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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림의 귀족 (상편)
군색하고 초라하기 짝 없는 조선청년 곤이, 그의 젊고 뜨거운 가슴 한 자락에 남모르는 풍운을 품고 동해를 건너고 있을 비슷한 시각,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북만 대밀림의 어느 한편.
만물이 정폐(停廢)된 침묵의 세계!
두어 시간 전만 하여도 이 만년수림(萬年樹林)에 고요와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데 위세가 맹렬하고 강풍까지 동반한 무서운 폭설이 마치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돌연 휘몰아친다. 예측불허로 급변하는 기상변화는 큰 숲에서 살아가는 숫한 사람들에게 난데없는 재난을 안기기 허다하다.
운명적으로 조선청년 곤과 조우하게 될 백계러시아인 율리비치!
커다란 숲을 자신의 정원쯤으로 여기는 사냥꾼인데 숲에 사는 사람들은 밀림의 패왕이라 경원(敬遠)하며 모두 두려워한다.
나무꾼이라면 또 모를까 숲을 기고 험한 골을 뛰어다니는 사냥꾼이라기엔 어딘지 어울리지 않게 큰 체구를 가진 이 남자는, 외부에서 고립된 곳에 요새처럼 견고한 자신만의 산막을 지어놓고 혼자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오래전부터 작고 외로워 보이는 한 돌무덤 근처를 오래토록 서성이며, 사냥총을 힘없이 어깨에 걸치고 깊은 상념에 눈언저리마저 젖어 뭐라 탄식한다.
“오! 꿈결에도 잊지 못할 보고픈 내 딸 아리샤야! 애비가 부덕하여 이 쓸쓸한 곳에 홀로 잠들게 하였구나. 야속한 녀석... 허망하게 가버리고 말다니...” 한참 후 발길을 돌리지만 애통함이 컸던지 내딛는 걸음을 비틀거린다.
외로움이 컸던 탓인지 자신의 산막으로 돌아와서도 통나무의자에 기대앉아 내내 침울해하며 독한 보드카를 물마시듯 들이켰다.
타다만 장작 같은 그을린 몸뚱이는 흡사 구설로만 전해오는 설인을 연상할 정도로 야성적이다. 하지만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맑게 깜박이는 눈동자는 분명 거한이 지성을 갖춘 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내력을 지녔기에 이 깊은 밀림에 혼자 살면서 초독(楚毒)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것일까?
외로운 눈빛이 마른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처럼 이따금 공허하게 흩어진다.
거한의 가슴에는 숨 다할 때까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고통의 상흔이 있는 것이다.
사내를 가두고 있는 어두운 회상의 늪은 스스로 그 자신을 학대하는 고뇌의 창살이기도하다.
산막 밖으로 밤의 정적이 괴괴히 흐른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맹수의 울부짖음이 밤을 가르는 것만 빼고는.
야성의 신성함이 살아 꿈틀거리는 암흑천지의 밀림!
듣는 이로 하여금 피를 말라붙게 하는 야수들의 울부짖음이나 숲을 스치는 스산한 바람소리 따위는 우울한 이 사냥꾼에겐 한갓 밀림의 숨소리로만 여겨질 뿐이다.
주인의 고독을 아는지 모르는지 털빛 시커먼 야견 한 마리도 언제부터인가 사나이의 발밑에서 배를 깔고 졸고 있다.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밀림! 여기에도 따르고 지켜야할 규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밀림의 묵약(黙約)을 철저히 실천하고 반드시 법도대로 응징하는 해결사가 여기 이 숲의 패왕 율리비치다.
밀림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종족들과 달리, 근래 갑작스레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대다수 사람들에겐 저마다 감춰 들고 온 곡절이 숨겨있었다.
러시아왕립사관학교 출신이자 기병장교였던 거한의 엽사에게도 나름대로의 뼈아픈 사연이 역시 감춰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숲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정도로 이제 밀림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도시에 살던 습관과 방식들은 삭아진 상처처럼 희미하게 잊혀졌다.
외로운 숲 생활이지만 딸아이 아리샤가 한때나마 곁에 있었기에 행복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떠나보냈지만 오로라처럼 신비로운 미소를 지닌 딸아이 아리샤를 지금도 가슴에 고이 묻어두고 있는 율리비치다.
“...”
마음을 붙들고 싶은지 술잔을 내려놓고 곁에 놓아둔 사냥총을 툭툭 건드려본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밀림에서 살아가려면 가장 가까이 두어야 할 소중한 물건이다.
