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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삼상 15:10-23절.
제목: 이 많은 소리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서론>
우리 중에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도전을 받으시는 분도 있지만, 좌절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친구가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듯 선명히 듣는다고 얘기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때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책이 대박 작품으로 판매되기도 했고, 교회마다 또는 영성 훈련 측면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가 선풍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사모하고 기도해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했거나 아예 이제는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포기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도,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높다고 평가될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두고서 하나님과 가깝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보다도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아주셨으니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높다고 할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한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귀에 듣고 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가까움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교회 근처에 산다고 해서, 또한 받은 직분이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높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 듣고도 하나님 음성 듣는 데 실패한 사울을 통해서 깨달아야겠습니다. 사실 사울은 이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만 아니라 이전에도 하나님 음성 듣는 데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울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울처럼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범죄 한 우리를 곧바로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10~12절)
바꾸어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어제 내가 한순간에 죄지었다고 또 오늘도 같은 죄를 되풀이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차단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갈 때 사무엘이 정한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렇지 않아도 싸울 군사가 부족한 판인데, 백성이 흩어지려고 하니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이제 더 떠나면 전쟁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엘 외에는 드리지 못하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결국 그 일로 사무엘이 대노하고 왕이 망령된 일을 행하였다고 책망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끊어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 보듯이 사울이 헛된 맹세로 백성을 위험에 빠지게 하고, 그 아들 요나단을 범죄자로 만들었을 때, 그리고 그가 피째 먹으면 여호와께 죄지음에도 피째 먹어 여호와께 죄를 범하지 말라는 그릇된 명령을 내렸어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차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울의 범죄에 하나님도 더는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패망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차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무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듣고 깨달으라고, 돌이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말씀이 바로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사무엘에게 하시는 것일까요? 사울을 버리시기에는 아까워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차라리 세우지 않았더라면, 하면서 후회하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에 보시면, 발람이 예언한 말씀인데,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했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예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듣지 않고 죄지었기 때문에, 당장 가서 그에게 벌을 내리고 심판할 수 있으시지만,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바로 사무엘이 사울 왕을 만나기 전에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었다고 해서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죄지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내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그러면서 무릎으로 돌아갈 것을 기도로 나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감동을 줍니다. 우린 그때가 기도할 때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사무엘이 이런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하게 돼서 근심하고 괴로워서, 고통에 울부짖을 때 사울은 그 밤에 무엇을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 갔다 하는지라.” 밤새도록 기도한 사무엘 선지자와 달리 밤새도록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사울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죄지었습니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 밖을 벗어나 죄를 범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죄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자기를 위해 달려간 사울처럼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차단하지 않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돌이켜 하나님을 따를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려면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13-19)
사실, 진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교회 와서 목사님이 전하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만 듣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지경을 우리 스스로 좁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좋고 은혜를 많이 체험한 장로님이나 권사님 집사님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신앙생활을 교회 안에만 묶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실패한 원인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 보시면, 사울은 흥에 겨워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분이 좋다고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복을 받으시라고 축복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주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사울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기 귀에 들려오는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말대로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면, 지금 자기 귀에 들리는 소리는 환청이어야 하는데,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이 말대로 하면, 사무엘은 평소 듣는 훈련을 많이 해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시면, 그는 엘리 제사장이 실로 성소를 섬길 때 아이로 그를 수종 할 때부터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훈련해 왔습니다. 그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전에 벌써 이 소리가 다른 소리와 섞여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 소리에 하나님의 소리가 있음을 분별하는 훈련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에 매우 민감합니다. 또 그 반응도 민첩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사무엘 선지자에게는 거슬리는 소리가 자기에게는 즐겁게 들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게을리해 왔는지, 그래서 훈련이 돼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즐거워하고 세상의 많은 소리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즐거워하는 영성을 쌓아왔다면, 그의 마지막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높이는 소리에는 귀가 번쩍거렸고, 자기를 위하는 소리, 자기의 업적을 높이는 소리, 자기에게 아부하는 소리는 당나귀처럼 귀가 밝았습니다. 예화) 우리 집에 강아지 만두를 키우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우리 만두를 놀립니다. 밥때가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만두 밥, 만두 개껌 하면 다른 소리에는 반응을 안 하는데, 유독 밥, 개껌, 산책 이 소리에는 귀가 들썩거립니다.
이처럼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목소리에는 귀가 열리지 않았고, 들려도 아주 미약하게 들려서 하나님 음성 듣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바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는 소리에만 귀를 열어 두고,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데는 발달이 덜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리가 끌고 온 것이 백성이 끌고 온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범죄에 대한 빼도 박도 못한 증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일상에서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평소 훈련해 있지 아니하면, 정말 급할 때 하나님의 음성보다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아가 세상의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지 우리를 혼란케 하는 영적 대 혼란의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내가 횡단 보도를 벗어나서 건너다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을 때, 차가 급정거하면서 끼익하고 자기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운전자가 클랙슨을 빠앙했다면, 조심하라는 경고음인데, 하나님께서 내가 말씀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훈련해 가면, 마지막 때 정말 어떤 것이 하나님 음성인지 영적 대혼란 때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에 당장 양과 소가 우는 소리에도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무엘 선지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사울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횟수도 줄고 마침내는 거룩하게 살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일상의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20-23).
본문 20, 21절 말씀을 보시면, 마치 사울이 아말렉 사람 전부를 다 죽이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과 그리고 그들의 소유물인 가축 중에서 가장 좋고 기름진 것을 남겨둔 것이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에 사울이 그렇게 변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아말렉 왕 아각은 자신이 끌어왔지만, 가축 중에서 가장 좋고 기름진 것은 백성이 마땅히 멸할 것이지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따로 남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21절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앞설 15절에도 나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말끝마다 귀에 거슬리게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울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의 이 말이 소리로 들릴 때 사무엘에 귀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우리 하나님이신데도 사울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면,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왕 삼으신 하나님을 자기가 의지하고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무엘이 믿는 하나님, 남이 믿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우리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 나와 우리를 통치하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백성들이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삼상 8:7절에 그들이 나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사무엘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 여호와를 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보시면, 이러한 공식이 사무엘을 버리고 왕위에서 폐위하는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신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순간,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 순종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시는 사람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물은 누가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사신 우상에게도 절하는 사람이 드려야 기뻐하십니까? 점치러 점쟁이에게 가는 사람이 드려야 기뻐하십니까? 그렇게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번제와 다른 제사를 하나님 기뻐하실까요? 오히려 진노만 쌓을 뿐입니다. 그러한 제사와 제물은 헛되고 헛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사람이 드리는 번제와 다른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하여 끝까지 듣지 않는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일상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상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시는 삶을 사셔서 그러한 자가 받는 복을 받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