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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반동-종교 근본주의
박정신 교수
복사 http://choys0000.blog.me/10178471155
-2013/10/22-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하라?
『이기적 유전자』로 일약 무신론자들의 대부가 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로버트 퍼시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이어 그는 유명한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Imagine)에 나오는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가사를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만약에 종교가 없다면,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테러도 없고, 런던 폭탄 테러도 없고,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인도 분할도 없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없고,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고, 그야말로 평화로운 세상이 될 거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모두 다 종교를 버리고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자고 그는 선동한다.
한 생물학자가 이렇게 작심하고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모든 종교가 근본주의적인 속성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때의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절대화하여 다른 사람의 ‘믿는 바’를 틀리다고 정죄하는 태도다. 나아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 그러기에 ‘틀린’ 사람들은 악의 화신이므로 폭력을 써서라도 제거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그런데 이 세상 그 어느 종교가 사랑 대신에 증오를, 평화 대신에 전쟁을 가르치겠는가. 종교 (宗敎)라는 한자어가 ‘마루 가르침’, 곧 인간이 살면서 체득해야할 가장 높은 가르침을 뜻한다고 할 때, 그것이 미움이나 폭력 따위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재현하는 주체는 역시 사람이어서, 인간으로서의 자기한계를 뚜렷이 드러낸다. 사실 종교인이란 자기가 믿는 바의 종교적 가르침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자들이다. 그가 선 자리가 보수든 진보든, 좌든 우든 상관없다. 중간지대를 ‘회색지대’라 비난하며, 타협이나 양보를 ‘변절’이라 매도하면서, 흑 아니면 백, 모 아니면 도, 예 아니면 아니오를 택하라고 강요하는 모든 태도가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흔히 20세기 초반 미국의 개신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하나의 신학사조로 생각하기 쉽다. 사실상 근본주의 (Fundamentalism)라는 용어의 태생만 보면 그것도 맞다. 하지만 이 용어를 그렇게 고정시키면 우리의 이해가 더 확장되기 어렵다. 오히려 근본주의는 모든 종교 (인)의 속성으로서, 차라리 근본주의 자체가 종교적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어떤 사안을 설명하는 틀로 자신의 견해 또는 관점을 유일한 근본 원리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해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분히 종교적이다. (그러므로 용어상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근본주의보다도 원리주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의 ‘건국 이야기’와 정교분리
주제와 좀 빗나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미국의 ‘건국 이야기’와 거기서 잉태된 독특한 미국 지성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럽 사람들이 이주하기 전, 이른바 신대륙 아메리카에는 인디언으로 불린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이 들려주는 건국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들이 아니라,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구대륙’ 유럽에서 종교적으로 억압 받다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이른바 ‘퓨리턴들’ (the Puritans)이다. 당시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떼부자가 되려고 온 투기꾼들, 모리배들, 협잡꾼들, 해적들, 약탈자들을 비롯하여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수상쩍은 일을 한 사람들’, 곧 이런저런 죄를 지어 자기 나라에 살 수 없던 범법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건국 이야기의 들러리일 뿐, 주인공이 아니다.
퓨리턴, 곧 청교도들은 유럽에서 구교라 일컬어진 로마 가톨릭이나 (Anglican Church)로부터, 다시 말하면 세상권력과 결탁한 지배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옛 대륙 유럽에서 ‘이질적 성분’을 지녔다 하여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누리지 못한 신앙의 자유를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마음껏 누리고자 갈망하였다. 이를테면 이들은 자기들이 ‘믿는 바’를 자유롭게 믿고 행할 수 있는 나라와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애급인 유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아메리카로 찾아온 것은 폐쇄와 배타의 옛 유럽을 버리고 개방과 포용의 ‘새 이스라엘’, ‘새 가나안’을 건설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으로 이들은 믿었다. 미국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예외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진 퓨리턴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는 단순한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를 ‘옮겨 놓은 것’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중남미로 이주한 유럽 사람들은 ‘정복자’로서 자기들의 정치·문화·종교를 그들이 정복한 곳으로 그대로 옮겨 놓고자 했다면, 북미주로 이주한 이들은 구대륙 유럽을 벗어나고자 한 사람들로서 유럽의 것들을 극복하고 떨쳐 버리려 했다. 그리고 중남미를 정복한 유럽 사람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이지만, 북미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서 각기 다른 이질적 성분의 기독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럽보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종교를 갈망하고 추구하였다. 달리 말하면 유럽의 특정 국가의, 한 종류의 기독교가 온 것이 아니라, 유럽 각지에 퍼져있는 여러 종류의 온갖 다른 기독교가 들어왔다. 이렇게 이질적인 성분의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미국 기독교의 모습은 가히 ‘종교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유럽과 다른, 아니 유럽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겠다는 ‘급진적 이상주의’를 내세우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대륙의 것과는 다른 ‘미국 기독교’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 좋은 보기가 바로 미국 헌법에 들어선 정교분리다. 