율리비치는 자신의 사냥총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며 맹신하였다. 탄속도 다른 총기는 추종을 불허했고 방아쇠만 당기면 신들린 것처럼 목표물에 정확히 날아가 박혔다.
숲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 장총은 미국유명사에서 특별히 제조한 육발연사식 실탄총으로 멋진 개머리는 수제 프랑스명품이다.
러시아기병지휘관이었던 율리비치의 부친이 어느 영국귀족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받았다한다.
율리비치가 의지하여 살아가야할 생존수단이자 삶을 지탱시켜주는 수족의 일부로, 러시아적화당시 비운의 명을 다한 선친을 대하듯 항시 소홀함이 없이 다루어 지녀온 귀품이다.
율리비치에게 없어서 아니 될 것 한 가지만 더 꼽으라면, 말만 못한다 뿐이지 독일무이(獨一無二)한 벗이요 가족과 다름없는 야견 코삭크다.
늑대개라 불리는 이 맹견은 오래 전부터 수렵(狩獵)을 삶의 수단으로 살아온 종족들이 비밀스레 사육하던 개로 알려져 있다.
대략 삼 년 전 어느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첫눈이 내리자 적설량을 살펴본 율리비치는 홀로 큰 줄범을 추적하여 자신의 사냥집에서 꽤 멀리까지 출렵에 나선 적이 있었다.
추적 중에 알았지만 숫대호(大虎)는 한 마리 암컷도 거느리고 다니는 숲 최상의 포식자였다.
우수리강 상류 쪽의 울창한 침엽수지대였을 것이다.
낌새를 알아차린 신출귀몰한 두 범들은 율리비치를 놀리기라도 하듯 교활하게 거리를 좁혀주지 않는다. 놈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신들 눈에 익은 숲을 돌아다니며 영악하게 사정거리 안에서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이놈들, 사람 놀리며 가지고 노는구나.”
갑자기 사라진 수컷의 자취를 살피던 율리비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까다로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놈들은 말 그대로 호시탐탐 율리비치를 덮칠 기회를 노리는데 형세가 뒤바뀌어 무섭고 날렵한 협살(挾殺)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위기의 일전에 처했다.
“이런 젠장, 일이 고약하게 꼬이는데.”
투덜거리며 율리비치는 두 범들과 목숨을 빼앗는 일전을 벌여 덮쳐온 암범의 공격에 왼쪽 어깨를 상했고 율리비치의 발포로 수컷도 실탄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한 차례 공격 후 행적을 숨겼지만 이제 피냄새까지 맡은 데다 총상으로 증오와 복수심으로 펄펄 날뛸 것은 당연하다.
“밤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는 놈들인데 인간의 약점까지 알고 있으니 결판내자면 내가 목숨을 부지할 확률이 희박하겠구나...”
극심한 어깨통증을 느끼며 두 마리 범과 결전을 기다리고 있을 때다.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위기의 순간 어디선가 훌쩍 나타나 율리비치를 구해준 숲의 사내가 한 명 있었는데, 율리비치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조선청년 곤과도 운명처럼 조우하게 될 고리드족사냥꾼 차오다.
“제가 그쪽으로 갈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 계십시오. 놈들이 지척에서 노려보고 있습니다.”
율리비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소문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조력해주시겠다니 고맙소이다. 오인하는 사격은 결코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율리비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쪽 풀숲이 조금 일렁거린다.
곧 한 사내가 흔들리는 수풀사이로 불쑥 모습을 나타내는데 율리비치는 이때 사내의 놀랍도록 신속한 몸놀림을 보고 대단히 감탄하였다.
바위틈에 끼어 앉아 피를 흘리고 있는 율리비치를 보고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우선 상처부터 좀 살펴보겠습니다.”
사내는 등에 걸치고 있던 엽낭을 벗어 무엇인가 꺼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율리비치의 상처를 지혈하며 전문가 못지않은 응급조치를 취한다.
“감사하오.”
“곧 어두워질 것입니다. 뒤를 맡을 것이니 저를 믿으시고 앞쪽으로 천천히 나아가십시오.”
율리비치는 총을 덥석 쥐고 천천히 일어서며,
“놈들이 공격한다면 뒤쪽이 훨씬 위태로운데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니 오늘의 신세는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범은 한 쌍인데 단발뿐이어서 심상치 않게 여겼지요. 그런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설마한들 율리비치님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를 알고계시군요. 참으로 부끄럽소이다.”
율리비치는 작은 사내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고 자신의 경망함을 질책했다.
