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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 보기] 가짐 없는 큰 자유, 부활의 삶
사순과 부활시기입니다. 본당사목을 할 때 사순절 특강과 공동보속에 대해 교육분과장과 논의를 하였습니다. 공동보속에 기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어떤 보속이 좋겠냐는 의견에 ‘냉장고 비우기’를 제안해주셨습니다. 외국에서 생활경험이 있으셨던 분이신데 외국에서 냉장고 비우기를 보속으로 해보았는데 힘들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순시기동안 만이라도 장을 덜 보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부터 다 비우면서 소비를 줄여 쓰레기를 줄이고 나눔을 실천해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이후 본당을 떠나 빈민사목을 하면서 선교본당에 온지 2년 반이 되었습니다. 꽤 넓은 공간에서 남이 해주는 밥과 빨래와 청소에 의존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제생활 25주년과 함께 빈민사목으로 옮기면서 자취생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밥과 빨래와 청소를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밥하는 것도 서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혼자 밥을 해먹는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몇 분은 냉장고가 너무 작고 낡았으니 좀 큰 것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냉장고가 크면 클수록 음식물도 더 많이 저장하고 못쓰고 버릴 것 같아 바꾸지 않았습니다. 냉장고는 금방 가득 찼습니다. 냉장고를 비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것 먼저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오는 음식으로 거의 채워져 있습니다. 가끔 냉장고가 비워져 빈공간이 생기면 작은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꽉 차 있는 냉장고는 내 마음의 욕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밥을 해먹으면서 냉장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냉장고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냉장고 없이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방영한 ‘냉장고 없이 일주일 살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을 본적 있습니다. 냉장고 없이 산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는 세상입니다. 프로그램에서 두가정의 일주일 체험을 통해 가족들뿐만 아니라 저 역시 새롭게 느끼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의 소비 생활은 결코 이웃의 삶과 생태계와 무관하지 않아
대형마트의 등장에 따라 냉장고는 대형화되어 과잉 저장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가12,18) 말씀처럼 더 큰 냉장고에 많은 음식들을 저장합니다. 그로 인해 추가로 발생하는 전기요금과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 양도 늘어납니다. 대형마트와 냉장고의 연결고리로 인해 잃게 되는 경제적 손실은 생각보다 큽니다.
냉장고는 문명의 이로운 제품이지만 인간의 욕심과 허영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부유한 나라의 냉장고에 식품이 남아돌아 썩어가고 있는데 지구 한편에서는 기아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곡간만 채우면 되는 삭막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고 합니다.
‘냉장고 없이 일주일 살기’ 체험자들은 냉장고 없이 살아보니 불편한 것은 많고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혜가 생겨납니다. 오래 보관할 수가 없기에 그때그때 먹을 필요한 양만 조금씩 장보는 습관이 생기고, 음식도 적당히 먹을 만큼 하게 됩니다. 장은 자주 보지만 장보는 비용은 예전에 비해 조금 나오고 음식물 쓰레기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히려 더 신선한 음식을 먹을 뿐 아니라 소비와 쓰레기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넓은 사제관에서 좁은 집으로 옮기면서 무조건 물건을 줄여야 했습니다. 집이 좁으니 버리고 줄여야 하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더 넓은 공간에 더 많은 것을 채우는 것이 편리하고 당연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짐 없는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유에 얽매여 중요한 자유는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 2017년 해외원조주일을 맞이하여 발표한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을 인용해 생태적 삶을 통한 나눔을 강조하였습니다.
