보통 30~50명 정도 되는 현지 스탭이 오픈 촬영 때는 100명까지 늘어난다. 5명의 현지 통역요원이 양국 스탭들 간의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베트남에는 노후한 BL카메라밖에 없기 때문에 제작진은 한국에서 아리캠 풀세트를 공수해 와야 했다. 조명은 현지 장비로 충당이 됐지만 스테디캠이나 지미집까지 가져와 쓸 수 없다는 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5년 만의 베트남 로케이션
▶강변에 지어진 가옥 세트 안, 굵은 나무줄기가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풍경이 음산하다
호이안은 베트남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들어온 지역이다. 영어 알파벳을 기초로 하는 지금의 베트남어를 탄생시킨 프랑스 신부 알렉상드르 로드가 17세기에 이곳을 통해 베트남에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니만큼 이곳에서 영화촬영을 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이 베트남 현지 촬영을 진행했던 이래 15년 만의 일이다. 사실 <하얀전쟁>의 경우도 모든 촬영에 대해 ‘정식허가’를 받았다고 말하기는 힘든 경우였다. 공수창 감독의 <알포인트>(2004)도 수개월간 베트남 현지 촬영을 시도하다 끝내 허가를 받지 못했다. 빌리픽쳐스의 이관수 공동대표는 “<알포인트>는 정글을 주 무대로 하기 때문에 캄보디아로 로케이션을 바꿔 촬영할 수 있었겠지만, <므이>는 도회지도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촬영 허가가 안 났다면 영화 제작 자체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라고 털어 놓았다.
그만큼 베트남은 여전히 굳게 닫힌 영화시장이다. 그럼에도 까다로운 촬영 허가를 얻어낸 데는 호치민과 다낭에 멀티플렉스 체인 DMC를 운영하고 있는 김태형 대표와, 현지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는 푹샹엔터테인먼트의 도움이 컸다. 헌팅과 현지 캐스팅에 큰 도움을 준 푹샹은 지난해 베트남 전체 흥행 1위를 기록한 <대리모>의 제작사다. 이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3>의 두 배 가까운 흥행수익을 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푹샹은 <므이>가 베트남에서 개봉할 경우 현지 판권을 갖게 된다.
베트남은 중국 못지않은 영화 개봉 검열로도 악명이 높은 나라다. <신라의 달밤>과 <번지점프를 하다>의 경우에도 각각 폭력과 동성애를 이유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당연히 공포영화는 심의를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할리우드영화로는 <식스 센스> 정도가 개봉에 성공할 수 있었고 우스갯소리 같지만 한국 공포영화로는 <귀신이 산다>가 개봉해 좋은 성적을 거뒀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므이>가 촬영 허가를 얻어내고 개봉 전망까지 밝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영화의 소재가 베트남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관수 대표는 자신이 제작한 <라이터를 켜라> 베트남 개봉 당시 달랏지방을 방문해 수많은 지역 귀신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질곡의 역사와 연관된 영혼들의 이야기였다. 베트남을 종종 오가던 이관수 대표는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마침 영혼이 봉인된 그림이 모여 있는 일본의 사원을 TV 다큐를 통해 보고 매료됐던 김태경 감독과 의견이 맞아떨어졌다. 프랑스 식민지 당시 희망이 없었던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영혼의 초상화는 희망을 주는 주술적 상징이었다. 이런 배경이 아니었다면 심의위원 12명 만장일치의 촬영 허가 결정이 나오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므이>는 오랜만의 베트남 현지 촬영이라는 의미를 넘어 장르 영화를 통해 아시아영화의 연대를 확인하는 호기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12월 30일부터 달리기 시작한 <므이>는 호이안 촬영 이후 호치민에서 마지막 베트남 촬영을 끝낸 뒤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3월쯤 크랭크업할 예정이다.
“공포영화는 다 같이 행복해지자는 것”
김태경 감독 인터뷰
벌써 두 번째 공포영화다.
10년 전에 써놓은 멜로 시나리오가 있어서 <령> 이후에는 꼭 만들 것이라 결심했다. 그런데 <므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호기심이 동했다. 더구나 내가 봤던 다큐의 사원 그림도 10개(므이)여서 어떤 운명적인 기분까지 느꼈다. 사실 베트남은 이전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던 나라였다. 그러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베트남에 들러 맨 처음 전쟁기념관에 갔다. 네이팜탄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는 유명한 베트남 소녀의 사진 있지 않나? 그 사진이 그 소녀가 자라서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과 나란히 함께 걸려 있는 것을 봤다. 정말 감동적이었고 나로서는 뭐라고 할까, 베트남에 대한 헌사로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귀신이란 존재도 억압된 것의 귀환이지 않나, 더구나 ‘므이’라는 단어에는 윤회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조안과 차예련의 연기는 어떤가?
재미있는 게 나를 포함해 조안과 차예련 세 사람 모두 혈액형이 AB형이다.(웃음) 그래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통하는 면도 많다. 먼저 조안은 화자로서 관객의 시선이다. 심도가 깊은 굉장히 좋은 눈을 가진 배우다. 차예련은 강한 이미지를 가졌는데 영화 속에서 꽤 어려운 양면성을 표현해야 한다. 만족스럽다. 두 배우 모두 캐스팅 1순위였는데 흔쾌히 출연해줘서 기뻤다.
공포영화로서 <령>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꽤 연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령>을 찍을 때는 매 장면 철저히 구상하고 계산해서 만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 있다. 장르 영화의 규칙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단지 무서운 장면만으로 기억되는 공포영화는 싫다. 공포영화를 통해서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다른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는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작년에 인사동에서 타로점을 봤는데 올해는 ‘나가서 잘 된다’고 하더라.(웃음)
사진 이휘영
베트남=주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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