“대단하십니다. 혼자서 두 마리 범을 상대하여 추적하시다니요. 아마도 이 숲에서 율리비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흉내나마 내려하겠습니까. 이런 무모한 사냥에 나설 사람은 두 눈 씻고 찾아봐도 다시없을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오히려 감싸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참으로 고맙소이다. 놈들의 공격이 있기 전에 당신을 먼저 만난 것이 행운입니다.”
율리비치는 자신의 가슴팍에 겨우 미치는 사내에게 굵은 허리를 굽혀 절하며 큰 입 잔뜩 벌려 웃었다.
“아하하핫! 풀잎의 움직임에서 나는 설마 당신이 사람일 줄이라곤 처음엔 전혀 생각지 못했소이다.”
작은 사내도 씨익 웃으며,
“숲에서는 몸이 작은 편이 때로는 도움이 될 때도 있답니다. 저는 차오라고합니다.”
율리비치는 즉시 사과하였다.
“본의가 아니었으니 용서해주시구려.”
“개의치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저를 땅두더지라고도 놀려 부른답니다.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어서 앞을 서시지요.”
율리비치는 사내의 말과 행동에서 강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대면하였던 적이 있었던가요?”
“하핫! 이 숲에 살면서 율리비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씀입니까. 일대 밀림을 다 뒤져도 율리비치님만한 덩치의 사냥꾼은 영원히 못 찾을 것입니다.”
노리고 있는 두 마리 성난 범의 위협은 아랑곳 않고 두 사람 산책길을 나다니는 것처럼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다.
일단 위기를 벗어난 율리비치였지만 범의 발톱에 할퀸 상처로 인한 세균감염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오라는 작은 사내는 용모에 비해 대단히 용의주도했다.
율리비치를 자기가 알고 있는 가까운 움막으로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상처부위를 다시 소독하며 찢겨진 피부를 세심히 꿰맸다.
그리고 그만이 알고 있는 약초를 구해와 고약을 만들어 정성들여 치료해주어 수일이 지나 깊은 부상에서 회복하여 전처럼 몸을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가공할 범의 앞발 공격이었지만 무쇠처럼 강한 뼈를 가진 율리비치인지라 근육과 피부 외는 손상은 입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율리비치는 작은 사내를 형제로 여기며 마음에 넣었다.
그리고 숲길을 가다 차오와 친분이 두터운 어느 고리드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게 되었는데, 뛰쳐나온 집주인은 두 사람을 보자 기절초풍하며 반겼다.
“이게 누구신가! 오호! 나의 친우여 어서 오시게나. 고맙게도 숲에서 가장 귀한 분을 모시고 이 누추한 곳에 발을 들이다니. 이는 벗이 평소 나를 가슴에 두고 있었음이 아니겠는가! 외로운 나의 영혼이 출렁이며 감동이 불같이 일어선다네.”
차오도 답례의 인사를 한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불쑥 찾아온 나를 핏줄처럼 반갑게 맞아주니 참으로 고마우이. 언제나 다정한 나의 형제여!”
그런데 고리드인 집주인이 처음 보는 율리비치를 친우보다도 더 극진히 대하는데 첫 인사말이 매우 의미롭다.
“오오! 은인이신 율리비치님! 어서 오십시오. 숲의 제왕께서 보잘 것 없는 저의 집을 찾아주신 감동에 가슴이 물결칩니다. 노비는 산 신명님을 영접합니다.”
율리비치가 아무래도 의아하여,
“나를 보고 은인이라니 도대체 그 무슨 말씀이시오?”
차오도 친우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찌 잊어버리겠습니까. 저와 제 가족을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주신 분을.”
율리비치가 가만히 찰시(察視)하니 과연 예전 자신이 한번 도와주었던 그 고리드인이다.
그러니까 몇 해 전, 그해 여름이 다 지나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한 산간마을주막에 율리비치가 잠시 발길을 내들린 적 있었다.
술집 한편에 도박판이 버젓이 벌어지고 밀실을 두어 아편쟁이들까지 들락거리는 그런 곳이다.
평소 버릇대로 탁자에 발을 걸치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술잔을 연거푸 비우는데 눈물범벅의 사내아이 두 녀석이 난데없이 품으로 뛰어들었다.
“헛, 요 녀석들 좀 보게!”
두 사내 아이 모두 목메어 애걸복걸 펑펑 울며 다짜고짜,
“아저씨, 우리 엄마아빠 좀 살려주세요.”