“현대에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는 인류적이고 지구적 차원의 것이면서 이에 대한 해결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과 파괴된 지구에 대한 성찰로 접근해야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비 생활은 결코 이웃의 삶과 생태계, 곧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내 이웃의 생활 태도는 나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권리나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제한하고 수탈함으로써 내게 온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환경으로부터 오는 혜택을 누리는 동안 우리의 후손들도 정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써만 인식하는 태도 때문에 어머니인 땅(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 곧 공동의 집인 지구가 수탈당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깨닫도록 합시다.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권리와 재화들은 사실 애초부터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할 선물이었던 것임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한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빈 무덤을 통해 참된 자유의 삶인 부활을 보여주셔
지난 2월은 빈민운동의 대부 고 제정구 바오로 선생님 20주기였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본받아 ‘가짐 없는 큰 자유’를 강조하시며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합니다. 회칙에서는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리는 관상적인 생활방식을 독려하며, 절제를 통해 성숙해지고,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을 제안합니다.
이는 검소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것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기회에 감사하며,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갖지 못한 것에 탄식하지 않는 삶입니다. 지배의 논리를 피하고 쾌락을 쌓는 일을 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찬미받으소서 222장) 또한 회칙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절제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간순간을 더 잘 즐기며 사는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의미를 체험하고 가장 단순한 현실에 익숙해져 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며 신앙인의 삶을 제시합니다.(찬미받으소서 223장)
부활시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자신의 무덤까지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빈 무덤을 통해 참된 자유의 삶인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욕망의 상징인 큰 냉장고, 큰집의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소유에 얽매임 없이 나누는 ‘가짐 없는 큰 자유’ 삶이 나와 우리의 부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오월의 어머니 마리아
오월하면 “맑은 하늘 오월은 성모님의 달……”을 흥얼거리며 아름답게 봉헌했던 성모의 밤이 떠오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에 곱게 옷을 차려입고 아름다운 성가 속에 묵주기도를 드리고 꽃과 초를 봉헌하며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아름다운 밤입니다.
특히 신학교 성모의 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서서히 어두워짐과 함께 아름다운 조명이 성모님을 비추는 가운데 기도와 성가와 성모님께 바치는 글과 함께 꽃과 초가 봉헌됩니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모의 밤이 슬프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80년대 초중반 시대는 암울하고 무자비했던 군사독재시절이었습니다. 특히 5월이면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되는데 그해도 밖에서는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최루가스가 신학교 마당에 흘러 들어오는데 신학생들은 성모상 앞에 모여 아름다운 성모의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치고 잡혀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고 성모님께 아름다운 편지와 기도를 드리는 성모의 밤이 부끄러웠고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아들을 잃고 가장 아팠던 생을 사신 분인데 우리는 그것은 잊어버리고 천상의 어머니, 영광의 어머니 마리아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마리아의 모습은 강한 여성, 시대에 순응하고 맞춰간 여성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고통을 겪은 여인이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성무일도 저녁기도에,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의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1-55)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염원이 담긴 노래
아름답게만 들리는 이 노래는 사회, 정치, 경제의 변혁을 노래합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고, 높은 사람은 낮추고 낮은 사람은 높이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이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긴 노래라는 것이 일반적 통설입니다. 그것을 루카복음서 저자는 ‘마리아의 노래’로 기록하여서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를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수탈당했습니다. 당시 지배층들은 백성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강대국의 붙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당시 지식층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자기 백성을 무식하고, 율법을 어기는 개, 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개, 돼지 취급당하며 천덕꾸러기 취급당하던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의 마지막 희망은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켜 주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염원이 담긴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어린 처녀의 몸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순명합니다. 역사의 부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당시 여성으로 주어진 당연한 길에서 벗어나 아기를 통하여 올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시 이 노래의 의미와 민중의 열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치시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높이시는 정치혁명, 배고픈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는 하느님의 경제혁명에 대한 기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를 노래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회변혁을 통해 평등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염원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복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산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자리에 아들을 눕혀야 했고, 출산을 하자마자 헤로데의 죽음의 손길을 피해 난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즘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향과 나라를 떠난 난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가정의 경제를 담당해야했던 남편인 요셉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키운 아들이 이제 집을 떠나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합니다. 