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중심, 덕수궁(德壽宮)을 느끼다
20131689 역사학과 이다현
덕수궁 답사리포트.hwp
이번 역사학과 춘계 정기답사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개인적으로 덕수궁(德壽宮)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 장소로 덕수궁을 선택한 이유는 덕수궁이 서울에 위치하고 있기도 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을 자주 답사한 것에 비해 덕수궁은 제대로 다녀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이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도로서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며 이번 리포트를 기회로 덕수궁을 느껴보고자 하였다. 답사 이전에 덕수궁을 떠올리면 사실상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맞이한 공간으로서 이유모를 엄숙함과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방문한 덕수궁은 날씨가 맑아서 그런지 봄을 맞아 화사해진 모습으로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을 들게 했다.
참고삼아 언급하자면, 문화재청에서는 덕수궁을 크게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대한제국역사관, 중명전(重名殿), 숭례문(崇禮門) 네 곳으로 분류하여 별도로 관람 기준을 정하고 있었다. 특히 유의해야 할 곳은 덕수궁 석조전이었는데, 석조전의 대한제국 역사관은 지층 전시실만 오후 6시까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고 1,2층 전시실은 사전 예약을 통해 해설사의 인솔 하에 정해진 시각에만 관람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미리 시간대를 확인하고 예약을 해야 했다. 그리고 중명전은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만 관람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번 개인답사는 주말 짧은 틈을 이용해 다녀오게 되어 석조전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덕수궁 전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다음 방문을 기약하게 하였다.
우선적으로 덕수궁의 역사를 살펴보면,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궁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와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고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삼아 거처했던 것으로부터 덕수궁의 궁궐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조 이후 즉위한 광해군(光海君)이 현재 즉조당(卽胙堂)으로 추정되는 정릉동 행궁의 서청에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광해군은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대신 정릉동 행궁은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덕수궁(당시에는 경운궁)은 인목대비 유폐 이후 ‘서궁(西宮)’이라는 이름으로 낮추어졌고, 인조(仁祖)가 즉위한 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궁궐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흐르게 되었다. 그리고 1897년 2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은 고종(高宗)이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면서 덕수궁은 다시 궁궐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함으로써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1907년에는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게 되면서 덕수궁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고 이 때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출구로 나와 조금 걷자 서울 시청을 바라보는 대한문(大漢門)을 볼 수 있었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으로 나 있는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대한제국기에 새로운 도심을 바라보는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고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요일인 답사 당일,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덕수궁을 방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중문화축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대한문 앞 작은 광장에서 가야금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외국인 관람객들이 우리나라의 궁궐과 전통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궁중문화축전(4.28~5.6)행사 - 가야금 연주
대한문으로 들어와 조금 걷자 오른편에 덕수궁의 정전이며 오늘날 보물 제819호인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中和殿)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화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해 확실히 작은 규모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주변 행각과 전각들이 헐렸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지금과 같이 정원 한가운데 중화전이 위치하게 되면서 규모가 주는 웅장함이 덜해졌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단부 계단의 답도에 용을 새기고 창호를 황색으로 칠한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중화전도 다른 궁궐과 같이 지어질 때는 중층의 정전이었지만 1904년 대화재를 겪고 1906년에 다시 지어질 때 단층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복원하는 2년의 시간동안 국가가 얼마나 쇠약해지고 황권이 약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중화전 뒤편의 즉조당이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공간이며 대한제국 초기에 정전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작은 공간이기 때문에 고종은 정전으로 사용할 중화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그 이후 즉조당은 편전으로 활용되었다. 즉조당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석어당(昔御堂) 또한 선조가 머무를 때부터 있었던 전각이다. 그리고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에 있는 유일한 중층 목조 전각이며 단청을 하지 않은 전각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아비와 자식을 잃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인목대비가 떠올랐고, 한(限)이 머무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즉조당의 왼편은 준명당(浚明堂)이다. 고종이 신하나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었으며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고종은 1916년에 이곳을 덕혜옹주만을 위한 유치원으로 만들었다. 당시 고종이 머물렀던 함녕전과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매우 가까운 곳이다. 지척에서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고종의 부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뒤에 보이는 전각이 중화전이다.