정교분리는 ‘미국인의 삶의 기본원칙’으로 누구도 쉽게 도전하거나 바꾸지 못하게 하였다. 유럽에서 세상권력과 짝한 종교권력으로부터 탄압 받은 경험과 기억을 지닌 이들이 자신의 ‘믿는바’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집단 또는 국가권력에 의해 제한·제재·억압·박해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신의 ‘믿는 바’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개인과 집단 또는 국가로부터 압박이나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종교적 자유방임의 낙원’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서로의 ‘믿는 바’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정통’이네 ‘이단’이네 하면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일은 매우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하여도 그 옛날 유럽에서처럼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과열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지성사에 나타난 종교 근본주의
우리의 지성사는 이와 다르다. ‘다른’ 생각, ‘다른’ 관점, ‘다른’ 해석에 대한 틈을 주지 않는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기록들이 넘쳐난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른바 억불숭유 (抑佛崇儒)를 새 왕조 창건의 기치로 내걸었다. 옛 세력과 결탁한 불교를 억압하고 신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사회를 재구성하려고 했다. 바깥 역사학자들은 이를 ‘유교화’ (Confucianization)라고 부른다. 풀이하면 유교의 교조화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 방편이 과거제도였다.
과거시험은 귀족사회였던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새 왕조를 창건한 이들이 세습적인 권력구조의 폐단을 막기 위해 인재를 널리 등용코자 채택한 제도였다는 게 우리 학계의 오랜 주장이다. 그러나 바깥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귀족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보다 넓은 사회계층에게 관리 진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과거제도가 실시된 것이 맞지만, 조선에서는 고려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창건한 이들이 자신들의 귀족적 특권과 권력을 합리화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과거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 과거제도는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신분이 양반이 아니면 응시할 수도 없었음은 물론 서자(庶子) 또한 응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양반의 적자(嫡子)라도 딸은 과거시험은커녕 대문 밖 나들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과거시험을 쳐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한 양반가문의 적자/아들뿐이었다. 이로써 권력과 부, 그리고 교육/명예가 소수의 집안에만 집중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인재를 널리 등용하겠다며 마련된 과거시험조차 ‘그들만의 리그’였다.
더 가공할 사실은 과거시험에 붙기 위한 ‘학문하기’가 조선의 유학자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관직에 오르기 위한 학문하기는 유학 (주자학에 터한 과거시험을 치루기 위한 것이다. 유학과 권력 유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학문하기와 권력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인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에서조차 건전한 학문 논쟁보다는 치졸한 권력 암투가 있게 된 것이 비극이다. 기득권을 장악한 소수의 유학자들의 견해는 권력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권좌에 앉은 유학자들의 시각과 학문이 ‘정학’(正學)이고, 그들과 다른 시각으로 학문을 하면 ‘사학’ (邪學)이었다. 유교 근본주의자들은 같은 유학자라고 하더라도 다른 학파나 정파에 속해 있으면 정치 보복과 숙청을 서슴지 않았다.
17세기 인조반정이 그 좋은 보기이다. 서인 일파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숭명배금 (崇明排金)의 논리를 폈다. 떠오르는 후금/청나라를 부인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기자는 정책이다. 아울러 신분제 완화를 요구하는 사회의 흐름에 역행하여 신분제를 강화하고,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을 사문난적 (斯文亂賊)으로 몰았다. 학문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눈이 있고, 따라서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시각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선택이고 그의 자유다. 각자의 시각은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의 시각을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시각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학인의 자세다. 배움이라는 열매는 이런 겸손한 자세로부터 맺어진다. 자기 시각만 고집하는 이는 결코 배움에 이를 수가 없다. 힘이 좀 있다고 해서 남에게 자기 시각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심지어 자기의 시각을 끝내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힘으로 공격하여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인조반정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예송논쟁 (禮訟論爭)은 유교 근본주의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보기다. 1차 예송논쟁이나 2차 예송논쟁이나 모두 왕 또는 왕비가 죽었을 때 상을 몇 년 치러야 하는지에 관한 당파간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종교화하고 교조화한 유학근본주의가 극성부린다. 일견 왕실의 단순한 전례문제로 보이지만, 이 논쟁은 사실상 당파가 갈린 유학자들, 이를테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권력 투쟁이 핵심이었다. 권력에 기댄 유학자들이 권력과 엉키어 서로를 증오하며 상대방을 향해 ‘이단’ (異端)이네 ‘사설’(邪說)이네 사약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교조화 되고 권력화 된 조선 유학자 사회의 맨 얼굴은 정약용과 그의 집안의 역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단지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유학자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배제와 차별, 그리고 귀양과 사약의 정치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상대의 ‘다른’ 논리는 존재해서도 안 되고, 유통되어서도 안 된다는 폐쇄적이고 오만한 독선이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오직 나와 내가 속한 당파의 생각만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단히 폭력적인 사고로,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랑과 관용, 포용과 자비를 이야기해야할 종교가 이러한 전체주의적 야만과 광기로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 종교 근본주의의 비극적 자화상이다.