들리는 소문은 좋지 않습니다. 위험한 인물로 찍혀 감시와 사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는 당시 지배계급과 기득권들에게 대립하고, 날을 세우면서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과 함께 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결국 다 장성한 아들이 국가반역죄, 국가 전복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수가 되었지만 힘없고 빽없는 촌로의 어머니는 아들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국가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구명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제자들마저 다 도망간 상태입니다. 누구하나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반란을 꿈꾼 사형수의 어머니 마리아… 빨갱이의 어머니… 친척들마저 거리를 둡니다. 결국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만 봐야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미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마리아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죽음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픔과 절망을 딛고 슬픔을 뛰어넘어 제자들과 함께 아들의 뜻,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살아있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평등한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제 또 다른 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들이 다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제 마리아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마리아의 부활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알아보고 만나면 더 의미 있는 성모성월
실제로 주변에서 굴곡의 세월에서 많은 어려움을 딛고 살았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죽음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편지와 수의를 보냈던 안중근 도마의 어머니 조마리아, 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울부짖음과 진상을 밝히기 위해 수 십 년을 싸워 오신 분들, 또한 민주화 과정에서 젊은 자식을 잃고 자식이 다 이루지 못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피눈물 나는 세월을 싸우며 살아오신 민가협 부모들, 최근엔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떠 올려 봅니다. 최근 위험의 외주화로 죽음으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인 태안 서부발전소 고 김용군 노동자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다시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기 아들처럼 죽지 않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비롯해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일명 ‘김용균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우리 시대의 부모님들은 자식을 잃고 통곡했지만,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더 이상 이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생명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는 평등과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자식을 얻고,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마음 쓰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힘을 얻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되셨습니다. 아픔을 딛고 다른 이들에게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변하신 분을 ‘복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그런 분이십니다.
오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알아보려하고 만나 뵐 수 있으면 더 의미 있는 성모성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지난해 11월 종로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로 7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번 참사로 고시원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시원들은 대부분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데다 성인이 두 팔을 뻗기도 어려울 만큼 통로도 좁고 미로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도 없는 방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화재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고의 사상자 18명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고시원이나 쪽방 등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저소득 빈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열악한 주거 공간입니다. 이번 화재 참사가 일어난 고시원도 저소득 장기 투숙자들의 인명 피해가 유난히 컸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청년, 일용직 노동자, 노인 등 주거 취약 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계층별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불어 장기적인 차원에서 집값 안정화와 함께 집을 투기가 아닌 생활의 공간으로 보는 주거권 개념 확대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요즘은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을 구한다고 합니다. 이제 집을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집이 아니라 좁은 공간인 방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집이 아닌 작은 공간인 일명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 라고 불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어선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도시빈민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국민의 50% 이상은 평생 자기 집하나 갖지 못해
국민의 50% 이상은 평생 자기 집하나 갖지 못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도저히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주거환경에서 비싼 월세를 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2018년도 국토부 통계를 보면 한사람이 임대주택 604채를 가진 사람도 있고 상위 10명이 4599채를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2살 아이도 임대사업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이 있습니다.