“아니, 녀석들아 대체 무슨 말이냐?”
그때 밀실 어디선가 찢어지는 아낙네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악! 제발 우리를 놓아주어요.”
“엄마 목소리다. 으아앙, 엄마!”
아이들이 외마디소리에 또다시 울고불고 눈물바다를 이룬다.
율리비치는 이들 가족에게 필시 무슨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밀실 안으로 당장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장막을 치고 둘러서서 한 사내를 죄인처럼 윽박질러대고 있었고, 옆에는 사내의 처가 분명한 자그마한 여자가 사태를 감당치 못해 벌벌 떨고 있다.
사내는 한계에 부딪쳤는지 저항을 포기한 채 손찌검과 매질을 온몸에 받아내고 있었고 막 인간매매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이다.
고리드인이라면 숲에 사는 것이 마땅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저 지경에 처하였는지 율리비치는 궁금키도 하였다.
내막인즉, 생필품을 구입하고자 고리드인이 모처럼 가족 모두를 동반하고 마을에 들렀던 모양이다.
말썽의 발단은, 근처 풀숲에 모인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애견의 우열을 가린답시고 개싸움을 벌인 것이다.
고리드인의 개가 다른 사람의 개 두 마리를 물어 죽였는데, 상대견들은 영국에서 투견전문용으로 개량된 체격이 큰 고급견종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나타난 만주인견주는 억지를 부렸고, 고리드인은 당장 개값을 지불치 못하면 그와 처자들 모두 만주인의 집에 노비로 끌려가야할 판이다.
율리비치가 생각건대, 저 고리드족사내가 아무래도 못된 자들의 독수에서 벗어날 것 같은 느낌이 떨쳐지지 않는다.
누군가 나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노비로 전락하여 평생을 만주인의 울타리 안에 갇혀 바깥세상과 담 쌓은 채 비참한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이다.
딱함을 알고 의분을 느낀 율리비치가 커다란 몸집을 흔들며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당장 멈추시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사람을 매질하여서 노비로 팔아 보상을 받겠다니 이 같은 야비한 짓이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이오.”
율리비치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고 우선은 타일러 말했다.
만주인들은 난데없이 끼어드는 율리비치의 체구에 조금은 위압감을 느낀 듯 보인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자들은 아니었고 역시 한 사내가 나서더니,
“어이쿠! 생긴 것은 꼭 불곰같은 녀석이구나. 하지만 덩치만 믿고 우리 일에 함부로 나섰다간 당장 곰우리에 가두어 사람들에게 구경꺼리로 만들어버릴 테다. 그런 꼴 당하기 싫거든 슬며시 뒤로 물러서는 게 신상에 이로운 것이야.”
텃세를 부리는 한 만주인의 기세는 누가 보기에도 제법 풍이 대단하다.
“이런 병신같은 놈 꼴값 떨기는.”
율리비치가 상대하기도 귀찮은 듯 냉소하고 당장 고리드족사내를 일으켜 세운다.
“걱정 말고 어서 일어나시오.”
이는 패왕의 출현이다.
희망이라곤 전혀 없든 고리드족사내와 그 처자들에게 서광이 비친 것이다.
“아흐! 이럴 수가...!”
고리드족사내는 감격하였다.
홀연히 나타나 만주인들의 횡포를 막아주는 이 구원자가 바로 자신들이 오래토록 살아왔던 숲의 지존 그 패왕이 아닌가!
고리드족사내와 그의 아내는 마치 지옥에서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바닥에 엎드려 크게 통곡하며 매달렸다.
“으흐흑! 패왕님! 이놈은 당장 죽어도 좋으니 제 가족만이라도 이자들 마수에서 구해주십시오.”
“숲에 사는 당신네가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하여튼 이제 아무 걱정 말고 내 뒤에나 꼭 붙어계시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리드인부부는 율리비치의 발밑에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이것을 본 그 고약하게 생긴 만주인이 다시 나서며,
“도대체 네놈은 누구이기에 감히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느냐. 몰골로 보아 사냥꾼 같은데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구나. 두 발로 걸어 나가고 싶다면 썩 비켜나 꺼져라. 다시 성질 돋우면 지금껏 겪지 못한 세상의 가장 혹독한 맛을 알게 해줄 테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 자가 둘러 선 패거리를 믿고 율리비치에게 텃세를 부린다.
율리비치가 좀 성가신 표정으로 그자를 노려보며,
“내 앞을 막아서면 당장 네놈부터 가죽을 훌쩍 벗겨 여기 주점입구에 내걸고 말 것이다.”
