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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방골 → 구룡공소 → 경주관아와 옥터 → 진목정
83.3Km 49.4Km 33.1Km
35. 구룡공소
첩첩산중인 깊은 산골 구룡산 산정에 위치한 박해 시대 교우촌이다.
아마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처음에는 구룡산 바로 아래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올라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정상리와
경상군 용성면 매남리 및 영천군 대창면 용호리와 경계 지점에 있는
구룡산(675m)의 산정에 위치한 깊은 산골의 교우촌이다.
진목정 공소와는 불과 15∼20km의 거리에 있다.
이 깊은 산골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구룡산 바로 아래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자인현의 구룡
(현 경산군 용성면 매남 3동 큰골의 기방우)에 교우촌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박씨 등이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다래덩굴을 헤치고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서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선의산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을 하면서
프랑스 신부들의 방문을 받아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살티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도 병인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 나라의 경사로 풀려난 후 이곳 자인골 용성면 매남 3리(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안살티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아 생긴 종지뼈의 상처로
3년간 더 고생을 하다가 1875 년에 그 후유증으로 치명하였다.
또한 병인박해 중(1866∼1873)에는 영천군 대창면 효일 부락에 살던
이규일(1835∼1880)이라는 신자가 박해를 피해 단신으로
이곳 구룡 공소에 와서 살다가 18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대구대교구 무학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임춘 신부의 증조부인
이종건(1837∼1900)도 산 아래 용성면 매남리에 살다가
이곳 구룡 공소의 박씨 가정의 딸과 혼배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또한 그 무렵에 이종건의 친척인 이종선 가정과 김종화 야고보 회장 가정,
그리고 최순집 회장의 부친인 최팔영 아오구스티노 가정도
이곳으로 피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 후 1882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
(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는
공소 신자가 60명이었으며, 그중에 5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50명이 영성체를 하였으며 6명의 외교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후 1893년 11월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언양, 선필, 진목정, 의실 공소 들을 방문한 후
이곳 구룡 공소와 자인 큰골 공소(용성면 매남리)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구룡공소는 구룡산(675m)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여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릴 정도로 깊은 산중이다.
공소는 용평 본당(1907), 하양 본당(1928), 금호 본당(1963),
자인 본당(1972)을 거쳐 1995년부터 용성 본당의 관할이다.
1997.11월 이문희 대주교는 공소 개축 미사를 봉헌했다.
구룡공소의 특이한 점 2가지
첫째, 박해시대 교우촌이지만 단 한 명의 순교자도 없었다.
보통 배교자에 의해 교우촌이 발각되는데, 이곳은 배교자가 없어
발각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교우촌은 보통 옹기를 구워 팔거나 짚신등을 엮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곳 구룡 교우촌은 천수답을 일구어 쌀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고
인근 마을 주민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순례지 167곳 중에서 다녀오기 힘든 곳 중에 하나이다.
구룡공소는 들어가는 입구가 겨우 차 한 대만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아서
1.8km 거리를 반대편 차량과 마주치면 피할 수가 없다.
후진으로 한참 동안 절벽길을 운전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는 주일 아침 7시 20분 경으로 초행길이라 그냥 들어갔는데,
순례를 마치고 나올 때는 3분여 동안
들어오는 차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어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둘이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운전했다.
거의 입구에 왔을 때 마침 차 한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걱정하는데
바로 옆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유일한 공간이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공소에 도착해보니 공소에 오는 길이 2개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길과 공소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조금 우회하더라도 이암지와 구룡농원을 거쳐서 매남 4리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 도로 상태도 훨씬 양호하고 상호 교행간에
옆으로 피해줄 만한 공간이 곳곳에 빈번하게 있다고 한다.
구룡 공소 순례 안내
- 하늘아래 첫, 동네로 구룡산 정상 해발675m 가까이에 있는 공소이다.
- 단체 방문 시, 버스 내려서1.8km 걸어야 하나 승용차는 진입가능하다.
- 주일미사 오전 7시30분이며, 별도 미사 신청도 가능 하다.
-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14처 길이 조성되어 있다.
- 소규모 20명 정도 단체나 개인 가족 피정 가능하다.
(시골 정취가 묻어나는 허름한 피정의집이 있다.)
- 식사는 성지 봉사자가 식당을 겸하고 있어
단체식사(식비7,000원정도) 까지 식사 가능하다.
- 봉사자겸 식당 연락처 010-4968-9977. 김영선(루시아) .
식사 의뢰 시 미리 연락
36. 경주관아와 옥터
경주 관아와 옥터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60년 경신박해, 1868년 무진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관장 앞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許仁伯,1822∼1868,야고보), 김종륜(金宗倫,1819∼1868,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이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되기 전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경주 동헌은 조선 시대의 경주부(慶州府, 종2품의 府尹이 관장인 아문) 관아로
한때는 경주 박물관으로 사용된 적도 있으며 현재는 경주 문화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1814년(순조 14년) 전국적으로 큰 비와 흉년으로 식량이 떨어져 고통 받을 때에
당시 배교자 전치수에 의하여 관헌들이 청송군 노래산 등을 습격하여
고성대 요셉 등을 잡아 경주 감옥에 가두어 고문하던 곳이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허인백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허 야고보는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와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경주 진영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음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이들 하느님의 종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는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끌려 나가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 7월 28일)이었다.