2015년 6월22일 제정되어 같은 해 12월23일부터 시행된 ‘주거기본법’은 국민의 주거권을 ‘물리적·사회적 위험에서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거비 부담을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임대주택 우선 공급 등을 통해 주거취약계층의 주거수준이 향상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주거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거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가정에는 집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짐승들의 먹이통에 뉘여 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헤로데의 추격을 피해 집을 버리고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가족들이 집이 없습니다. 집을 가져본 적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족과 집은 같은 의미입니다! …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현대적 도시에 살면서 우쭐거리고 심지어 헛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도시는 소수의 기쁨을 위해 편의시설과 복지시설을 제공하지만, 수많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 형제들, 아이들에게는 살 집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집은 상품처럼 사고 파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 54항에서 무관심의 세계화를 개탄하시며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문화가 우리를 마비시키고, 시장에 새 상품이 나오면 사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반면에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세계적 위기는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서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는 것이 세계적 위기”라고 강조합니다. 권력욕과 소유욕에 빠져서 “이익 중대를 목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하는 이 체제 안에서, 절대 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복음의 기쁨56항)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문제들, 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불평등은 사회 병폐의 뿌리입니다.”(202항)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처럼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돈의 주인이다”를 선포합니다. 따라서 돈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고 특히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최우선임을 확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집은 상품처럼 사고 파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돈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주거 정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가난한 사람들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아이 일하던 곳을 갔었습니다. 갔는데, 너무 많은 작업량과 너무 열악한 환경이, 얼마나 저를 힘들게…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우리 아들을 맡기다니. 아무리 일자리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데 안 보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습니까.”(고 김용균 씨 어머니의 말씀 중에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입사한지 3개월 만에 죽임을 당한 24살의 고 김용균 노동자 어머니의 절규입니다. 이 절규는 젊은 노동자 어머니의 절규가 아니라 위험에 노출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어머니들의 절규이고 분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절규이며 분노이고, 하느님의 절규이고 분노입니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공장을 둘러보고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빨리 나오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작업현장에서 자기 아들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미 이 발전소에서 지난 9년 동안 무려 12명의 노동자가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국회국정감사에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제발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더 이상 옆에서 죽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했던 곳이었습니다. 왜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수년간 많은 노동자가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한마디로 돈 때문입니다. 이윤과 효율만을 추구해온 자본에 있습니다.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위험한 일은 하청을 줘서 위험을 외주화 했고, 2인1조로 일해야 하는데 입사 3개월 된 신입사원을 혼자 일하게 했습니다.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작업환경을 개선하지 않아 매년 많은 산업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지난해에도 노동자 1명이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최근 3년 동안 4건의 사고가 발생해 4명이 숨졌습니다.
발전소는 숨진 노동자가 있는데도 무재해 인증을 받아 재해 방지에 노력했다며 정부로부터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 여 원을 감면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재해 포상금이라며, 정규직 직원들에게 4770만 원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24살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2교대 근무하면서 월 160만원의 임금을 받다 세 달 만에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사망한 것입니다. 먹지 못한 컵라면 세 개와 과자를 남겨놓고….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용은 사람들을 죽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위험의 외주화는 단지 태안화력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 노동현장 전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고용불안과 살인으로 내모는 작업환경 속에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은 고귀한 것이고 노동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녀들에게 그 직업을 권하겠습니까?
교회는 줄곧 노동의 중요성 강조하면서 노동의 고귀하고 신성한 가르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동은 하느님이 세우신 사랑의 계획 일부입니다. 우리는 땅을 일구고 모든 피조물에서 나온 산물을 돌보며, 그럼으로써 창조의 노동 안에서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노동은 인간 존엄의 기본입니다. 여태 일해 오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언제나 행동하시는 하느님과 닮게끔 합니다. 노동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능력을, 나라의 성장에 기여할 능력을 부여합니다.”(2013년 노동자 성 요셉 축일) 라고 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과 노동자는 멸시와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 노동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무시와 멸시,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 회칙에서 노동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나아가 집단적인 경제적 투자로서의 노동력을 대하는 자본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로인해 기업의 최대 이윤 추구와, 노동시장에서의 갈등과 착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11항)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2018년 유엔이 정한 ‘사회정의의 날’에 노동과 일자리에 대해서 “고용불안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건강을 해치고, 가족들을 피를 말리며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은 사람을 죽입니다. 일자리는 인류의 우선과제입니다.” 라며 노동은 단순히 생계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용은 사람들을 죽인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뿐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야
또한 교황은 2013년 노동자와의 만남에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노동을 바꾸고 노동의 고위함과 신성함을 되찾기 위해서 사람과 노동을 중심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람과 노동을 중심에 되돌려놓으십시오. 위기는 경제뿐만 아니라, 윤리, 영성, 인간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 위기의 뿌리에는 개인들과 권력집단 모두에게서 공동선에 반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태까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소득과 이익의 법칙을 밀어내고 사람과 공동선을 중심에 되돌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명히 노동입니다. 인간의 참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노동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 사회전체와 모든 구성원들은 존엄성의 원천인 노동을 주요 관심사로 삼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정치 및 경제 기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013년 9월 22일 사디니아 섬 방문 노동자들과의 만남, 연설문)
가톨릭교회 교리서 2428항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타고난 능력의 일부를 발휘하고 실현한다.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처럼 사람은 노동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노동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일의 주체이고 목적이 이루어질 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고,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윤보다 생명이, 효율보다 안전이,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뿐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이는 노동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살리는 노동이 되고, 노동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상보기]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껏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길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여유가 없습니다.