율리비치가 둘러서는 만주인들을 멸시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는데 만주인은 아직도 율리비치의 성깔을 퍼뜩 깨치지 못하고,
“이자가 사람 말을 도통 못 알아듣는 것을 보니 미련한 짐승이 분명하군.”
이때 서너 명이 율리비치를 에워싸고 고리드인을 낚아채려하자, 율리비치가 전봇대같은 육중한 발로 그중 한 놈을 걷어차니 짚단처럼 나떨어져 버린다.
“비열한 놈들! 또 다시 이 부부에게 체벌을 가한다면 맹세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즉 막아서면 곧 죽음을 자초하는 것인 줄 알아라.”
“푸하핫! 갈수록 간덩이가 부어터지는 놈이구나. 네놈이 그러고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줄 안다면 큰 오산을 한 것이다. 스스로 죽여 달라고 자초한 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후해해도 소용없다.”
이 말에 성미 급한 율리비치가 그 만주인의 목털미를 솥뚜껑만한 손으로 닭 모가지 거머쥐듯 덥석 움켜잡는다.
“네놈들 패거리가 얼마나 몰려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여기 기다리고 섰다가 나타나는 족족 네놈처럼 모조리 모가지를 비틀어 절단내고 말리라. 우선 네놈부터 본보기로 갈기갈기 찢어 여기 걸어놓고 말테다.”
목줄을 붙잡혀 공중에 매달린 만주인은 그때서야 헛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삶에 미련을 가진 두려운 눈을 껌벅이며 살려줄 것을 애원한다.
“잘 못했습니다. 제가 우둔하여 미처 사람을 판단치 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개값만 되돌려준다면 더 이상 저 고리드인을 속박하지 않겠습니다.”
율리비치는 만주인을 노려보며,
“이놈, 잔말 없겠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거짓말로 무슨 이득을 얻겠습니까.”
율리비치는 그자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둘러선 다른 자들에게로 성큼 다가가 그중 한 놈을 쏘아본다.
놈은 사태파악을 빨리하였다.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일에 상관없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바닥에 털썩 꿇어 앉아 조금 전의 무례를 빌었다.
이렇게 되어 만주인들은 받아야할 정당한 돈만 받아 물러섰고 고리드인가족은 소중한 자유를 되찾게 된 것이다.
친구로부터 대략의 사정을 듣고 내막을 알게 된 차오는 몹시 놀라워하며,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었군요.”
고리드인은 율리비치와 차오를 칙사 모시듯 청하여 안으로 맞아 들였다.
“주인장께서 옛일을 기억하여 이처럼 환대로 반겨주시니 나야말로 감사하오이다.”
“오늘 비로소 만분의 일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케 되었으니 분명 하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고리드인이 가족을 불러 모으자 어른 아이 모두 율리비치에게 극진한 예우로 공경한다.
“이 녀석들 많이 컸구나.”
“패왕님! 절 받으십시오.”
고리드인의 처는 주인을 만난 종처럼 흙바닥에서 절하고 발에 입까지 맞춘다.
“어허 참! 이러시면 내가 무안하질 않소이까.”
차오가 친구에게 짧은 설명을 곁들였다.
“예기치 못한 일로 율리비치님을 만나 자네 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네. 도중에 날이 저물 것 같아 오늘밤을 형제의 집에서 묵어가고자 들렀는데 푸대접받지 않을 것 같으니 마음이 편하다네.”
“나의 다정한 벗이여! 그 무슨 망령스런 말씀인가. 자네나 나나 이 넓은 천지에서 구르는 돌처럼 외로운 사람인데 어찌 친구를 홀대하여 어려움을 모른 척 한단 말인가. 겨우 바람을 막고 사는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모든 정성으로 대할 것이니 편히 쉬어가시게.”
율리비치는 차오와 집주인이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당 한구석에 웅크리고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캐 한 마리를 관심 있게 살피고 있었다.
만주인의 투견을 물어 죽인 그 개가 분명했다.
언뜻 보기엔 잡견 같지만 사람 무시하듯 힐끗 쳐다보는 눈빛에 강한 야성견의 기질이 엿보인다.
고리드인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바삐 들락거리게 하며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꺼내놓았다.
숲에 혼자 사느라 사람의 정리에 결핍된 율리비치다.
우연히 조우하게 된 차오와의 인연도 그렇지만 고리드인의 융숭한 대접으로 오랜만에 사람다운 감정을 흠뻑 느꼈다.