칸막이를 허무는 역사의 길
지난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77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은 연쇄살인범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스스로를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 천명했다. 그는 이주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펴는 집권당 (노동당) 때문에 노르웨이가 망가진다고 믿었다. 오슬로 정부청사와 우퇴이아 섬에서 노동당 캠프에 참가하던 청소년들이 범행의 표적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한때 기독교 극우정당 (진보당)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것도 이 정당이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범행 3시간 전에 그가 인터넷에 올린 ‘2083 유럽 독립선언’의 골자는 이랬다. “2083년까지 유럽 각국을 극우보수정권으로 교체하여 이슬람 이민자들을 내쫓아야 하며, 중동 이슬람 국가들을 제압할 새로운 유럽을 탄생시킴으로써 기독교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범행 전 친구에게 보낸 성명서에서 한국과 일본을 언급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다문화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은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1950년대의 유럽이 지녔던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원칙들’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종교 근본주의가 ‘다름’과 ‘섞임’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지없이 노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횡포, 곧 상대방에 대한 배타와 차별, 나아가 희생과 제거를 자신의 종교적 신념 아래 복속시켜 정당화하는 행태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대답을 하려면 ‘역사란 무엇인가’의 정의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 거창한 물음에 쉽게, 짧게 대답한 역사학자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헤겔은 이데아 (Idea)의 정반합 과정을 통한 발전으로 보았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고 했고, 에드워드 카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의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는 ‘우리(我)와 우리 아닌 이들(非我) 사이의 끊임없는 쟁투(爭鬪)’라는 말로 역사를 표현했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인류는 맨 처음 수렵채취의 삶을 꾸렸다. 주로 산에서 남자들은 사냥을 하러 멀리 떠나고, 여자들은 남자들을 기다리며 주거지 근처에서 먹을거리를 긁어모은 게 그 시대의 생활상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부족이라는 도전이 제기되었다. 이 무렵 인류조상들은 사냥을 떠난 남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식량을 조달해야 했던 여성들의 지혜를 활용하여 농업기술을 창안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앨빈 토플러식으로 말하면, 인류는 ‘첫 번째 파도’를 넘은 것이다. 그 후로도 수많은 도전이 계속 제기되었으나, 인류는 이 도전들을 피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응전하였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이라는 ‘두 번째 파도’도 넘고, 정보화혁명이라는 ‘세 번째 파도’도 넘었으니, 토인비의 역사 정의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매번 거대한 파도를 만날 때마다 어떤 무리는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고집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산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강가로 내려가 농사지으며 살자고 권할 때, 강물의 범람을 두려워하여 산에 안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토인비는 이른바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창조적 소수’에 주목한다. 과거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 퇴행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끊임없는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하며 현실의 문제를 돌파했던 사람들이다.
산에서 강으로 공간이 확장되니, 만나는 사람도 다양해졌다. 농업도시문명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른바 4대 고대문명 (중국,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이 모두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종족, 언어, 풍습, 종교는 그동안 산에서 비교적 동일집단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를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산 (과거)으로 퇴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소수’는 다름을 두려워하고 섞임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야함을, 또 그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설득했던 것이다. 농업도시공동체 내부에 드리워진 종족의 칸막이, 언어의 칸막이, 풍습의 칸막이, 종교의 칸막이를 서서히 허물자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면 공멸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때의 공존은 그저 한 공간 안에 다양한 다수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면서 거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다름’이 더 이상 나를 불편하게 혹은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 ‘다름’이 없다면 자신의 고유한 견해와 관점과 해석에 내포된 편협함이나 부족함도 깨달을 계기가 없다는 성찰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다름’은 결국 자신을 깨우치고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서로 다름이 모여 조화를 이루되, 모두가 하나로 똑같아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를 가르친 ‘창조적 소수’에 의해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들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참 지식인의 전형이다. 이들은 자기가 믿는 바의 허상을 유일한 진리라 여겨서 도무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자신이 사약을 마셔야 했으며, 예수 역시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면면히 살아서 수많은 다름 사이에 놓여 있는 칸막이를 허무는 역사의 길을 꿋꿋이 열어가고 있다.
