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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 19편 강해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본 시에서는 자연 만물이 일반 은총 혹은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을 선포하여 여호와를 향한 신앙의 필연성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특별 은총 혹은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의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주신 율법의 완전성을 선언함으로써 도한 이러한 여호와를 향한 신앙으로 순종하며 복종할 때 완전한 복을 받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여호와 신앙의 절대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과 궁창이라는 두 단어는 ‘동의대구법’의 기법입니다. 같은 의미인 하늘과 궁창, 하나님과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일, 선포하다와 나타내다가 각각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늘과 궁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만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만들어진 우주만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웅대함과 장엄함 또 섬세한 아름다움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의해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런 우주만물을 통해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롬 1:20). 그럼에도 인간들이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는 낮과 밤이 끊임없이 교차되며 이루고 있는 조화로움과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갖는 그 아름다움과 그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이는 마치 창수가 밀어 닥치듯이 또는 샘이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뿜어내듯이 말한다는 뜻입니다. 또 지식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롬 1:17,20)을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인 표현이기에 앞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자연만물은 말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아주 선명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을 자연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 소리’와 ‘그 말씀’은 같은 의미로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가리킵니다. 온 우주 전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곳에서 선포함을 증거하기 위하여 시인은 어디에나 빛을 비추는 ‘해’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해를 위해 장막을 베푸셨도다.’는 말은 해를 의인화시킨 표현으로서 우주의 천체들 가운데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해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국가들 중에는 해를 숭배하는 나라가 많았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해에 관해서 노래한 것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노래한 것이므로,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창조 신앙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연 계시의 편재성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당위성을 경고하였습니다(롬 1:18-20).
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해가 신랑 같다는 말은 아침마다 어둠을 헤치고 나오는 해의 신선하고 웅장함을 신부와 밤을 보내고 아침에 신방을 나오는 신랑의 활기찬 모습에 비유하여 나타낸 의인법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돋는 해의 힘찬 모습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모습을 장사가 힘차게 달리는 모습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학 작품에서 태양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방인들이 숭배하는 태양이 실상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태양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인해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이러한 태양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태양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보지 않는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받지 않는 자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본 절부터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초자연적 계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는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므로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율법’은 제한된 의미의 모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8,9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증거, 교훈, 계명, 도, 규례 등은 다 같은 의미로서 바로 하나님 말씀의 특징의 각기 다른 측면을 묘사한 말입니다. ’완전하여‘라는 말은 흠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이 세상의 어떠한 법이나 교훈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나타냅니다. ’영혼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을 뜻합니다. 비록 자연 계시가 하나님을 증거하나 그것은 죄로 인해 영안이 어두워진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에는 절대 불완전한 것이며,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증거는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화실하다는 것은 견고하다, 충실하다, 의심할 바 없다는 뜻으로 그 내용에 있어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믿을 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라서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확실한 말씀이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견고하게 이끄시며 그 나아갈 바를 깨닫고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정직하다’는 ‘바르다, 곧다’는 뜨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교훈이 세상의 거짓된 교훈과 달리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임을 뜻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하고’는 그러한 여호와의 교훈이 진정 인생들의 마음에 참 만족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다는 말은 그 말씀에 전혀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말씀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인간의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근거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정확 무오한 유일한 시금석입니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정결하다는 말은 전혀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100% 순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짓된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즉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이 삶의 규범으로 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오류나 거짓된 것이 없으니 영원토록 존속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이 세상은 장차 폐하여 없어지고 말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니 그 분의 말씀 또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벧전 1:24,25).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완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의롭다는 말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릇된 것이 전혀 없고 그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소성케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목적의 측면에서, 그리고 구원으ㅜ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과정과 그 구원 방법의 측면에서 절대 의로운 것입니다.
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비유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금은 전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금으로 아주 귀중한 것을 의미합니다. ‘송이 꿀’은 벌집에서 흘러넘치는 꿀 덩어리로, 꿀의 달콤함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인간 세상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인 정금과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송이 꿀이 비유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며 또한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과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교훈적 기능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교훈 받게 되며 이로써 그릇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이 말은 인간이 선한 행실을 힘써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복하며 그 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 따른 분명한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다(고전 3:10-15). 이것은 구원에 덧붙여 하나님이 덤으로 더 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인은 하나님께 인간이 스스로는 자기 허물을 깨달아 회개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말씀을 통해 영안을 밝게 하여 자신의 숨은 허물을 깨달아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숨은 허물은 12절의 고범죄와 달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은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시인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고범죄(故犯罪)는 고의적으로 짓는 죄, 즉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고범죄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에 모든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이며 성경은 이를 ‘성령 훼방죄’와 동일하게 사함을 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마 12:31) ‘주장하다’는 말은 ‘관장하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는 계속 그 죄가 올가미가 되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마련인데 이 같은 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같은 죄의 무서운 속성을 충분히 인식할 때 시인의 이 같은 기도가 또한 우리 자신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시 119:43). ‘큰 죄과’ 죄과는 거역한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본래는 반역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거스르며 순복하지 않는 고범죄를 가리킵니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는 ‘반석, 구속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반석은 힘과 피난처입니다. 구속 자는 어떤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구원해 주는 보수자, 기업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석처럼 힘과 피난처가 되시며 또 자신의 죄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 곧 대속자 또는 용서하실 자가 되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열납된다는 말은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뜻합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은 기도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마음 속에 생각한 바를 곧 말로 표현해 아뢰는 것입니다. ‘말’은 단순히 언어 행위 뿐만 아니라 외적인 행위까지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말‘과 ’마음‘은 내면적, 외면적 모든 생활을 의미하므로 본 절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시인이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삶이어야 하고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봉서방
말씀의 은혜를 받읍시다
성경본문: 시편 19: 7-14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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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의 선장이 이끄는 배 한 척이 인도로 가는 도중에 어떤 말레이지아 상인을 태우게 되었습니다.