석어당 쪽에 있는 문을 통해 나오면 동북쪽에 덕홍전(德弘殿)과 함녕전(咸寧殿)이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볼 점은 고종이 주로 생활했던 내전(內殿)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황후가 머무르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고종은 명성왕후 사후 다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에 경효전(景孝殿)에 명성왕후의 신주를 모셨다. 그러나 대화재로 소실되고 덕홍전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덕홍전은 정면은 3칸인데 측면이 4칸으로 다소 특이한 형태의 전각이다. 그리고 외국 사신의 졉견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외부는 전통 한옥 방식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이 녹아있어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옆 함녕전은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그리고 1904년 대화재가 이곳의 온돌공사에서 시작되었다. 궁궐의 대화재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내전의 많은 전각들이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일제에 의해 빠르게 철거되어 산책로와 연못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소 텅 비어버린 공간이 너무나 허전하고 먹먹하게 느껴졌다.
덕수궁에서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덕수궁 석조전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완벽한 서양식 건축물로써 웅장한 규모와 분수가 놓여진 정원은 대한제국과 덕수궁을 대표하는 공간이라 여겨질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조선의 궁궐이라고 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이국적인 석조전은 덕수궁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기에 더욱 가치 있게 여겨졌다. 고종은 이곳에서 고관대신이나 외국 사절들을 만났다. 그래서 석조전에는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과 접견실 등 공적인 공간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래 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많이 파괴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기도 하였고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어 본연의 모습을 오랫동안 되찾지 못하였다. 그러다 2009년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고,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전 예약이 없으면 지상층은 방문하지 못해 너무나 아쉬웠다. 빠른 시일 내 다시 한 번 이곳을 반드시 방문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전체를 관람하지 못해 아쉬웠던 석조전
고즈넉한 중명전 전경
맨 마지막으로 본 곳이 중명전(重明殿)이다.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어 덕수궁을 나와 5분정도 걸었다. 정동극장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작은 골목 안쪽으로 위치해 있었다. 중명전 또한 석조전처럼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바로 이 곳이 국권피탈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곳이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가니 바로 오른쪽 방에 을사늑약 체결 당시를 재현하고 있었다. 실제 인물들까지 구현하여 영상과 함께 그 모습을 보니 당시의 참담한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더 안쪽에는 헤이그특사 세 분과 그들을 통해 보내고자 했던 고종의 친서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했던 처절한 노력이 저절로 느껴져 숙연해지면서 슬퍼지기까지 하였다.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한 중명전이 더욱더 쓸쓸하게 여겨졌다.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서양과 우리나라의 모습이 공존하는 덕수궁의 모습은 낯설지만 놀라움을 자아내었다. 서양의 문물이 궁궐에까지 침투한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를 이기지 못해 일제에 무너져버린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렇기에 좀 더 진지하고 엄숙하게 임하고자 했던 답사였다. 앞에서는 1897년 이후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혼란했던 대한제국 시기에 궁궐로서 중심을 잡았던 곳이 덕수궁이었다. 그 탓에 덕수궁은 일제로부터 많은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덕수궁을 답사하는 동안 쇠약해져가는 대한제국을, 끊임없는 혼란의 시대를 피부로 느끼는 것만 같았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라는 혼란기에 궁궐로서 묵묵히 역할을 다했다. 다른 궁궐들이 안정적인 조선의 시간을 이야기한다면 덕수궁은 비극의 역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오늘날, 덕수궁은 힘들었던 그 때를 잊지 않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필 답사를 다녀온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윤봉길의사는 25살이라는 나와 같은 나이에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고 결국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덕수궁 답사는 윤봉길 의사와 같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신 많은 조상들을 생각하게 하였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