양반과 상놈,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백인과 유색인, 왼쪽의 생각과 오른쪽의 생각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이제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설령 여전히 차별이 경험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법과 제도에 의해 어느 정도 걸러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뼈저린 차별이지만, 적어도 건강한 도덕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차별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인식을 공유하는 수준까지는 왔다. 이만큼도 커다란 역사적 진보다. 그래서 나는 역사란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공간 확장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공간은 확장되어 갈 것이고, 그 확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칸막이들이 허물어져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심판대에 선 한국교회
인간의 활동공간 확장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자기와 다른 생김새,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정치적 견해, 다른 종교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를 생각해보자. 서구의 공간 확장의 역사가 동양의 한 끝,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까지 밀려들어왔다. 바깥에서 밀어닥친 충격에 의해 조선의 유교 사회가 내파 (內破)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엄격한 사농공상 (士農工商)의 신분 차별에 터한 유교사회와 갈등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낯선 가르침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 땅에 오랜 세월 드리워진 여러 칸막이들은 서서히 제거되어 나갔다.
구한말 요동치던 조선 사회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마치 채소밭에 떨어진 겨자씨처럼 왕성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은 비록 적은 무리의 공동체로 출발했으나,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결코 작은 공동체가 아니었다. 유교 화된 현존질서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초월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조선사회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던 양반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사랑방’이라는 비좁은 예배처소에 와서 이미 개종한 상놈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은 것, 이른바 ‘이질적인 요소들의 섞임’ 자체가 ‘소리없는 혁명’이었다. 이 사랑방에는 신분, 나이, 성의 다름을 구분하기 위해 쳐진 칸막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 새로운 교회공동체도 그 성장과정에서는 ‘다름’과 ‘섞임’으로 인한 갈등을 겪었다. 1893년 문을 연 서울의 곤당골교회가 그 보기이다. 무어 (S. F. Moore) 선교사가 시작한 이 교회는 주로 양반 계층이 모였다. 그러다가 백정 박성춘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급기야 장로로까지 선출되자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 따로 홍문동교회를 세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테면 ‘백정교회’와 ‘양반교회’ 사이에 칸막이가 쳐졌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곤당골교회의 화재로 예배당이 전소하자, 홍문동교회 교인들이 곤당골교회 교인들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아마도 곤당골교회의 화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근본진리를 되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근본진리라 했다. 근본진리야말로 근본주의를 초극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예배당 안에 양반들이 백정과 나란히 예배를 드리는 그림만으로는 진정한 ‘섞임’이 아니다. ‘다름’에 대한 서로의 인식 차이가 시험대에 오를 때는 권력과 연관될 때이다. 백정이 장로로 뽑히자, 양반들의 오만과 편견이 증폭된다. 자기와 출신성분이 다른 백정과 예배는 함께 드릴지언정 권력을 나눠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근본주의 투쟁은 권력투쟁을 함축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들어맞는다.
진리는 스스로의 힘이 있어서 강퍅한 마음을 녹일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 쳐진 무수한 칸막이를 무너뜨리는 힘마저 지닌다는 걸 꿰뚫어본 이가 바로 마하트마 간디다. 그의 유명한 ‘샤티하그라하’(眞理把持) 운동은 이런 신념에서 나왔다. 근본진리 앞에서 모든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믿는 바’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참다운 종교인이다. 인류 역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주인과 종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근본진리에 철저히 순종한 신앙인, 곧 ‘창조적 소
수’에 의해 인도되었다. 앞으로 역사가 갈 방향도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 그 방향일 것은 틀림이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칸막이를 허무는 역사의 길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디딤돌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기득권 유지에 눈이 멀어 다른 종교를, 다른 교단을, 다른 신학을 정죄하기에 급급하다면, 역사의 심판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다양성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였다.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요동칠 때마다 초월에 기대어 방향을 제시해줄 ‘창조적 소수’가 과연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가.
[박정신 교수는 미국 와싱톤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역사학과와 국제학대학원에서 종신교수로 미국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숭실대학교에서 기독교와 역사사회변동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Protestantism and Politics in Korea, 『한국 기독교 읽기』, 『한국 기독교사의 새로운 이해』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