그러나 걱정거리가 남아있다. 부상 입힌 범을 숲에 놓아두고 왔던 것이다.
차오도 그런 율리비치의 심고(審考)를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 차오가 집주인을 따로 불러 무엇인가 주고 받드니 모두의 근심꺼리인 난제를 들추었다.
총상으로 인해 분노하여 날뛸 범의 고통도 덜어주고 자칫 사람에게 미칠 피해를 미연에 방지키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즉시 실행에 나서 마침내 놈을 거두어 후환을 없앴다.
두고두고 율리비치 마음에 가시처럼 남아있을 일을 두 고리드인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한 것이다.
율리비치가 자신의 부주의를 마무리 짓기까지는 물론 차오의 조력도 있었기에 가능하였지만, 집주인이 빌려준 한 마리 야견의 활약으로 수월하게 마무리 지울 수 있었다.
알고 보면 친우의 집을 찾아온 것부터가 모두 차오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때에 율리비치는 그 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야성견의 진가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을 하였고 돌아올 때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왔는데 바로 코삭크다.
대략 이러한 사연으로 율리비치는 흔치않은 늑대개를 소유하게 되었고,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대평원을 그리며 코삭크라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날로부터 세월은 빨리도 흘러 한해가 훌쩍 지났다. 그 짧은 기간에 율리비치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 아리샤를 잃어야 하는 아픔을 감수해야하였다.
홀로 남게 되자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며 나날을 슬픔과 실의에 차 오로지 술로써만 소진하여 지냈다.
산간 마을들을 기웃거리고 다니며 술과 도박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것이 율리비치가 살아가는 방식의 전부였다.
문득 그런 자신을 되돌아보았을 때, 율리비치는 딸아이 아리샤가 접고 간 불운의 삶을 똑같이 답보하고 있음에 망연자실한다.
그토록 잊고 싶어 하던 피로 얼룩진 과거의 상처만 되새겨 줄뿐이다.
곁에 코삭크마저 없었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율리비치라도 결국에는 별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율리비치가 평소와 달리 더욱 쓸쓸해 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딸아이 아리샤가 촛불처럼 외롭게 흔들리다 숨져간 슬픔의 그날이었기에.
적화된 러시아를 떠나 갖은 위험을 뿌리치고 고난 끝에 이 숲에 터전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리샤는 아름다운 강물이 흐르던 고요하고 풍요로운 남부러시아의 풍경을 내내 잊지 못하였다.
어린 마음에 향수병이라는 허상의 덫에 걸려 떠나온 고향의 그리움에 내내 시달리다 갈수록 병이 깊더니 자폐증까지 겹쳐 결국 자신을 가두어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세상천지 의지할 곳 없는 율리비치를 홀 남겨 놓고.
그토록 좋아하던 붉은 장미 한 송이 꺾어 달랠 수 없는 차디찬 겨울밤에....
싸늘하게 식어가던 아리샤의 눈에 고향의 푸른 강이 굽이져 흐르는 것을 보고 세상을 원망하며 절규하였다.
대문만큼 큰 입을 벌려 세상이 떠나가도록 통곡했다.
지금이라도 햇빛처럼 눈부신 미소를 뿌리며 안으로 뛰어들 것만 같은 아리샤의 환영(幻影)이 율리비치를 할퀴고 괴롭힌다.
귀족출신 어머니와 결혼한 율리비치의 부친은, 제정러시아 당시 여러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공을 수없이 세운 걸출한 기병지휘관이었다.
율리비치가 기병장교로 인생의 첫 출발을 시작한 것도 부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율리비치에게 한 가지 크나큰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단란하였던 지난날을 기억하는 즐거움이다.
어느새 또 한 병의 보드카가 해를 가릴 것처럼 커다란 율리비치의 손에 의해 주둥이를 열었다.
들이키는 한 잔의 술만이 세상 유일한 기쁨이자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향수와 같다.
삭연(索然)하다.
간헐적으로 문을 흔드는 바람소리는 고립된 사냥집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바깥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파묻혀 앉은 조그만 통나무집 한 채가 세상에 오직 한 명 인간으로 여겨지는 율리비치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다.
“커어엉!”
멀지 않은 곳에서 승냥이무리의 독특한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밤을 가르며 들려온다.
근처를 배회하는 놈들로써 만주 특산이라 일컫는 매우 흉포(凶暴)한 적색이리다. 초원이리처럼 놈들도 단체행동을 하며 사납고 악독한 점에 있어서도 초원이리를 능가하는 무서운 족속들이다.
