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실크로드기행 (22)
비잔틴제국의 몰락과
오스만터키의 등장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www.haedongacademy.org)
지중해와 흑해사이에 있는 이스탄불 항구에서 필자 이치란 박사
몽골제국의 압박에 밀려와 중동 세계의 지배자 된 튀르크 족
실크로드 역사에서 동로마였던 비잔틴 제국의 위상과 영광은 너무나 큰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 무대가 바로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가는 말하길,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 화려했던 동로마제국으로서,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비잔틴제국은 동쪽에서 온 또 다른 실크로드의 주역의 하나인 튀르크 족에게 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산하와 바다를 내 주지 않으면 안 될 역사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유럽인들이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면서, 기독교 성지를 점령한 예루살렘에 있던 무슬림정권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주축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비잔틴제국의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를 약탈하고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였다. 50년 후에, 다시 비잔틴제국을 회복했지만, 라틴제국은 너무나 많은 것을 쓸어 가버렸고, 피폐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은 200년을 더 지속했지만, 좀처럼 옛 영광을 되돌리기에는 힘이 너무 빠져있었다. 이런 틈을 노린 적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유목을 하던 튀르크 족이었다. 튀르크 족이 여기 까지 밀려오는 데는 몽골제국의 압박이 있었다.
몽골초원에서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를 압박했다. 몽골제국이 일어나기 전 튀르크 족들은 카자흐스탄 지역에 왕국을 세웠다. 튀르크 제족은 본래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던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다. 인종상으로는 황인종 백인종이 섞인 튀르크 족이다. 튀르크 족은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을 건설했으며 수 없이 많은 문화와 유산을 남겼다. 그들의 활동 영역은 중국과 유럽,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에 분포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서진하여 11세기 무렵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중동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현재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분절되었지만 모두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며, 튀르크계 제 민족이라고도 부른다. 최근 학계에서는 배씨 성과 관련, 한반도 철기 문화의 유래와 투르크족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가설이 대두되고 있다. 역대 튀르크 족에 관한 기록들은 수도 없이 많은 데, 기록들은 발트 해에서 오호츠크 해에 이르는 수많은 나라들의 문헌 속에 존재한다.
튀르크 관련 사료는 《논어》, 《한비자》, 《삼국지》, 《자치통감》, 이븐 알 아시르의 《완전한 역사》,알 다하비의 《이슬람의 완전한 세계사》, 예언자 무함마드의 《하디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유럽 기사도 문학인 《니벨룽겐의 노래》, 토마스아퀴나스의 《교회사》, 프리스쿠스의 《비잔틴사》, 현장법사의 《서천취경》 등에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최근엔 중국에서 이른바 <돌궐> 연구에 대한 많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터키 이야기로 진입해 보자.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1세(1258∼1324)에 의해서 1299년에 아나톨리아인 지금의 터키의 북서부에서 건국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362년에서 1389년 사이에 무라트 1세(1326∼1389)가 발칸반도를 정복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유럽대륙을 횡단해서 영역을 넓혔다.