그들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朴召史)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현재 경주 문화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주 문화원 정원에는 초석(礎石),
장대석(長臺石), 연화대석(蓮花臺石) 등의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경주 옥터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방명사 아파트 내에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성건성당
방문한 시간이 9시 30분 경으로 주일 미사(10시 30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성지순례 왔다고 하자 한 자매가 신부님이 아래층 휴게실에 계시니
만나보라고 안내를 하여 신부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오셨다고 하며 당신이 쓰신 책에
직접 서명을 하여 우리에게 주셨다. 파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우리는 제주에 도착해 신부님께 귤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성당 입구에서 여러가지 식품을 팔고 있어서 젓갈류를 구입했다.
오늘 일정이 여유가 있어서 20년 만에 석굴암을 가고 싶었다.
불국사 근처에 가자 차량이 정체가 되었고 석굴암 오르는 길은
마치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려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다.
20여분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U턴을 하여 진목정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았다.
석굴암 가다가 되돌아 오는데 1시간 이상 시간을 허비했다.
37. 진목정 성지
경주 건천읍을 지나 청도로 넘어가는 단석산 자락에
발이 닿으면 진목정 성지가 있다.
이곳은 125위 시복시성 대상자이기도 한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세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바위굴(범굴)에 숨어 살았던 옛 신앙의 터전이며,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가 옮겨 묻어
그들의 피로써 은총의 성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마치 그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병인박해 후에 이사 온 신자 후손들이다.
진목정은 단석산 줄기인 도매산 중턱에 있는
해발 350m 정도 고지대에 위치한 깊은 산골짜기다.
예로부터 참나무가 많았을 뿐 아니라
참나무 정자가 있어서 진목정(眞木亭)이라고 칭했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단석산 동편 정상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했던 도장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그곳에 OK목장이 있다.
부근의 탑골과 상선필에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언양 지방에 신자촌이 형성되고, 그 후 차츰 전교가 되어서
이곳에도 신자촌이 형성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 후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의 노래산 등지에서 살던 신자들이
청송군과 영천군의 경계 지점인 보현산(1124m)을 넘어
영천군의 용평, 질구지 및 이곳 구룡과 진목정 신자촌으로 피난 와서 살았던 듯하다.
그래서 이미 박해 시대 때인 조선 순조 때(1801∼1834)부터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1837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이 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할 때
언양, 구룡과 이곳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고 전한다.
1850년경부터는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상선필과 이곳 등 부근의 지방을 순회 전교했으며,
이어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와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1870년 주교로 서품)도
병인박해 이전에 상선필과 이 부근의 지방을 순회 전교한 것 같다.
세 순교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다.
이곳은 1858년 경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하던 때부터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따라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지(가묘)가 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다.
내일 1리 마을을 지나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무너져 내려 그 원형을 가늠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세 순교자와 그 가족들은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동굴은 본래 호랑이가 살던 굴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생활한 지 며칠 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위협했을 때 허인백 야고보가 나서서 성호를 그은 뒤,
“우리는 지나가는 길손인데 체면 불구하고 너희 집에 들어왔다.
매우 미안하지만 너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동정하는 뜻으로
너희 집을 다른 데로 정해 가 있으면
박해가 끝나는 대로 너희에게 돌려주겠다.” 하자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굴 맞은편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 위에서
밤중에 이따금 ‘어흥 어흥’ 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근처 다른 짐승들이 이들이 머무는 동굴에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병인박해 때는 부근의 단석산 중의 범굴에서 살았던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3명이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다.
증언록에 의하면 허 야고보와 동료 치명자들은
울산 죽령 교우촌에서 잡혔다고 나온다.
범굴 얘기는 《영남순교사》(김구정, 1966)에 나온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1866년 병인박해 후에 이사 온 신자들이다.
병인박해 중에 이곳에 살았던 신자는 1893년 뮈텔 주교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할 때 이 공소의 회장이었던
박 요한 가정과 박씨 문중인 듯하며, 그의 형제 중에는
1892년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이 있었다.
병인박해 때 김문학 알로시오 가정이
경주 양남에서 우중골과 소태골로 피난을 다니다가
박해가 완전히 끝날 무렵인 1898년경에 이곳에 정착해 산 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진목정 성지 찾아가는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자 삼거리가 나왔다.
위지도 현위치라는 빨간표시가 된 곳이다.
우측으로는 피정의 집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나오는 출구에 통행정지 막대가 있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이 근처임을 알려주어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여러대의 차량이 직진하였다. 그들을 따라 조금 오르니 차량들이 주차해 있었다.
우리는 계속 직전했는데 전망대, OK 청소년 수련원이 나와서 다시 내려왔다.
조금 전 몇 대의 차량이 주차된 곳에 주차하고 내려다 보니 밑에 순교자 성당이 보였다.
오늘도 길을 찾는데 시행착오를 했지만 갈 수 없었던 전망대를 알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 때에도 사인을 믿지않고 스페인 사람을 믿고 따라갔다가
2시간을 고생한 후 '사람을 믿지말고 사인를 믿어야 한다'고 후회했는데
오늘도 다른 사람의 차량을 뒤쫓다 시행착오를 겪었다.
석굴암, 진목정 두 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데 왠지 오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