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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다(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근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 과정이 본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도 각자가 당면한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근심"? (국어사전) "해결되지 않는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지는 것"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을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언제 근심하는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근심하게 된다.
예컨데, 수험생이 취업을 위해서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내일이 디데이다.
시험 전날 수험생과 면접관 중 누가 근심하겠는가?
면접관이 근심하겠는가? 별로 근심하지 않는다.
반면에 수험생은 매우 근심할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면접관은 수험생을 통제할 수 있지만, 수험생은 면접관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근심이 발생하면? 속이 타 들어간다. 애가 쓰인다.
속이 타 들어가고 애를 써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이 우울해진다.
우울감이 습격한다.
우울감이 계속 반복되면 우울증이 된다.
지금 제자들이 이런 상태이다.
속이 타 들어가고 애가 쓰인다.
며칠 전에 어느 사적인 장소에서 쌍둥이 두 아들을 군대에 입대시킨 아주머니의 사연을 들었다.
훈련소에 두 아들을 입소시키고 집에 돌아와서 아들들의 방을 보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고 한다.
입맛이 떨어지고 의욕이 상실되어 며칠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답니다.
이러다가는 우울증에 걸릴것 같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다들이 근심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예수님께서 제자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13:21)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겠다고 통보하셨기 때문이다(13:36)
이상의 두 가지는 제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원인들이다.
근심하게 될 때 찾아오는 현상이 있다.
<근심>? 헬라어 원어로 <타 랏소>? "뒤흔들다, 선동하다, 어지럽히다, 불안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물이 요동치는 모습에서 유래가 된 단어이다.
마태 14:24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근심에 쌓였다는 말은 요동치는 물과 같이 내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극도로 불안한 상태이다.
이런 근심의 마음, 타랏소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에게 임한 것이다.
근심하는 자들은 불안해하고 마음이 흔들린다.
지금 제자들도 극도로 불안해한다.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면 평소에 잘 알던 길도 찾지 못하게 된다.
수험생도 불안해지면 평소 잘 풀었던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게 된다.
지금 제자들이 이런 상태이다.
4절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아느니라"
하지만 제자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5)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말이 맞다.
지금 제자들은 평소의 상태가 아니다.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제자들 자신이 알고 있었던 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불안해지면 판단력과 분별력이 저하된다.
음주 운전자들이 고속도로에서 그리고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을 하게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판단력을 상실한 자들이 이런 사건을 일으킨다.
이렇게 제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할수 없는 문제로 인해 근심에 빠졌다.
근심으로 인해 마음이 심란해졌고 불안해졌다.
그래서 평소 잘 알고 있던 길까지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길을 모른다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길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제자들이 찾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을 아는 자는 길을 알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씀(7)
예수 믿는 우리는 길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이다.
제자들도 길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너무 불안해져서 자신들이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린 것이다.
안경을 끼고 있으면서 안경을 찾고 있다.
성도들이 통제할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심거리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문제 그 자체보다 반응이 더 중요하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났는가? 라는 사실보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겠는가?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에만 집중한다.
키가 작다든지, 돈이 없다든지, 머리가 나쁘다든지와 같은 문제에 집중한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 자신이 통제할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해결할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제에 집중한다. "나는 왜 키가 작지" "우리 집에는 왜 돈이 없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이렇게 살면? 늘 근심하게 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주변 사람들 눈치만 보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이 바람을 통제할 순 없지만 돛은 조정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문제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 우리가 바람을 통제할 수 있는가?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는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행위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 종일 하소연하고 원망하면서 살게 된다.
다 큰 자식을 통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살면 좌절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있다.
바람은 통제할수 없어도 돛을 조정할 수는 있다.
돛의 방향을 바람의 방향에 맞추게 되면 우리가 탄 배는 순항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다"
지금 제자들에게 일어난 문제보다 하나님을 향한 제자들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
마태 14:22-33을 찾아서 읽자.
제자들이 고난을 당했다. 이때 길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찾아오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다.
왜 이들이 길이신 예수님을 외면했는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바람에만 집중했기에 고난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다.
그렇다.
문제에 집중하면 그 문제에 빠진다. 그 문제에 빠졌다는 말은 그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외모에 집중하면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아르바이트해서 보톡스 맞고 쌍꺼풀 수술하려고 또 알바를 구하고
월급으로 코 높이고, 이렇게 성형 중독에 빠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미 벌어진 문제는 우리 손을 떠났다.
그때부터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이 당장 지출해야만 하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없는 나 자신이나 가난한 부모님을 원망하자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반응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에게 적당한 직업을 주시든지 아니면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십시오"
이미 일어난 사건, 이미 잃어버린 돈, 이미 떠나간 사람, 이미 벌어진 실수를 깨끗이 잊어버려라.
이 모든 것을 우리가 통제할수 없다.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돛을 주셨다.
우리는 돛을 조정할수 있다.
하나님이 돛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바람에 순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 인생에 바람이 세차게 불때가 있다. 근심하기 시작한다. 미래가 불안하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수를 믿는 나에게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가?"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나?"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도 계속 예수를 믿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심의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매달려야 한다. 예수님이 길이시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가도 되고, 기차를 타고 가도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도 되고, 아니면 좀 돌아서 멀리 서해 바다를 통해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다양한 길이 존재하는 셈이죠.
그러나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 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처를 믿던지, 알라를 믿던지, 여호와를 믿던지 다 똑같다. 어느 신을 믿던지 결국에는 다 천국에 간다.”는 것이 이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이시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종교나 철학사상, 선행, 봉사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없이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진리가 많다고 말합니다. “네가 믿는 것도 진리고, 내가 믿는 것도 진리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의 가치와 사상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지내자”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와 공존을 논하는 그럴듯한 주장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가 오직 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부처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알라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길 되시며, 진리 되시며,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만이 참된 구원자 되십니다. 이 세상에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시다.
그렇다면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더 이상 다른 길을 찾지마라.
성도는 길을 찾는 사람이 아니다. 구도자가 아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은 사람이다.
성도는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길 외에는 그 어디에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길을 걷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찾은 그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다.
길을 잃었는가? 그렇다면 길을 찾지 마라.
제자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길을 찾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길을 잃을때마다 자꾸 길을 찾는다. 새 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뒷산에서 길을 잃다/ 곽효환"
우습지 않는가? 뒷산에서 길을 잃다니
한 달에 몇 번씩 오르는 뒷산에서 물통을 두고 온 약수터를 찾지 못해 두 시간씩 오르내리는 꼴이라니
그냥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더라구"
근심을 만났을 때에도 우리는 그냥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우리가 가는 그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시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그 길을 찾았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성도는 길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라. 그분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걸으라.
그 길을 걷다 보면 그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도달하게 된다.
다른 길은 다 가짜요 우리가 망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