코삭크가 귀를 가끔 쫑긋거릴 뿐 율리비치나 코삭크 모두 별다른 경계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숲의 냉기와 정적만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을 뿐.
“탕! 타탕! 탕!”
그때다. 고요한 밤의 숲 어디선가 몇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율리비치가 홀로 즐기는 고요를 방해하는 무슨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적도들 사이의 세력다툼으로 예측되는 총질이 분명하다.
율리비치는 화가 단단히 일어 자신의 신체일부와도 같은 원체스타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또 하나의 팔처럼 언제나 곁에 붙어있는 총이다.
“괘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 내 사냥터에 숨어들어 함부로 소란을 피우다니 날이 새면 양쪽 모두 반드시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말테다...”
중얼거리며 사냥집을 밝히고 있는 등잔을 모두 내리고 어둠을 뚫어보는 단련된 눈으로 동요 없이 밖을 살핀다.
새하얀 눈 위에 달빛이 뿌려지고 있고 이후로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날 밝기 무섭게 율리비치는 간밤 총소리가 들려온 지점을 살피러 나섰다.
위험이 따를 수도 있었지만 숲은 자신의 영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난잡한 총질로 짐승들이 모두 멀리 가버린다면 자신도 빈숲을 지키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코삭크가 냄새를 맡아가며 앞서 나아갔고 율리비치가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한구의 시체가 뒹굴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한구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살펴보니 모두 총상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신들은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 이리에 의해 처리될 주검들이다.
그런데 공교롭다고 할까 총격전을 벌린 것으로 간주되는 한 무리 패거리들과 정면 마주치게 되었다.
저들과 은원관계가 없는지라 율리비치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제법 큰 집단이었는데 휴식을 취하던 몇몇이 율리비치를 발견하고 적대감을 나타낸다.
율리비치는 개의치 않고,
“나는 근처에 사는 사냥꾼으로 율리비치라고 하오. 당신들에게 몇 마디 충고를 던지고자 찾아왔소.”
여기 답하여 누군가가 제법 위엄을 부리며,
“당신 눈에는 우리가 마치 토끼풀이나 뜯으러 나온 동네꼬마들로 보이는 모양이군.”
율리비치가 그자를 힐끗 쳐다보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 조상님말씀처럼 귀담아 들어 두는 것이 조금이라도 오래 허파운동 하는데 도움 될 것이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율리비치의 안하무인격에 그자가 분격하여 총기에 손을 가져간다.
물론 노려보는 율리비치의 총도 안전장치가 풀려 있었고 총구를 겨누면 당장 불을 토하고 말 것이다.
잠시 긴장이 고조되는 그때,
“아하핫! 누구신가 하였더니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셨군. 율리비치씨! 소문난 그 성질부터 좀 죽이시오.”
누군가가 율리비치 앞으로 쓱 나섰다.
“그쪽은 누구슈?”
“나는 해동랑이라 하오.”
“당신이?”
“그렇소이다. 율리비치씨도 나를 모르지는 않는 것 같소이다.”
“아하! 온 숲에 악명 무성한 해동랑이 바로 당신이시다 그런 말씀이오?”
“숲의 귀족께서 별것 아닌 본인의 이름을 다 칭송해 해주시다니 나로선 대단한 영광이오.”
율리비치는 자신을 당당히 내세우는 이 자의 됨됨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오호라! 이 자가 밀림을 떠들썩하게 휘젓고 다니는 바로 그 해동랑이라는 못된 자로구나.’하고 중얼거렸다.
“용건이 있다면 시원하게 말씀해보시오. 숲의 패왕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기꺼이 경청하여 답해 드리겠소이다.”
율리비치는 번쩍거리는 해동랑의 외눈을 마주치며,
“불과 몇 시점 전 정체모를 자들이 한밤중 내 사냥집 근처에서 서로 총질을 하였소. 나는 그 누구든 내 앞마당을 훼손치 말라는 훈계를 하고자는 것이오.”
율리비치가 정체 모호한 무리들에게 계고(戒告)의 차원으로 목에 힘주어 말한다.
해동랑은 율리비치의 언행에 조금도 불쾌한 표정 없이,
“율리비치씨! 당신이 말한 그대로이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전쟁 중에 있소이다. 놈들이 제거되면 고요해질 것이니 그때까지는 모르는 척 본업인 사냥에 열중해주시오.”
듣기에 따라 발칙하기도 하다.