이 상인은 광장한 부자였는데 어느 날 선장에게 성경을 몇 권 가지고 있으면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장이 이교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이 영어 성경을 달라고 합니까? 당신은 그것을 읽지도 못 할 텐데요?”
선장의 말에 말레이지아 상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상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왜 성경을 가지고 싶어 하는 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나는 나와 거래를 원하는 영국인이나 또는 당신 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성경을 그가 다니는 길에 남 모르게 놓아두고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봅니다. 만일 그가 이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그것을 읽으면 나는 그가 나를 속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성경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대하고 함부로 집어 던지거나 또는 성경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게 되면 나는 결코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 상인은 사람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나의 인간됨을 말해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 귀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7절).
‘소성’이라고 하는 말은 ‘돌이키다, 회복하다, 되돌아가다’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낙심과 절망 중에 빠져서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그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아주어서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할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머나먼 이국땅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나이다(11절)”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이 바벨론이 자기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그 환상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살아나는 환상이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 속에는 어느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시체를 땅 속에 장사하지 아니하고 골짜기에 내다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뼈들은 자기의 짝을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말라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서대로 대언을 합니다.
그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뼈와 뼈들이 자기의 짝을 찾아서 맞추어집니다.
그 위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입니다.
그러나 아직 생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그 때 죽었던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서 큰 군대를 형성하고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내가 이 마른 뼈들처럼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바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절망이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우리를 소성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 의지하고 살아서 절망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주님의영광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7절).
‘우둔하다’는 말은 ‘단순해서 아무 말이나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말이나 믿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 주지 아니하면 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붙잡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늘 옆에 있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아무리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7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솔로몬이 저녁때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거기에서 솔로몬은 한 소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철없는 어린 소년이 어떤 이방 여인의 꾀임에 빠져서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음녀의 골목이라는 것은 오늘날 윤락가를 말합니다.
아직도 어린 소년이 윤락가를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잠7:22)”고 탄식을 합니다.
이 말은 “오늘 또 한 사람이 죽으러 도살장에 끌려가고 있구나!”라는 말입니다.
그는 창문을 닫고 집안으로 돌아와서 아들을 불러 놓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1-5)”
이 말씀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비록 네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죄악된 길에 빠지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씀대로 살면 우둔한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준미의영광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말씀대로 살아서 거짓에 속지 말고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말씀은 순결해서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8절).
‘순결하다’는 말은 ‘맑고 투명하다’는 뜻으로서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심령이 밝아지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밝게 한다’는 말은 ‘등잔을 켠다’라는 뜻입니다.
즉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듯이 우리의 인생에 불을 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환하게 비추어 주어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란 북부에서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승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지 말고 다이아몬드를 캐며 살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탐욕이 생긴 농부는 농토를 팔고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각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이아몬드는 찾지 못하고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항으로 갔다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농부의 땅을 산 사람이 모래밭에 나갔다가 반짝이는 돌을 반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돌을 가지고 전문가에게 가서 알아본 결과 그것이 바로 다이아몬드 원광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땅에 다이아몬드 원광석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왜 이 다이아몬드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석을 두고도 그 보석이 눈에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해서 어두운 우리의 눈을 밝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가장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눈을 뜬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이 말씀을 통해서 뜨여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는 주님의영광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상이 있습니다(11절).
‘상’이라고 하는 말은 ‘보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어떤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보상이 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크다’는 말은 ‘많다, 풍부하다, 충분하다, 족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만족한 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아람 나라의 장군인 나아만이 평생의 고민이 되는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엘리사가 뛰어나와서 자기를 반갑게 맞이하고 손을 얹고 기도해서 자기를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종 하나를 보내어서 말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5:10).”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그는 일국의 국방장관과도 같은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할 수가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노한 마음을 안고 그냥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때 그를 따라온 그의 종들이 그에게 간청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한번 해 봅시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종들의 말에 마지못해 요단강을 찾아간 나아만은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의 몸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의 살은 마치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평생에 자기를 괴롭히는 질병의 멍에를 깨끗이 벗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돌아갔다면 이러한 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무엇으로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상이 크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는 신자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영광교회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세기에 미국의 육군대장인 류 월레스는 무신론자 친구인 잉거솔의 권유를 받고 기독교의 거짓과 헛됨을 밝히는 책을 저술할 마음을 먹고는 아무래도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점점 반대할 마음은 없어지고 오히려 성경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다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벤허’라고 하는 종교소설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 뜻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 귀한 맛을 모릅니다.
보통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물어보면 성경을 별로 읽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대하 드라마보다도 더 재미있고 꿀보다도 단 그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9-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기에서 ‘사모한다’는 말은 ‘열망한다’는 말입니다.
즉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 말씀대로 살고 계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내 인간의 생각이 자리 잡고 나를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큼 존귀하신 분이 어디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만큼 귀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생각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과 말씀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지혜롭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상을 받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전에 아브라함에 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가 아들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를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복이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사람은 오늘도 복을 받습니다.
만족한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은혜 받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다른 것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서 복을 받아 누리시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