오스만 제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1453년 메흐메트 2세(1432∼1481)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처음으로 카이사르와 칼리프의 칭호를 쓴 군주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한 후,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한 인물로서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 넓혀 ‘정복자’란 별명을 얻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유럽사회에 충격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한갓 유목 출신의 오스만 제국은 천년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지중해와 발칸반도로의 진출과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비잔틴제국이 몰락하자, 그리스 고전학 연구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였는데, 사실상 이들에 의해서 서유럽에서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스탄불에 가면,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제국의 안전을 기한 다음, 제10대 술탄인 술레이만 1세(1494∼1566, 재위:1520∼1566)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군사전략가로서도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서구에서는 그를 ‘장려한 쉴레이만(the Magnificent)’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의 이름 쉴레이만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터키어식 발음이기도 하다. 그만큼 위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터키에서는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높이 사 ‘입법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유목민족이었던 튀르크 족은 페르시아를 거치면서 아랍의 종교와 페르시아의 문화에 젖었고, 튀르크 고유의 공격성까지 가미된 복합성을 띤 오스만 튀르크로 그리스-로마지역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이처럼 오스만 터키가 부상하는 데는 페르시아와 아랍을 경과할 수가 없다. 이미 아랍에 정복된 페르시아에서 튀르크는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이 되었고, 문화적으로 페르시아인 되어 있었다. 게다가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몽골제국에 밀려서 아나톨리아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본래 페르시아의 종교는 예언자요 철학자였던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의 경전은 젠다베스타란 신비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고, 몇 개의 종파로 갈라져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마호메트는 페르시아인, 로마인, 기타 유럽의 바바리안들이 가장 타락하여 무질서한 시대에 태어나서, 종교사상 가장 극적인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아랍 왕조의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586~644,재위:634~644)는 제1대 칼리프의 정복 사업을 계승,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를 빼앗았으며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를 합쳐 이슬람 제국의 바탕을 이룩했다. 당시 수도는 다마스커스였다. 그는 《꾸란》을 처음으로 편집하였으며, 622년 헤지라의 해를 이슬람 기원 원년으로 정하였다.
우마르가 다스리던 10년 동안에 사라센(이슬람)은 3만 6천개의 도시와 성채를 정복했고, 4천개의 非 무슬림교회와 신전을 파괴했으며, 마호메트의 종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1400개의 모스크를 건립했다. 7세기 중반의 일로서, 예언자가 메카에서 도피한지 100년 만에 그의 후계자들의 군대와 통치는 인도에서 대서양까지 뻗어갔다. 하지만 역사란 돌고 도는 물레방아처럼 역사의 무대는 또 다른 주역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셀주크 왕조의 튀르크가 떠오르고 있었다. 북방 유목민들인 튀르크는 페르시아를 휩쓸고, 사마르칸트에서 그리스와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드디어 오스만 튀르크는 소아시아(터키)에서 패권을 잡았고, 마침내 승리의 초승달 깃발을 성 소피아 대성당의 돔에 걸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도 사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튀르크 족 무슬림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
셀주크 제국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성지 예루살렘의 정복 때문이었다. 십자군(十字軍, croisade)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의미하지만,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이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1187년 및 1229년~1244년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데, 오늘날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십자군 전쟁 이야기까지 다루려면 또 다른 챕터가 필요하고 지면도 한 두 페이지로 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십자군 전쟁이 단순히 성지 탈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세시대 중동과 유럽의 역사로서 엄청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의 중동문제에까지 연결되는 직접적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봐야하고, 또 중심에는 아랍보다도 튀르크 족이 포함된 사라센(이슬람)이 개입되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가운데 가장 큰 실수는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교황은 교황권 강화를, 영주들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향이 반영된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제4차 전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것이 큰 패착이었다는 역사적 평가이다.
다시 이야기를 오스만 터키로 돌아가 보자. 비잔틴제국을 몰락시키고 승승장구했던 오스만 제국도 18세기에 이르면 힘이 약해지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오스만 터키에 빼앗겼던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고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수백 년 지배받으면서 유럽 국가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에서 왕국으로 독립하고, 오스만 터키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개혁과 전쟁을 치루면서 재정이 피폐해지고, 힘이 빠지자 서구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이 필요했고, 제국은 점점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유럽 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말았다.
이 무렵 유럽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두고 부를 축적하고 부강한 나라들이 되어 가고 있는 반면, 오스만 제국은 내륙에 갇혀 있는 빈사상태나 다름없는 환자제국이 되고 있었다.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패, 정치적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때, 재정 파산 이후 제국 경제를 장악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의한 자본 투하가 진행되어, 유럽의 문화가 빠르게 침투해갔다.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 당에 의해 황제가 폐위되고, 메흐메트 5세가 황제로 옹립되고, 헌법을 부활하고 개정하였으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터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전하였으나,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이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가 등장했다. 그는 터키의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이며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를 뜻한다. 이로써 터키의 역사는 새로 쓰여 지게 되었다.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