굵직한 목소리에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고 러시아어와 만주어를 섞어가며 율리비치를 설복(說服)시키듯 말한다.
근래 들어 정체 모를 무리들 서로간의 총격전이 일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율리비치도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나 눈앞의 이자는 들리는 소문대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
밀림에 악명 날리는 수많은 적도들 중 눈앞의 해동랑만큼 숲사람들 사이에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자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그 이름 몇 자 만으로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난폭한 적단의 마두였다.
율리비치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해동랑이란 악명은 밀림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히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누구든 해동랑의 구역 안에서 그를 거역하면 그것은 곧 바로 죽음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율리비치가 누구인가!
밀림사람들이 해결사라 받들며 집행자로 숭앙하는 숲의 제왕이 아닌가!
그런데 율리비치는 죽음의 저승사자 해동랑을 평가하는 관점에 있어 나름대로 조금은 다른 각도로 분석하고 있었다.
몇 개월 전 밀림을 피비린내로 뒤덮은 크나큰 적대적(敵對的) 분쟁이 한차례 있었다.
율리비치는 은밀히 조사에 나섰고 그때 해동랑이 제거한 수많은 자들은 하나같이 밀림의 광견(狂犬)과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제거되어야할 인간독버섯이었던 것이다.
그때 해동랑을 평가할 기회가 없었다면 율리비치의 성깔에 여차하면 좋지 않은 분쟁이 당장 일어났을지 모른다.
“좋소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고 해동랑당신의 의사도 알았으니 관여치 않고 이만 돌아가겠소. 하지만 이왕에 만났으니 한 마디는 분명히 해두겠소. 내 고요한 사냥터 근처에서만은 함부로 쏴대는 그 총질 좀 그만 두시오. 나의 충고를 무시한다면 당신네들도 내 총에 죽은 여느 자들과 별 다르지 않을 것이오.”
상대는 폭도무리를 이끄는 수장인 해동랑이다. 홀로 대적하여 경고하니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었다.
하지만 이 적도의 우두머리는 오히려 율리비치의 엄포가 재미나는 듯 씽긋 미소까지 지으며,
“아하핫! 숲의 패왕이신 율리비치씨의 충고를 내 두 귀로 잘 들었소이다. 가능하다면 자제하겠소. 그리고 이차에 나 해동랑의 말도 잘 기억해 두오. 필요하다면 내 언제라도 당신의 사냥집을 빌리러 갈 것이오.”
“아하! 아마 목숨 열 개쯤은 담보해야 가능할 것이오.”
“율리비치씨! 나를 거절하면 당신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하여튼 만나 반가웠소이다. 잘 가시오.”
고집불통 숲의 두 거인은 오늘 이 정도 선에서 헤어진다.
심심풀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풍걸
첫댓글 정의감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인식이 매우 뛰어난
고급스러운 좋은 소설입니다
일송정님께서 언제나 후한 점수를 주시니 그저 고마움으로 고개 수그립니다.
이렇게 긴 글을 쓰시는데 많은 시간을
쓰셨을것을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꾸뻑 ^^
감사합니다^^ 풍걸님
고급소런 소설 잘 읽었습니다
손가락 몸살 나서 당분간 휴양해야겠습니다.
@풍걸 감사합니다^^ ㅎㅎ
수고많으셨습니다
@엔젤라 엔젤라님, 발가락유양소는 있는 줄로 아는데 손가락 유양소는 어디에도..
@풍걸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ㅠ
백조 사냥꾼 다음 편이군요
또 기다립니다. 풍걸님
살아 숨쉬는 세계를 그려 주셨습니다.
대~단~ 합니다
OK일베님이 힘든 애국활동으로 행여나 초조하게 지치실까 만만한 여유를 드리고 싶어 올리는 심심풀이가 조금이라도 피로회복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풍걸
그럼요.
풍걸행님
늘 기다립니다.
풍걸님 작품 잘 읽었습니다.
초돌님, 다음에 올리는 편은 초돌님의 눈물샘을 좀 자극하고픈 이야기로 꾸며볼까합니다. 바쁘고 험한 세상에 이 인간 지독히 할 일 없어 보이시죠. 그저 감사하쥬.
율리비치에게서 풍걸님의 모습 간간히 떠올리며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후속 기대합니다.
이쁜손님, 잘 지내시죠!
율리비치처럼 정의감 넘치는 분들은 우리 애국동지 분들 중에 무수히 많으시답니다.
(백계러시아인이란, 적화된 소련을 버리고 떠나온 구러시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