한 달에 얼마가 있으면 생활하는데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돈은 얼마가 필요할까요?
2020년 최저임금이 결정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시급이 240원 인상된 8590원입니다. 이 결정에도 많은 난항이 있었습니다. 최저임금 결정을 앞둔 지난 7월4일, 자유기업원 원장은 한 TV 토론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은 4000~5000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실로 엄청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최저임금을 무려 절반 안팎을 깎자는 주장입니다. 과연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또 반으로 삭감된 최저임금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연봉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의 연봉이 243억8100만원이라고 합니다. 한 달로 따지면 20억3175만원, 하루로 치면 9680만 원씩입니다.(한국일보 2018년 4월2일) 노동자들은 시간당 최저시급 9천원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는데….
내년 최저임금을 적용해 보면 주 40시간과 유급 주휴시간을 포함하면 올해보다 5만160원 올라 월 179만5310원이 됩니다. 최저임금 인상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137~41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주휴수당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너무 많이 올랐다고 비판하는 야당도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정규직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이 가장 큰 소원입니다. 기술 사회가 되면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일하는 삶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갑니다.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과 알바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절망과 좌절 속에 결혼을 포기하고, 출생률 꼴찌와 자살률 1위, 세계 최장노동시간 등의 파국적 삶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양극화, 불평등, 민생고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소외와 갈등으로 몰아갑니다.
기본소득은 경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
해결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 20장의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 각각 일꾼을 불러 저녁 때 까지 일을 시킵니다. 일을 다 마친 후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었습니다. 미리 약정한대로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이 노동자 하루 품삯 8만원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의 불평이 쏟아졌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20,12). 이에 주인은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20,13-14.)
우리는 선뜻 이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8시간 일한 사람이 1시간 일한 사람보다 더 품삯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8시간을 일하나 1시간을 일하나 똑같이 대우하면 불만이 생깁니다. 포도밭 주인처럼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우하면 누가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일하겠느냐며 투덜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이 선하고 후한 분이라서 똑같이 주었다고 합니다. 선하고 후한 분이라면 각자에게 각기 일한 만큼에 상응하여 차별적으로 기본급을 지급한 후에 보너스를 더 주거나 품삯을 최저시급 이상으로 계산해서 더 많이 하루 일당을 지급해주면 불평을 들을 필요도 없고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나중에 일하러 온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5시까지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던 노동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침 일찍 일자리를 찾아 일하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하루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일하지 못하면 내일 가족의 굶어야 할지 모릅니다. 가족의 생계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생존의 기본임금을 의미합니다. 일이 없어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은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건, 일을 적게 한 사람이건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품삯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동의 총량과 그 질에 관계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비용이 바로 기본소득입니다. 이 점에서 기본소득은 경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중심, 생명을 중심으로 임금을 바라봐야
예수님은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품삯을 줄 때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양에 따라 합당하게 계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급, 생계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8시간 일한 사람도, 1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은 비슷할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시간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급이나 최저 생계비는 주어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영감을 얻은 경제학자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의 부제는 생명의 경제학이었습니다. 간디는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러스킨의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책이 바로 이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했던 노동이나 임금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 자본 중심의 경제학에서 사람과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을 통해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강조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항상 “돈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임금을 바라봅니까? 자본을 중심으로 능력과 노동을 강조하고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이 주신 모든 재화는 사람의 생존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먼저 나눠 함께 살 수 있는 사람 중심, 생명을 중심으로 임금을 바라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